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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 의상실' 홍정자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8.01 16:43
  • 글자크기설정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노동과 생활풍속 등을 통하여 우리들만의 멋과 아름다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토종문화와 기층문화, 그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다. 고스란히 예전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토종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사람들.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 또는 직업적 방편으로 먹고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들이 정작 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본다면‘서민속의 서민’으로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들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현장을 잠시 기웃거려 본다.

 

오드리햅번(Audrey Hepburn)의‘사브리나(Sabrina, 1954)’나 기네스 펠트로(Gwyneth Paltrow)의‘엠마(Emma, 1996)’등 로맨스 형식의 드라마 영화 속에서는 팬츠와 롱 스커트 등의 패션이, 또는 원피스 한장이 얼마나 아름답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구현되어 조명될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여성들이 원초적으로 꿈꿀 수 있는 몽환적인 판타지를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대로 재현해볼 수 있는 곳, 블라우스와 원피스 한 가지도 수백 가지 종류의 원단과 무늬와 디테일(detail)로 만들어지는 곳, 그곳이 맞춤옷을 제작하는 의상실이다.
패션에서의 칼라(collar), 포켓(pocket), 커프스(cuffs), 네크라인(neckline), 슬리브(sleeve), 스커트(skirt), 웨이스트라인(waistline), 벨트(belt) 등 굵직한 선을 가진 디테일과, 플라운스(flounce), 프릴(frill), 파이핑(piping), 스티칭(stitching), 핀턱(pin-tuck), 스모킹(smocking), 주름잡기(pleating), 퀼팅(quilting), 자수(embroidery), 러플(ruffle), 셔링(shirring) 등 보다 잔잔한 선을 가진 디테일은 때로는 일상에서의 영감으로, 또 꿈으로 다가든다.   
흔히 양장점으로 불리기도 하는 의상실은 갖가지 종류의 메이커를 무기로 앞세운 채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을 구사하는 기성복 매장처럼 단순하게 규격화된 디자인의 옷을 팔고 마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나만의 옷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1년 전이 다르고 2년 전은 더욱 다른 이 시대, 언제나 그렇듯이 항상 옛것은 새것에 쉽게 밀려나고, 울진 지역의 멋쟁이들을 위한 패션의 중심에 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의상실도 이제는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말았다.
 ‘레디메이드’의 기성복 시대와 브랜드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면서, 어느새 사람들은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느림’에 대한 여유를 잃어버렸다.
의상실에서 옷을 맞추어 입으려면 먼저 가게를 찾아가서 치수를 재고, 기다렸다가 다시 찾아가서 가봉을 하고, 다시 얼마간을 또 기다렸다가 가게를 찾아가서 옷을 찾아와야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시대의 조급증에 길들여진 기성복 세대는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인내할만한 여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기성복 매장 바로 앞에 차를 주차하고 즉석에서 완제품을 확인한 다음, 곧장 옷을 구매하는 신속한 풍조에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 맞춤옷의 생존전략을 찾기는 그다지 쉽지 않을 것으로만 보인다.    
한때 골목마다 위치하여 성업했던 의상실과 양복점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시대에 따른 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문화양식을 고집하던 빼어난 멋쟁이들이 더 이상 이 시대에서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여성 의류의 양극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기성복과 명품 브랜드 옷의 중간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맞춤옷은 언제부터인가 절반 이상의 매출 전략을 학생들의 교복에서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맞춤옷의‘손맛’을 잊지 못하는 50대 이상의 멋쟁이 여성들이 주 고객층을 이루고 있다.
양복점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수선을 겸할 수 있는 세탁소로 전업해갔듯이, 여성 운영자가 대다수인 의상실 업주들은 그동안 수선업종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은 무시하고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여성 양장을 고집하는‘희 의상실’은 울진읍내에 자리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흔들림 없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이어가는‘희 의상실’운영자인 홍정자씨의 맵찬 저력은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맞춤옷을 원하는 단골 고객들과 장인(匠人)으로서의 자존심, 바로 그것이다.

