
봄이 오고 있다. 누가 ‘부지깽이를 꽂아 두어도 싹이 틀 것’이라고 했듯이 대지는 탄생 전야 같다. 없는 놈은 추위도 더 타는가. 며칠 전 왕피천 둑에 섰더니 강물 풀리는 소리가 몸으로 퍼져 온다. 겨우내 움츠린 기운이 일시에 강변(江邊)으로 녹는다. 어디 따스한 곳에서 막걸리라도 먹을 수 있는 시절이 왔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다. 또 이렇게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만나듯 불영사와 시절 인연을 가졌던 사람들을 만나려고 한다.
지난 호는 불영사의 창건에서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이러저러한 연유로 불영사와 인연을 가졌던 사람들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흔적이야 문자를 독점했던 문인 사대부들이 남긴 기록이다. 물론 그 기록도 빈약하고 원본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다시 베끼고 윤색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또 그 사본의 해석본을 본다. 그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모습일 뿐이다. 먼저 스님들을, 이어 유학자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영사 그곳에 있었던 스님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다》
기록에 보이는 대표적 스님은 먼저 창건과 관계된 의상 대사를 시작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불영사에 있었을 소운(小雲) 법사· 선조 연간의 성원(性元) 법사·숙종 때의 양성(養性) 법사·양성 법사의 문도였던 천옥(天玉) 법사·정조대 불영사 대원암의 쾌원(快圓) 법사·구한말의 설운과 조경 장로 그리고 일제 때의 영암당 임성(映岩堂 任性) 스님 등이 불영사를 거쳐 간 큰 스님들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의상 대사를 설명할 생각은 없고, 소운 법사는 불영사 사적비에 ‘조선 태조 5년(1396)에 화재를 입어 다음해 법사가 재건하였다’는 짤막한 기록 뿐이다. 그러나 불영사 하면 떠오르는 스님이 있는데 바로 성원과 양성(1622-1696) 두 법사이다. 조선 중·후기에 불영사에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다.
시기로 볼 때 두 사람은 서로 이생에서는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사동의 황동명이 불영사를 찾아 성원 법사를 만나 불영사 사적기를 쓴 것이 1611년인데, 그는 성원 법사를 노사(老師)로 호칭하고 있다. 양성 법사가 태어나기 11년 전이다. 두 사람의 행적을 보면 시기의 차이도 있지만 뭐랄까 풍기는 분위기도 다른 느낌이 든다. 그리고 좀 독특한(?) 느낌의 쾌원 법사도 있다.
성원 법사에 관한 기록으로 황동명이 쓴 불영사 사적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내가 병을 조섭(調攝:몸조리)하기 위해 광해 3년(1611) 1월 3일에 사동을 떠나 불영사에 오니, 노사(老師)가 있어 반가이 맞아 위로해 주었다. 그 말이 심히 간곡하고 얼굴 모습이 옛 조사들 같아서 참되고 순수한 데가 있더라. 뿐만 아니라 불법을 깊이 알고 계를 엄히 지키며 삼가는 품이 범승(凡僧)과는 또한 달랐다. 이 절의 사적을 보여주기에 내가 받아 펼쳐 보니, 그것은 공민왕 19년(1370) 8월에 한림학사 유백유가 쓴 천축산 불영사 기였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를 적어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노사는 무슨 자취가 있어 기록하려고 하는가?”하니 노사가 말하길 “첫째는 내가 이 절에 온지 29년인데 처음 와 보니 절이 파괴되어 목어도 없고 법고와 철종도 없었는데, 내가 와서 만든 것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둘째는 남산의 절벽이 기이하여 그 위에 두어 칸 암자를 지어 수도를 할 수 있게 했는데 남암(南庵)이라 이름지었다. 셋째는 경진년 선조 11년(1580)에 절 동쪽에 동전을 지었는데, 이는 옛 의상 법사가 청련전을 지었던 자리이다. 넷째는 정축년 1577년에 전염병이 퍼져 병에 걸린 자는 십 중 팔구 죽었다. 하여 조정에서 전염병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람마다 주사(朱砂)로 쓴 부적을 차고 집집마다 대문에는 바다 해(海)자를 써서 부치라 하였다. 