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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가계부 써온 김진업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9.18 14:46
  • 글자크기설정

김진업씨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되돌아보며 불필요하게 돈을 낭비한 부분은 없었는지, 이번 달에는 어느 정도의 수입에 얼마의 지출이 있었는데, 다음 달은 대략 얼마정도의 지출이 필요할 것인지 등을 계획하고 그러한 예산과 지출 내역을 통해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가계부를 쓴다.
 

매일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가계부는 한달이 지나면 한달간의 살림살이 내역을 알려주게 되고, 일년이 지나면 또 한 해 동안의 가정 살림살이 규모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물론 가계부에는 돈의 흐름인 숫자만 기록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계부속에는 어떤 한사람과 한 가정의 고단한 인생역정과 시간이 고스란히 기록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돈의 액수는 부수적으로 기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계부에는 어느 한 가정의 재무 설계와 그것의 기본방향, 목표가 제시되고, 금융 소비법에 대한 금융시스템까지 구체적인 모든 내용이 포함된다.

 

한 가정의 행복공식을 도출해내기 위한 가계부, 가정경제의 문제점을 낱낱이 알려주고 대안을 찾아주는 가계부, 가계부에는 한 가정의 진솔한 삶과 그것을 위한 절대적인 공식이 내재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조선시대 영조때의 유명한 암행어사였던 박문수(朴文秀) 종가의「양입제출」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계부라고 말한다.

 

현재의 가계부와 비슷한 양식으로 작성되어 있는 ‘양입제출’에는 수입으로 논밭에서 생산된 곡물, 각 지방에서 올라온 선물, 논밭의 소작료 등을 합산하여 기록했고, 매달 지출되는 각종 경비의 액수를 기록했다.
 ‘양입제출’은 그 당시 선비들의 검소한 소비패턴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가정의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는 항목은 명절을 쇠는 비용이며, 하인들에게 지급되는 새경(私耕-사경)이 그 다음 몫을 차지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논밭 서너 마지기 소유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후포면 금음1리에 가면 지난 1966년도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열성과 부지런함으로 가계부를 기록해 온 김진업(金鎭業. 72세)씨를 만날 수 있다.

1972년 어머니 신차기씨의 회갑을 맞아

김씨의 수십권 되는 가계부를 펼쳐보면 몇십년 전의 물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차비가 얼마, 경조사비가 얼마, 식대가 얼마, 비누가 얼마, 학생들 공납금이 얼마 하는 식으로......
 

김진업씨는 논 서너 마지기, 밭 네 마지기를 부치던 가난한 농사꾼인 김주기씨와 신차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제가 11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일흔 둘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위로 누나가 한분 계시고, 저와 남동생, 여동생 이렇게 2남2녀의 맏아들로 태어났어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저도 태어났지요. 이집에서 할아버님부터 저까지 3대가 살고 있는 셈이네요.”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지만, 어릴 때부터 서당을 하시던 할아버님으로부터 한학을 익혀 한문은 상당한 실력을 자랑한다.
 “조부님께서는 원래 이곳에서 가까운 금음2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조부님은 상처(喪妻)를 다섯 번이나 하신 분이었어요. 제 아버님은 조부님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상처를 다섯 번이나 한 조부님께서는 첫째, 둘째 며느리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셋째 며느리였던 제 어머님에게 심신을 의탁하신 게지요. 할아버님께서는 제가 열다섯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김진업씨의 할아버지는 금음1리 현 장소에서 서당을 하며 후학을 지도하는 일로 평생을 보냈다.
 “할아버님은 서당을 하셨습니다. 저 역시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할아버님 밑에서 한문공부를 했지요. 어릴 때 시작한 한문공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선비들은 우리 집이 서당이다 보니까 모두들 들러서 한끼 식사를 얻어먹기도 하고, 자고 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당시에 할아버님께 한문을 배우던 학동들은 100여명 남짓했는데, 혼자서 한꺼번에 가르치지 못하니까 천자문이라도 먼저 떼고 공부가 앞서가는 학동들이 뒤처지는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고 그랬습니다.”


김씨는 부모님의 결혼과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을 들려준다.
“그때 울진군은 강원도에 속해 있었잖아요? 제 할아버님은 강원도 선비였고, 외조부님께서는 경상도 영해 선비셨지요. 우연히 주막에서 만나 술잔을 나누면서 즉석에서 의기투합하여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고, 부모님을 결혼시키신 걸로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요즘이야 어디 가당키나 한 얘깁니까? 어머님은 영덕군 영해 목골(미실)에서 태어나신 분이지요.”


