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10월 ‘조선독립단’ 사건 주동자로 구속 수감
지난 8월 15일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점령에서 해방된 지 62주년을 맞이한 날이다.
191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의 민족분열통치기, 1930년대 이후부터의 파쇼통치기를 거치면서 식민 지배를 일삼았다.
전국 각지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일제강점기 기간 내내 언론, 민족교육, 출판 활동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의병세력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본격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울진 지역에서도 미약하나마 지속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울진에서도 옛 만흥학교 출신들과 한학계 청년들이 모여 음력 3월 11일을 기해 매화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3월 13일에는 북면 흥부장날에 맞춰 칠보산에서 만세운동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부산 및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3.1운동 이후 지역에서는 신간회 울진지회, 울진공작당, 적색농민조합이 창립되어 활동했고, 1939년 10월경 농민조합운동의 주축이 모여 창유계(暢幽契)가 결성되어 1942년 5월경까지 64회에 걸쳐 집회를 개최하는 등 자체적인 결속을 다져간다.
그런데 1943년 3월 중경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창유계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일본경찰에 의해 창유계 관련자 102명이 검거되어, 41명이 입건 구속되고 61명은 무혐의로 석방된다.
1943년 창유계 사건으로 인해 지역의 많은 청년들이 일제에 검거되던 해에 1941년 조직 결성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사건으로 7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된다.
이때 검거된 인사는 장영인(張永仁), 이재선(李在琁), 장영호(張永昊), 김인보(金仁輔), 진병우(陳炳宇), 이재봉(李在鳳), 이성교(李聖敎)씨로써‘조선독립단’은 이들 7명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1993년 국내 항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수상한 건국훈장 애족장 및 훈장증
‘조선독립단’은 조선독립(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 민족문화의 우월성, 문맹퇴치를 목표로 내걸고 5일 장날, 결혼식장, 상갓집, 농번기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주민 계몽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조선독립단’단원 7명의 공적이 울진군에서 발간된 책자는 물론 정부 각 부처에서 발간한 책자에조차 ‘조선독립단’이 아닌 ‘창유계’사건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2001년 2월 울진군에서 펴낸 신간 ‘울진군지(蔚珍郡誌)’에서조차 ‘조선독립단’사건으로 구속된 애국지사들을 ‘창유계’ 사건 관련 구속자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할 때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써 실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추후에 발간되는 각종 출판물 등에서는 ‘조선독립단’사건이 ‘창유계’사건과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하며, 당시 사건의 주동자로서 북면에 거주하는 장영인 생존 애국지사의 생생한 증언은 물론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건 등의 증거물에 따라 정확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광복 62주년을 맞은 2007년 8월 현재 보훈청에 등록된 울진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총 72명이다. 이 가운데 지역의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로서 조선독립단의 주동자로 활약했던 장영인(84세)지사를 8월 21일 북면 부구리 자택에서 만났다.
장영인 애국지사는 1990년 2월 28일 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하면서 교육 분야 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고, 국내 항일운동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4월 13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으며, 1994년 6월 2일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자라왔나
고향은 울진읍이다. 지금의 울진향교 인근에서 장사국씨와 이순남씨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울진에서 보냈다.
위로 형님이 한분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 둘이 있다. 여섯 살 때 울진국민학교를 입학해서 몇 달 다니던 중 아버님을 따라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장사국씨는 당시 알아주던 부자였다는데
아버지께서 부산에서 해산물과 관련된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이미 우리 가족보다 몇 년 먼저 부산에 가서 사업을 하고 계셨다. 당시 아버지는 부산과 울진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였는데, 회사에 서기를 4명씩 두고 사업을 하셨던 분으로서 말루의 유부자와 비교하면서 세인들이 부러워하던 부자였다. 근남면 굴구지 일원 임야가 전부 우리 땅이었고 그 땅을 관리하는 관리인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울진양조장도 아버지가 운영하던 것이었다. 울진의 나이든 어른들에게 장사국씨하면 지금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덕분에 어린 시절은 별 아쉬움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부산에 내려가서는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떻게 생활했나
부산으로 이사 간 곳이 동구 초량동이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당시의 집 번지와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다. 집 번지는 1002번지였고 전화번호는 1186번을 사용했다.