전염병은 귀신의 장난이라 못할 짓이 없는 법인데 내가 자청해서 조정에서 권하는 글을 갖고 집집이 다니면서 권하자 마을 사람들이 다 위험하다 했고 절에서도 모두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 다녔는데도 나는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섯째는 그 해에 영산전과 서전을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되고 영사전만 남았는데 난(亂)이 끝난 뒤에 다시 복구할 생각으로 우선 선당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는 수해와 기근이 심해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좁쌀도 시주하는 이가 없어서 내가 맨주먹으로 1603년에 시작하여 1609년 까지 7년 만에 준공하였다. 이 절이 다시 있게 된 것은 선당이 있었기 때문인데, 만약 하늘이 나에게 수년의 목숨을 연장시켜 준다면 이 절을 완전 복구시켜 옛 모습을 찾게 하겠는데 이제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하겠는가. 이제 원하는 바는 한 문사를 만나 내가 이루어 놓은 것과 아직 이루지 못한 한(恨)을 기록해서 후인에게 남기고 싶은데, 그대가 왔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도우는 것이다”하였다. 의상 법사가 아니면 이 절이 이룩될 수 없고, 노사가 아니면 복구할 수 없으니 노사는 오늘날의 의상과 같은 사람이다.
선사(울진)의 촌 늙은이가 불교 믿는 자가 많은데, 만약 노사가 의상과 같이 한 15년 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다가 왔다면 반드시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슬프다. 유백유가 이때에 다시 태어나지 못함이여! 그러나 의상 법사는 당나라 초에 태어났고 유학사는 명나라 홍무 연간에 태어났으니 그 사이가 7,8백년인데 어찌 알겠는가?
노사가 죽은 뒤 7,8백년 뒤에 유학사 같은 자가 태어날지 모르니 그 이름이 후세에 드날리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병이 있고 글재주가 없으니 어찌 능히 기를 적으랴, 그대와의 대화를 적어 주노라 하니 노사는 좋다 하고 절하고 물러갔다.
노사는 관서(평안도) 용만(龍灣)사람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이 절에 오니 나이가 72세다. 기력이 더욱 강건해서 조석에 예불을 게을리 한 적 없고 정신의 맑기가 비할 데 없다. 노사의 법호는 성원 법사이다.』여기서 법사 개인의 모습은 물론 임란 전후의 불영사 변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또 ‘불영사 중창 권선문’에서도 성원 법사에 관한 언급이 있고, 임만휴의‘법당 단청문’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매양 산을 즐겨 하는 취미 밖에 없어 관동 땅의 승경을 두루 구경하다가 우연히 불영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작자 미상의‘증 원장로 별사(贈 元長老 別辭)’라는 글에는 성원 법사에 대한 면모가 잘 보이는 대목이 있다.
『대사가 일단(一端)의 자비심을 베풀어 일만 사람의 착함을 권유해서 한 자(尺)의 베(布)와 조그마한 재물과 한 말의 곡식과 한 되의 쌀을 시주받아서, 아침에는 물을 퍼고 오후에는 나무를 하고 목재와 공인을 모아 동서남북에 불화를 그린 화각과 금전을 지어 당년에 준공하니 그 화주(化主)의 공이 이에 더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가 별유천지의 아름다운 곳이니 대사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살았는데, 그 성품이 진실하고 욕심이 없고 말이 적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신의가 있고 대인과 사물에 정성을 다하니 착한 스님이라는 이름이 이 고을에 널리 알려졌다...(중략)...마음은 저 산과 같고 정신은 물을 쫓아서 맑으니 옷은 두 벌이 없고 먹는 것은 한 끼 밖에 먹지 않으니, 친한 벗도 사귐을 끊고 새와 짐승과 놀면서 밤이 새는지 모르고 참선에 들어 깨어나지 않고, 보고 듣는 기능이 멈추고 마음에 걸림이 없고 섬돌에는 이끼가 푸르고 얼굴에는 연하(煙霞)의 빛을 띠니 수선(修禪)하는 도가 뭇 선객(禪客)들 보다 뛰어났다...(중략)...무릇 인생이란 한 마당 꿈과 같으니 만나고 헤어짐도 또한 무상한 것이다. 대사는 본시 구름 위를 돌아다니는 자라 후일 또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 한문공(韓文公)이 태전(太顚)과 헤어질 때 의복 한 벌을 주어 정을 표시했으나 나는 가난하여 아무것도 줄 것이 없으니 한스럽다』
그가 성원 법사를 보고 지은 시 한 수다.
