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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놀이와 십이령바지게꾼놀이를 보급한 이규형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12.26 12:46
  • 글자크기설정

이규형씨
이름부터 거창한 세계화의 물결과 더불어 찾아든 무한경쟁의 이 시대에 울진군이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문화 상품은 무엇일까를 반문해 볼 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음은 비단 한두 사람만의 고민거리는 아닐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화의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퇴색되어 진부한 것으로만 치부했던 토종문화가 도리어 우수성을 띈 상품이 되어 경쟁력을 가진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최첨단을 지향하는 기계문명의 이기 속에서 한층 더 숨겨진 본연의 빛을 발하는 토종문화, 그것은 전형적인 지역 향토의 색깔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확실히 이 시대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정겹고도 살가운 우리 시대의 토종 문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애절한 그것은 어쩌면 토종 문화 그 자체로서 이 시대의 또 다른 콘텐츠의 왕위에 올라있는 자본과의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형성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문화발전소(?)로 자리잡아가는 토종문화, 그 중심에 농악이 있다.
아무 걱정이 없던 어린 시절,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그 시절에 나이 지긋한 동네어른들이 꽹과리와 징소리를 앞세워 한바탕 동네 굿을 벌이면 우리들은 흥겨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숫기가 남다른 친구들은 보란 듯이 전신을 흔들어 깨우며 춤을 추었고, 숫기 없는 친구들은 남들이 들을세라 속으로 나발을 불고 속으로 소리를 흥얼거리며 속으로 어깨춤을 추었다. 

 

어릴 적에 일상 속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던 농악소리도 언제부턴가 LP, SP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에 이어 등장한 CD와 MP3 같은 서구식 기계음에 밀리며 점점 듣기 힘들어 지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는지, 좀처럼 가시지 않는 갈증처럼 꽹과리와 징소리는 늘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고, 근래 들어 다시금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농악에 대한 재평가와 아울러 곳곳에서 크고 작은 동호회 형식으로 농악의 맥을 이어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음은 가히 환영할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농악기의 대표주자인 북, 장구, 꽹과리, 징 등 네가지의 민속 타악기로 연주하는 사물놀이는 1978년‘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농악 연주단체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보급됐고, 이제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역적인 것이 국가적이고, 국가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신명이자 기운인 전통적인 토종 리듬이 세계적인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네 삶과 생활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공연이 이루어지던 전통예술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바람이 휘몰아치며 일상 속에서, 일터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어렵고 고달프기만 했던 일제 강점기에도 동네마다 울려 퍼지던 농악놀이를 새마을운동이 죽여 버린 것이다.
‘잘살아 보세’로 대표되던 새마을운동 앞에서 일하다 말고 신명나게 꽹과리도 두들기고 징도, 북도, 장구도 두들기며 춤사위를 이끌었던 농악놀이는 단연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냥 일만 죽도록 하면 되었지, 일하면서 동시에 노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던 1970년대.
노동의 악기로서 일을 할 때 힘을 덜어 주고, 축제의 음악으로서 풍년을 축하하고, 각종 잔치음악으로서 돌잔치와 환갑, 칠순잔치를 풍요롭게 하고, 군악으로서 전쟁에서조차 군사들의 사기를 충천시켜주던 농악이 새마을운동의 거센 바람 속에서 일부 편협된 모습만 부각되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70년대의 시대적인 조류에 밀려 농악은 실외에서 실내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경제개발 측면에서는 백점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농악 등 전통예술의 싹을 자른 점에서는 빵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똥장군을 깨먹고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 

울진제동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울진 지역의 각급 학교에 농악을 최초로 보급시킨 이규형(86세) 전 초등학교 교장의 고향은 북면 주인1리 일명 ‘석수동’이다.
이씨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2년 이금출씨와 장전연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석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자 출자를 썼고, 어머니는 장씨 성에 전자 연자를 썼어요. 두분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아래로 여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여동생은 두 살 아래인데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작년에 오빠인 저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났어요.” 

