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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파 미용실 김복순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4.04 13:08
  • 글자크기설정

70년대 이전까지는 여성 전용 미용업소를 미장원이라고만 불렀다. 그러던 중 미장원이라는 이름 대신 미용실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더니 언제부턴가 머리방, 헤어미용실, 헤어아트 등 다양한 표현의 미장원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굳이 구별하면 미장원은 머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집일 테고, 미용실은 머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방이라는 뜻이니 미장원이 미용실보다는 규모가 큰 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미장원이 단독으로 규모가 있는 독립된 업소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하나의 독립된 건물 안의 일부를 차지한 소규모 업소로 전환되면서 미장원에서 미용실로 그 이름이 변천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기만족에 머물든지 아니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구애행위로 연결되던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를 포기하는 것은 여성이기를 또는 남성이기를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특히 헤어스타일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최대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남자라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다.
종종 미장원에서 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너무 많이 잘랐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매한가지이다.
동물이 깃을 흔들고 꼬리를 흔들며 이성에게 구애를 펼치듯 사람 역시 피부와 함께 모발에 대한 관심은 지극하다.
특히 모발은 여성이나 남성의 건강미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최상의 포인트로 자리한다.
 

시대를 따라 미인에 관한 기준 또한 정적인 아름다움에서 역동성이 가미된 동적인 아름다움으로 바뀌고 있듯이 헤어스타일의 변천 또한 그 역사는 길다.
미장원은 사람들의 머리나 얼굴 모습을 아름답게 매만져 주는 일을 영업으로 하는 집이지만, 대부분 동네 여성들의 휴식처로서의 역할까지 톡톡히 겸하고 있다.
 

미장원 안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흉도 몰래 보고, 성공한 자식 자랑도 하고, 누구누구는 어떻다느니 하며 제3자의 은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기도 하면서 동네 사랑방의 역할을 도맡아왔다.
미장원은 여성들의 내밀한 화제를 매개로 하여 스트레스 해소 장소나 분출구로 자리해온지 오래 되었다.
 

때로는 여성들의 은밀한 해방구로서의 장소로도 이용되는 미장원, 괜히 우울한 심사가 들어 머리를 매만지러 왔다가 이것저것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 주로 여성들을 상대하는 미장원은 남성들의 이발소와 함께 지역의 여론을 모으고 주도하는 장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애초 간호사를 꿈꾸었던 어린 소녀
 

▲ 1966년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할 당시의 김복순씨
울진 시장 안에서 40여년 미장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복순(61세)씨는 울진 지역 미용업계의 산 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지역에서 최초로 미용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울진군 미용실 허가 1호에 걸맞게 그녀의 미장원에는 40년 단골부터 10년 단골까지 수십 년 동안 낯익은 얼굴들이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머리를 다듬기 위해 즐겨 찾고 있다.
 

김씨는 미용사로서의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1991년 ‘제1회 구미시장배 쟁탈 미용 경기 대회’를 비롯해 ‘제3회 경상북도 미용 기술 경기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경상북도 일원에서 그녀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복순씨는 지난 80년 후반 울진군 미용협회의 초대 지부장도 역임하는 등 명실상부한 울진 지역 미용업계의 대모로 자리 잡고 있다. 김복순씨는 울진읍내에서 신림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위치한‘올시골’ 못 미쳐‘황토배기’라는 곳에서 2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김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를 소망했던 꿈 많고 여린 소녀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 간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간호사는 당시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학벌이 필요했고 어려운 자격증도 따야 했기에 포기해야만 됐지요. 어린 시절 주택 청부업을 하시던 아버지(고 김세호씨)가 사업에 실패한 후 어머니(고 안남연씨)가 생선 장사를 하시면서 근근이 절 국민학교까지 졸업시켰는데, 그 당시의 앞뒤 사정이 간호사가 되려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간호사의 꿈을 접고 김복순씨는 열여섯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시간을 보낸다. 

