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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약방 김창웅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3.20 07:23
  • 글자크기설정

 “이제는 손님도 없고... 일평생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건강이 허용하는 한 약방을 계속 하려고 했는데 시대적인 추세를 거스를 수가 있나요? 이제는 정말 그만두어도 미련이 없지요.”

 

동네 의원과 약국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시골 각 동리마다 한두 군데씩은 꼭 약방이 있었다.
소화가 안 되거나 과식하여 속이 더부룩한 사람은 약방에서 까스 활명수 한병만 사 마시면 신통하게도 뱃속이 금방 편안해졌고, 각 가정에서는 손님들이 찾아오면 최고의 접대용 음료수로 박카스를 한병씩 권하고는 했다.
 

아기를 키우는 집들은 누런색 알약으로 맛이 고소한, 당시에는 유일한 영양제였던 원기소를 철따라 어린애들에게 사 먹이며 건강을 챙겼다.
위생상태가 나빴던 예전에는 너도나도 부스럼이나 종기에 많이 시달렸었다.
몸 한 구석에 부스럼이나 종기가 나서 염증이 생기고 욕창이 번질 때면 약방으로 달려가서 이명래고약이나 됴고약(조고약)을 사 붙이면 하루 이틀 새 고름이 쏙 빠지면서 금세 아물어 새살이 돋고는 했다.
나이든 할머니들은 머리에 바람이 들어 시리고 두통이 있을 때면 약방을 통해 뇌신이라는 약을 구해서 복용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했던 배고팠던 시절, 추석이나 설날은 맛있는 명절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잔뜩 움츠려 있던 허기진 뱃속에 기름진 음식이 한껏 들어갔으니 찾아오는 불청객은 배탈이었다.
이때도 어김없이 동네 약방을 찾아야 했다.  설 쇤다고 약방문을 걸어 닫았던 주인은 배탈 약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설을 거꾸로 쇤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고, 일부 제약회사는 명절특수를 위해 제수음식과 함께 소화제를 꼭 준비하라고 광고하기도 했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상처부위에 된장이나 송진, 오징어 뼈 가루를 찍어 바르고, 입가에 허연 버짐이 생기면 부엌에서 가마솥 위로 끓어 넘치던 밥물을 발랐고, 심지어 몸 안의 회충을 죽이겠다고 소량의 석유까지 마셔대던 30~40년 전에 동네 어귀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약방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최신 양약의 효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웬만한 상처는 된장으로 치유하던 시절에 약방에서 팔던 빨간약 아까징끼(머큐로크롬액)의 효력은 경이로움에 가까운 것이었고, 기껏해야 탄산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거나 제자리 뜀뛰기를 통해 체증을 가라앉히고 할머니의 약손을 빌어 소화를 시키던 시절에 까스 활명수의 위력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만 해도 약방에서는 약을 조제하기도 했고, 기본적인 진단에 주사는 기본이었다.
 

이빨을 뽑아주기도 해서 치과, 당시 흔하게 앓던 귀앓이에 약솜을 넣어주어서 이비인후과, 속이 아픈 걸 약 한병으로 치료하는 내과에 소아과를 겸할 정도로 서민들에게는 약방이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약이 귀해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시절, 약방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조건 독하게만 약을 지어달라고 요구했고 약이 독한만큼 병도 빨리 나았다.

돈을 만져보기가 힘들던 시절,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순한 약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지어먹을 수 없었던 당시 서민들의 궁핍한 살림살이 습관은 지금도 여전히 약국이나 병원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독하게 지어주소...”,“뭐니 뭐니 해도 감기 몸살에는 주사 빨이 최고니까 약보다는 차라리 주사나 한 대 놓아 주소...”   
  
약방은 약국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약국은 약사법에 따라 약사 또는 한의사가 의약을 조제하거나 판매하는 곳이다. 의약품의 종류 또한 약방보다는 약국이 월등히 많다. 당연히 약사나 한약사가 아니면 약국을 개설할 수도 없다.
반면에 약방은 의약품을 조제할 수 없고 의약품 가운데서도 비교적 전문지식이 필요 없는 제한된 품목의 의약품만을 판매할 수 있다.
 

