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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한복, 장금연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6.13 16:19
  • 글자크기설정

예로부터 한국인들이 가장 오랫동안 입어온 전통 복식인 한복은 한국인의 얼굴이며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의 복식이다.
 

한국인의 사상과 미의식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한복은 세계 패션무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아왔고, 얼마 전에는 미국의 유명배우인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국인 부인‘앨리스 킴’과 함께 방한했을 당시에 한복을 격식에 맞추어 차려입고 피로연을 연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한복의 유형은 남성과 여성 모두 저고리에 해당하는 긴 상의와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남성은 저고리와 바지를, 여성은 저고리와 치마에다 두루마기형 포를 걸치고 나타나며, 상의와 하의가 각각 다른 색깔로 상의의 깃, 앞단, 말단에 의복보다 짙은 넓은 선 장식을 대주고 허리띠까지 선장식과 같은 짙은 색을 사용하여 장식했다.
 

전통복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재 우리들이 입는 한복의 모양이 완전히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단정한다.
전문가들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이민족 등의 영향을 받아서 다양한 형태로 유형변화를 보이던 한복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가시화되던 조선시대의 실학사상으로 인해 복식 또한 한국화 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복식이 일정한 틀로 양식화된 조선시대에는 유사한 의복위에 사용된 문양이나 색깔, 장신구 등으로 신분 차이를 두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의 한복은 색상과 형태 등에서 점점 다양화되고, 패션화되고, 고급화 되어 가면서 다시금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무지한 이웃으로 인해 여덟살 때 두 다리가 마비돼
씨실과 날실로 엮어진 피륙에 한올한올 정성을 쏟아야 완성되는 한복을 30년 가까이 짓고 있는 장금연(53세)씨의 고향은 울진읍 고성리 ‘귀골’이다.
 

장두천(94)씨와 주석이(84)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장씨는 여덟살 때 두발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위로 언니 한분이 계시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어요. 어릴 때 시골서는 소에게 풀을 뜯기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소를 몰고 다녔잖아요? 풀이 파릇파릇할 때니까 이맘때쯤 되었을 거예요. 조금 큰 애들도 섞이고 해서 10여명이서 소를 몰고 가 동네 인근에서 소를 먹이고 있었는데, 소 가운데 한두 마리가 어떤 사람의 논에 들어가서 논을 망쳐놨어요. 곧 논 주인이 쫓아 나오고 어린 우리들은 단체로 논 주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얻어맞았습니다. 지금 기억에도 그 논주인은 참 인정사정이 없었던 사람 같아요. 함께 소 먹이러 갔던 애들은 팔다리, 등을 두들겨 맞았는데 저는 어쩌다 등을 얻어맞았습니다.”

봄에 소를 먹이러 갔다가 소가 논을 밟아놨다고 논 주인에게 등을 얻어맞은 장금연씨는 그때 척추를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양 발이 마비가 되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해 보상금, 그런 건 없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다들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였으니까요. 또 봄에 두들겨 맞았는데 가을부터 마비가 오기 시작했으니까 그걸 증명할 마땅한 방법도 찾기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저를 때렸던 그 아저씨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운명으로 돌리게 됐습니다. 여러 명이서 함께 두들겨 맞았는데 나만 불구가 되었겠는가 싶더군요.”
 

장금연씨는 그때만 하더라도 어린 나이였기에 평생 불구인 채로 살아야 한다는데 대한 두려움이나 힘든 삶이 쉽게 연상되지 않았었다고 술회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 독학으로 한글 깨쳐
한두 살씩 나이가 더 들어가고 사춘기가 되면서 장씨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점점 힘에 겨운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스물일곱살에 한복 기술을 배우기 전까지는 집에서 가사를 조금씩 도우면서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한창 민감한 사춘기를 지나면서 절룩거려야 하는 내 모습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스무살이 넘어서면서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마음 한구석이 아프고 힘들고 그랬지요. 명절이 되거나 해서 집에 친척들이라도 모이는 날이면 두 다리를 절어야 하는 내 모습이 불편하고, 다들 나만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가끔은 한평생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삶을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민도 하고 그랬어요.”
 