초등학교 졸업 후 열다섯살에 집안 살림 떠맡아 

김씨는 후포초등학교 5회 졸업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부터 집안 살림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여덟살에 후포초등학교를 입학해서 열네살에 졸업했습니다. 당장 한입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사치일수밖에 없었어요.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열다섯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았지요. 아버님은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해에 돌아가셨지, 어머님은 고생 없이 곱게 자라오시다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온 분이어서 험한 일은 할 수도 없었고, 방법도 모르던 분이었습니다. 그나마 가족들의 생계를 의지했던 서너 마지기 논은 아버님과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초상 비용 등으로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뒤였지요. 당연히 맏아들인 제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진업씨는 어머님은 글이 참 좋은 분이었다고 술회한다.
 “영해 목골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글을 익힌 어머님은 실력이 뛰어났던 분이었어요. 후포는 물론이고 평해에서까지 사돈지와 문안지를 받으러 멀리 어머니를 찾아오실 정도였으니까요.”
 

‘사돈지(査頓紙)’와 ‘문안지(問安紙)’는 조선시대부터 부녀자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순 한글 편지로써, 후대에 이르면서 내간체(內簡體) 문장으로 정립되면서 규방문학(閨房文學)으로 발전하고, 수기 문학 발생의 모태로 이어지게 된다.
 ‘사돈지’는 안사돈끼리 주고받는 일반적인 편지로써 ‘안사돈지’라고도 불린다. 사돈을 맺은 두 집안 간에 혼례를 올릴 때 신행을 가는 인편에 신부의 어머니가 신랑의 어머니에게 딸을 보내는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을 솔직하게 적어 보내고, 그 답장을 신랑의 어머니가 신부의 어머니에게 적어 보냄으로써 양 집안 안사돈끼리의 ‘사돈지’ 내왕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 ‘문안지’는 초례를 올린 신부가 시집식구들에게 맨 처음으로 문안을 드리는 신부 문안지와 일반 부녀자들이 친지들에게 안부를 묻는 일반적인 문안지 등 두 종류가 있다.
 

특별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일반적인 문안지와는 달리 신부 문안지는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야 하고 또 일정한 문투에 따라 써야 하는 만큼, 김진업씨의 모친에게 ‘사돈지’와 ‘문안지’를 받으러 멀리 평해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김씨 모친의 공부가 당시에 인근 부녀자들에게 상당한 평가를 받았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항상 배고팠던 나날…논밭 일꾼, 광산주임, 목재상 거쳐  

김진업씨의 말을 빌리면‘일평생 살면서 만사 걱정이 없었다’는 어머니 덕분(?)에, 김씨는 가족들의 한끼 밥을 위해 남의 논밭으로, 광산으로, 목재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당시만 해도 돌아서면 항상 배가 고팠고,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날은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지요. 열다섯살에 물려받은 서너 마지기 밭을 일구면서, 남의 밭에 김도 매러 다니고 논일도 도우면서 그렇게 한푼이라도 벌어야 했습니다. 품삯을 벌기 위해 이곳저곳 일손이 달리는 이웃의 논밭 일을 하다보니까, 금세 일손이 재빨라졌어요. 평생 농사 일로 잔뼈가 굵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농사일을 잘 한다는 소리도 듣고는 했습니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김진업씨는 광산 기술자, 목상(木商)등의 일도 하면서 그렇게 가족들의 생계를 힘겹게 꾸려갔다.
“남의 논밭에서 김도 매고, 피도 뽑고 해서 받는 돈으로는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 살기가 힘들었어요. 마침 그때 금음리 인근 ‘석골’이라는 곳에 ‘울진철산’이라는 광산이 있었는데, 선광주임으로 들어갔습니다. 선광이라는 것이 광산에서 채굴한 광석을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제련하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불순물이나 각 광석의 종류별로 분리하는 일을 말합니다. 2년 가까이 근무했지요. 그러다가 ‘울진철산’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인근의 영덕군 병곡면 유금동에 있던 ‘유금철산’이라는 광산에 다시 입사를 했습니다. 3년 가까이 근무했어요.”