 

이씨의 아버지 또한 북면 주인1리‘석수동’에서 태어나서 농사를 지으면서 가족들 생계를 꾸려갔는데, 우연한 기회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아버지 또한 이곳에서 태어났고, 집안에 딸린 작은 농토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글쎄 우연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네요. 이곳 석수동 뒷산 너머에 우리 집 밭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 밭에 똥장군으로 똥물을 져내다가 그만 똥장군을 깨 먹었어요. 왜, 똥장군은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옹기로 만든 것도 있었는데, 아마 깼다는 것으로 볼 때는 옹기로 만든 똥장군이었나 봅니다. 하여튼 아버지는 밭으로 똥물을 져 나르다가 잘못 엎어지며 똥장군을 깨 먹은 일로 할머니께 엄청나게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님께 똥장군을 깼다고 야단을 맞은 바로 그 길로 똥장군값을 벌어 오겠다며 일본으로 건너 갔답니다. 그러고 보니 우연이라기 보다는 홧김이라고 해야겠네요. 홧김에 처자식을 뒤로 남기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 거지요.”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똥물을 져내다가, 똥장군을 깨 먹었다고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홧김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규형씨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자동차 운전기사로 취직하여 돈을 벌었다고 이규형씨는 전해준다.
“할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은 아버지는 그길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답니다. 여러 명이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갈 요량으로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일본말이 서툰 사람은 일본 본토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나마 일본말이 조금은 능숙했는지, 친구들은 한명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혼자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 제 나이 겨우 여섯 살이었고 여동생이 네 살이었을 때지요. 가까스로 일본에 도착한 아버지는 그곳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사로 취직을 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운전기사는 평범한 남자들이라면 꽤 부러워하는 직업이었나 봅니다. 그런대로 다른 직업보다 돈도 조금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었고요.”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으나, 일본말이 서투른 친구들을 뒤에 남기고 혼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씨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자동차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꽤 큰돈을 벌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으로 돈을 보내 왔답니다. 할머니에게 ‘보내는 돈으로 자신이 깨먹은 똥장군 사라’며...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는 돈 삼백원을 보내왔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백원짜리 지폐 세장을 봤던 기억이 아주 선명합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큰돈을 본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그때 돈 삼백원은 무척이도 큰돈이었어요. 그 돈으로 논밭도 장만하고 그랬으니까요. 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했지요. 우리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 큰돈을 벌어서 집으로 보내왔다고요.”
 

부구공립보통학교와 제동학교 시절, 그리고 제동학교 동창회 모임

울진제동학교 시절
이규형씨는 일제 강점기에 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제동학교(濟東學校)를 졸업했다.
제동학교는 일정시대에 울진읍 읍내리의 현 울진향교 명륜당을 교사(校舍)로 사용했던 학교로써, 1922년 4월에 설립됐던 ‘울진강습소’가 3년 만에 승격된 학교이다. 

 

울진 지역의 유지들이 한푼 두푼을 보태서 설립한 제동학교는 20여 년간 운영되던 중 1938년 4월 ‘울진보통학교’로 병합되어 편입 유지되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당하고 말았다.
본지『월간울진』의「우리 곁의 이런 삶」 코너를 통해 지난 10월호(제18호)에 소개되었던 ‘43년 동안 일기(日記)를 써오고 있는 장보균씨 이야기’에서의 장보균씨 또한 제동학교 출신으로서, 이번호에 소개하는 이규형씨와 비록 나이 차이는 있지만 제동학교의 동창이기도 하다. 

“보통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 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홉 살이었어요. 당시의 부구공립보통학교는 4학년제였습니다. 부구공립보통학교에서 4학년까지 마치고 울진 읍내에 위치하던 제동학교 5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 학교를 2년을 더 다녀서 6학년까지 마쳤지요. 제동학교에 편입할 그때에는 편입시험도 치렀는데, 그 시험에 떨어진 친구들도 상당 수 있었어요. 근방에서는 최고의 학교였지요. 또 부구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동네 처자들 열대여섯명을 모아놓고 야학도 가르쳤어요. 저녁에 길쌈을 삼는다고 우리 집에 오면 벽에 흑판을 달아놓고 글자를 가르치고는 했지요. 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도 그때 글자를 깨우쳤습니다.” 