 

영주종합고등기술학원 졸업 그리고 보조시절
 

나이는 한살 두살 먹어가고 아무런 기술도 없이 대책 없이 집에서 먹고 지낼 수는 없다는 조급증에 김씨는 영주시에 거주하던 사촌언니댁으로 올라가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에 뭔가 기술을 배워야겠다 싶었어요. 무작정 놀고 먹을 수는 없잖아요? 영주의 사촌언니댁으로 올라갔지만 식모살이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잔심부름도 도맡아 하고... 그래도 먹고 자는 일은 해결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지요. 이곳저곳 알아보다가‘영주종합고등기술학원’이라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영주종합고등기술학원에 입학한 김복순씨는 그해 3월부터 10월까지 열심히 미용 기술을 배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영주고등기술학원에서는 편물, 양재, 미용 등 3가지 기술을 가르쳤는데, 편물과 양재는 교재비가 많이 들지만 미용은 고데할 때 사용하는 종이 값만 있으면 됐으니까 미용 일을 배우게 된 거지요. 요즘 생각하면 그때 미용기술을 배운 것이 차라리 잘됐다 싶지만요. 당시만 해도 미용기술은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 배웠어요. 그 틈바구니에 끼여 열심히 미용기술을 습득해 나갔습니다. 3월에 입학해서 10월에 졸업했는데 ‘영주종합고등기술학원’의 13회 우등졸업생으로 미용기술 과정을 끝마치는 행운을 얻었어요.”
 

영주에서 미용기술학원 과정을 끝마친 김씨는 울진으로 내려와서 몇 개월 동안 고된 생활로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진다.
 “학원을 졸업한 후 집에 내려와서 몇 달 쉬었어요. 그러다가 울진 읍내의 ‘비너스 미용실’이라는 곳에 미용 보조로 취업을 했어요. 처음으로 사회경험을 한 셈이지요.”
 ‘비너스 미용실’에 보조로 취업한 김씨는 월급도 없이 한달에 용돈으로 6천원씩을 받아가면서 일년 반 정도를 보낸다.
 “월급도 없이 한달에 6천원 정도 받아가면서 미용사 보조로 현장 일을 배웠어요. 학원은 졸업했지만 자격증도 없고 무엇보다 현장 경험이 필요할 때였으니까요. 어느 정도 미용기술이 손에 익어 익숙해질 때쯤 미용사 자격시험에 응시했습니다.”
 

‘비너스 미용실’에서 1년 6개월여를 보내고 난 김씨는 열여덟살이 되던 해 대구로 올라가서 국가미용자격시험에 응시해 단번에 합격한다. “당시만 해도 미용사 자격시험은 여섯 과목을 쳤는데, 80점 이하의 과락 과목이 한과목이라도 있게 되면 탈락됐습니다. 심지어 해부생리학이라는 생소한 과목까지 있었고 그때 울진에서 3명이 올라갔는데 저 혼자만 시험에 합격했어요. 미용 자격시험과 관련된 서적을 구입해서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몇 달간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공부한 결과가 좋았던 거지요.”
 

 남들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공부하여 미용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김복순씨는 ‘마야미용실’에 취직하게 된다.
 “현재 문화원 바로 옆에 ‘마야미용실’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취직했어요. 자격증이 있다 보니까 그래도 월급이라고 받아가면서 일을 할 수 있었지요. 몇 개월 일하다가 월급을 더 많이 준다고 하기에 죽변면에 있는 ‘맘보 미용실’이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맘보 미용실’은 현 죽변 태성장여관 인근에 있었어요. 그때 월급으로 3만원을 받았어요. 당시에 미장원에서 파마가 2천원, 고데가 2백원 할때였으니까 3만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요.”

 

울진 미용실 허가 1호 ‘형제미장원’ 개업
 

영주종합고등기술학원에서 기초적인 미용기술을 배우고 난 다음 ‘비너스 미용실’과 ‘마야 미용실’에 이어 ‘맘보 미용실’을 거치는 동안 2년여의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만큼 미용 기술이 온전히 손에 익은 김씨는 울진 읍내에 처음으로 ‘형제 미용실’이라는 상호로 자신의 미용실을 개업하게 된다.
 

“학원 졸업 후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2년 정도 남의 집에서 보조로 일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보조생활이 짧았다고 할 수 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집 앞에 미용실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고는 했는데, 아마 어릴 때부터 눈에 익어서 남들보다는 미용기술 익히기가 쉬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김씨는 자신의 첫 가게 이름을 ‘형제 미용실’로 지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열달에 4만원씩 주고 사글세를 얻어 가게를 열었는데, 군청에 허가를 맡으러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에 담당하는 계장이 나이도 어린데 벌써 어려운 자격증을 따서 가게를 개업한다면서 대견해 하더니, 여동생과 함께 장사를 시작한다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상호를 ‘형제 미용실’로 정하라더군요.”
울진군에서 미용실 허가 1호로 개업한 김씨는 이내 단골손님들을 만들어가면서 친절하고도 알차게 장사를 지속했다. 