장씨는 어릴 때 장애를 입은 탓으로 정규교육을 받아보지도, 또 받아볼 기회도 갖지 못했다.
“학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누군가 일일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가 수업이 끝나면 다시 데리고 오고 해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하겠어요? 부모님들은 당장 농사지어 먹고 살기도 바빴는데... 그래도 당시에 사촌오빠가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사촌오빠 덕분에 한글을 완전히 깨우칠 수가 있었어요. 그나마 큰 다행이었지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하루 종일 집에서만 지내야 하는 장씨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듣고, 여러 시청자들의 이런저런 사연도 듣고, 바깥세상 소식도 모두 다 라디오를 통해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라디오가 없었더라면 견디기가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라디오는 저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벗이었고, 동료이기도 했어요. 라디오에서 공감할 수 있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들으면 편지를 보냈고, 펜팔을 통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고는 했어요.”
 

그 당시 가사를 도울 때나 무료할 때 항상 라디오를 틀어두던 습관은 아직까지 남아서 장씨는 요즘도 작업할 때 자주 라디오를 켜둔다.  

 

펜팔로 사귄 언니 도움으로 맺은 한복과의 인연
장씨는 라디오를 통한 펜팔로 알게 된 어느 언니의 소개에 힘입어 스물일곱살에 한복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인근 봉화군에 사는 홍수란(56세)이라는 언니와 펜팔로 많은 사연을 주고받고 했지요. 제가 장애인임을 아는 언니가 강원도 영월군으로 한복 기술을 배우러 가는데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일곱이었어요. 그 언니는 전에 학원에서 한복기술을 배웠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드니까 다시 기술을 배우러 가는 길에 저와 함께 갈 생각을 했던 거지요.”
 

펜팔로 알게 된 언니와 함께 강원도 영월로 올라간 장씨는‘백로한복’이라는 곳에서 3개월 동안 이를 악물고 한복기술을 힘들여 익혔다고 전해준다.
 “언니를 따라 영월의 ‘백로한복’ 집에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처음 기술을 가르쳐준 그분은 지금 80세가 넘어서 일은 안하시고 어디 아들집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몸이 불편하기에 다른 곳에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지만 ‘백로한복’에서는 먹고 자는 것을 한꺼번에 걱정 없이 해결하면서 기술도 배울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었지요. ‘백로한복’ 주인 또한 마음 씀씀이가 자상하고 너무 고맙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장씨는 자신에게 한복기술을 배우게 해준 봉화의 홍수란이라는 언니와는 지금까지도 전화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는다고 전해준다.
“그 언니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힘들고 어려워서 죽음까지도 생각하던 저에게는 은인인 셈이지요. 물론 지금도 자주 연락합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한복 기술을 배우게 해준 그 언니는 봉화에서 한복 일을 하다가 업종을 변경해서 지금은 옷 수선가게를 하고 있으니 세상일이라는 게 참 엉뚱하고 재미있지요.”

 

영월 ‘백로한복’… 서울 ‘시대복장학원’에서 기술 익혀

영월 ‘백로한복’에서 3개월 동안 한복 기술을 익히고 울진으로 내려온 장씨는 당시 울진시장 안에 위치해있던 새마을예식장 맞은편에 가게를 얻어‘장미한복’이라는 상호로 개업을 해서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용감했던 거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 손으로 한복을 온전히 완성해 본 것은‘백로한복’에서 한벌, 집에 내려와서 부모님이 입으실 한복 두 벌 등 전부 합해도 3벌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작정 개업을 한 것입니다.”
 

처음 개업을 할 때만 하더라도 경력이 짧고 자신이 없다보니 엄청 떨렸었다고 장씨는 기억한다.
“개업하고 얼마 지나서부터 손님들의 주문이 하나둘씩 들어오는데 떨리기도 하고 망치면 원단은 어떡하나 겁도 나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합니다. ‘장미한복’을 한 3년 정도 운영했어요. 그때 한복 한벌을 만들면 원단 값을 빼고 공전(품삯)으로 2만5천원 정도 받았어요.”
 

3년 동안 장미한복집을 운영하던 장씨는 어릴 때 불구가 된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2년 정도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나이 서른 한둘이 될 때쯤에 장미한복집을 관두고 다리를 수술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뼈도 이미 굳어 있었기 때문에 수술결과가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어요. 그나마 수술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아졌지만 힘을 떠받쳐 주는 데는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특히 수술을 하고 난 다음에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는 것이 중요했는데, 내내 쉬고 있을 수만은 없고 또 다시 한복을 짓느라고 제때 운동도 제대로 못했으니 상태가 호전되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요.”
 

