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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을 무자맥질로 살아온 해녀(海女), 오성화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8.01.18 17:45
  • 글자크기설정

기성면 구산1리 집앞에서 포즈를 취한 해녀 오성화씨

 

바다의 전사(戰士)인 해녀(海女). 풍부한 해산물의 보고인 바다를 무대로 활동해 오면서 자연스레 길러진 해녀들 특유의 강인한 기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뭍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해녀들에게는 또 다른 생명의 영토인 바다가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일찍부터 바다가 또 하나의 경작지면서 안식처였다. 

 

사시사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눈보라가 휘날리는 영하의 한겨울에도 한국의 해녀들은 바다 속으로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해내는 초인적인 강인함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끈 지 오래이다. 

 

특별한 기계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나잠어법(裸潛漁法)으로 수심 10미터 이내의 비교적 얕은 바다에서 전복, 소라, 미역, 톳, 우뭇가사리, 문어 등의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 

 

해녀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녀는 바다를 접한 곳이면 어디나 흩어져 살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데,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제주도 해녀들이다.
전문가들은 해녀의 발상지를 제주도로 파악하고 있고,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서 생활하면서 자연발생적인 생업수단의 하나로서 해녀가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도 해녀들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부단한 수련을 통해 헤엄치기와 무자맥질을 익히다가 15~16살이 되면 독립적인 한명의 해녀 대접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들 해녀의 정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개는 60세를 전후하여 바다에서의 물질을 그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녀들의 해물 채취 작업은 여름철에 최고조에 달하지만, 추운 겨울철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그리고 한번 물속에 들어가면 보통 5미터 정도의 수심에서 30여 초 간 작업하다가 한번씩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호흡을 고른 다음 다시 무자맥질을 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10미터 이상의 수심에서 1~2분씩을 견디는 경우도 있다. 바다 속에서 작업을 하다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마다 입으로 참고 있던 숨을 몰아서 내쉬는 ‘훠이~’하는 음정이 날카로운 소리는 숨비소리, 솜비소리, 숨비질소리 등으로 불린다. 

 

여성들의 사회, 경제적 참여가 저조하던 오랜 옛날부터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성은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어머니를 따라 헤엄치는 연습을 해야 했고, 15~16세가 될 때쯤이면 해녀로서 한사람 몫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왔다. 

 

바다에서의 노동문화를 일군 해녀들의 물질은 고된 삶을 이겨내기 위한 고통의 몸부림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무자맥질을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목숨을 담보하고 무자맥질을 해서 돈을 벌어도 항상 식구들이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고 전해준다.
그래도 자신이 물질을 중단하면 당장 식구들이 먹고살 방법이 없었기에 추운 한겨울에도 이를 악물고 물질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 나올 때가 없는데... 그러니 그때만 하더라도 목숨 걸고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라는 해녀의 한마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고 나서 무자맥질을 끝낼 때까지는 언제나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녀로서의 자신의 삶을 또 다시 딸자식에게 대물림으로 유전자처럼 이어주는 그들의 삶의 여정은, 어쩌면 바다 속에서의 간섭받지 않는 삶의 도구를 통해서 가난을 잊을만한 자유가 물려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질을 가르쳐준 해녀 어머니,

그리고 계모가 싫어서 ‘해조상’을 따라 육지로 

생명줄인 두룽박, 조래기, 가개, 수경은 해녀들이 무자맥질을 할 때 꼭 필요한 장비이다

19살 되던 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울진 기성면 구산리에 정착해서 일흔이 된 지금까지 해녀로서 살아가고 있는 오성화(70세. 기성면 구산1리)씨는 울진군에 몇 명 남지 않은 현역에서 활동 중인 제주도 출신의 해녀이다.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이미리라는 곳에서 아버지 오송기씨와 어머니 고춘자씨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위로 오빠 한명과 아래로 남동생 한명, 여동생 한명이 있습니다. 제가 딸 맏이로 태어난 거지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엄마 얘기하니까 괜스레 눈물이 나네요.” 