이럴 때쯤 인근 영덕 병곡 칠보산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고, 한동안 김씨는 산불로 인해 버려진 나무를 파는 목재상도 한동안 했다고 기억한다.
“군대에 가기 전에 병곡 칠보산에 큰 산불이 나서 엄청난 면적을 태웠던 적이 있었어요. 영덕군 병곡면에서 울진군 온정면까지 아주 넓은 지역을 초토화시켰지요. 그 당시 병곡과 후포에 살던 발 빠른 사람들이 산불로 타버린 나무를 가공해서 팔고는 했는데, 저도 그 목재를 판매하는 중개인을 했어요. 물론 당시에도 불법이었지요. 산림을 관리하는 간수가 쫓아오면 피해 다니면서 그렇게 목재를 필요한 제재소등에 연결시켜 주었어요. 그때 칠보산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 모두 굶어 죽거나 했을 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칠보산 나무 팔아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연근해 어선도 조금 탔고, 그렇게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스물두살에 통신병으로 군에 입대…제대 후 중매로 결혼 

군 생활 당시에 통신선 가설작업을 하며
농사 일꾼과 목재상을 거쳐 ‘울진철산’과 ‘유금철산’으로 옮겨 다니며 힘겹게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던 김씨는 ‘유금철산’에서 3년쯤 근무하던 후반기에 징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된다.
 

“스물두살 때였지요. 1957년 10월 25일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2년 8개월 동안 군에 근무했어요. 1군단 1통신단 77가설대대였는데 경기도 청평중계소에 소속되어 복무했지요. 군에 가서 처음에는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때마침 목공 유경험자를 선발하기에, 사회에서 목공경험이 있다고 속이고서는 차출되어 1군단 부대를 이사하는데 목공병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목공병으로 근무하고 난 다음에는 표창장까지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통신단에 합류하여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청평중계소에서 연락을 받으면 케이블 가설도 하면서 그렇게 군에서 생활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전방의 전화 회선은 모두 다 군부대에서 맡아서 관리했었기에, 김진업씨는 군 생활을 통해 통신과 관련된 기초적인 지식을 모두 쌓을 수 있었고, 이것은 후에 체신부 소속의 대구 전신전화 건설국에서 일하면서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1960년 6월 10일 제대한 김진업씨는 후포 금음리 집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가사를 돌보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온정면 백암에 살고 있던 네 살 연하의 천생배필 김금옥(金今玉. 68세)씨를 만나 부부의 예를 갖추게 된다.
 

“우리 이웃에 집사람의 5촌 아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분이 소개를 했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집사람이 스물두살 때였지요.”
김씨의 부인 김금옥씨는 “5촌 아재가 자기 이웃에 김진업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재물은 없어도 사람 하나는 야물고 똑똑하다고 해서 시집을 오게 되었다”고 한마디 거들면서 웃는다.
 

“원체 없는 집에 시집와서 집사람이 참말로 고생 많이 했지요. 먹고 살면서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유동산업이라는 통조림 공장에도 다니고, 채소장사도 하고, 노가리도 까고, 오징어도 건조하면서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집 근처에 미나리꽝이 있었는데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미나리를 솎아서 시장에 내다 팔고는 했어요. 제가 출근하기 전이면 시장에 실어 내주기도 했지만, 어디 멀리 출장을 갔을 때는 집사람이 직접 리어카를 이용해서 시장으로 내다 팔고는 했습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온갖 굳은 일 마다않고 돈벌이가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다 했습니다. 결혼 초부터 집을 개조하여 늘 셋방을 놓아 왔는데, 지금도 방 두 개를 세놓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한 집사람에게는 항상 고맙고 미안하지요.”
 

스물여섯살에 네살 연하의 부인 김금옥씨를 만나 결혼한 김진업씨는 이듬해 첫딸 숙희(강원도 거주)씨를 시작으로, 종희(여. 강원도), 분치(여. 부산시), 삼(남. 서울시), 근주(여. 인천시), 용수(남. 울진군), 선희(여. 충주시)씨 등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김씨는 셋째 딸 이름인 ‘분치’는 할머니가 지었는데, 아들인줄 알았다가 딸인 것을 알고는 분하다고 해서 ‘분치’라고 지었다면서, 그나마 ‘분치’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인지 바로 그 다음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으니 이름값을 하기는 톡톡히 한 모양이라고 전한다. 