 

결혼과 이별... 그리고 두 딸 효진과 효미
 

십여 년 동안 여동생과 함께 우직하게 장사에 몰두하면서 재미를 붙여가던 김복순씨는 스물일곱 되던 해에 결혼을 해서 대구시로 올라간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하면서 미용실을 접고 대구로 올라갔어요. 남편은 대구에서 가내공업으로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종업원이 이삼십명으로 늘어날 만큼 공장도 잘 운영됐는데 2년 정도 지나서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게 됩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 후에 김씨는 고향 울진으로 내려와서 다시 미용실을 개업하게 된다.
 “남편이 사업을 실패한 후에 몇 달 동안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프고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도 없이 여인숙에서 몇 달 동안 숙식을 해결하면서 결혼 패물조차 그때 다 팔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첫딸은 두살이었고, 둘째 딸은 출산을 앞둔 상태였어요. 사업 실패 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는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습니다.”
 

고향 울진으로 내려온 김씨는 둘째딸을 출산하자말자 미처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두 번째 미용실인 ‘수도 미용실’을 개업했다.
 “남편과 헤어져 혼자서 두 딸을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에다 무엇보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절박했기에 출산 후에 몸조리 한다는 건 사치스런 일일 수밖에 없었지요. 울진 시장 안에 ‘수도 미용실’을 개업했어요. 그전에 누가 ‘수도 미용실’을 영업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는데, 제가 그 가게를 상호까지 그대로 인수하여 개업하게 된 것이지요.”
 

 

두 딸을 키우며 3년 정도 ‘수도 미용실’을 하다가 김씨는 자리를 옮겨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미용실 상호인 ‘오고파 미용실’을 개업했다.
 “3년쯤 장사를 했는데, 집주인이 집을 판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울진 시장안의 축협 옆쪽과 앞쪽을 두어 번 옮겨 다니면서 미장원을 계속했어요. ‘오고파 미용실’이라는 상호로 30년 이상 장사를 한 거네요. 그때만 하더라도 울진 읍내에 미용실이 몇 군데 없어서 무지 바빴는데 보조 미용사를 한두 명씩 두고 장사를 했어요.”
 

김복순씨는 울진 시장 안 현재 미용실 자리 인근에서 두어 번 가게를 옮겨가며 지금까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사이 큰딸 정효진(35세. 제주도)과 작은 딸 정효미(33세. 울진읍)는 예쁘고 착하게 성장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려 잘살고 있고, ‘형제 미용실’을 개업할 당시 김씨의 보조로 일하던 여동생도 결혼과 동시에 미용 일을 관두었고, 두 남동생도 결혼하여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월변 포교당 김일 스님... 그리고 남동생
 

한때 김복순씨는 사는 일이 너무 고달파서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고 술회한다.
 “작은 남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 사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어느날 거울 앞에서 가위로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월변 포교당 동림사에 기거하시던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법명이 김일 이었어요. 저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제 얘기를 말없이 한참 듣더니 처음에는 부모 동의서를 끊어 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추천서를 한 장 써 놓을 테니 내일 이른 새벽에 다시 와서 추천서를 가지고 어느 절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그 후에도 서너 시간을 한없이 울다가 그렇게 월변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김씨는 누나의 머리 깎은 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작은 남동생을 보고서는 차마 절로 가지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남동생을 보고 나니 도저히 절로 못 가겠더군요. 내가 안 벌면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지도 못 할 텐데...... 또 다음날부터 미용실 일을 열심히 했지요. 그렇게 내 손으로 벌어 두 남동생을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했어요.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맏딸이자 두 남동생의 누나였으니까요.”
 

당시 피치 못하게 스님을 속였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불교 신자도 아닌 김씨는 지금까지도 가게를 찾아오는 스님들이 있으면 꼭 돈 천원이라도 시주한다고 전한다.

 

불쌍하신 어머니... 물곰국과 옥수수
 

 

 

김씨는 6년 전 82세로 돌아가신 어머니 안남연씨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먼저 앞을 가린다고 말한다.
김씨의 인생에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무엇보다 각별하다.
 “어머니는 쉰아홉에 후두암을 수술하셨어요. 서울 원자력병원의 심윤상이라는 박사님께서 수술하셨는데, 결과가 좋아서 수술 후에도 스무해 정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지금도 그 박사님이 너무 고맙습니다. 수년 전부터 TV 프로 가요무대에 꼭 감사의 편지를 한번 쓴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내일 하면서 시간만 흘러 버렸네요.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고 난 다음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시면서 저를 졸업 시켜 주셨는데 참 어렵던 시절이었어요.”
 