 

타고난 팔자처럼 일평생을 해녀로 살아온 오씨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해녀인 엄마를 따라 바닷가로 가서 헤엄과 무자맥질 등의 물질을 익혔다고 말한다.
“글쎄요, 제가 언제부터 물질을 배웠는지는 기억이 없어요. 아주 조그만할때부터 해녀로 살면서 해산물을 따는 작업을 하는 친정 엄마를 따라 바닷가로 나가서 놀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물질을 배운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수경까지 쓰고서 물질을 배우다보니 열서너 살이 되었을 때쯤에는 이미 해녀로서 한사람 몫을 톡톡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요.” 

 

오성화씨는 자신이 해녀로서 독립할 때쯤이던 열네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수년 후 뱃사람이던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아들이면서 생긴 갈등으로 인해 육지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전한다.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평생 남들 다하는 호강 한번 못해보고, 바다를 농토삼아 자맥질하면서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느라고 고생만 하시다가 불쌍하게 돌아가신 거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5년은 동생들 보살피면서 아버지와 함께 지냈어요. 저야 이미 해녀 기술을 모두 익혔으니 바다에 나가서 작업을 했고요. 그러던 중 제가 열아홉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새 어머니를 본 거지요. 어디 가서 계모를 한명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몇 달 함께 지내다 보니 그저 묵묵히 입 닫고 견디면서 살기가 힘들더군요. 계모와 같은 지붕을 이고 한동안 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계모를 데리고 들어와서 살면서,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이 개떡같이 취급했고, 그러다 보니 도저히 이대로는 못살겠다 싶었어요. 아버지가 계모에게 너무 푹 빠져서 사신 거지요. 이미 나이가 든 저나 오빠는 그렇다고 쳐도 어린 동생들이 받았을 상처는 또 어땠겠어요? 이꼴 저꼴 안보고 차라리 집을 떠나 버리자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그때 육지에서 ‘해조상(海調商)’들이 제주도 해녀들을 모집하고 있기에 그길로 연락선인 큰 발동선을 타고 울진 구산리로 나왔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해녀들을 조달하는 상인들인 ‘해조상’들이 육지에서 제주도로 해녀들을 모집하러 퍽 자주 들어오고는 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육지에는 해녀들이 없었기 때문에 미역 등을 채취할 시기가 되면 꼭 제주도 해녀들을 수십, 수백 명씩 모집해서 데려다가 물질을 시키고는 했지요. 제주를 떠나오는데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가지 말라며 잡지 않더군요.”

 

어린 시절의 어떤 상처는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영 지워지지 않아 

1956년 당시 오씨는 울산이 고향인 최말출씨라는 해조상을 따라 울진 구산리로 건너왔다고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해조상들이 물질이 뛰어난 제주 해녀들을 뭍으로 데려오기 위해 수시로 제주도를 들락거릴 때였어요. 저는 우리 동네와 인근 동네 해녀 수십 명과 함께 최말출이라는 해조상을 따라 울진으로 건너왔어요. 그 해조상은 울산이 고향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죽고 없지요. 그 해조상의 부인도 제주도 출신의 해녀였던 것으로 기억나네요.” 

 

일반적으로 해녀들은 이른 아침을 먹고 바다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작업을 하다가 오후도 늦어서야 물에서 나온다. 지금도 작업이 있는 날이면 해녀들은 하루에 보통 여섯 일곱 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시간을 감당하기가 예사다.   
“울진으로 건너와서는 동료들 서너명이 어울려서 일반 가정집 방 한 칸을 빌려서 밥도 직접 해먹고 잠도 자고 하면서 바다에서 작업을 했어요. 다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다보니 형제자매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다에 들어가서 천추, 도박, 미역, 멍게, 해삼도 따고 문어도 잡고는 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달리 바다 속에는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어요. 해물을 잡아서 뭍으로 나오면 무게를 달아서 판매하고, 수익금은 해녀와 해조상이 절반씩 나눠 먹었지요.”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해녀인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운 뒤 19살 되던 해에 계모가 싫어서 제주도를 떠나 울진으로 건너온 오씨는 10여 년 전 고향을 떠난 후에 처음으로 제주도로 건너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곳 구산리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려서 제주도로 관광을 갔던 적이 있어요. 고향인 남원면 이미리까지 찾아갔지요. 벌써 제가 태어난 집은 허물어져 없어져 버렸는데, 수소문 끝에 오빠와 남동생만 겨우 만나고 돌아왔어요. 막내 여동생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나와서 서울로 시집가서 살고 있지요. 전에 언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제주도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어릴 때 아버지로 인해 계모에게 받은 상처가 깊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더군요. 그래서 안 갔어요. 어릴 때 받았던 어떤 상처들은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영 지워지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울진에 정착하고 3년이 지난 22살에 울릉도 출신의 뱃사람 신인휘씨를 만나서 결혼 