분치씨는 현재 부산시에서 법무사 사무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남 5녀의 자녀 가운데 특히 김진업씨의 둘째 딸 종희씨는 국·내외에 무궁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지역출신 화가로써 경남대학교 사범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후 현재 강원도 인제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66년 체신부 시행 통신기술직 공개 체용시험에 합격

1974년 통신선 케이블 확장공사를 수행하며

 

김진업씨는 첫째 딸 숙희씨가 태어나던 해에 체신부 대구전신전화국 건설국 직원 모집 공개 채용 시험에 합격하는 경사를 맞는다.
 “군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보니까, 전신전화국 통신기술직 직원 모집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직업이었어요. 시험 응시는 모두 다섯 번을 했는데, 한번은 시험을 치러 가지도 못했고, 네번 만에 합격한 셈입니다. 부산 체신청에서 한번, 대구 건설국에서 두번, 서울 체신청에서 한번 시험을 쳤는데, 대구 건설국에서 두 번째로 친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합격했어요.”
 

인터뷰 내내 김씨 옆에서 자리를 지킨 부인 김금옥씨는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오징어 건조해서 판돈을 들고 대구로 네 번째 시험을 치러 가는데, 이번에도 떨어지면 손가락이라도 자르겠다는 심정을 비장하게 전하면서 올라갔었다”고 전해준다.
 

체신청의 통신 기술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김진업씨는 한참 뒤에 기성우체국에 첫 발령을 받는다.
 “체신부 대구 전신전화 건설국의 통신 기술직 시험에 합격하고 난 다음에 기성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신전화국 직원들이 우체국으로 파견 나가서 근무했어요. 기성, 평해, 후포, 울진 우체국 등으로 옮겨 다녔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전신전화국 직원은 체신부 소속 국가 공무원이었고, 후포만 하더라도 학교 교사와 행정 공무원 등을 포함하여 공무원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지요.”

 

첫 월급으로 3,600원 받으며 가계부 쓰기 시작해

체신부 소속 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딛은 김진업씨는 입사 초기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1966년도에 기성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은 뒤 한달이 지나서 첫 월급으로 3천6백원을 받았어요. 그 당시에 아마 쌀 두어가마 정도 값이었을 겁니다. 딸린 식구는 많지, 역시 그 돈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어요. 작은 돈이나마 제대로 계획을 세워 관리해보자 싶어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계부를 쓰면 확실히 가정경제를 꾸려가면서 절약이 됩니다. 지금까지 자식들 키우고 살아오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가계부, 죽변-삼율간 차비 600원, 식대가 500원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씨는 1966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써 오면서 단 10원이라도 수입과 지출 내역이 다른 적이 없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까지 40여년 가계부를 기록해 오면서도 단 10원이라도 금액이 틀려 본적이 없습니다. 10원이라도 수입과 지출 내역이 맞지 않으면 밤새 그 돈을 찾았지요. 어디에 썼는지 기억이 안 나면 그 다음날이라도 생각해서 앞뒤를 맞추었어요. 요즘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스톱을 즐기지 않는데, 하다못해 친구들끼리 10원짜리 고스톱을 쳐서 돈을 몇 백원 따면 그것도 몇 백원 수입으로 기록하고, 또 잃으면 몇 백원 지출로 기록해 오고는 했습니다.”
 

40여년 하루도 빠짐없이 수입과 지출 내역을 꼼꼼히 가계부에 기록해온 김진업씨는 지금도 매일 가계부를 작성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1966년부터 1979년까지 써온 14권의 가계부를 곰팡이가 슬고 너무 낡았다고 여겨 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없애버렸다는 점이다.  
 