 

9남매의 맏딸로 태어나…울진중학교 8회로 졸업

스물 한살에 의상실을 개업하고 40여년 변함없이 고객들의 맞춤옷을 제작하고 있는 홍정자(66세)씨는 울진읍 명도리 도청골(道淸洞)이 고향이다.
경찰관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홍종만씨와 어머니 남영주씨 사이에서 태어난 홍씨는 딸 일곱에 아들 둘인 2남7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 아들을 얻으려고 그러셨는지 위로 딸 입곱을 두었어요. 끝으로 아들 두명을 두었고요. 저는 2남7녀의 맏딸로 태어났어요. 평생 경찰관으로 재직하시던 아버지는 9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보다 앞서 15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홍정자씨는 울진중학교 8회 졸업생이다. 초등학교는 경찰관인 아버지를 따라서 무려 6번이나 자리를 옮겨 전학을 다닌 끝에 울진초등학교 41회로 졸업했다.
 “울진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쳐 놓고서도 진학할 수 없었어요. 당시 할아버님이 아주 엄하셨는데 딸 많은 집안에서 여자를 어디 고등학교까지 보내느냐면서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결국 엄격한 할아버지 덕분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그때는 다들 그렇게 생각할 때였지요.”

 

 강릉‘뉴스타일’양재학원…‘함흥라사’… 삼척 양재학원 강사로

열일곱살에 중학교를 졸업한 홍씨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강릉시로 옮겨가서 양재학원에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찰관인 아버지가 강릉경찰서로 옮겨 가셨어요. 당연히 저도 따라갔지요. 강릉에 올라갔을 때 처음에는 아버지가 우체국의 전화 교환수 일을 구해 주셨는데 하루 만에 관두었어요. 단 하루만 근무했을 뿐인데도 교환수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그럴 때에 근처에‘뉴 스타일’이라는 간판을 단 양재학원이 있었는데, 아버지께 양재학원을 다닐 수 있게 1년 동안만 경제적으로 도와달라고 매달렸지요.”
196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숱한 양재학원들이‘뉴 스타일’또는‘노라노’라는 상호를 사용했고, 그런 류의 이름은 당시만 하더라도 보다 세련되고 유식하고 멋스럽게 느껴졌다.

특히‘노라노’라는 상호는 그 당시에 유명세를 타던 국내 여류 디자이너의 이름을 무단 사용한 것으로써, 이후에 시대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기까지 했다.
 “강릉시에 있던‘뉴 스타일’양재학원은 본과 4개월, 보통과 3개월, 미싱과 4개월까지 합쳐서 총 11개월간의 코스를 거쳐야 했는데, 저는 본과 기간 4개월만 수업료를 내고 나머지 기간은 무상으로 다닐 수 있었어요. 그때 함께 입학한 양재학원 동료들보다 기술을 익혀가는 속도가 빨라서 금세 선생님들 눈에 띈 거지요.”
양재 기술을 배워가는 힘든 과정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던 홍정자씨는 4개월이 지난 뒤부터 학원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보조교사로 활동했고, 나머지 7개월의 잔여 과정은 수업료 없이 다양한 양재 기술을 완전히 익히고‘뉴 스타일’양재학원을 졸업한다.
“처음 양재학원에 입학할 때 아버지께 1년 동안의 수업료를 도와달라고 부탁드렸는데, 결국 4개월을 신세진 것이지요. 저는 천을 잘라서 옷을 만드는 일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교복 가운데 하복은 직접 천을 잘라서 손미싱을 돌리고 또 바느질을 하고 해서 그렇게 입고 다녔어요. 여학생들은 가정 가사 시간에 재단이나 바느질 같은 기본적인 것은 다들 배우잖아요...? 기성복을 사거나 양장점에서 맞춘 옷은 도리어 폼이 나지 않았는데, 제가 직접 만든 옷은 한창 예민하게 사춘
기 시절을 겪는 여학생들의 체형을 예쁘고 섬세하도록 돋보이게 했던 것 같아요. 직접 교복을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저에게 친한 친구들이 부탁을 해 와서, 그 당시에 다섯 명의 하복을 손수 만들어 준 일까지 있었으니까요.”
강릉‘뉴 스타일’양재학원을 졸업한 홍씨는 현장에서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강릉시에 위치하고 있던‘삼흥라사’에 취직한다.
“양재학원을 졸업하고 난 다음에 강릉에서 ‘삼흥라사’라는 곳에 보조재단사로 취직했어요. 그곳은 남성들과 여성들의 옷을 함께 취급했어요. 양복점과 의상실을 합친 형태로 영업을 하는 곳이었지요. 그 시절이었던가요...? 그때만 하더라도 요즘처럼 편리한 전기다리미가 아니라 연탄불을 이용하는 다리미를 사용했는데, 연탄난로 위에 아이롱 두 개를 걸쳐놓고 달구어 가면서 번갈아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한번은 미싱 일을 하는 동료가 바빠서 대신에 그 다리미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는데 큰 실수를 했어요. 연탄불에 달군 다리미로 공정이 끝난 연두색 옷을 다렸는데 옷 색깔이 노란 색으로 변해 버린 겁니다. 연탄 다리미에 익숙하지 않을 때였기에 불의 세기를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때 망쳐버린 옷을 변상하기 위해 한달 월급을 통째로 물어주었어요.
 ‘삼흥라사’를 거친 다음에는 삼척시로 내려와서 역시‘뉴 스타일’이라는 상호의 양재학원에서 강사생활을 얼마쯤 했어요. 그때만 해도 양재학원은 온통‘뉴 스타일’아니면 ‘노라노’라는 상호만을 고집했어요.”