오씨의 동료인 이차선(64세)씨가 물질에서 갓 잡아 올린 문어를 들어 보인다
19살에 계모가 싫어서 제주도의 고향 집을 떠나 울진 구산리로 들어온 오씨는 해조상을 따라서 함께 왔던 동료 해녀들이 작업 철이 지나서 제주도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구산리에 계속 남게 된다.
“해녀들의 작업량이 제일 많은 때는 4월에서 8월 달까지지요. 아무래도 바닷물이 따뜻하니까 물질하면서 작업하기도 수월하고 해산물도 가장 많이 잡히고 하니까. 당시에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나온 해녀들은 오래 머물러도 보통 1년 정도 지나면 제주도로 다시 되돌아갔어요. 육지로 나와서 힘들게 돈을 벌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지요. 해물 따는 한철 돈 벌어서 제주도로 갔던 대부분의 해녀들은 겨울 한철 쉬면서 몸을 추스르고, 3~4월 봄이 되면 다시 육지로 나왔다가 8~9월 달이 되어 바닷물이 차질 때면 다시 돌아가고를 반복했어요. 그런데 저는 19살에 이곳 구산리로 ‘배꼈물질(바깥물질)’을 나왔다가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집이라고 제주도로 돌아가 봤자 보기 싫은 계모 얼굴을 다시 봐야만 했으니까요. 어차피 계모와 문제를 일으킬게 뻔한 저를 아버지인들 반겨 맞아 줄 리가 만무했지요. 함께 왔던 동료들이 제주도로 돌아가는데 울진에 혼자 남았던 거, 살면서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어요.” 

 

19살에 계모가 싫어서 무작정 해조상을 따라 육지로 바깥물질을 나와서 기성면 구산리에 자리 잡은 오성화씨는 3년이 지난 22살에 울릉도 출신의 뱃사람 신인휘씨를 만나 결혼한다.
“3년 정도 구산리에서 해녀로 물질을 하면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남편 될 사람을 만난 거지요. 서로 눈이 맞아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연애결혼을 한 셈이네요. 저보다 나이가 4살 많은 남편은 울릉도가 고향인 사람으로, 그 당시에 후포항으로 배를 타러 나왔었어요. 저는 물질 다니고, 남편은 배를 타고 하다 보니까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지요. 둘 다 울진이 객지다보니 서로 의지하면서 가까워지게 된 거고요. 남편은 7년 전에 67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제주도에서 수십 명의 해녀가 한꺼번에 구산리로 바깥물질을 나왔지만 결혼해서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오씨는 앞서 세상을 떠난 남편 신인휘씨는 배를 부리는 기술 하나는 무척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결코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해준다.
“남편이 배타는 기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어장배, 머구리배, 꽁치배 등 이배 저배 가리지 않고 타면서 돈을 벌었어도 돈 한푼 집에 들고 들어오는 거 못 봤습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술을 워낙 좋아해서 술만 마시면 속도 많이 썩히고 그랬어요. 배를 타면서 돈을 벌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돈이 떨어져야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으니, 그때 시커멓게 다 타버린 내속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어요? 그러나 어떻게 하겠어요? 애들이 커가니 돈 들어갈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고 돈을 벌어야 했지요.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만난 덕분에 결혼하고 나서도 바다만 잔잔하면 늘 바다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배운 재주라고는 자맥질 하는 것뿐이니 궂은 날만 아니면 죽어라고 바다를 들락날락 했지요.” 