 

당시 이규형씨와 제동학교를 함께 다니던 학생들 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친구들은 장보균, 남재창, 남종열, 임중호씨 등 30여명이나 된다고 이씨는 말한다.
“그 당시에 근남면 행곡리에 살던 남효중씨가 제동학교의 교사를 했는데, 지금까지도 살아 계시지요. 원래 제동학교는 현재의 울진향교를 학교 건물로 사용했었는데, 울진 보통학교로 통합되면서 그만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규형씨는 당시의 제동학교 졸업생들이 현재까지도 일년에 한번씩 근남면에 위치한 전 제동중학교 교정에 모여 동창회를 개최한다고 전해준다.
“일년에 한번씩 일제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이면 근남면 제동중학교 교정에 모여서 동창회를 엽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동창들도 다수 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는 동창들이 꽤 있어서 참여율도 그럭저럭 합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일제 강점기의 제동학교와 얼마 전에 폐교된 제동중학교와는 아무 연관성이 없지만, 제동중학교의 설립자가 제동학교 출신인 점으로 그나마 그 장소를 위안삼아 모이게 되는 거지요.”

 

열여섯살, 아버지의 초청을 받고 일본 본토 ‘시나가와’로 

일본 에바라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이씨는 열다섯살에 제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열여섯살에 아버지가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일본 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아홉살에 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4학년을 마치고, 제동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6학년까지 마치고 나니 15살이 되었습니다. 16살이 되던 해에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저를 초청했어요. 아버지의 초청을 받고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간 다음에 기차를 타고서 동경까지 갔어요. 그 당시에 아버님은 동경에 도착하기 전에 위치한 도시인 ‘풍천(시나가와)’이라는 곳에 살았어요. 애초에 저를 초청할 때 보낸 편지로 아버지는 동경에 도착하기 전 풍천에서 기차를 내려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만 기차표를 동경까지 끊는 바람에 풍천을 지나쳐 동경까지 가게 되었지요. 수십 년 전이던 그때도 동경역에는 플랫폼이 12개가 있었는데, 조선 촌놈이 그것도 궁벽한 시골 태생인 울진 촌놈이 일본 본토 동경역에 도착하니까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무작정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버님이 보내주신 주소를 보여주면서 길을 물었더니, 이미 네 정거장이나 지나쳤으니 왔던 길을 도로 거슬러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일본어도 능숙하지 못했어요. 시골 학교에서 배운 일본말이 유창할 까닭이 없었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눌한 일본어로 풍천까지 가는 길을 묻고 있자니까, 금테를 두른 안내 완장을 찬 동경역 승무원이 다가오더군요. 그 안내원이 이곳에서 몇 번 홈으로 나가면 ‘시나가와’로 갈수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겨우 동경역을 벗어나서 풍천역까지 되돌아 올수 있었지요.” 

 

천신만고 끝에 동경역을 벗어나서 풍천에 도착한 이규형씨였지만, 그를 반갑게 마중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이씨는 술회한다.

 “어렵게 어렵게 ‘시나가와’에 도착했는데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아들이 도착하는 기차시간에 맞추어서 풍천역에서 계속 기다린 아버지가, 끝내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다시 저를 찾아서 동경역까지 되짚어 올라 가신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시간에 아버지와 제가 길이 엇갈린 거지요. 제가 동경역에 처음 내렸던 시간이 아침 7시쯤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길을 물어 풍천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밤 10시가 넘어 있었어요. 정신도 없고 배도 고프고 해서 힘없이 시나가와역 통로에 앉아 있는데 정말이지 눈물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그때 나이가 겨우 16살이었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겠어요? 어깨를 늘어뜨리고 통로에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야, 인마야’하면서 등을 탁 치더군요. 아버지였어요. 풍천에서 저를 기다리다 못해 동경역까지 갔다가 다시 풍천으로 되돌아오신 거지요. 아버지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 울음이 터지고, 아버지를 붙들고 한참동안 정신없이 울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합니다.”