그런데 의사회와 약사회의 숱한 진통 끝에 지난 2000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의약분업이 실시된 이후부터는 약방은 물론이고, 약국 또한 약사 마음대로 임의조제를 못하게 되었다.
약사는 전문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투약하고자 하는 약을 처방한 처방전에 근거하여 주약이나 보조약 등 여러 가지 약을 혼합하는 행위만 가능하다.
 

약국의 약사와는 달리 약방의 약업사(약종상)는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혼합하는 행위조차 못하도록 강제되어 있다.
약국과 약방에 이어 보다 인구가 적은 시골에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읍내 약국에서 판매를 지정해둔 지정소가 있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약포(藥鋪)에서도 간단한 응급 약품 정도를 판매하고 있다. 

현재 울진군에는 약국 18개소, 약방 3개소, 약국 지정소 4개소, 약포 1개소가 각각 영업을 하고 있다. 약방은 후포면 2개소와 평해읍 월송리 1개소가 영업 중이며, 북면 덕구·근남 노음·서면 삼근·망향휴게소에는 약국 지정소가, 원남면 매화리에는 관내에서 유일하게 약포 1개소가 영업 중이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
후포 중·고등학교 앞에 가면 40여년 한결같이 동해약방을 지키며 살아온 김창웅(77세)씨를 만날 수 있다.
1967년 약업사(약종상)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부터 약방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 동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주민들에게 필수의약품을 팔아온 김씨는 일본 동경(東京) 간다구(神田區)에서 태어났다.
 “일정시대에는 간단한 허가만 맡으면 조선인들도 일본으로 들어가서 얼마든지 생활하거나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도 각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만나고 결혼해서 나를 낳고 내 밑의 여동생 한명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내 고향은 일본 동경입니다. 막내로 태어난 남동생은 해방 후에 국내로 들어와서 태어났어요.”
 

조선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의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 일가족은 해방 뒤에 국내로 귀국하게 된다.
 “원래 우리 부모님은 평생 일본에서 사시려고 했던 것 같아요. 다들 해방되고 곧장 귀국하고는 했는데, 우리 가족은 해방을 맞고도 2년이 지나 거의 마지막 파수로 일본을 떠나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고 난 다음에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나 중국등지에 남아있던 일본인들 상당수가 현지인들로부터 곧잘 피습을 당하고 심지어 맞아죽기까지 했잖아요? 그런 참상을 겪은 일본인들이 어렵사리 본국으로 귀국하고 난 다음에는 그때 당한 보복심과 적개심을 일본에 잔류중인 조선인들에게로 돌렸습니다.”
 

김씨는 평생 일본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작정했던 부모님이 복수심에 불타는 일본인들을 피해 할 수 없이 귀국했다고 전한다.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러시아나 중국등지에서 귀국한 일본인들로부터 습격당했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간혹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다가 결국은 국내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김씨네 가족은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후포면 금음 1리에 정착한다.
오랜 타지 생활 후에 고향이라고 들어왔지만, 당시는 온 나라 안이 어수선할 때라 김씨네 가족이 의식주를 해결할만한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부친은 이미 일본에서 30년 이상 눌러 살던 분이었어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돈을 왕창 벌고 난 다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집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렇게 잘 먹고 잘산다는 꿈이 있었는데, 아버님은 그런 계획이 전혀 없던 분이었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에서 계속 살 생각이었으니까요.”
  
고향 후포 금음리로 귀국... 그리고 가난
해방을 맞아 국내로 들어와서 고향을 찾아 들었지만 김씨네 온 가족은 당장 죽 한끼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씨는 그 당시 가족들이 각자 능력껏 이곳저곳 눈치를 보면서 밥 한끼를 얻어먹으러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기억한다.
 “죽 한 그릇도 얻어먹기가 힘드니까 어머니께서 평해읍에서 의원을 하시는 친척 분에게 나를 데리고 갔어요. 어머니께 외삼촌 되시는 분이셨는데 강상술씨라고 당시에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해에서 의원을 개업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조카아들인 나를 보고는 당신 밑에서 일을 거들라고 하더군요.”  김창웅씨는 평해의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간단한 환자 치료며 수술 일도 거들고, 잔심부름도 하는 등 어머니의 외가 친척인 평해의원 의사의 조수로 근무하면서 4~5년을 보내게 된다.