 

‘친정아버지, 어머니 덕 못 본 거 신랑 덕은 보겠나 하면서 살아왔니더’라고 말하는 오성화씨는 살아생전에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남편이었지만 막상 죽고 난 후에는 차마 화장을 시킬 수가 없어서 땅을 사서 매장을 했다고 전한다.
“22살에 남편을 만나서 40여 년 동안 함께 살면서 이판사판으로 죽자 살자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막상 죽고 나니까 뜨거운 불구덩이에는 도저히 넣기가 싫었어요. 정말 그렇게 하기 싫어서 일부러 경주에 있는 공원묘지의 땅을 조금 사서 그곳에 묻었어요. 남편은 살면서 평생 제 속을 썩인 게 미안했던지 돌아갈 때는 큰 애를 안 먹이고 떠났지요. 어느 날 12시에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12일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도 큰 고생 안 시키고 쉽게 이승을 떠난 거지요.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든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적은 남편이 죽고 난 다음이었어요. 아득했어요. 벌어 놓은 건 없지, 그래도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최소한 마음 한편에서라도 의지하고 위안도 되고는 했는데... 지지고 볶고 살더라도 남자든 여자든 제 짝이 있어야 든든한 모양입니다. 나이를 떠나서 여자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두렵고 외로운 일입니다.”    
 

이름 석자도 똑바로 쓰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가끔씩 원통하다는 생각 들어

해녀 오성화씨와 그의 가족들
해녀로써 평생 바다에서 물질을 해온 오성화씨는 한글을 전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일정시대 후반에 제주도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니 학교가 어디 있어요? 그 당시 남자들도 다니기 힘든 학교였는데. 기자 양반이 해녀로 살아온 제 얘기를 쓴다고 해도 저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썼는지 알 수가 없을 겁니다. 사진이 실린다면 그냥 사진만 보고 마는 거지. 예전 언젠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급한 일로 집안에서 대출을 받을 일이 있어서 수협에 갔는데, 보증인이 된 저더러 수협 직원이 자필로 이름을 써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름 석자를 쓸 줄 모른다니까 그 직원이 큰 종이 위에 제 이름을 쓰더니 똑같이 따라서 써보라고 그러더군요. 보증인 이름은 다른 사람이 쓰면 안 되고 꼭 본인이 직접 써야 한다면서요. 수협 직원이 써준 제 이름을 따라서 그리는데 몇 십 분이 걸렸어요. 이름 석자도 똑바로 못 쓰고 지금껏 세상을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가끔씩 원통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오씨는 22살에 만난 남편 신인휘씨와의 사이에 4남1녀를 두었지만, 어떤 자식 하나 대학도 못 보내고 부모가 못 배운 한을 고스란히 물려준 것 같아서 가슴 한쪽이 아릴 때가 있다고 말한다.
“위로 마흔 아홉, 서른여덟, 서른여섯 먹은 아들 셋이 결혼을 해서 서울, 부산, 수원 등지에 나가서 살고, 그 다음으로 서른 하나 된 딸이 지금 신랑이 될 사람과 동거를 하고 있는데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으로 있어요. 그리고 스물일곱 먹은 막내아들이 있고요. 이 세상을 통틀어도 못 배운 한과 가난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대물려 주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세상을 살아오면서 모진 풍파를 겪다 보니까 되는 일보다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습디다. 남편은 돈이 떨어져야 집을 찾아 들어오지, 혼자서 물질을 해서 먹고 살아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위의 아들 둘은 중학교도 겨우 마치고서 객지로 나갔어요. 그리고는 저들이 벌어서 결혼해서 그냥 먹고 살지요. 어느 자식 한명 대학교도 못 보냈는데도 혼자 바다에 일 나가서 먹여 살린다고 힘은 힘대로 들었고, 생각하면 참으로 아득합니다.” 