 

고향 울진을 떠나서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 얼굴을 기억 속에 새기고서 이역만리 일본 본토로 건너갈 당시에 이규형씨는‘게다’를 신고 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나막신’ 또는 ‘게다’로 불리던 일본만의 고유한 나무로 만든 신발은 밑 부분에 나무굽 두 개를 대고, 윗부분에는 세 개의 구멍을 내고 ‘하나오(콧실)’라는 끈을 묶어 완성하는데, 이 나무신발은 일정시대 당시에 유행하던 멋스런‘아이템’이기도 했다고 이씨는 말한다. 

 

“그때 일본신발인‘게다’는 젊은 친구들이 폼 나게 신었던 신발이었습니다. 쫄쫄 굶으면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고는 우선 밥부터 먹었지요. 밥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제가 조선에서부터 신고 간 ‘게다’를 보더니, 일본에서 살려면 당장 신발부터 바꿔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어쨌든‘게다’는 일본식 복장에는 어울리는 신발이었지만, 그렇게 격식 있는 신발은 아니었던 거지요.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신발을 파는 가게로 갔어요. 그 가게에서 아버지가 구두 한 켤레를 사 주었는데, 생전 처음 신어보는 구두인지라 그때의 그 기분은 평생을 두고 두고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땅에서 어렵게 아버지를 만나 밥을 먹고 신발까지 사 신고는 아버지가 유숙하시는 집으로 돌아갔지요.”

 

시나가와의 ‘에바라 중학교’, 그리고 교원양성소로 

15살에 제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6살에 아버지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씨는 일본의 ‘에바라(강원)중학교’에 입학한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에바라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시험도 없이 곧장 입학했지요. 2년 정도 ‘에바라중학교’에 다녔습니다. 2년 정도 다니니까 일본어도 능숙해져 말문이 확실하게 트였고, 그러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니까 ‘에바라중학교’를 졸업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교사가 되기는 힘들겠더군요. 저는 천성이 선생을 하라는 팔자였는지, 어릴 때부터 주인리 석수동에 살던 동네 아이들을 스무명쯤 이곳저곳 몰고 다녔어요. 후배든 친구든 가리지 않고 저를 잘 따르기도 했고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에바라중학교’를 다니던 이씨는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에바라 중학교’를 다니던 도중에 ‘교원양성소’에 편입한다.
“에바라중학교 2년을 마치고 교원 양성소에 편입해서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중학교 2년을 마치고 교원양성소를 거치면 교사가 될 자격을 손쉽게 갖출 수 있었어요. 교원양성소는 3년 과정이었는데, 스무살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게 되었지요. 교원양성소는 여자 둘과 남자인 저를 포함하여 조선 사람 세명이 졸업했어요.” 

 

이규형씨는 일제 강점기던 당시에는 교원양성소를 졸업하여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조선 사람은 일본 본토에서 교사로 활동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조선 사람은 교사 임용시험을 거치더라도 일본에서 교사로 근무할 수 없었어요. 교사로 일하려면 조선으로 다시 건너와야 했지요.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도 금방 조선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가, 21살이 되던 해 6월 달에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건너 왔습니다. 조선을 떠나 일본 본토로 건너간 지 햇수로는 6년만이었지요.”

 

6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철원군 ‘동송공립보통학교’ 촉탁교사로

6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서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 이규형씨는 교원양성소 졸업장을 손에 들고 당시 울진군이 속해있던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가 위치한 춘천으로 올라간다.
“졸업장을 들고 귀국한 다음에 울진으로 돌아와서 울진군청에 들렀더니, 교사가 되는 절차를 밟으려면 강원 도청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도청이 있던 춘천으로 올라갔어요. 비포장 길을 석탄을 때서 연료로 사용하는 버스를 타고 사흘이 걸려 춘천까지 갔습니다. 그때 운행되던 버스는 모두 석탄을 땠는데, 크기는 지금 버스와 비슷했어요. 그러나 힘이 딸려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면 승객들이 하차하여 밀고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엔진을 식히느라 쉬어가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모두들 그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 것을 돌이켜보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한번씩 할 수밖에 없지요.”
 