『구름과 같은 일생을 종용에 맡기고 초연한 그 모습은 사람마다 우러른다 만리 가는 그 행장은 오직 바랑 하나 뿐 백년의 생계는 한 개의 주머니 안에 있고 홍진의 명리는 버린지 오래여라 맑은 물 푸른 산을 마음대로 떠다니니 부럽다 그대 생활 얼마나 즐거울까 객지에 떠다니는 내 신세가 한스럽다
浮雲身世任從容 到處長携解虎? 萬里行裝單衲裏 百年生計一囊中
紅塵紫陌逃形影 緣水靑山遍路? 羨汝未能如此樂 悔將漂泊困疎?』
양성 법사(1622-1696)에 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불영사 남동쪽에 위치한 부도 비에 잘 나와 있다.
『양성 법사의 법명은 혜능(惠能)이고 자(字)는 중열(中悅)이며 세속의 성은 남씨로 그 선대가 고려 때부터 선사에 우거하여 후예들이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대사로부터 고조·증조·조 등 5대를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 명문 집안이며, 모친은 행주 전씨로 명망 가문이다. 모친이 꿈에 하늘의 신선을 보고 대사를 잉태했는데, 태어난 뒤에 이름을 몽선(夢仙)이라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곧아 말을 함부로 아니하였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처신하여 항상 출세의 뜻을 가지고 있어 부모가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에 응철장로를 쫓아 출가하여 계를 받고 8년 간 정진하여 모든 불경을 통달한 뒤 천조 대사에 나아가 묻고 또 호구당에게서 수행하여 크게 깨달아 막히는 데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 인후하고 보시하기를 기꺼이 하였으며, 계율을 엄히 지켰고 평생을 명산 고찰을 찾아 주유하기를 좋아하여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소백산 등 그의 발자취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스승을 찾아 도를 강론하여 초연한 넓고 큰 뜻을 가지고자 함이리라. 어느 날 홀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탄식하기를 “도를 구하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사람이 근본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어찌 일찍 떠난 고향에 돌아감을 잊는 것 과 다를 바이오”하며 마침내 옛 곳(불영사)으로 돌아와 머물며 수도하는 집에 현판을 달아 양성당이라 했다.

양성당 혜능 선사 부도와 부도 비
또 그곳에서 시를 읊었는데, 모두 다 염불삼매 중에서 자연히 흘러나온 것 같았으니 그 한 수를 소개하면,
<강론을 마치고 염불에 날이 저물면 밝은 달 솔바람 타고 사립문을 닫아 거네
고요하게 살면서 고요하게 흥취를 자득하니 온 경내 고요하여 꿈결인 듯 아늑하네>라 읊었는데,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내가 부처와 연꽃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하다.
병자년 12월 17일 앉은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75세요, 법랍 64세이다. 다비하는 날 서기 한 줄기가 중천에 뻗쳐 수일 만에야 사라지고 드디어 금빛 나는 사리 3과가 나왔기에 부도를 절 동쪽 수십 보 지점에 세우고, 그의 수제자 천옥 대사가 장차 비석을 세워 양성 대사의 행적을 기록코자 홍우해(洪宇海)를 통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우해와 대사는 마치 문공(文公)과 태전(太顚)과 같은 관계이므로 대사에 대한 사실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나에게 상세히 말하므로 내가 듣고 가상하여 비문을 쓰고 명하노라.』
이 부도 비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1646~1715)이 지었다.