 

6. 25 전쟁 발발... 국군과 인민군 노무자로
의식주가 온전히 해결되면서 큰 걱정없이 몇 년을 보내는 가운데 1950년 6.25전쟁이 터진다.
김씨네 가족은 급하게 보따리를 꾸려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김씨 혼자 앞서 가다가 중간에서 가족들과 헤어지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당시에 의원에서 조수로 근무하던 나에게는 온갖 볼일을 보러 다닐 때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한 대 있었는데, 피난 짐을 자전거에 가득 싣고서 앞서서 후포를 떠나게 됐어요. 부모형제들은 뒤에서 다른 피난민 행렬에 섞여 따라오고요. 그런데 영덕쯤 다다라서 가족들을 기다리니까 가족들이 도무지 따라오지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픈데 인근 과수원에서 떨어진 과일들을 주워 먹으면서 이틀을 보내고 사흘을 기다려도 가족들이 보이지가 않아요. 들리는 소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밀고 내려와서 영덕 인근 마을들까지 점령했다고 하더군요. 곳곳에서 전투도 치열했지요. 너무 앞서 내려간 나만 가족들과 떨어져 졸지에 외톨이가 된 것입니다.”
 

김씨가 영덕쯤에서 뒤처진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영덕, 강구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를 피해 이리저리 헤매던 김씨는 국군의 눈에 띄어 노무자로 끌려가서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하게 된다.
 “혹시나 싶어 가족들을 찾아다니는데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붙잡더니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새끼줄로 멜빵을 꼬아 어깨에 걸치게 하고 탄약, 박격포탄, 식량 등을 운반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둘러메고 인민군을 피해 숨어가면서 이동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군인들의 인솔 하에 한시간쯤 이동하다가 잠깐 쉬고 다시 이동하기를 몇날며칠 반복하다 보니까 어느 부대에 도착하더군요. 도착하니까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잘 먹을 수 있었지요. 군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 잘못하면 적의 포탄이나 총을 맞고 죽을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선 삼시세끼 주먹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습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시절이었고 또 한참 먹을 나이였으니까요......”
 

의원에서 의사의 조수생활을 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길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군인들에게 노무자로 끌려간 김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특기와 무관하지 않은 의무대 일을 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노무자로 끌려가서 부대에 도착한 뒤 며칠 동안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 보니까 하사관 몇 명이 오더니 사회에서 의사로 지냈거나 그쪽 방면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내가 조금 경험이 있다고 하니까 본부 의무대로 데리고 갔어요. 당시 그 부대의 의무대장이 세브란스의대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중위였습니다. 의무대장 밑으로 위생병이 몇 명 있었는데 실력이 나에게 미치지 못했어요. 전쟁터에서 총이나 포탄에 맞아 창자가 삐져나오는 등 끔찍하게 다친 병사들을 즉시 응급조치하여 후방으로 이송하는 일을 밤낮으로 했습니다. 피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았습니다. 의무대는 일반 사병들에게 지급되는 식사보다 훨씬 양질의 밥과 반찬이 지급됐으니까요.”
 

노무자로 국군에 끌려간 김씨는 8사단에서 의무대장의 깊은 신뢰를 받으며 밤낮 다친 병사들을 보살피면서 인민군의 진격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는 부대를 따라 영천까지 내려가게 된다.
노무자로 끌려 다닌 지 2개월여 가까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에 큰 의욕과 힘을 주었습니다. 내가 노무자로 근무하던 8사단은 영천에서 인민군 제5사단을 거의 전멸시켰어요. 인민군들은 그때 후퇴하면서 사병들이 먼저 물러나는 가운데, 탱크가 제일 뒤에 처져 가면서 엄호 사격을 하고는 했어요. 지금도 기억이 선합니다. 사람이 수도 없이 죽고 다치고, 심지어 어떤 민가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악에 바쳐 눈알을 뽑아버린 여자도 보고 참으로 못 볼 것을 많이 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국군의 반격을 따라 김씨는 강원도 원주까지 올라갔다가, 바람에 나뒹구는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 울진지역이 이미 수복됐고 국군이 삼척까지 진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울진이 수복됐다는 기사를 보고서 의무대장에게 가족들 생사도 모르고 이만 집에 가봐야겠다고 말하니까 무슨 증명서를 하나 써 주었습니다. 그 증명서를 들고 노무자로 같이 일하던 근남면 수산 사람과 함께 걸어서 울진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지요.”
 