춘천에 위치한 강원 도청을 찾아간 이씨는 이왕이면 고향 울진에서 근무하고 싶었지만, 도청 관계자의 권유에 따라 당시에 강원도 내에서 최고 학군으로 평가받던 춘천, 강릉, 철원 등 세 지역을 근무 희망지로 신청하고 울진으로 돌아왔다.
 “도청을 찾아가서 교원양성소 졸업장을 보여주고 교사로 취직하고 싶어서 왔다니까, 희망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더군요. 그 당시에는 각급 학교의 교원 관리까지도 도청에서 맡고 있었고, 도청에 소속된 공무원 가운데 고위직은 전부 일본 본토인들이었어요. 그때 강원도 내에서는 춘천, 강릉, 철원에 소재한 학교들이 최고였는데, 도청의 고위 공무원이 ‘당신은 젊고 일본어도 능숙하니까 고향인 울진보다는 그쪽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더군요. 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여 춘천, 강릉, 철원 세곳 가운데 한군데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해 달라고 신청하고는 울진으로 내려와서 무작정 기다렸어요.”    

 

교사 근무 발령을 신청하고 울진으로 내려와서 몇 달 기다리자 강원 도청으로부터 교사로 발령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주인리 석수동으로 돌아와서 몇 달이 지나자 연락이 왔습니다. 그해 늦은 가을에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서숙을 가을걷이 하는데 우체부가 교사 발령장을 들고 집으로 찾아 왔어요. ‘강원도 공립 보통학교 촉탁을 명함. 철원군 동송공립보통학교 근무를 명함’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범대를 졸업하면 ‘훈도’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교원양성소를 졸업하면 ‘촉탁’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어요. 촉탁교사로 발령이 난거지요. 다시 사흘이 걸려서 철원 근무지까지 올라갔습니다. 철원은 인상적인 곳이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울진에서는 다들 가난해서 삼시세끼 밥도 먹고 살기 힘든데 철원 사람들은 대부분 하얀 이밥을 해먹었고, 심지어 쌀로 엿까지 고아먹으며 그렇게 살고들 있었습니다. 철원은 평야가 넓은 만큼 밥 먹고 사는 걱정은 울진보다 훨씬 덜했던 거지요. 고향 울진과 비교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1943년에 한살 연하의 황옥서씨를 만나 결혼, 그리고 명주 스무자 

고향 울진을 떠나 철원군에서 ‘동송공립초등학교’교사로 근무하던 이규형씨는 21살에 초임 발령지인 그 지역의 아가씨를 만나 결혼한다.
 “뒤에 장인어른이 되시는 분이 당시 제가 근무하던 동송초등학교 교장선생님과 절친한 분이었어요. 제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은 처음에는 일본어가 유창한 저를 보면서 일본사람으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뒤에 알고 보니 제가 조선 사람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딸을 저에게 소개시켜 준거지요. 결혼할 당시에 저는 21살이었고, 아내는 황옥서라는 이름의 20살 처자였어요. 아내는 제가 첫 근무지로 발령받아서 근무했던 철원 동송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이었어요. 처음에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처가가 될 집안에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결혼할 형편이 안된다’고 했는데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두 사람이 좋으면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지요.” 