 

당장 먹고 살기에 바빠서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에 오씨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자식들에게 용돈 한 푼 바란 적도, 달라고 말해본적도 없다고 말한다.
“자식들 낳고 50년을 살아오면서 자식들에게 용돈 한번 바란 적이 없어요. 가난하게 살아온 부모 만나서 공부도 제대로 못해보고 빈손, 빈 몸뚱이로 타지에 나가서 저들이 벌어 저들이 먹고 사는데 어떻게 용돈 달라고 하겠어요? 모르지요. 키우면서 잘 먹이고 많이 가리켜서 객지로 내 보냈으면 뭐해 달라, 뭐해 달라 조르기도 하겠지만, 저들도 힘들게 벌어서 먹고 살기 바쁠 텐데... 자식들이 명절을 쇠러 오면 그래도 절 키워준 엄마라고 용돈 하라면서 한두 푼씩 주는데, 손주들 손에 그대로 쥐어 주어서 보냅니다. 오히려 자식들이 용돈을 주면 부담되지요. 부모로서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요즘 울진 앞바다는 숭년이 들어서 해먹을게 없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바다에서의 물질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오성화씨는 요즘 바다 속에서는 해먹을게 없다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1950년대 중반에 처음 울진 구산리로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바다 속에 들어가면 물건이 천지였어요. 널린 게 해물이다 보니 해녀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서 작업을 해도 서로 따내기에 바빴지요. 단 몇 시간만 작업을 하더라도 두룽박 밑에 달린 조래기 가득히 비싼 값에 팔수 있는 해산물이 그득했는데, 언제부턴가 바다 속에 해먹을게 없어 졌어요. 물건이 없지요. 울진 앞바다에 숭년(흉년)이 졌어요. 그러니 근래 들어서는 부쩍 노는 날도 많아졌지요.”    

 

현재 기성면 구산리에서는 오성화씨, 이차선(64세)씨, 유차선(58세)씨 등 3명이 바다에서 해녀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성화씨만 제주도 출신의 해녀이고, 이차선씨와 유차선씨는 울산 방어진 출신의 해녀이다.
“이제 더 이상 해녀의 물질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산소통을 둘러메고 바다에 들어가면 한시간 이상씩 버틸 수 있는데, 힘들고 고달픈 해녀 일을 왜 배우려고 하겠어요? 지금 구산리에는 해녀가 3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줄면 줄었지, 더 이상 해녀 숫자가 늘어나지도 않겠지요.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서 미역을 할 때쯤이면 어촌계에서 작업을 하자고 연락이 옵니다. 우리가 먼저 작업을 가자는 얘기는 못합니다. 먼저 어촌계에서 불러 주어야지요. 미역 철이 되어 우리 세명이 물건을 다 못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서 해녀들을 불러 옵니다.” 

 

일평생 해녀를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오씨는 겨울 한철, 3~4개월은 일이 뜸해서 그저 놀 수밖에 없다고 전해준다.
“겨울 한철은 작업이 없어요. 스펀지 잠수복을 입어도 겨울에는 물이 차가워서 춥고 봄이 되어 미역을 할 때까지는 그저 놀지요. 설을 쇠고 3~4월 달이 되어야 미역도 하고 그러면서 한철 또 바빠지지요. 음력 2월 그믐 밥을 먹어야 해동이 되고, 그러면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거지요. 해동이 되면 미역부터 시작합니다.” 

 

해녀로서 특별한 금기는 없어, 1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 밤의 ‘용왕 멕이기’ 

오성화씨는 바다를 자맥질하는 해녀들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금기시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바다 속의 물건을 하려고 무자맥질을 할 때라도 특별하게 가리고 따지고 하면서 금지하는 것은 없어요. 그러나 1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에 ‘용왕 멕이기’는 잊지 않고 꼭 하지요. 정월 대보름날 밤에 해녀들이 각자 혼자서 하는데, 달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시간에 맞춰서 집에서 출발해서 바닷가로 향합니다. 밥을 해서 참종이(문종이)에 싸서 바다에 던지는 해녀도 있고, 입쌀을 봉투에 넣어서 바다로 던지는 해녀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정성껏 입쌀로 밥을 한 다음에 두 숟가락 정도의 밥을 참종이에 싸서 들고, 막걸리와 잔 하나를 챙겨서 보름달이 떠오를 때 가까운 바닷가의 짬으로 갑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왕님께 올 1년 동안 사고 없이 물건 많이 하게 해달라고 빌고는 참종이에 싼 밥을 바다를 향해 던지지요. 막걸리를 잔에 따라서 바다에 붓는 일도 빠트리지 않고요. ‘용왕 멕이기’는 정성이지요. 정월 대보름날 밤에 용왕을 멕이고 나면 나름대로 마음의 위안을 크게 받기도 하고요.”