그는 최명길의 손자이며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친 뒤에 이조참판·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조판서를 지냈다. 1701년(숙종 27) 영의정으로 장희빈(張禧嬪)의 처형을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그런 거유(巨儒)가 변방 스님의 부도 비문을 지었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비문에서 나오지만 홍우해가 비문을 청했는데, 우해와 양성당은 한문공(韓文公) 즉 한퇴지(韓退之)와 태전 선사(太顚 禪師)와 같은 사이라고 해서 글을 지어 준다. 우해는 조선 후기 학자 겸 시평가인 홍만종 (洪萬宗, 1643~1725)의 자(字)이다. 그는 본관이 풍산(豊山), 호가 현묵자(玄默子)로 문학지사로 자처하였으며, 정두경(鄭斗卿) 문하에 출입하고 김득신(金得臣), 홍만주(洪晩洲) 등과 친교하였다. 문학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순오지(旬五志)》에서 국문학의 가치에 대해 논하였고, 정철(鄭澈)의 시가 등 대표적인 작품에 대해 평을 가했다. 정통적인 시문(詩文)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시화(詩話)·소설에 흥미를 가져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는《순오지》외에 편저로《역대총목(歷代總目)》《시화총림(詩話叢林)》《소화시평(小華詩評)》《해동이적(海東異蹟)》《명엽지해(蓂葉志諧)》등이 있다. 양성당 혜능이 우해와 같은 대학자와 문공과 태전의 교의를 한 것으로 봐 그의 격을 짐작하고 남는다.
그런데 지금 불영사 입구 부도군에 있는 양성당 부도 안내 간판 뿐 아니라 군지 등에 양성 법사의 생몰이 모두 잘못 기록되어 있다. ‘세종 7년(1425년)에 울진군 원남면 금매리에서 11세에 출가하여 연산군 6년(1500)에 소실된 불영사를 중건하고, 중종 11년(1516)에 입적’등의 기록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연대를 잘못 기록하고 있는 양성당 혜능 선사 부도 안내판
이는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의 글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하루속히 간판의 내용을 수정 해야 한다. 움직일 수 없는 일차적 금석자료인 부도 비문에 근거하면 세속의 나이가 75세인 병자년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병자년은 1696년 숙종 22년으로 계산하면 1622년이 태어난 해가 된다.
양성 법사의 일화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가 사가에 쫓겨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자결을 하려다 홀연히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 노승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저는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온데 마마께서 괴로우셔도 눈물을 거두시고 3일만 더 기다려 보소서.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하였다. 과연 삼일 뒤에 복위시킨다는 임금의 전갈이 왔다. 이 고마움의 표시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을 하사하였고 축원당까지 지어 주었다. 지금의 의상전 상량문에서 ‘인현왕후원당’이란 묵서명이 나오기도 했다.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천축산불영사시창기’에 사방 표시인 4표(四標)의 위치를 적은 기록은 있으나 왕조실록 등에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서 좀 독특한(?) 이라고 표현한 쾌원(快圓) 스님에 관한 기록은 우암 윤시형의 증손인 황림 윤사진(惶林 尹思進, 1713-1793)이 지은 불영사 대원암 신창기(佛影寺 大圓庵 新創記)에 나온다.