 

철원 동송공립보통학교로 초임 발령이 난 이규형씨는 황옥서씨와 결혼을 하게 됐지만, 막상 북면 주인리 본가에서는 할아버지 한분만 결혼식에 참석하러 올라왔었다고 말한다.
“먼 객지 땅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됐는데, 울진 북면 본가에서는 할아버지 한분만 철원까지 올라 오셔서 손자 결혼식에 참석했어요. 아버지는 일본에 계셨지, 어머니와 삼촌들이야 당장 먹고 살 한끼를 걱정해야 하는 판에 비싼 차비 써가며 집안일을 제쳐두고 멀리 철원까지 올라올 수 없었던 거지요. 그나마 집안을 대표해서 손자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신 할아버지께서 결혼 비용에 보태 쓰라며 명주 스무자를 가지고 오셨기에 요긴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씨는 할아버지와 처가쪽 친인척들의 축복 속에 철원군 일본 신사(神社)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사 앞에서 동네 사람들과 친척을 포함하여 1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어요. 저는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가슴 왼쪽에 꽃을 꽂은 차림으로, 아내는 하얀 드레스 차림을 하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전통 결혼식이 아닌 서양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때가 1943년이었어요.”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에 고향 울진으로 돌아와  

부인 황옥서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맏아들을 낳은 이씨는 결혼식을 올리고 3년이 지나 해방이 된 다음에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맏이를 낳았고 햇수로 3년이 지나서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자 일본 본토 사람인 ‘동송공립보통학교’ 교장도 본국으로 되돌아갔고, 해방 되던 해에 저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전에 우여곡절도 있었지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곧 철원지역에는 소련군이 밀려 들어왔어요. 이북 땅이 되어 버린 거지요. 그 참에 제가 혼자 울진으로 내려와서 작은 아버지와 함께 철원으로 다시 올라갔어요. 철원으로 올라가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대충 짐도 챙기고 해서 울진으로 되돌아 내려오는데, 남북 경계선에서 보초를 서던 소련군인과 마주치면서 그들에게 붙들리게 되었어요. 그때 마침 챙겨온 짐 속에 빨간 천이 한필 있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글쎄요, 당시 소련의 국기 색깔과 맞는 빨간 천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천이 귀할 때라서 그랬는지...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북면 주인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 집으로 돌아온 이규형씨는 북면 ‘소곡국민학교’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곳 석수동에서 소곡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당시 소곡국민학교에 근무하던 교장은 그 시절 유행하던 좌익사상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기에, 저를 포함해 교사 2명이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해 운동회를 하게 되었는데, 교육감이 운동회 하는 것을 지켜보고서는 마음에 들었는지 저를 울진국민학교로 발령을 내더군요. 울진국민학교에 근무할 당시에는 해방 직후다 보니까 각 학교들마다 전통 음악이다, 무용이다 뭐 그런 쪽에 한창 신경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제가 서울까지 오가면서 무용연구소에서 강습을 받고, 울진으로 돌아와서는 방학 때마다 교사들을 모아놓고 무용을 다시 가르치고는 했어요. 그때는 울진국민학교 강당에서 무용도 하고 농악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그 시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도 하고 그랬습니다.” 

 

소곡국민학교를 거쳐 울진국민학교에서 근무하는 도중에 이씨는 6.25 전쟁을 맞았다.
“울진국민학교에서 근무하던 중에 6.25 전쟁이 터졌어요. 6.25 전쟁 때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포항까지 피난을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울진군의 북쪽 지역에 소재한 국민학교들은 대부분 한번씩 옮겨 다니면서 근무를 했고요.”
 

1953년 교감으로 승진, 농악놀이에 대한 열정
1953년 6.25 전쟁이 휴전되던 해에 이규형씨는 평교사에서 교감으로 승진하게 되고, 이와 때를 맞추어 이씨는 울진군 관내의 각급 국민학교에 농악을 보급하는 일에 열성을 쏟게 된다.
“1953년에 교감으로 승진하고 나니까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인 여유도 보다 많이 생기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관내 국민학교에 농악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운동회를 앞두고는 교사들 대여섯명이 꽹과리, 징, 장구를 치고 학생들 오륙십명이 소고(벅구)를 치면서 운동장을 따라 돌면 그 광경은 큰 볼거리였지요. 당시만 해도 벅구를 요즘처럼 문방구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학생들이 사용하는 벅구는 일일이 종이를 오려서 양면을 만들고 손잡이를 만들고 그렇게 흉내만 내기가 일쑤였습니다. 울진 지역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볼 수 있었던 농악놀이는 처음에 그렇게 힘들게 시작이 된 거지요. 또 국민학교 운동회 때면 농악놀이를 지도하는 여선생들이 제 앞에서 쩔쩔 매기가 보통이었어요. 제가 운동회의 농악놀이를 구경하고서는 항상 이런 점은 잘됐고, 저런 점은 잘못됐다고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고는 했으니까요.” 