몇 날에 걸쳐 길을 따라, 또 때로는 산과 계곡을 타고 내려오던 두 사람은 서면 삼근리 인근까지 오게 된다.
 “삼근리쯤 왔을 때 산에서 내려오는 어떤 농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입고 있던 군복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안심하고서 산에서 따왔다면서 머루를 꺼내놓고 잠시 허기라도 채우라고 권하는데 그 산머루 맛은 아직까지 입안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참 달게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농부로부터 뒤처진 인민군들 상당수가 현재 불영사에 주둔하고 있다는 귀한 정보를 얻는다.
그 농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인민군을 피해 야밤을 이용하여 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김씨는 깜깜한 밤에 이동하는 도중에 원주에서 서면 삼근리까지 함께 동행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말한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이동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안 보이는 겁니다. 할 수 없이 혼자 계속 내려오다가 어떤 농가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아직까지 깊은 산 곳곳에는 인민군이 바글바글하고 인근 울진과 죽변은 시도 때도 없이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과 지역의 공비들이 함께 작전을 했던 것 같아요. 계곡을 헤엄쳐 건너기도 하면서 계속 내려오다가 인민군의 딱콩총에 맞아 죽을 뻔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참 아득하기만 합니다.”

 

소년기의 기억은 아픔으로... 또 그리움으로
일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생활한 탓인지 약간은 어눌하고 일본식 발음까지 섞인 동해약방 김창웅씨의 얘기를 듣다보면 흡사 긴 전쟁영화 한편을 보는 것도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약방이야 천직이다 생각하고 평생 한자리를 지키면서 약을 사러오는 주민들에게 약을 팔아왔는데 특별하게 무슨 할 얘기가 있겠냐는 김씨는, 일평생 가장 고생스러웠던 아픈 기억들이나 듣고 가라며 주저리주저리 6.25전쟁을 전후해서 겪었던 고생담을 길게 풀어 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누구든지 유년기와 소년기의 기억이 제일 강렬한 색깔로 일평생을 남아 가는 것이고, 그것은 아픔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소년기를 회상하는 김씨의 기억력은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과감한 일상의 언어를 통해 꽤나 구체적으로 불거져 나오며 그런 만큼 생동감이 있다.
다시 밤을 타고 길을 떠난 김씨는 추위와 졸음에 지쳐 어느 농가의 마구간에 들어가서 소여물 썰어놓은 것을 온몸에 덮고서 잠을 잤었다고 말한다.
 “인민군을 피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의 집 마구간에서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한순간 문이 삐걱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떠니, 소여물을 가지러 왔던 그 집의 젊은 새댁 또한 깜짝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나더군요. 곧 어떤 할아버지가 나오기에 전후 사정을 설명했더니 인근 지리를 상세히 알려 주더군요. 한참을 걸어 나오니 현재 성류굴 부근의 비포장 신작로가 나왔어요.”
 