2년 정도 쉬면서 다리를 수술한 후에 장씨는 서울에 위치해 있던 ‘시대복장학원’에서 1개월 동안 한복 기술을 추가로 배웠다.
“당시만 하더라도 기술이 뛰어난 한복장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견본용 한복 두세 가지 중 하나를 손님에게 입혀보고는 대충 눈대중으로 손님 옷을 짓고는 했습니다. 줄자로 치수를 재지 않는데도 다 만들어 놓으면 기가 막히게 손님 몸에 안성맞춤이고는 했어요. 그런 한복장이들이 정말 기술자고 실력자들이었어요. 영월에서 처음 만났던 선생님도 기술이 뛰어났어요. 손님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도 대충 덩치가 이만저만하다고 알려주면 말로만 전해 듣고 옷을 짓는데 실수가 없었지요. 영월의 ‘백로한복’에서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기술을 배웠습니다. 줄자로 손님들의 치수를 재고 난 다음에 계산해서 옷 짓는 기술을 배우지 않은 거지요.”
 

그런데 막상 울진에 내려와서 그런 방법으로 한복을 만드니까 대부분의 손님들이 “어떻게 줄자로 치수도 재지 않고 한복을 만드냐”면서 의아해 하기도 하고, 기술도 잘 믿어주지 않더라고 장씨는 전한다.
“줄자를 이용해서 신체 치수를 잰 다음 한복을 만드는 것이 손님들의 의구심을 덜어주는 것이다 싶어 서울로 가서 ‘시대복장학원’에 입학을 했어요. 3개월 정규 과정을 1개월 만에 속성으로 졸업했습니다. 한복 짓는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고, 줄자로 정확히 치수를 내는 법만 터득하면 됐으니까요.”
 

간절했던 삶의 의미… 한복 바느질로 되찾아 

 

서울에서 1개월간의 한복 제작 속성과정을 다시 한번 더 거친 장금연씨는 울진으로 내려와서 울진읍내에 방 한칸을 얻어 본격적으로 한복 짓는 일을 하게 된다.
“서울 학원을 다니면서 치수 계산하는 기술을 한달 배우고 내려온 다음 작은방을 하나 얻어 주문 들어온 한복 지으면서 생활한지가 지금까지 죽 이어졌네요. 대부분의 일감이 시장안의 한복점으로 들어오고, 저는 또 그곳에서 일감을 연결시켜줘서 하니까 일단 집은 시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선은 제가 덜 불편하니까요.”
 

스무살 나이가 넘어서면서부터 무엇보다 간절하게 자기 자신의 삶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던 장씨 앞에 나타난 한복과의 인연은 어느덧 30년 가까이 되었다.
펜팔로 알게 된 언니의 소개로 접하게 된 한복과의 인연에 앞서 장씨는 장애인 기술센터에 입학하여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적당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스무살 시절에 집에서 가사나 도우면서 평생을 살수는 없겠다 싶어 장애인 기술센터에 가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조건이 까다로워서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부모님이 농사를 조금 짓고 있으니 당연히 생활보호대상자에서는 제외됐지요. 그런데 해당 읍·면장의 추천서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하기에 당시 울진읍장님께 전후 사정을 장황하게 편지로 써서 추천을 좀 해달라고 했는데 읍장의 답장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참 야속했지요. 보잘것없는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밑에서 평생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 당시에 공무원이 직접 집이라도 방문해서 딱한 사정을 살펴봤다면 추천서 정도는 쉽게 써 주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장애에 대한 우울함도, 당시 담당공무원에 대한 야속함도 한복 기술을 배우고 부터는 점점 사그라지더라고 장씨는 전한다.
“한복 바느질 기술을 배우고부터는 모든 게 괜찮아졌어요. 제가 처한 입장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누구에게 등 떠밀려 강제로 배운 기술도 아니고 제가 간절해서 배운 일이니까요. 일을 배우면서 또 일하면서 여태까지 별다르게 힘든 점은 없었어요. 또한 다리가 불편해도 집안에서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고, 밖에 나갈 때면 보조기구에 의지할 수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기술장이들이 그러하듯이 장씨 또한 기술을 배우고 일을 하면서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일종의 슬럼프 기간이 잠깐 있었다.
그래도 장씨는 생각보다는 쉽게 넘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복 일을 시작하고 2~3년이 지날 때쯤에는 정말 힘도 들고 이 일도 하기가 싫어지더군요. 일에 고비가 온 거지요. 아마 몸이 건강했다면 이 일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장애인으로 이 일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생각에 쉽게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요.”