 

주변의 별다른 도움 없이 열정 하나만으로 관내 국민학교에 농악을 보급하기 시작하던 이씨는 운동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농악놀이가 자리를 잡아간다고 판단될 즈음, 농악놀이 보급과 확대를 위한 예산을 울진교육청에 정식으로 요청하게 된다.
“국민학교에 제대로 농악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교육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예산을 지원받아서 정식으로 농악대를 만들었습니다. 울진군에서는 처음으로 부구국민학교 학생 60명으로 옷차림부터 악기까지 정식으로 갖추어 농악대를 구성한 거지요. 다함께 땀을 쏟으면서 열심히 연습을 했고, 마침내 울진군 관내 교직원 체육대회 자리를 빌려 첫선을 보였는데 아주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어요. 교직원들의 호평을 바탕으로 각 학교마다 농악대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에도 교육청의 협조를 얻어서 서울 무용연구소에 몇 번 더 올라가서 교육을 받고는 했어요. 울진으로 돌아와서는 또 국민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농악을 지도했고요. 제가 88년도에 국민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 시점에 와서는 울진군의 각 국민학교에 거의 농악대가 구성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60~70년대에 처음으로 농악놀이를 보급할 당시만 하더라도 교육청 주최로 국민학교 농악 경연대회를 자주 개최했고, 그때마다 저는 심사위원이 되어 관람하면서 점수를 매겼습니다.”


서면 광회국민학교와 ‘쓰리쿼터’의 추억 

1953년 교감으로 승진되고 난 다음부터 관내에 소재한 국민학교에 본격적으로 농악을 보급시키기 시작한 이씨는 1957년 교장으로 승진하여 서면 ‘광회국민학교’로 부임하게 된다.
“교감으로 승진하고 난 다음 4년 만에 다시 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광회국민학교에 부임했는데 당시만 해도 도로사정과 자동차 편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울진읍까지 한번 나오려면 구불구불하고 폭이 좁은 위험한 도로를 ‘쓰리쿼터’라는 차를 타고 나왔어요. ‘쓰리쿼터’는 원래 6.25 전쟁 때 사용하던 군수용 트럭인데, 판금도 새로 하고 도색도 해서 버스로 개조한 자동차였어요. 50년대 후반 당시 서면 옥방에 살던 주민 한사람이 그 ‘쓰리쿼터’를 돈을 받고 운행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불법 개조차량에 정식 운수업 등록 자동차도 아니어서 어림없겠지만, 당시로서야 오히려 그런 트럭이라도 돈을 받고 태워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할 때였지요. 짐도 싣고 사람들도 한 20여명 태울 수 있는 자동차였어요. 그나마 그 차가 운행하지 않을 때 울진읍으로 나오려면 빙 돌아서 삼척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울진으로 내려와야 하는 불편을 겪었습니다. 광회국민학교와 삼근국민학교에 근무할 때가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당시 후했던 시골인심도 정겨웠고, 삼근국민학교에 근무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인근 산중으로 땔나무를 하러 다니기도 했고.”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여선생님과 ‘산토끼’ 