울진초등학교를 몇 달 다니다가 내려가서 영주동에 위치하고 있던 ‘부산공립보통학교(釜山公立普通學校)’6년 과정을 1938년에 졸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초량상업학교(釜山草梁商業學校)’4년 과정을 1941년에 졸업했다. 상업학교는 원래 5년 과정이었는데,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급박하다보니까 4년 과정으로 줄여 졸업했다. 부산초량상업학교 시절이 대동아 전쟁 말엽이었는데 공출이나 창씨개명 등으로 인해 사회가 지극히 어수선할 때였다. 그때 영도 섬에 일본의 군수 기지창이 있었다. 그런데 상업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일본군이 영도의 군수기지 물자를 이북의 청진이나 나진 등으로 한창 옮겨갈 때였다.
정세를 관망하던 아버지께서 곧 큰 전쟁이 있을 것 같으니 짐을 꾸려서 고향인 울진으로 올라가자고 하셨다. 영도의 군수 기지창이 집중적으로 공격당하면 민간인들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래서 온 가족이 짐을 꾸려서 울진으로 올라왔다.
울진으로 올라와서 곧장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나
1941년 3월 ‘부산초량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으로 올라와서, 그해 7월 중순경 울진 읍내리에 있던 아버지 소유의 ‘울진양조장’ 분점에서 첫 모임을 가지고 ‘조선독립단’을 발족했다.
장영인 애국지사는 1994년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대부분이 보통학교도 졸업하기가 힘들 때였기에, 그래도 상업학교 정도를 졸업한 우리들이 지역의 엘리트들인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조바심을 다들 얘기할 때였다. 당시 조직원은 나와 이재선(李在琁), 장영호(張永昊), 김인보(金仁輔), 진병우(陳炳宇), 이재봉(李在鳳), 이성교(李聖敎) 등 7명이었다. 이 가운데 이재선, 장영호, 이재봉 3명은 ‘부산초량상업학교’를 함께 졸업한 동기동창이었고, 1명은 후배, 나머지 3명은 친구들이었다. 당시 아버지 소유였던 ‘울진양조장’ 분점은 울진문화원 왼쪽편의 하당방면으로 올라가는 시내버스 주차장 인근이었는데, 현재 노모 씨가 살고 있다.
‘조선독립단’은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장날이면 장터를 돌아다녔고, 상갓집, 결혼식장, 제삿집은 물론이고 농사철이면 논밭으로도 찾아다니며 지역의 주민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민족의식 고취, 민족의 우수성, 국권회복, 문맹퇴치 운동 등을 역설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역 주민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또 자기 이름 석자도 변변히 쓰지 못하는 문맹자들이었다.
당시에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던 이승만, 김활란여사, 중국 상해임시정부의 김구선생,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단 등의 얘기를 마치 옛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또 일본의 문화와 문명이 애초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이야기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민족의 우월성을 얘기하며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서는 무조건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
‘조선독립단’에 소속된 우리들이 주로 모인 장소는 아버지가 경영하던‘울진양조장’ 분점이었다. 당시에 양조장 분점 바로 옆에 울진경찰서 직원들의 숙소가 있었다. 그리고 근남면 행곡리 김인보의 집, 근남면 수곡리 진병우의 집에서 자주 모였다. 특히 ‘울진양조장’ 분점에서 모일 때는 양조장에서 생산하던 찹쌀로 만든 질 좋은 약주를 가져다 놓고 한잔씩 나누면서 이런저런 세상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한때 이북에서도 교사생활을 했던 것으로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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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농장으로 가기 전에 서울의 ‘대복여관’에서 1달간 나무도 패주고 하면서 얻어먹고 지내다가 함북농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신덕국민학교(新德國民學校)’ 교사로 근무했다.
함북농장은 백두산이 불과 40리 떨어진 곳으로 해발 1500미터 고지였고,농장의 전체면적이 5000정보[(町步-약 49,586,776m²(15,000,000평)]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면적을 자랑했다. 당시 그곳에는 450여명의 우리 민족이 농장을 개척하고 있었는데, 전부 일본 군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함북농장 신덕국민학교에서 ‘알아야 산다’, ‘우리 민족은 세계최고로 우월한 민족이다’ 등의 주제를 가지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 1948~1990년 40여 년간 초등 교사 역임, 교감 퇴임
- 2년 3개월 동안 울진경찰서 및 형무소 독방에서 생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나
1943년 3월에 울진군에서 창유계(暢幽契) 사건이 터졌다. 그때 창유계와 관련하여 102명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서 유치장이 좁으니까 울진공회당에 수감했다. 창유계 사건이 터질 때 ‘조선독립단’으로 활동하던 나를 제외한 6명의 동지들도 함께 구속되었다. 우리 동지들 6명은 백순사(白巡査) 장모씨가 밀고하여 구속되었다. ‘백순사’는 ‘왜순사’와 구별되는 말로 조선인 신분의 첩자나 프락치, 끄나풀을 말한다.