『옛 천축산 불영사에 새 암자가 있으니 이는 이 절의 승(僧) 쾌원(快圓)이 지은 것인데 불교의 대원각이라는 말에 따라 암자 이름을 대원암이라 지은 것이다. 쾌원이 어릴 때 아비를 잃고 편모슬하에 자랄 때 살림이 곤궁하여 키울 수 없어 출가시켰는데, 마음이 날로 불교에 골몰하여 그 심오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더니 표연히 스승을 구하여 전국의 명산 도량을 찾아다니다가 제월당 재일(霽月堂 在日)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았는데, 재일(在日)이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 법을 전하고 법통을 잇게 하는 동시에 호를 송암(松巖)이라 지어 주었다. 쾌원이 그의 도를 받고 불영사에 돌아와 경자년(1780) 봄에 절 남쪽 향로봉 밑에 이 암자를 지으니 다음해 가을에 준공하였는데 무릇 20여 칸이더라. 쾌원이 이 암자에 고요히 앉아서 항상 벽에 걸린 대원암(大圓庵)이라는 편액을 보면서 스스로의 마음자리를 크고 둥글게 가지려 하였다. 달이 둥근 것이 둥근 것이 아니고 하늘이 둥근 것이 둥근 것이다. 달은 둥글면 이지러질 때가 있지만, 하늘이 둥근 것은 만고에 변함없이 항상 둥글다. 그러므로 대원이라 한 것이다. 이 대원의 뜻이 불서(佛書)에 소위 마니주(摩尼珠)의 원광(圓光)이 속에 감추어 있다가 밖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요. 앉아서 성불하는 자가 마땅히 원의 뜻을 깨달음이 있는 즉, 그 깨달음이야말로 큰 것이다. 쾌원의 공부가 과연 이에 이르렀는가? 아! 송암이 옛적 도승(道僧) 서암(瑞巖)의 후신이라 혹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쾌원이 두 번 세 번 내게 기를 써 달라 청하더니, 이제 또 와서 간곡히 청하거늘 내가 사양할 길이 없어서 허락했다. 그러나 공자님이 말씀하길“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하였다. 내 솔직히 재삼 사양하였던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내 글이 졸렬한 탓이요. 둘째는 내가 유가의 선비로서 불교와 도가 같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이름 내기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이제 내가 구태여 졸렬한 말을 하겠느니 갓은 유관(儒冠)을 쓰고 말은 불도(佛道)의 말을 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예전 서암의 성성한 법을 또한 유현이 취하여 나쁠 것이 없고 이를 후학자에게 전해 주어 기이할 것 없어라. 송암이 능히 서암의 유법을 체득하였으니 사람이 암자와 더불어 부끄러울 바가 없으므로 내가 이 기문을 지어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쾌원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그는 예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뭔지 모르겠지만 독특한 맛을 풍긴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의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황림 윤사진이 유림으로 불가의 글을 여러 번 거절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풍조도 보이는 듯 하지만, 큰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도 엿보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불영사 경내 주차장 입구에 있는 강원도 울진군 천축산 불영사 사적비기의 기문을 받으러 오대산 상원사에 한암 대종사를 찾아간 영암 박기종(朴淇宗) 스님이 있다. 그는 이 비를 세운 1933년에 당시 불영사 주지였다. 그는 1907년 우리 고장 울진 출생으로 1933년 월정사에서 방한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불영사 주지로 왔다. 그 후 1975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는 등 불교계의 거목으로 활동하다 1987년 세수 81년법납 64세로 열반, 사리 10과를 남긴다.
불영사와 이런 저런 인연들
《해 저문 들길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오는 누구인지 물을 것 없이 굳이 덧없는 세상일을 들추지 않아도 좋다》
불영사에는 죽었던 사람을 살린 이야기가 전한다. 1408년(태종 8년) 8월 판관 이문명(李文命)이 쓴 환생전기(還生殿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옛날 광산 백극재(白克齋)선생이 울진 현령으로 제수 받아 수레를 타고 임지로 내려가다가 삼월에 돌림병을 얻어 갑자기 사망하였다. 부인 이씨가 민망하고 두려워 이 지역에 기도를 올릴 정사가 있는지의 가부를 묻자, 한 관리가 말하기를 서쪽에 불영사란 절이 있으며 건물은 오래되었고 불상은 영험하다고 하였다. 이에 부인이 상여를 절의 탑 앞에 옮기도록 조치하고 부처님 앞에서 분향하고 울며 축원하기를 첩의 지아비가 길을 떠나 죽었으니 횡사함과 같구나. 즉시 엎드려 하늘에 기도하고 꿇어 앉아 정성들이기를 삼일 삼야에 이르러 부인이 잠깐 잠이 들자 산발을 한 도깨비가 달려가며 지금이 각천광중 10년 원이 맺혔구나 하고 말하는데 반복하지 않고 끝내었다. 부인이 놀라 깨어 관을 열어보니 엄연히 환생하였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로 탑을 돌고 기쁨으로 불전을 돌며, 환생한 건물로 인하여 금글씨로 연화경 7축을 베껴 썼으니 부처님의 은혜 때문이라.