김씨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불쌍해서 그저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후두암을 수술한 후에는 그 흔한 관광도 한번 못가고, 노래도 한번 못 부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김씨는 물곰국과 옥수수를 제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생전에 물곰국과 옥수수를 좋아하시던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어 오기에......
 

김씨의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앞선 38년 전에 작고했다.
 “아버지는 어디 특별히 몸이 불편한곳도 없었는데 환갑상 받으시고 3일후에 돌아가셨어요. 환갑잔치는 부산에서 전문 장구재비들까지 불러서 정말 거창하게 차려 드렸었지요.” 근방에서 이름난 효녀이기도 한 김씨는 그런 점을 인정받아 1991년 어버이날을 맞아 울진군수로부터 경로효친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탄화덕과 고데기... 불파마... 토니파마
 

김복순씨는 40여 년 전 미용학원을 졸업하고 보조시절을 거쳐, 어린 나이부터 미용실을 직접 운영했기에 울진 지역 미용업계의 짧지 않은 역사와 함께 예전에 미용실에서 사용하던 미용기술이며 기구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 형제미용실을 개업했을 당시에는 연탄화덕과 신문지를 이용해서 머리를 말렸습니다. 연탄화덕의 후끈거리는 열기를 둥글게 말은 신문지를 이용해 머리카락으로 전달해서 그 열기로 머리를 말리고는 했는데 효과는 컸어요. 그런데 그때는 신문지도 귀할 때라서 무척 아껴 써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5년 후 쯤에 머리에 통째로 뒤집어쓰는 드라이기가 등장했습니다.”
 

김씨는 머리에 뒤집어쓰는 대형 드라이기는 스위치를 이용해 찬바람과 더운 바람을 각각 조절할 수 있었는데 당시 미용업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준다.
 

현재 미용실이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편리한 전기 드라이기는 그 후에도 몇년이나 지나서 시중에 선을 보이게 된다.
1906년 독일의 미용사 ‘카를 네르스’가 처음으로 고안했던 파마의 역사는 100여년을 자랑하는데 김씨가 미용실을 개업하고 얼마 뒤에 도입된 파마가 ‘토니파마’였다.
 ‘토니파마’는 미국 시카고의 ‘네아스 헐리스’라는 미용재료상이 개발했다고 알려진다.
 

그 전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파마를 하기 위해서는 전선이 여러 가닥 들어간 큰 통을 쓰고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면서 고문 아닌 고문을 견뎌야 하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었다.
 ‘토니파마’는 이런 불편함을 상당히 줄이고 웨이브액과 중화제, 권모기, 고무밴드 등을 이용하여 좀 더 간편하고 덜 고생스럽게 파마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미용업계의 일대 혁신 발명품으로 기록될 정도이다.
 

오늘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이 당시의 발명품인 ‘토니파마’를 이용하여 파마를 하고 있다.
 “그때는 고데기도 전기가 아니라 연탄을 이용해서 달궜어요. 연탄구멍에 고데기를 꽂아두고 달군 거지요. 너무 벌겋게 달아서 뜨거우면 옆쪽에 미리 준비해둔 물수건을 이용해서 식혀서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움의 정도를 파악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더니 익숙해져서 숙달되니까 코 가까이에만 갖다 대더라도 온도를 거의 정확히 알아맞힐 정도가 되더군요. 또 너무 뜨겁다 싶으면 고데기 손잡이 한쪽을 잡고서 휘휘 돌려서 식히고는 했는데 손님들이 신기해하며 재미있어 했지요.”
 

훨씬 간편하고 편리해진 ‘토니파마’이전에는 숯을 이용한 ‘불파마’가 있었다고 김씨는 전한다.
 “그때는 불붙은 숯을 이용해서 불파마를 했습니다. 몽당연필처럼 생긴 숯에 불을 붙여서 전용 집게에 꽂아서 파마를 했어요. 집게 하나에 몽당 숯이 4개씩 들어갔는데, 파마 약을 바르고 난 다음에 숯이 든 집게를 머리 가득 꽂아두고 파마를 했지요. 손님들이 이쪽이 뜨겁다, 저쪽이 뜨겁다 소리치면 얼른 가서 집게를 떼어내고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난 다음에 다시 꽂아두고는 했어요. 불붙은 숯으로 머리카락을 굽는 것이었지요. 불파마를 할 때는 미용사 한명이 손님에게 전적으로 매달려 있어야 했습니다. 요즘처럼 미용사 한명이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해서 파마를 해줄 수가 없었어요. 불파마는 자칫 방심하면 머리를 태워먹기도 했기 때문에 손님이나 주인이나 모두 다 무척 불편했었어요.”
 