김진업씨가 평생 기록해 온 가계부, 현재 1980년 가계부부터 보관되어 있다
현재 김씨에게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의 가계부가 보관되어 있다.
 “젊을 때는 항상 자식들의 학비가 가계부의 큰 몫을 차지하고는 했는데, 요즘은 우리 부부 병원비와 약값이 가계부에서 큰 지출 항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년 전에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비로 큰돈을 써야 했고, 아내도 무릎 관절 수술을 하느라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지요. 집사람이 무릎수술을 하고 난 다음에 침대를 마련할 일이 생겨서 방을 새로 옮기면서 너무 오래돼서 너덜거리는 가계부를 일부 버렸는데 되돌아보니 그것이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1966년 체신부 소속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된 김씨는 1년에 8개월 정도씩 관외로 출장을 다니며 전신전화 가설 공사를 수행했었다고 전한다.
 “1년이면 절반 이상을 울진군 관내가 아닌 포항, 안동, 경주, 의성, 영덕 등지로 출장을 다녔어요. 말이 좋아 출장이지, 한곳에서 짧게는 한달 정도씩 지내고 길게는 반년도 생활하고는 했습니다. 전화기가 반자동에서 자동으로 전환될 때는 정말 바빴지요. 또 신설공사도 많이 했고요.”
 

김씨의 직책은 ‘연공(鳶工)’이었다. 연공은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매달려서 일을 하는 기술자를 일컫는 말로, 김씨는 전봇대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전선도 연결하고 떨어지거나 이을 곳은 납땜도 하고 심선(心線-가는 쇠줄로 꼬아서 만들어진 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가느다란 줄)을 연결하는 그런 류의 일을 주로 했다.  
 

“여러 명의 자식들 낳아 키우면서 먹고 살려니까 부지런히 일해야 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포항 전화국에 파견을 나가서 6개월 정도 공사를 해야 할 때가 있었지요. 그 당시에 전화기가 반자동에서 자동으로 넘어올 때였습니다. 수천대의 반자동 전화기를 자동식 설비로 교체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써서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면서 공사를 했는지, 공사가 끝나고 나서 테스트를 하는데 단 한군데도 오류가 나지 않았습니다. 포항 전화국 공사를 잘 끝내고 나니까 능력을 인정해서인지 공사주임으로 승진시켜 주더군요.”
 

공사주임으로 승진한 김진업씨는 더욱 관외 출장이 잦아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전화 설비에 맞추어 신설공사와 교체 공사 등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김씨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으로부터 통신사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3번에 걸친 표창장과 함께 우수 직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한(恨)으로 자녀 7남매 가운데 4명 대학 보내 

2004년 `대한민국 공훈사'에서 발간한 `현대인물사전'에 실린 김진업씨
김씨는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자신의 배움에 대한 회한을 풀어야겠다는 각오로 이리저리 박봉의 돈을 쪼개어 쓰면서도 2남5녀 가운데 4명의 자녀를 대학교에 진학시켰다.

“집안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는 한이 항상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요. 먹고 입는 것을 줄이더라도 아이들 대학은 시켜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정 능력이 뒷받침하지 않을 때 대학에 입학할 적령기에 도달한 자식들은 대학에 못 보내게 되었지만, 지금도 넷째딸이 자기가 벌어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7남매를 키워 오면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킨다고 한때는 빚도 많이 얻어 썼었다는 김씨지만, 지금은 결코 적지 않던 그 빚도 다 갚았고, 노부부끼리 그저 큰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창 아이들 클 때는 농협에 빚도 꽤 얻어 썼지요. 빚을 얻어 쓰고 갚고 또 얻어 쓰고... 그런 일을 한동안 반복했었어요. 이쪽 금음리에서는 여자애들 중학교 이상 보낸 것도 제가 처음입니다. 당시 이웃집의 노친네 한분이 ‘진업이는 왜 쓸데없이 여자애들까지 중학교에 보내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여자애들은 초등학교나 졸업시켜서 공장에 보내면 돈 잘 벌어 온다’면서... 그때는 다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때였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언젠가 무궁화작가로 알려진 둘째딸 종희가 연애해서 대위 계급장을 단 사람과 우리 집으로 인사를 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고, 진업이가 금테 두른 사위를 보려고 아들내미, 딸내미 공부시켰구나’하더군요. 왜, 대위 계급장이 번쩍거리는 금테 아닙니까...? 그 사위는 소령까지 달고 예편했습니다. 종희는 지금 강원도 인제에서 미술학원 운영하면서 화가로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요.”
 

이미 금음리 선산에 묏자리 잡고 가묘(假墓)까지 세워
40여년 가계부를 써왔다는 사실 말고도 김진업씨는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기에는 조금 특이한 면(?)이 있다.
 