천신만고 끝에 산과 계곡을 타고서 원주에서 울진 근남까지 내려온 김씨는 이번에는 국군이 아닌 인민군들에게 생포되는 비운을 다시 겪게 된다.
 “근남에서 신작로를 따라 걸어서 매화를 지나는데 인민군 일곱 여덟 명에게 생포되어 그들의 본부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노란 견장에 왕별을 달고 허리에 권총을 찬 젊은 사람이 대장으로 보였어요. 원주 국군 부대의 의무대장이 써준 소개서를 보더니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다 싶었는지 고향을 물어보는데, 일본이라고 하니까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함께 있자고 했어요. 우선 가족의 생사가 궁금하다니까 하는 수 없는지 숨어 다니지 말고 대로변으로 걸어가는 편이 차라리 안전하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왕별을 단 인민군 대장의 충고대로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던 김씨는 얼마 못가서 다시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 부대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울진군은 공식적으로는 국군이 수복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부대가 곳곳에서 후퇴를 하는 중이거나 국군과 교전을 벌일 때여서, 지역은 아군과 적군의 구별 또는 전선의 구분이 그리 명확하지 못할 때였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후퇴하는 인민군 부대와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인민군에 붙들려서 노무자로 쌀가마를 지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무거운 쌀가마를 지고 한참 올라가는데 어느 순간 코피가 칵하고 터지더니 길바닥에 그냥 기절하다시피 쓰러졌지요. 원체 타고난 몸도 약한데다가 원주에서부터 인민군을 피해 도망치듯 내려온다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였지요. 어떻게 겨우 일어나서 다시 쌀가마를 지고 올라가는데, 한 번씩 아군의 쌕쌕이 비행기가 지나가며 기관총을 퍼부으면 포플러 나무 뒤에 웅크려 숨기도 하면서 그렇게 계속 올라갔지요.”
 

김씨는 원남면에서 인민군들에게 붙들려 노무자로 쌀을 지고 가다가 근남면 부대에서 만나 자기를 풀어주었던 인민군의 젊은 왕별 대장을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그 대장으로부터 “이미 풀어주었는데 부하들에게 다시 잡혀 왔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북으로 올라가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으로 김씨는 기억한다.
 

도망할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며칠 동안 김씨는 인민군들이 인근 농가의 소를 뺏고, 쌀도 뺏고 하는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노무자로서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다가 결정적으로 도망칠 기회를 얻게 된다.
 “죽변면 인근의 어느 농가에서 인민군들이 소를 뺐더니 나보고 소를 끌고 먼저 부대로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절호의 기회다 싶었어요. 혼자 본부로 내려오던 도중에 소를 어느 나무에 매어 놓고 뒤도 안돌아보고 그대로 도망을 쳤지요. 산을 타고 한참 도망치다 보니까 갑자기 숲속에서‘손들어’하는데 돌아보니까 국군이더군요. 군인들을 따라서 내려오니까 어느 민가에서 잠을 재워주는데, 그날 밤 인민군들이 습격을 가해 와서 밤새 총소리에 난리였어요. 이튿날 군부대에서 기본적인 신원확인 절차를 거치고 나니까 남쪽 방면으로 가는 차가 있다면서 기성면 사동리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후포 금음리 집으로, 그리고 전쟁터로
김씨는 기성면 사동리에서 후포 금음리 집까지 걸어서 무사히 도착한다.
금음리 집에 돌아와보니 피난 초기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무사히 생활하고 있었다.
6.25 전쟁 초기에 김씨를 먼저 남쪽으로 떠나보낸 가족들은 다른 피난민 행렬과 섞여서 내려오다가 영덕 조금 못 미쳐서 인민군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갔던 길을 되짚어 그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국군 노무자로, 또 인민군 노무자로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가 천신만고 끝에 금음리 집으로 돌아온 후 2~3개월 쉬던 김씨는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되어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한다.
 “집에서 두세 달 쉬다 보니까 마을 이장이 와서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됐으니까 군에 가야 된다고 하더군요. 먼저 울산에 있는 방위군 본부에 모였다가 걸어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선을 타고 제주도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실 김씨가 마을 이장으로부터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김씨의 나이가 미달돼 징집 대상자도 아니었는데, 김씨는 먼 훗날 기막힌 당시의 사정을 알게 됐다.
 