 

스물 한살… 예명‘홍진희’의 끝 글자 따서‘희 의상실’개업… 결혼

열일곱살에 울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강릉시로 올라가서‘뉴 스타일’양재학원을 졸업하고,‘삼흥라사’에 취직했다가, 삼척시‘뉴 스타일’학원의 강사로 활동하던 홍정자씨는 스무살에 고향인 울진으로 돌아온다.


 “스무살에 울진으로 내려와서 현재 울진 시장안의‘울진 양장점’에서 재단사로 6개월 근무했어요. 그러다가 스물 한살에 시장안의 ‘범이네 양품점’자리에‘희 의상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직접 의상실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울진읍내에는‘뉴서울’이라는 상호의 의상실이 한군데 더 있었는데, 수년 후에 그 의상실 주인은 가게를 팔고 울진을 떠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홍정자씨는‘희 의상실’이라는 가게 상호의‘희’는 예명인‘홍진희’의 끝 글자를 딴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스물 한살에‘희 의상실’을 개업한 후 2년 남짓 의상실을 운영하던 홍씨는 스물 세살에 네살 연상의 남상홍(70세)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뒤이어 의상실을 관두게 된다.
“벌써 43년 전이 되고 말았지만 연애결혼을 했어요. 울진읍내 시장 안에서‘희 의상실’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동양고무신’이라는 이름의 신발 가게를 바로 옆쪽에서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국내 최고의 신발 제조업체였던 ‘동양고무’의 회장이 남편의 친 형이었는데, 총각이던 남편이 울진군 대리점 사장으로 내려와서 근무하던 중이었지요. 바로 옆에서 가게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고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의상실을 운영하다 보니까 남들보다는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다닐 수 있었고, 그런 점이 남편의 눈길을 끌었던가 봅니다.”
홍씨의 남편 남상홍씨는 충북 음성군이 고향으로 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등 항해사로 근무하다가 울진에서 동양고무신 대리점을 운영했다.
또 그 후에는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과 고기 집인 청주회관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홍정자씨는 40여 년 전 울진 지역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던 자신이 옷차림이 한껏 세련된 도시미를 풍기는 신여성이자, 날씬하고 멋스러웠던 아가씨였다고 웃음 지으면서, 1953년 부산시에서 동양고무로 출발한 화승그룹의 현 회장이 남편의 조카라고 귀띔한다.