 

2006년 3월 9일, 구산1리 효도관광으로 다녀온 도담삼봉

 

스펀지 잠수복, 두룽박, 조래기, 가개, 뽕돌, 오리발, 그리고 숨비소리  

후천적으로 체득한 강인한 기질로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조차 자신들의 삶의 영토로 끌어들인 해녀들. 

 

그들은 물질을 할 때 스펀지로 만든 잠수복과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두룽박(테왁), 조래기(망사리)에, 허리에는 납덩어리로 만들어진 뽕돌을 달고, 양 발에는 오리발을 신고, 한손에는 해산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도구인 ‘가개(호미, 갈고리)’를 들고 잠수한다.
“처음 제주도에서 해녀 일을 배울 때만 하더라도 스펀지 잠수복이 나오기 전이라서 흰색 광목으로 만든 적삼을 위에 입고, 아래에는 검정 광목으로 만든 팬츠 비슷하게 생긴 것을 걸치고 바다에 들어갔어요. 광목으로 만든‘물소중이’가 스펀지 잠수복으로 바뀐 건 아마 80년대쯤 들어서서였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한 30년 되었네요.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두룽박은 우리들의 생명줄입니다. 그것 때문에 안심하고 바다 속을 들락거리면서 무자맥질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 어머니 때만 하더라도 두룽박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으로 만들어졌었어요. 바짝 마른 박 덩어리에 의지해서 위험천만하게 바다를 들락거렸던 거지요. 두룽박 밑에 달린 조래기도 지금처럼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억새나 짚풀 같은 풀로 만들었고요. 오리발을 신고 작업한지도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 해녀 일을 배울 초창기에는 맨발로 작업을 했고, 수년전까지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신는 실내화를 신고 물에 들어가서 해물을 따는 작업을 했어요. 성게 가시 같은데 발을 찔려 다칠 우려가 있어서요. 지금이야 세월이 참 많이 좋아진 거지요. 더 이상 해녀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도 없고, 그저 남은 우리들이 물질할 수 있을 때까지 해녀로 살다가 가는 거지요.” 

 

보충 인터뷰를 위해 두 번째로 해녀 오성화씨를 찾았을 때는 다행히도 운이 좋아서 기성면 구산리 어촌계에 소속된 해녀 3명의 작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바다로 나가서 정오가 넘은 시각에 작업을 마치고 뭍으로 올라온 오씨는 바깥 기온이 떨어져서 바다 속 수온도 많이 차다고 전한다.
“구산리 해녀 3명 가운데 제일 어린 막내가 벌써 58살인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추위를 더 타는 것 같아요. 물질을 나서기 전에 마당 한쪽에 마련한 장작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출발합니다. 물질을 다녀올 때쯤이면 아궁이 위에 걸린 솥의 물이 뜨겁게 끓어 있지요. 그 물로 짠물이 베인 몸도 헹구고 잠수복도 씻어 말리고 그럽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한평생을 해녀로 살아온 이들의 가쁜 숨비소리와 그 소리만큼이나 절박했던 그들의 가없는 절망.
물속에서 솟구쳐 나오며 ‘훠이~’하는 안도의 숨비소리는 짙은 회색빛 색깔로 그들이 살아있음을 허공에 알리고, 그런 삶의 무게만큼이나 그들이 안고 사는 두룽박은 또 다른 희망과 자유의 색깔로 주변을 하얗게 물들인다. 

 

당장 밥 한끼가 아쉬웠던 시절,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바다에 대한 믿음 하나로 바깥 물질을 나와서 평생 기성면 구산리에 뿌리를 내린 오성화씨. 

 

결코 지칠 수가 없었던 그녀의 일상과 고된 노동은 끝까지 가족을 지키는 주춧돌이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면서 자신의 생명줄인 두룽박을 안고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건져 올린 그녀의 물질은 우리네 부모님들의 굳센 삶에 다름 아니다. 

 

오씨의 이마를 가로 지르며 깊게 패인 주름살은 그녀가 평생 겪어왔을 고된 노동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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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을 무자맥질로 살아온 해녀(海女), 오성화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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