천생 음악과 무용을 좋아하여 울진군 관내의 국민학교에 최초로 농악놀이를 보급하기 시작했던 이규형씨는 일본에서 ‘에바라중학교’를 다닐 당시의 여선생님과 연결되는 기분 좋은 추억 한 토막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서 학교에 다닐 때 저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는데, 그 당시에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던 여선생님 한분이 계셨어요. 제가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에 그 여선생님께서도 일본 오사카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일본 본토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 가면서 우연히 연락이 닿아 비행장에서 극적으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여선생님은 50대였고, 저는 40대였으니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간 얘기가 됐네요. 그 여선생님 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그 여선생님께서 근무하시는 학교의 수업을 맡을 기회가 있었어요. 오후 시간에 1시간동안 일일교사가 되었던 거지요. 교실 가득 온통 저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1시간 동안 그곳 국민학교 학생들과 박수를 치면서 노래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학교에 다녔던 당시에 배웠던 일본 노래도 함께 부르고, 우리나라의 ‘산토끼’ 노래도 애들에게 가르쳐 주고 하면서 1시간을 보냈어요. 일본의 국민학교 교육방식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기억은 평생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요. 참으로 의미 있었던 시간으로 지금까지도 기억합니다.”


토종 문화의 주류 ‘농악놀이’ 그리고 ‘십이령바지게꾼놀이’  

1988년 부구국민학교 퇴임시 수여받은 동백장
이규형씨는 1988년도에 국민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나서 한동안 울진문화원 이사로 활동하면서 북면, 죽변, 서면, 후포, 평해. 원남면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농악을 지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울진만의 고유 명물인데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던 ‘십이령 바지게꾼’의 일상을 놀이로 재현시킨 장본인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본지『월간울진』에서 지난 10월호(제18호)‘기획특집’코너를 통해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퇴직 후에 더 바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울진문화원 이사에 울진노인대학 학장으로도 3년 정도 근무했어요. 각 읍면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농악을 지도했고, 도 단위 대회에 출전하여 상도 여러 번 탔지요.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을 했었다고 자부하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런 토종문화의 명맥을 어디선가 이어가고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가족... 그리운 나의 아버지 

이규형씨는 부인 황옥서씨와의 사이에 4남2녀를 두었다. 영승(남, 63세), 태용(남, 61세), 정숙(여, 60세), 향숙(여, 57세), 광용(남, 50세), 해용(남, 47세)씨가 그들로서, 모두 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칠순 생일날 가족들과 함께

 

한편 이씨가 여섯살때 돈을 벌겠다고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는 평생 일본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준다.
“제가 일본 본토로 건너가서 아버지와 햇수로 6년을 살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산지 3년 만에 아버지는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 여자와 새살림을 차렸습니다. 그 여자와의 사이에 딸도 하나 두었지요. 아버지는 일평생 일본에서 살다가 소화 47년(1972년)에 이역만리 떨어진 일본 땅에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지 5년 정도 지나서 제가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버님 유골을 모셔다가 이곳 석수동 인근에 묘소를 꾸며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묘소를 꾸미고 난 후 10년쯤 더 사시다가 돌아 가셨어요. 여섯 살에 처자식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골로 한국 땅에 돌아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요...? 없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저도 없었을 것인데요. 그리고 고향 울진에서 생활하던 식구들도 알게 모르게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일수밖에 없고, 제 나이가 90을 바라보는데도 아버지는 항상 그리운 대상으로 남아 있어요.”
  
나이 일흔을 넘긴 이들 가운데 고생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그리고 그 후의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긴 그들이다. 고생도 원 없이 한 그들의 얼굴에 생긴 주름살 하나하나는 비단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안다. 

 

여섯살때 아버지와 생이별하다시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 그리고 어머니 밑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고, 한평생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열정 하나로 관내 학교에 농악놀이를 보급한데 이어,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고서도 여전히 바쁘게 살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농악을 지도하고 ‘십이령 바지게꾼 놀이’까지 재현한 이규형씨. 

 

그도 속절없이 늘어가는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라, 얼마 전에는 급격히 떨어지는 시력을 회복하려고 시내의 큰 병원에 입원하여 장시간 눈 수술을 받았다고 전한다.
고생한 그들, 어디 나이가 들면서 나빠지는 것이 한둘일까...... 진심으로 그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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