 

전라북도 남원… 경기도 부평…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스물 하나에 결혼한 홍씨는‘희 의상실’을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남편을 따라 전라북도 남원시로 이사를 한다.      
 “동양고무 회장이던 남편의 형님, 그러니까 시아주버니께서 남편을 울진 시골보다는 전라도 남원으로 보내서 동양고무신 대리점을 맡아 보라고 하셨나 봐요. 남편을 따라 남원으로 갔어요. 제가 양장기술을 배워서 돈을 쏠쏠하게 번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의 권고로 바로 밑의 여동생도 양장기술을 배웠는데, 힘들여 자리를 잡은‘희 의상실’을 여동생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울진을 떠났습니다.


  결혼하고 첫애를 임신하니까 남편이 힘든 양장 일을 하지 말라고 말린 이유도 있고 해서, 가게를 채우고 있던 기본적인 원단이며 미싱 등 기구 일체를 주고 떠났으니 여동생은 부담 없이 의상실을 운영할 수 있었지요. 남편 또한 울진에서 자리를 잡은‘동양고무신’가게를 장인어른이신 제 아버지께 대가없이 그대로 남겨주고 떠났어요. 남편이 우리 친정에 큰 도움을 준 것이지요. 그때의 고마움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그 고마움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지요.”
  울진에서의 신혼생활을 접고 낯선 곳, 남원으로 자리를 옮긴 홍씨는 남원에서 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이사를 한다.
 “경기도 부평에서는 2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서 애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어요. 물론 남편을 대신하여 동양고무신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생활했지요. 애들을 키우면서 부평에서 저 혼자 생활할 때, 남편은 고향인 충북 음성군에서 6년근 인삼을 정제하여 홍삼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일을 했어요. 그 후에는 화물트럭을 구입하여 운수업을 잠깐 하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에 경기도 부평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이 있는 충북 음성군으로 내려가서 시집살이도 1년여 남짓 했습니다.”
전라도 남원에서 경기도 부평을 거쳐, 충북 음성에서 시집살이를 잠깐 한 홍정자씨는 수년 만에 다시 고향 울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애들을 키우고 장사를 했는데, 친정이 있는 고향 울진을 떠나서 고생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남편이 울진으로 돌아가서 양장점 일을 다시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저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요. 그래서 음성군에서의 시댁 생활을 뒤로 하고 수년 만에 울진으로 다시 되돌아왔어요.”

 

다시 울진으로…직원 예닐곱씩 두고 맞춤옷 제작

수년 동안 남편을 따라서 타향살이를 하던 홍정자씨는 울진으로 돌아와서 다시‘희 의상실’을 연다.
 “울진으로 돌아와서는 현 울진약국 자리에서 가게를 다시 개업했어요. 그러다가 현 인디안 가게 자리에서 장사를 했고, 그 다음에 현재 자리로 옮기게 됐지요. 이 자리에서만 십오륙년 정도 의상실을 하고 있는 셈이네요. 당시만 하더라도 의상실이 한창 호황을 누렸어요. 단골들도 점점 늘어나고 덕분에 장사가 잘 됐어요. 그때 여성들 양장 한벌 값이 3천원에서 5천원 정도 할 때였는데, 경찰관이던 우리 아버지 한달 월급이 3만원 정도 됐어요. 어떤 날은 양장 맞춤 주문이 하루에 열대여섯 벌씩 밀려들고는 했는데, 그런 날은 제가 하루 만에 버는 돈이 아버지의 한달 월급보다도 많았어요.”
타향살이 수년 만에 울진으로 되돌아와서 다시금‘희 의상실’을 열었을 당시에 홍씨는 밑으로 기술자를 예닐곱 명씩이나 두고서 맞춤옷을 제작했었다고 기억한다.
“울진으로 돌아와서 현 인디안 가게에서 의상실을 할 때는 수년 동안 일감이 넘쳐나서 기술자를 7명씩이나 두고 장사를 했어요. 옷감 재단은 제가 직접 했고 미싱 2명,‘마도메(손바느질)’3명, 다림질과‘우라(안감)’떠주는 시다 2명씩 그렇게 데리고 일을 해 나가야 할 때도 있었지요.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밑으로 기술자 5명씩 두고 일을 했어요.”