당나라의 식하(食荷)비구가 6일 만에 환생한 것도 불력의 깨우침이고, 양나라의 유씨 딸이 7일 만에 환생한 것도 법력의 깨우침이요, 두씨의 아들이 3일에 환생한 것도 하늘의 힘이 깨우침이니, 정성이 있는 곳에 감응이 있는 것에 고금의 세속이 한결같이 의지하는 것이니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울진 군지 관안에 백극재는 1396년(태조 5년)에 부임하여 산성에 읍을 옮겼고 관청에서 죽으니 부인이 불영사에 가서 불공을 드려 환생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33년의 천축산 불영사 사적비기에는 백극재가 성종 5년 1474년에 울진현령으로 제수 받고 내려가다 돌림병을 얻어 사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문명이 환생전기를 쓴 1408년 보다 오히려 늦다. 앞뒤 정황상 잘못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남편의 금의환향이 죽음으로 되었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는 심정은 어렵지 않게 든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고 기도하고 살린 곳이 불영사라고 한다.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기야 하겠냐만... 지금 불영사에서는 대웅보전 동편에 있는 황화실을 환생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휴 임유후(萬休 任有後, 1601-1673년)는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했다. 이 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울진 행곡의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20여 년간 살게 된다. 그는 궁향 벽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기르는 등 지역의 문풍에 일대 기여를 한다. 그는 1630년 불영사를 방문하게 되는데 법당 단청문과 불영사 14경이란 시를 남긴다.
법당 단청문에서『기술하노니 내 일찍이 설산서극(雪山西極)에 도량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창해 동쪽 머리에 진상(眞像) 있음을 보았도다. 진실로 여래가 고해의 마귀를 항복받는 신령한 힘을 나타내었고, 대사의 싱그러운 주문이 용을 쫓아내는 기이한 위력을 발휘하였음을 전했더라...(중략)...임진병화로 잿더미 된 이 사옥을 새로 지으니 연작(燕雀:제비와 까치)이 처마 밑에 와서 하례하고 긴 들보 큰 기둥이 옛 초석 위에 거듭 지어졌고, 동쪽 숲 속의 쇠북 종은 부처님의 찬미를 전하는데 서쪽에 있는 단청은 빛바랬구나...(중략)...산정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불문에 감동하여 우는 소리 같고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이니 어찌 자비의 한 세상을 이루지 않겠는가? 보배가 집에 가득해도 업을 짓는 원인이 되고 착한 심근(心根)은 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날 인(因)이 되리라. 빈부를 불구하고 보시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크고 적은 공덕을 어찌 쌓지 않을까 보냐. 단장에 채색하는 것은 선승들의 마음을 밝히고...(후략)』
또 불영사 주변의 승경(勝景)을 14경으로 명명하고 시를 남긴다.
1.부용성(芙蓉城) 2.청라봉(靑螺峰) 3.해운봉(海運峰) 4.종암봉(鍾巖峰) 5.금탑봉(金塔峰) 6.삼각봉(三角峰) 7.향로봉(香爐峰) 8.원효굴(元曉窟) 9.의상대(義湘臺) 10.좌망대(坐忘臺) 11.용혈(龍穴) 12.오룡대(五龍坮) 13.단하동(丹霞洞) 14.학소(鶴巢) 등이다. 이중 제10경인 좌망대 시를 소개한다.
『앉아서 시내물 맑은 것을 사랑하니 해가 서산을 넘어 가도 모르겠구나
발을 씻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소리 높여 자지곡(紫芝曲:중국 한나라 때 자연에 묻혀 살아가려는 의지를 노래한 곡)을 노래하더라.
坐愛溪水淸 不知山日夕 濯足望靑天 高歌紫芝曲』
삼연 김창흡 (三淵 金昌翕, 1653-1722)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 창집·창협과 함께 은거하였다. 후에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울진의 성류굴을 방문하여 기문을 남겼으며, 다음은 불영사에 왔다가 남긴 시 한 수이다.