김씨가 예전에 손님들에게 해주던 ‘불파마’는 지금의 열파마인 ‘셋팅파마’나 ‘디지털 파마’, ‘매직 스트레이트’의 원조 격인 셈이다.  

 

“여자가 버는 돈은 힘이 없더라......”


김복순씨가 40년 이상 운영하는 ‘오고파 미용실’에는 40년, 30년, 20년, 10년 이상 되는 단골들이 지금도 잊지 않고 꾸준하게 찾아온다.
 “제 미용실에는 오래된 단골손님들이 참 많습니다. 처음 개업했을 때나 수십 년 동안 영업해 오면서 가게를 찾아주시던 손님들이 지금은 일흔, 여든이 됐는데도 다들 잊지 않고 반갑게 찾아오십니다. 예전의 젊은 이삼십대 새댁들도 지금은 다들 환갑이 가깝거나 이미 지나버린 나이들이 되셨지요. 개업하고 수년 동안 아가씨였던 제가 운영하던 미용실을 찾던 엄마들이 지금은 나와 같이 늙어가는 셈입니다.”
 

40년 이상 미용사로 지내온 김복순씨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그간의 고단하고 힘에 겨웠던 이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첫째마디들마다 기형에 가까울 정도로 굳은살이 박여 퉁퉁 부어 보인다.
그런 손가락이 부끄러워 김씨는 친구들 계모임 등에 참석할 때면 먼저 소형 밴드 바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웃으며 말한다.
 

“생각해 보니 참 오랫동안 미용 일을 했다 싶어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미용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가위질을 해왔고, 파마하면서 머리카락을 말 때 손가락 끝에 많은 힘을 들여야 하니까 손가락 끝마디가 이렇게 변형된 것입니다. 파마약이 독한 것도 한몫 할 테고요. 어찌 보면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훈장 같은 흔적일수도 있지만, 간혹 이해를 못하고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예 안보이려고 하는 거지요. 오랫동안 미용사 일을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손가락 끝마디가 이렇게 변형되고는 하더군요.”
 

천상 미용장이로 평생을 살아온 김복순씨는 미용실을 하면서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놀러 한번 제대로 못 갔지만 여자로서는 썩 괜찮은 직업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작은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취직했다가 후에 미용기술을 배워서 저와 함께 미용일을 했어요. 결혼을 하면서 그만 두었지요.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치고는 수입도 안정적이고, 자기 시간을 규칙적으로 활용할 자신만 있으면 미용기술 배우는 건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저야 가난을 경험했던 예전 세대다보니 그렇게 못했지만 요즘 젊은 미용사들은 한달에 한두 번씩 규칙적으로 휴일을 정해서 놀러도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고 그러잖아요.”
 

오랫동안 미용사로 지내면서 돈은 많이 벌었느냐는 질문에 김복순씨는 “여자 돈은 힘이 없더라”며 웃는다.
 “여자가 버는 돈은 힘이 없어요. 그래도 만족합니다. 이 두 손을 움직여서 딸들 키워 시집보내고, 동생들 공부 시키고, 작은 아파트도 마련했으니 그걸로 된 거지요......”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당대의 문화나 가치관이 변해가듯 아름다움의 기준 또한 끝없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주변의 환경과 현실적인 시각을 떠나 타인들에게 또는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아름다움을 꿈꾸는 인간 본연의 욕망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 없이 변하지 않고 있다.   
 

시대를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트렌드는 나 자신은 물론 주변인들까지 변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혹자들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훨씬 진실 되고 소중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적인 아름다움에 더해 외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게 된다면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외적인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첫인상을 결정짓는데 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세상이 다변화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급속도로 확장되어 가는 근래 들어 더욱 이런 관점은 쉽게 부인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헤어스타일은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최대의 요인이자 관심사이다.
 

이미 수천년 전부터 이집트에서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에서 파마를 했었다는 기록이 있고, 본격적인 파마기술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중세시대에는 귀족들이 요란하게 웨이브를 준 가발을 써서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일평생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헤어스타일을 매만지기에 바빠서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았던 김복순씨의 일그러진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두 손은 아름답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이 아름답다. 울진 시장 안 ‘오고파 미용실’의 김복순씨를 만나는 것은 이 시대 진정한 아름다움의 한 기준을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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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파 미용실 김복순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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