그때는 조선인 첩자들을 모두 ‘백순사’라고 불렀다. ‘창유계’사건으로 동지들이 울진에서 구속되고 나니까, 정보를 입수한 무산경찰서(茂山警察署) 형사 3명이 나를 잡으러 왔다. 형사를 피해서 도망을 갔다. 청진을 거쳐서 서울 돈암동으로 피신했다. 돈암동에 잠깐 몸을 숨기고 있다가 1942년 12월 31일자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12월 31일은 일본인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설을 쇠러 간다고 기차가 가장 혼잡스러울 때였다. 인파로 복잡하여 열차가 발 디딜 틈도 없을 때를 이용하여 서울서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서 일본 옷인 기모노등을 파는 옷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는 내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점원으로 위장하여 숨어 있으니 쉽게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동안 그 가게에서 일하면서 먹고 자고 했다. 그러던 중에 당시 부산에서 ‘미시마(三島) 고등실업여학교’에 다니던 바로 밑의 여동생이 우연히 가게를 지나다가 나를 보게 됐고, 울진에서 생활하시던 아버지에게 연락이 된 것이다. 그 당시 울진에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 등 가족들은 나의 행방을 좇던 일본 형사들로부터 끈질기게 괴롭힘을 당하며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부산까지 나를 찾아 내려왔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함께 울진으로 올라오던 중 영해 ‘소화여관’에서 하룻밤 묵게 됐다.
교통이 형편없던 그때만 해도 부산에서 울진까지는 당일 만에 올라올 수 없는 먼 거리였다. 여관에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잠도 오지 않고 해서 밖에 나왔는데, 옆방에서 우리 부자간의 얘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울진까지 올라가서 경찰에 체포되면 고문 등으로 몸이 성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멀리 도망가라고 충고했다. 아버지를 두고 다시 부산으로 도망을 갔다. 전에 근무하던 그 일본인 옷가게로 들어갔는데 또 다시 아버지께서 부산으로 찾아와서 설득하기에 할 수 없이 울진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평해까지 도착하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울진경찰서 형사들 3명이 내가 앉아 있는 앞과 중간, 뒤에 올라탔다.
그 형사들이 울진에 도착하자말자 울진경찰서로 끌고 가서 2호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그때가 1943년 10월이다.
울진경찰서에서 고문은 없었나? 또 재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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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낸 `조선독립단'의 형사사건부 기록 |
하루는 불러서 나가니까 형사 3명이 죽검과 바케스 등을 들고 들어왔다. 심하게 패면서 물고문이라도 하겠구나 싶어, “만약 고문을 하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사실도 일체 얘기를 하지 않겠다”며 독하게 계속 버티니까 끝내 그렇게 심한 고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치장 독방에서 1943년도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몇 달 더 버티다가 결국 견디다 못해 ‘조선독립단’사건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시인하고 동지 6명을 포함하여 7명 모두 대구형무소로 넘어갔다.
대구형무소 미결감방으로 넘어갔는데, 죄수번호 930번을 달고 역시 나 혼자 독방생활을 했다. 대구형무소에서 현재 부장검사급인 ‘쑤쑤미’검사정(檢事正)에게 취조를 받았다. 취조를 하는 ‘쑤쑤미’검사에게 “나를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 당신들도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는데 우리를 어찌 탓하겠느냐?”고 말하며 계속 버틴 것이 기억난다. 결국 ‘쑤쑤미’검사정이‘조선독립단’사건을 다시 예심으로 돌려 또 다시 몇 개월 걸려가며 울진경찰서의 취조를 받았다.