김씨는 실제 본 나이보다 호적까지 두어 살 적게 등록돼 있는데, 당시 마을 이장이 다른 사람 대신 배경이 없는 만만한 김씨를 국민방위군 입소 대상자로 서류를 꾸민 것이었다.
김씨는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군 생활을 2~3년 일찍 시작했고, 또 그만큼 더 오래 군에 있게 된 것이다. 김씨는 일생에 가장 억울했던 일이 나이도 미달되는데 군에 끌려간(?)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김씨가 국민방위군에 입대할 당시는 제주도에 훈련소 건설이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제주도 훈련소에 도착한 김씨는 ‘060~’으로 시작되는 군번을 부여받고 낮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밤에는 훈련소를 건설하는 일에 전격 동원된다.
매끼 식사로 지급되는 것은 주먹밥 한 덩어리에 해산물인 진저리를 소금물로 푹 삶은 것뿐이었다.
 “제주도 훈련소는 대구 등 육지에 있던 훈련소들 일부를 옮겨온 곳이었는데, 한달간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만 받았으면 덜 고생스러웠겠지요. 새벽 6시에 기상해서 낮에는 총검술 등의 기본 군사교육을 받고, 밤에는 흙을 파고 돌멩이를 옮기고 철조망을 둘러치면서 훈련소를 지었어요. 시간을 아낀다고 밥도 5분 안에 먹어야 했지요.”
 

김씨는 제주도 훈련소의 훈련병 1기생으로군번이 ‘060’으로 시작되는데 뒤에 입대한 전우들을 만나 보니까 1기생보다 더 빠른 ‘059’로 시작하더라며, 지금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씨는 제주 훈련소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떠올린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의 일부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량미 지급 등을 유용한 결과, 병사들을 굶주리게 하여 1천여명의 사망자를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 방위군은 해체되고 방위군 총사령관과 부사령관 등 다섯명이 공개 처형되었다.
 “당시는 그런 상황 등으로 인해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여줘야 힘을 내서 군사교육도 받고 훈련소도 지을 텐데, 다들 죽지 못해 살았던 시절이었지요.”
  
6.25 전쟁 중 포병부대 위생병으로
제주 훈련소에서 1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받고난 김씨는 부산시 동래구의 보충대에 대기하다가 경남 진해의 포병학교에 입소한다.
포병학교에 지원한 김씨는 그곳에서 무전병 교육을 받고 육군본부 직할포대로 당시에 창설된 독립포병 제10포대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사실은 사회에서의 경험도 있고 해서 은근히 의무대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당시 의무대 위생병은 모집하지 않더군요. 계속 남아 있다가는 떠밀려서 최전방으로 배속될까봐 포병으로 지원한 것이지요.”
 

김씨가 근무하던 포병부대는 중대 급의 4.2인치 중박격포 부대로서, 이 부대에 배치된 김씨는 대구시 화원초등학교에서 다시 재교육을 받다가 의무대로 들어가는 작은 행운을 얻는다.
 “재교육 훈련 도중에 상사 한명이 경력사항을 검토하고 몇 사람 부르더니 상황판에 영어로 여러 가지 약 이름을 죽 쓰더니 읽어보라고 했어요. 막히지 않고 내가 읽어 내려가니까 의무대 위생병으로 근무하라고 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의원 조수로서 의술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쌓았던 김씨는 군에서 위생병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해가면서 부대를 따라 대구 화원에서 강원도 홍천까지 올라간다.
강원도 홍천에 도착한 김씨 소속 부대는 홍천에서 재교육을 받고 강원도 인제에 배치되어 미 해병대를 지원 사격하는 포병부대로 전환했다가, 다시 국군 해병대를 지원하는 포병부대로 넘어간다.
 “국군 해병대를 지원할 당시는 김일성 고지를 두고 남쪽과 북쪽 피아간의 공격이 가장 치열할 때였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수도 없이 고지를 사이에 두고 죽고 또 죽었습니다. 끝내 김일성 고지는 우리 국군이 탈환하게 됩니다.”
 