김씨는 작년에 건강이 엄청 안 좋았던 이후에 윤대웅 전 울진문화원 사무국장의 도움을 빌어 금음리 선산 한쪽에 명당을 잡아서 가묘(假墓)를 써 두었다.
비석에 새기는 비문까지 자신이 직접 쓰고 난 다음에 현 전인식 울진문화원장의 자문과 고증을 거쳐 글자를 파서 세웠다.
 

“작년에 아프고 난 다음에 느낀 점이 참 많았습니다. 윤대웅 전 문화원 사무국장이 풍수 일을 하시는데 묏자리를 좀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비문까지 제가 직접 써서 전인식 문화원장님께 자문을 받아 일부를 수정하여 파서 세워 두었어요. 금음리에 선친께 물려받은 작은 선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묏자리를 잡았습니다. 양지바른 곳을 골라서 우리 부부 묏자리를 나란히 잡아 놓고, 봉분을 올리고, 비석이며 석물까지 세워 두었습니다. 죽고 나더라도 자식들 고생은 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평생 자식들 키우면서 한두푼 모아 일군 얼마 안 되는 재산도 제가 죽고 나면 혹시라도 또 그것 때문에 형제자매들 간에 싸움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이것저것 정리해서 골고루 물려주었습니다. 저와 집사람이야 이 집이라도 있으니 삼시 세끼 먹고 사는데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맏아들은 선조들 제사도 모셔야 하니까 얼마 더 떼 주었습니다. 맏이가 잘 살아야지요. 맏이가 잘 살아야 부모가 먼저 가고 난 후에도 큰집이라고, 친정이라고 찾아와서 밥이라도 얻어먹고 갈 거 아닙니까?”
 

분주한 일상과 바쁜 업무에도 적극적인 사회활동 펼쳐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전국적으로 황폐하고 피폐하던 시기에 논밭 서너 마지기 밖에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열한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다섯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장 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일평생 힘겹게 가계를 꾸려 오느라 농사 일꾼에 광산일도 하고, 불탄 나무를 파는 재목상에 어선까지 탔다는 김진업씨.
 

김씨는 그렇듯 고단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지치지 않고 1966년 체신부에서 시행한 통신 기술직 공개 채용에 합격한 이래, 29년 동안 경북 일원의 체신관서를 옮겨 다니면서 후포전화국 선로과장과 영덕전화국 기계과장등을 역임했고, 지난 1995년 정년을 1년 연장 받아 59세에 후포전화국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했다.
 

또 그는 분주한 일상과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후포면 운영위원을 시작으로, 울진군 산림조합 9, 10대 대의원, 9대 수석이사, 산림조합장 직무대행, 평해향교 장의, 2004년 춘향 석전대제 종헌관, 울진문화원 이사, 전국 박약회 울진군지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김해가 본관인 김진업씨는 김해김씨 삼현파 자계서원보존회 이사, 울진군 종친회 이사와 후포면 종친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좌우명이 일심노력(一心努力)입니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거지요. 자신의 현재 처지에 불평불만을 일삼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열심히 사는데 누가 당하겠습니까? 가족 간에 화합하고, 부부간에 신뢰하고, 형제간에 도타운 정을 나누고, 일터에 나가서는 최선을 다하고......”
 

김진업, 김금옥씨 부부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궁여일책격으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진업씨는 죽을 때까지나, 정신이 혼미해져 더 이상 가계부를 작성할 수 없을 때까지 가계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웃으며 전한다.

“옛날부터 써왔던 가계부를 들여다보면 우리 가족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그 속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들 공납금 납부했던 영수증부터 각종 공과금 납부한 내역, 용돈은 얼마 썼고, 경조사비는 얼마나 지출됐는지를 월별로, 년별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가계부 쓰는 일을 귀찮아하지요. 그러나 한번 꾸준히 써 볼 것을 권합니다. 처음 얼마동안이 어렵지, 몇 개월 쓰다보면 습관이 돼서 안 쓰면 도리어 궁금해지지요. 지난달과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데 가계부만한 것이 있을까요? 제가 평생 써온 가계부 안에는 제 일평생의 삶이 단 한줄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글쎄요... 제가 죽고 난 다음에 자식들이 아버지의 가계부를 유품삼아 소중하게 간직하며 교훈으로 삼을수 있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지만, 없애버려도 또 그만이지요. 저야 살아오면서 제 삶을 써온 것이고, 자식들이야 자식들 나름대로의 또 다른 삶이 분명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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