 

아버지 홍종만씨… 남편 남상홍씨의 도움
홍정자씨는 지금까지도 자동차를 타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는 자동차지만 홍씨에게 자동차를 타는 일은 절로 숨이 막히는 힘에 겨운 일이다.
“자동차를 타는 일은 제가 가진 체질하고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타면 금세 속이 울렁거리는데도 제대로 토하지도 못하겠고, 그러다보면 금방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 경험을 하고는 합니다. 그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울진 읍내 P약국 사모님이 제 가게 단골이신데,‘희 의상실’은 우리 약국에서 다른 약은 하나도 안 팔아주고 멀미약만 팔아준다고 웃으며 농담을 하고는 합니다. 예전에 손수 운전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다른 이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보다 멀미가 덜했던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고는 해요.”
홍씨가 울진에서‘희 의상실’을 운영하던 초기에는 경찰관이던 아버지가 대구까지 비포장 길을 열서너 시간씩 왕래하면서 딸의 가게에 필요한 원단을 조달해 주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일이 있었고, 저는 자동차를 못타지. 결국 아버지께서 근무가 비는 날을 택해서 대구까지 왕복하면서 원단을 사다 주고는 했어요. 대구 원단 가게와 제일 처음 거래를 털 때만 제가 한번 어렵게 올라갔었지요. 제가 어떤 종류의 원단과 색상을 선호한다는 걸 아는 원단가게 주인이 아버지께서 올라가시면 스스로 알아서 원단을 챙겨주고는 했어요. 아버지께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희 의상실’을 시작할 당시 아버지께 도움 받던 부분을 이제는 홍씨의 남편 남상홍씨가 일정 부분 대신하고 있다.
“양장은 일손이 많이 가는 고된 작업입니다. 고객이 찾아오면 신체 치수를 재고, 거기에 맞추어 재단하고, 가봉하고, 미싱하고, 안감 넣기 전에 다리고 또 단추를 달고... 특히 재단은 고객 치수의 반쪽을 놓고 옷감을 포개어서 합니다. 그런데 맞춤옷은 항상 단춧구멍 내는 일이 만만치가 않아요. 
특히 양복 스타일의 옷은 단춧구멍을 내는 미싱이 일반 양장의 단춧구멍을 내는 미싱과 달라요. 우리 가게에서도 일반 미싱 1대와 오버로크 미싱 1대, 밑단 박는 미싱 1대, 일반 양장 단춧구멍 내는 미싱 1대 등 총 4대의 미싱을 사용하고 있는데, 양복 스타일의 옷은 굳이 대구까지 가서 단춧구멍을 내 와야 합니다. 양복 스타일의 단춧구멍 내는‘큐큐’라는 미싱은 가격이 꽤 고가인데, 막상 구입하려다가도‘이제 의상실을 하면 얼마나 더 하겠나’싶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여태까지 구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차를 못타니까 대구까지 가서 단춧구멍 내오는 일을 남편이 대신해서 도와주고 있어요. 여전히 항상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홍정자씨는 남편 남상홍씨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결혼은 참 잘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남편과 살아오면서도 변변한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하도 싸우지 않고 살아오다 보니까, 어쩌다가 말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자식들이 먼저 나서서‘지금까지 싸움 한번 하지 않다가 나이 들어가면서 왜 싸우려고 하냐’고 말하고는 합니다. 그럴 때면 서로 쳐다보며 웃고 말아요. 남편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서 항상 손해만 봐온 사람입니다.”
홍정자씨는 남편 남상홍씨와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맏아들 인규(43세)씨와, 울진에서 생활하고 있는 딸 미란(41세)씨, 동섭(39세)씨가 그들이다.  
“자식들이 뭐 그렇게 남들보다 대단하고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썩 괜찮은 아버지 밑에서 커오다 보니까 그냥 무난하고 순하게 자라주었어요. 저 역시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모진 평지풍파도 겪지 않았고 그저 무난하게 살아온 듯 합니다. 열심히 애들 키우고, 남편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면서, 좋아하는 옷 만들면서......”