 


못 다한 학업의 아쉬움만… 결혼은 생각 없어

장금연씨의 나이 쉰셋. 아직까지 장씨는 미혼이다.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장씨는 먼저 웃고 만다.
“장애를 깨달을 나이가 되면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은 버렸어요. 글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었다면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자립이 가능해지면서부터는 더욱 결혼할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장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때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고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지금도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요. 사촌오빠에게 한글을 배우고 그 후에 혼자 이것저것 독학한 것이 제 공부의 전부니까요. 그때 누군가 공부에 대한 기회를 만들어줘서 검정고시라도 볼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항상 그런 열망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그것조차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십대였을 때 주위에 공부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창 공부할 시기인 사춘기에 방황만 했던 그런 시간들이 돌이켜보면 아쉽기만 하다는 장씨.
장씨는 현재 한복 한 벌을 만들면 여성의 경우 치마와 저고리 수공비로 6만원, 남성 한복은 바지와 저고리, 조끼, 마고자를 제작하는 공전으로 8만원 정도를 받는다.

여성들의 치마와 저고리 한 벌을 만드는 데는 보통 하루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 고객이 한복을 맞춰 입기 위해 시중의 혼수방 등을 찾아 주문을 하면 혼수방은 혼수한복 재질인 천(원단)에서 이윤을 남기고, 장씨 같은 기술자의 경우 공전에서 이윤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장씨의 경우 현재 두 대의 재봉틀로 작업을 하는데, 한 대는 한복의 끝단을 처리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또 한 대로는 일반 재봉질을 한다고 귀띔한다.
또 대부분의 한복 제작 바느질은 재봉틀로 이루어지지만 끝마무리 부분은 꼭 직접 손이 가야 한다고 전해준다. “아무래도 남자 한복이 가짓수도 많고 손도 많이 가는 만큼 공전을 더 받아요. 남자 한복은 제대로 갖추려면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여자 한복은 아래쪽은 고쟁이, 속치마, 겉치마를 갖추면 되고, 위쪽은 여름에는 나시 등을 받쳐 입고 저고리를 걸치고, 겨울에는 속저고리인 속적삼과 저고리를 갖춰 입지요. 그러나 요즘에는 고쟁이와 속치마는 기성복이 워낙 잘 나오니까 기성복으로 그냥 사서 입는 경우가 많아요. 한복 천은 화학섬유나 본견(本絹-명주실로 짠 비단)을 사용하는데 본견은 천연섬유다 보니까 역시 가격대가 만만하지 않지요.”

 

성심성의껏 한복 짓는 일을 즐기면서 살아갈 터


예전에는 일반 바느질을 사용해서 제작하던 한복도 요즘은 대부분 ‘깨끼 바느질’로 완성한다.
‘깨끼 바느질’은 세 번에 걸쳐서 박음질해야 하는 바느질 기법으로, 소재를 겹쳐 박음으로써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효과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또 ‘깨끼 바느질’과 함께 대표적인 전통 바느질 기법인 ‘누빔 기법’은 평면적인 옷감에 부피감과 입체감을 주고 무늬를 새겨 넣는 등으로 한껏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때 주로 사용된다.
“이전에는 한복을 지을 때도 일반 박음질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전부 ‘깨끼 바느질’을 합니다. ‘깨끼 바느질’은 천에 1cm 정도의 시접(천의 솔기 가운데 접혀서 속으로 들어간 부분)을 준 다음 밖으로 옷감을 접어 2~3mm 되는 곳에 바느질하고 나머지 시접을 바짝 잘라냅니다. 그 다음에 잘라낸 시접을 안쪽으로 접어 준 다음 접은 부분을 뒤로 하고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박아주는 기법입니다. 시접 박고, 잘라내고, 접고, 다시 박아주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시중에서 판매되는 모든 천을 ‘깨끼 바느질’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끼 바느질’할 수 있는 천은 따로 정해져 있어요. 대부분 두꺼운 천은‘깨끼 바느질’이 안 되고 우선 얇아야 합니다. 한복의 우아함과 절제된 미를 최대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깨끼 바느질’인 셈이지요. 다만 섬세한‘깨끼 바느질’이 사용된 한복은 바느질이 상할 수 있기 때문에 드라이 클리닝이나 세탁을 할 때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복식 전문가들은 ‘깨끼 바느질’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뛰어난 기술이라고 의견을 모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유명한 한국디자이너들이 외국에서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또한 한국의 전통 바느질인‘깨끼 바느질’의 힘을 빌린 것이 주효했다고 알려질 정도이다.
특히 한복 치마저고리의 경우‘깨끼 바느질’의 솔기가 얼마나 가늘고 일정하게 바느질 되어 있는가가 마지막 품질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천의 종류가 그 다음이다.
 