『부용꽃 봉우리가 피고 피어 성 이루고 금탑봉 청루봉이 날고자 하는데
전각 밑 용추에는 용이 황홀하고 동문 밖 광경에는 부처처럼 방불하네
눈 녹은 시냇물은 은폭포를 이루는데 이월의 봄구름은 푸른 산기운이 서리고
새벽에 둥근달을 따라가 좌망 대에 앉으니 속진을 씻겠더라
芙蓉千朶化城圍 塔岫螺峰惚欲飛 殿脚潭湫龍恍惚 洞門光景佛依?
一溪雪水騰銀瀑 二月春雲幕翠微 向曉步隨圓月去 坐忘臺上淡忘機』
이 외에도 임만휴의 수제자 이었던 우와 전구원(愚窩 田九?, 1615-1691)은 보개봉 소설(寶蓋峰 小說)과 남암 중창기(南庵 重創記)를, 울진 현령으로 재임 시 큰 선정을 베풀었던 서파 오도일(西波 吳道一, 1645-1703)은 양성 법사에 증하는 시를 남긴다.
자장(子張) 이세기(李世機)는 1701년(숙종27년) 9월에서 1705년 6월까지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는데, 1702년에 불영사를 방문하고 시와 천옥 법사에 증한 글을 남긴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기자헌 (奇自獻, 1562~1624)도 불영사를 방문하고, 응진전 대들보에‘대시주 의정부 영의정 기공 자헌’이라 쓴 글이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아동이 있는데 불영사에 4살에 와서‘만고화(萬古化)’라고 썼다.‘평해 사동 김주서(金周瑞) 4세 서(書)’라고 협서가 쓰여 있는데,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불영사를 둘러보고 만고화라고 썼다니 기가 막힌다.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글씨는 참으로 천진난만한 질박미가 있어 보면볼수록 좋다.

기성면 사동의 김주서(金周瑞)라는 4세 어린이(조선 철종때로 추정)가 불영사에 왔다가 남긴 서예작품
마치며
창건한 의상과 사적기를 쓴 고려조 유백유에서부터 불영사란 기록의 편린들이 어떤 연유를 거쳤든 우리 앞에 왔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불영사에 왔다 가고 사라졌다. 그들이 그렇게 한 줄 글이라도 남겼기에 불영사의 옛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황동명의 말처럼“슬프다. 유백유가 이때에 다시 태어나지 못함이여!”그러나“없는 것은 없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라”는 말도 있고 보면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 그 모두 섭리인 것을 어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1650여년 전인 353년에, 늦봄의 회계산 난정에서 모여 수계사(修稽事)를 하고 남긴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집서에서『뒷날에 지금을 보는 것도 현재에서 옛날을 보는 것이니 슬프도다! 그러므로 당시의 인물들을 차례로 열거하여 그 서술한 바를 기록하니, 비록 시대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 할지라도 감회를 일으키는 까닭은 한결 같음이라. 뒷날 보는 사람 또한 장차 이 글에 감회가 있을지니라.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그 옛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렇다. 비록 시대가 다르더라도 느끼는 감회는 한결같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영사를 찾는 그들도 우리처럼···.
<편집자 주>
불영사 답사기로 처음 불영사의 창건에서 오늘까지의 역사를 돌아보고 거쳐간 인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불영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당연히 그 부분도 다루어야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2회에 걸친 불영사 답사기는 여기에서 마친다.
<참고문헌>
▲『佛影寺 大雄寶殿 實測調査報告書』, 文化財廳, 2000. 8
▲ 南錫和『蔚珍郡誌』, 1939
▲『萬休堂集』, 豊川任氏牧使公派宗中, 1995
▲『鄕土史硏究 第 1 輯』, 蔚珍郡鄕土史硏究會, 1988
▲ 심현용『천축산 불영사 신자료 고찰』佛敎考古學 第5號, 威德大學校 博物館,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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