 

교복 구입할 형편조차 안 되는 학생들… 돕고 싶어

울진 읍내에서 40여년‘희 의상실’이라는 상호로 영업을 해온 홍정자씨는 수년전부터 학생복 대리점을 겸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 맞춤을 겸하여‘희 의상실’이라는 상호에‘교복 1번지’라는 상호를 추가했어요. 그러던 중에 관내 J중학교에서 어느 날 일방적으로‘스마트’라는 교복을 구입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울진이 아닌 관외의 업자에게 일감 전부를 맡겨 버리더군요. J중학교에서 급작스럽게 학생복 메이커를‘스마트’로 변경하는 바람에 결국 대구까지 가서‘스마트’울진 대리점 간판을 따 왔어요. 제일모직의‘아이비’나 SK의‘스마트’같은 상표는 전부 학생복 메이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희 의상실’,‘교복 1번지’, ‘스마트’등 3개의 상호를 한꺼번에 사용하고 있어요.”
중·고등학생들 교복 맞춤의 경우, 대부분이 입찰 경쟁 방식을 거쳐 단체로 주문이 이뤄지기 때문에 동복은 1월초부터 2월말까지, 하복은 4~5월에 일손이 가장 바쁘다.
“학생복은 동복이 15만원, 하복이 7만원 정도에서 가격이 책정됩니다. 교복 시즌이 되어 일손이 부족하게 되면 대구에서 기술자를 데려다 씁니다. 예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고 지내는 기술자들을 불러다가 일손을 드는데, 하루 일당으로 계산해서 한달 정도씩 쓰고는 하지요.”
  교복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다. 홍씨는 교복을 맞춰놓고도 돈이 없어서 제때 찾아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복을 그저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조심스레 말문을 연다.
 “교복을 제때 찾아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부모님 가운데 어느 한쪽이 계시지 않는 결손가정이거나, 부모도 없이 연로한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학생들이었어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사정을 확인하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교복을 그저 주고 맙니다. 특히 북면 검성리의 어느 여학생과 그 학생의 할머니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 여학생이 어려운 것을 알고 교복을 그저 주고, 할머니 옷까지 한벌 근사하게 만들어서 선물로 드렸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연신 고맙다면서 집에 있는 감나무에서 단감도 좀 따가고 집 구경도 할 겸 꼭 한번 찾아오라고 말하더군요. 그 정성이 하도 고마워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멀미약까지 먹고 남편과 함께 물어물어 검성리까지 찾아갔던 적이 있었어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다가 단감 몇 개 따서 돌아왔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기껏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서 학생복을 선물로 그저 주어도 고맙다는 전화 한통 없기에 서운할 때도 더러 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뭘 바라고 한건 아니지만, 왜 사람의 기분이란 것이 그런 거잖아요...? 조건 없이 주고서도 잘 받았다는 전화 한통 오지 않으면 조금 서운하고 뭐 그런 거... 특히 앞으로는 학교 측에서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교복을 맞출 때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달 돈 몇 만원이 없어서 점심을 굶을 만큼 우리 지역에는 아직까지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은데, 교복 값은 그보다 훨씬 더 고가인데도 학교 측에서 미처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학교 측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사전에 알려주기만 해도 얼마쯤 가격을 깎아주거나,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저 도와줄 수도 있을 텐데 아쉬울 때가 있어요.”     