“한복도 원단의 소재가 다양합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사철깨끼 원단으로 생명주(生明紬-생사로 짠 명주)를 비롯하여 세모시(올이 가늘고 고운 모시)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생고사(生庫紗-생명주 실로 짠 비단), 갑사(甲紗-품질이 상급인 비단)류 등의 소재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는 복고풍의 영향을 받아서 각 계절에 맞는 소재를 주로 사용합니다. 겨울철에는 모본단(模本緞)과 칠색단(중국 비단의 한 종류), 단도양단(겹으로 두껍게 짠 비단의 한 종류)같은 양단(洋緞) 소재를 사용하고,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는 명주와 수직 실크 소재를, 나머지 계절에는 갑사와 속고사 등의 천을 사용하지요. 그러나 원단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좋은 천이라고 해도 바느질이 쫓아가지 못하면 결국 한복 고유의 맵시를 살려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장씨는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장애인 단체 등에 단 한군데도 가입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예전보다는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일거리가 꾸준히 들어오고, 일단은 먹고 사는 일에 바빴어요. 또 성격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도 싫어하고요. 앞으로도 한눈팔지 않고 성심성의껏 열심히 한복을 짓고 또 이 일을 즐기면서 그렇게 변함없이 살아갈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한복은 결혼식 등의 잔칫날에만 맞춰 입는 예절복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명절에조차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만나보기 힘들게 된 이 시대에, 한복은 일상복이라기보다는 전통과 관련된 사람들이거나 사회 운동권 인사, 개성 강한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 정도로 전락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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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서는 한복의 일상화를 부르짖으며 전통 한복 대신에 생활 한복이라는 사생아적(?) 구조의 간편해진 한복을 시장에 출시하고 있지만, 생활 한복 또한 입으면 ‘튄다’는 느낌과 함께 운동권 출신들이나 입는 옷이라는 부정적인 편견으로 인해 선뜻 입고 나서기가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와 정서는 물론 사시사철이 뚜렷한 기후의 특성에 걸맞게 발전되어 오면서 정착된 고유의 옷이다.
복식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오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기본 복식 구조가 세부적인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유한 구조인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저고리, 치마, 포(袍-두루마기)의 상하 분리형이자, 머리와 몸에 입고 발에 신는 삼분 구조형으로 이뤄진 우리의 한복.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는 오방색으로 이루어져 선과 색이 아름다우며, 의복 구조가 우리나라의 기후에 잘 적용하도록 매치되어 있는 한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옷이다.
 

전통적인 ‘누빔 기법’과 정성스럽게 세 번 박음질해야 하는 ‘깨끼 바느질’을 사용하여 얇은 소재를 튼튼하게 박아내어 만들어진 한복은 입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을 더욱 더 고급스럽고 품위 있고 단아하게 만들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대표하는 한복도 발 빠르게 진화하는 세계의 유행 패션을 미처 쫓아가지 못해 약간은 뒤처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평소 한복을 즐겨 입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해외영화제등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상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을 보고 가슴 한쪽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 적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복의 인기 재도약을 위해 ‘한복장이’들 또한 전통 한복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작업과 함께, 한국의 전통 옷을 현대적으로 개선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될 것이다.
 

더불어서 저고리, 치마, 조끼, 두루마기, 마고자를 만들어가는 우리 곁의‘한복장이’장금연씨의 한땀 한땀 전통을 짓는 손길 또한 쉼 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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