그 결과 재판을 받게 됐는데, 담당검사가 단기 1년 6개월 장기 3년형을 구형했다. 내심 속으로 “검사구형이 단기 1년 6월, 장기 3년이면 판사가 좀 감해주겠구나” 싶었는데, 1944년 7월 14일 최종 결심 공판 때가 되니 판사가 “이놈은 참 지독한 놈”이라고 하며 검사 구형 그대로 단기 1년 6월에 장기 3년형을 언도했다. 당시에 ‘조선독립단’ 7명이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모든 일은 내가 다 꾸몄고, 나머지는 죄가 없으니까 나 혼자서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결국 나머지 6명은 기소유예와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고, 나만 실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
재판을 받고 나서는 어느 형무소에서 생활했고, 언제 풀려날 수 있었나
재판을 받을 당시에 내 나이가 만으로 21세 성년에 3개월 못 미치는 미성년자의 나이였다.
단기 1년 6월에 장기 3년이라는 형은 먼저 1년 6개월 동안 감방 생활을 하게 한 다음에 개전의 정이 뚜렷하면 나머지 형을 감해주고, 아니면 잔여기간까지 3년 동안 감방을 살게 한다는 뜻이다. 재판을 받고 나서 미성년자들을 수용하는 ‘김천소년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독방에서 생활하다가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생활한지 1년 19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해방이 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나머지 형기를 다 채우고 풀려났을 것이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울진경찰서 유치장에서, 1944년 4월부터 7월까지 대구형무소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생활한 것이다. 1943년 10월에 울진경찰서 형사들에게 구속되고부터 1945년 8월 해방이 되어 감방에서 풀려날 때까지 계속 독방에서만 생활했는데, 총 2년 3개월 동안 독방에서 감방생활을 한 것이다.
그 고생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김천소년형무소에서 풀려나던 날, 간수들이 불러내더니 일을 시켰다. 나무로 만든 ‘구루마’에 형무소와 관련된 서류들을 잔뜩 싣게 하더니 인근 대항면 운수리 황악산(黃嶽山)에 위치하고 있던‘직지사(直指寺)’절 뒷산으로 옮기게 했다. 그 뒷산에는 가건물이 있었는데, 가건물로 한창 짐을 옮기는 도중에 형무소에서 비상 사이렌 소리가 한참동안 울렸다. 급하게 간수들의 인솔 하에 형무소로 되돌아오니 해방이 되었다고 하더라.
그날 저녁에 다들 풀어주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차비를 내 주었다. 그렇게 출소하여 울진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김천소년형무소에는 이북의 평양, 나진, 함흥, 북청과 중국 등지에서 잡혀 들어온 소년 사상범들이 78명이나 수감되어 있었다.
울진으로 돌아와서는 어떻게 지냈나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풀려나서 울진 집으로 돌아와서는 1948년 9월까지 3년 동안 감방 후유증으로 생긴 심신도 보살피면서 집안의 농사일도 돕고 하면서 그렇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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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5세 되던 해인 1948년 10월부터 1990년 2월 28일 정년퇴직할 때까지 4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서 살아왔다. 북면 소곡초등학교로 초임발령 받았고, 21년 동안 부구초등학교에서 교감생활을 했다. 교감생활을 하도 오래 하다보니까 교장을 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당시의 울진교육장이 둘째 여동생의 남편으로 매제가 되다 보니까 오히려 하기 힘들었다. 당시에 교장을 했다면 모두들 매제 덕으로 교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매제였던 당시의 오해석 울진교육장은 오준석 국회의원의 친동생이다. 정년퇴직은 북면 주인초등학교에서 했다.
가족사항은? 또 근황은
평생 나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아내 김금순이 7년 전에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의 사이에 경희, 경애, 지식, 호식, 규식, 은식이 등 4남2녀를 두었다. 모두들 가정을 꾸려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
나는 이집에서 혼자 화초를 돌보는 일로 소일하면서 보훈과 관련되는 각종 행사에 초청 받아서 다니기도 하면서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식사나 빨래는 이웃의 아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해결하고 있다. 파출부를 두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강아지 2마리를 얻어 와서 키우고 있다. 강아지라도 있으니 덜 심심하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내 좌우명이자 평생 간직해온 신조가 ‘죽심송성(竹心松性)’, ‘인자무적(仁者無敵)’이다. 대나무같이 또 소나무같이 곧고 변함없이 살자는 것이다. 또 사람이 어질어서 적이 없다면 그것으로 한 세상 족한 것이 아닌가? 예전의 아픔은 잊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분명 과거의 아픔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과거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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