 

특별한 자리… 특별한 사람 위한…단 하나의 옷

학생들의 교복 시즌이 아닌 시기에도 홍정자씨는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감이 예전에 비하면 현저하게 줄어들었어요. 양장 맞춤은 학생복과 비교하면 3분의 1정도의 일거리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도 특히 중년을 넘어서는 여성들의 신체적인 체형이 기성복과 무난하게 어울리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맞춤 양장을 선호하는 고객들이 있지요. 또 기성복 메이커 옷은 똑같은 디자인이 항상 여러 벌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지역의 모임 같은 곳에서 자기 자신과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되면 누구나 기분이 상하게 되나 봐요. 
다들 메이커라고 비싸게 주고 구입했는데 똑같은 옷을 타인이 입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맞춤옷은 지구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단 한명의 옷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지요. 또 맞춤옷은 주문하는 고객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하여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맞춤옷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자리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준비된 옷이지요. 요즘 맞춤 양장 한 벌은 25만원에서 30만원 정도에 마련할 수 있어요.”

 

재단, 미싱, 다림질…평생 좋아서 해온 맞춤 양장

열일곱살에 양장 일을 처음 접한 다음 스물 세살에 자신의 예명을 따서‘희 의상실’을 개업한 홍정자씨는 살아오면서 4~5년 동안 애들 키운다고 일손을 놓은 기간을 빼면, 66세인 지금까지 양장 일을 손에서 단 한시도 떼본 적이 없을 만큼 맞춤옷을 제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해온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이다.

그런 그녀도 이제는‘희 의상실’을 물려받을 제대로 된 기술자를 한명 키워내야 한다는 약간은 조급한 속내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자식 가운데 어느 한명에게 이 일을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당초부터 없었어요. 양장일이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힘들고 고생스럽기도 하니까요. 부모의 심정이야 누구나 매한가지 아니겠어요...? 그렇지만‘희 의상실’이라는 상호 하나로 지역에서만 40여년 맞춤옷을 제작해 왔는데, 진정으로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기술 가르쳐주고 이 가게를 물려주고 싶어요. 평생을 함께 해온 의상실을 나이 들어 고생스럽다고 하루아침에 문 닫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홍정자씨는 일평생 함께 해온 맞춤옷과의 인연을 천직이라고 얘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원단 알레르기로 인해 눈 건강을 해친 일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수십년 동안 옷을 짓기 위해 원단을 가위로 자르고 미싱을 하다 보니까 원단 알레르기가 생긴 모양입니다. 금방 공장에서 염색을 거쳐 나온 원단의 휘발성 성분이나, 가위질을 할 때 생기는 미세한 먼지 같은 것에 장기적으로 노출되다 보니까 알레르기로 발전한 모양이지요. 언제부턴가 자주 눈이 충혈 되거나 붓고는 해요. 이제는 애들도 엄마는 일중독인 듯 하다면서 고생은 그만 하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만큼 아버지와 이곳저곳으로 관광도 다니고 그러면서 노후를 즐기라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 고객들의 치수를 재고, 재단하고, 미싱을 돌리고, 다림질을 하면서 하나하나 옷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그렇게도 즐겁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양장일이 싫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에게 맡겨진 일을 끝내지 않으면 다른 일은 아예 손에 잡히지 않아요. 그것은 타고난 성격이기도 하고, 어쨌든 40년 넘게 해온 양장일이 지금도 마냥 좋기만 하니 차라리 천직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재단부터 미싱까지 맞춤옷의 모든 공정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만이 혼자서‘의상실’을 운영해 나갈 수 있다.
재단에서 미싱, 다림질까지 맞춤옷의 전 공정을 혼자서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장인(匠人)이요, 장인들에게서는 특유의 장인정신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한 벌의 옷이 완성되어 나오면 모든 고생을 잊고 자신이 만든 옷 앞에서 진정한 성취감과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울진 지역의 장인 홍정자씨.
고객의 주문을 쫓아 밤을 새워서라도 옷을 만들고, 손님이 그 옷을 입었을 때 잘 어울린다 싶으면 그간의 힘든 점을 한순간에 잊게 된다는 홍정자씨.
그런 면에서 40여년 양장일이라는 외통길을 걸어오면서도 단 한번도 옷 만드는 일이 싫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홍씨의 말은 장인정신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홍정자씨의 이러한 장인정신이 그저 빠르고 간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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