제주 훈련소에서 1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 군에 입대해서 횟수로 7년을 맞은 다음 김씨는 제대를 한다.
6.25 전쟁 후 김씨가 근무하던 포병부대는 보병 8사단 직할부대로 편입되고, 당시 김씨는 보병부대의 사단장 부관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CIC((미 육군 소속의 방첩부대로서 공식적으로 1948년 한국에서 철수했고, 그 후에는 켈로 부대(KLO)로 불렸다))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함께 입대했던 동료들이 모두 중사나 상사로 제대했는데 나만 하사로 제대했습니다. 상급자에게 따져 물으니까 CIC에 파견 나가 있었기 때문에 깜빡 잊고 진급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고 하더군요. 이게 말이 됩니까? 돌이켜봐도 그것은 억울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창웅씨는 1953년 휴전되고도 3년이 지난 1956년 3~4월경 군을 제대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7년 만에 군을 제대하고 약종상으로... 그리고 결혼
군을 제대한 김씨는 이전의 직장이었던 평해의원에서 계속 조수로 근무한다.
그러던 중 1967년 제1회 약종상 시험에 합격해서 이듬해에 후포면 금음리에서 약방을 개업한다.
금음1리에서 처음 약방을 개업하고 1년쯤 지난 다음에 김씨는 현재의 장소로 약방을 이전하여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금음리에서 무척 어렵게 약방을 시작했는데 영 손님이 없었어요, 그래서 후포시내가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하고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김씨는 약방을 개업하고 난 다음인 스물여덟살 때 평해 삼달 출신인 세 살 연하의 김복여씨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렸다.
 “일본에 있을 때 집사람의 5촌 아재가 우리 집에 한동안 머물렀었는데,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관계여서 중매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만 해도 금음리에서 막 약방을 시작했던 때였는데 얼마나 어려웠던지 책보자기에다 약 몇 가지를 펼쳐놓고 명색이 약방이라고 운영할 때였지요.”

 

스물여덟 살에 가정을 꾸린 김씨는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만 셋을 두었다.
현재 첫째아들(47세)은 고등학교 교사로, 둘째아들(44세)은 병원 기술직 직원으로, 막내아들(40세)은 법무부의 5급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0년 시행된 의약분업의 된서리
한평생 부부여행 한번 제대로 떠나지 못하고 약방을 지켰다는 약업사 김창웅씨는 2000년 시행된 의약분업 이후에 약방의 수입이 줄고 또 줄어 이제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 놓는다. 오죽하면 요즘 김씨는 천직으로 여기던 약방을 차라리 닫아버릴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동네 병원이나 의원에서 처방전을 받아서 약국에서만 약을 지을 수 있게 됐잖아요? 의약분업 이후에는 도통 손님이 없어요. 60년 중반부터 의료시설이 열악한 시골 동네에서 평생 성실하게 한눈팔지 않고 약을 팔며 서민들의 건강 일부를 챙겨왔다고 자부하는데, 약방을 의약분업에서 제외시키다니 말이 됩니까? 결국 약방만 의약분업의 희생양이 된 것이지요. 한때 정부가 필요로 해서 약종상 면허를 주었는데, 역할이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려져서야 되겠어요?”
 

김씨는 평생 약방을 운영해오면서도 큰돈은 벌지 못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자식 셋 모두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신혼살림에 조금씩 보태주고 그렇게 살아왔지요. 시골 약방에서 얼마나 벌겠어요? 항상 빠듯하게 살림을 꾸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약방과 약업사는 우리들 기억 속에

약종상(약업사)은 과거 의료 인력이 부족하던 시절에 무의면(無醫面)과 무약면(無藥面) 해소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제도로써 1974년 이후 사라졌다.
어찌 보면 약방을 운영하는 약업사는 과거 어렵던 한 시절 격지와 오지 등 작은 시골마을에서 한국 의료계의 한 축을 거뜬히 담당하며 봉사했던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
 

의사와 약사 인력이 충분히 배출되고 있고 전국적으로 보건소와 보건지소가 생겨난 지금은 그런 약업사의 공로는 일방적으로 무시되면서 의약분업이 약업사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진행됐고, 다만 약업사들의 기득권 존중차원이라는 명분만 그럴듯하게 남아서 약업사의 자격을 겨우 보유시켜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상북도에 따르면 도내에서 영업 중인 약방은 2001년 133곳이었지만 2005년 말 현재 106곳으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통계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 약업사들의 평균연령은 70세 정도라고 한다.
전국의 약업사들이 점점 나이 들어감에 따라 앞으로는 약업사와 함께 약방도 영원히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예전 작은 시골마을과 농어촌 등지에서 수십 년간 지역주민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오며 주민들의 건강을 담보했던 약업사의 역할이 영 무시되거나 작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싶다.
우리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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