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일(시인, 수필가) |
각설하고, 링거액을 주렁주렁 매단 채 널브러진 몰골을 보고, 뜨거운 것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내 발로 걷는 것 보다 쉬운 일이 어디에 있으랴만, 한 걸음 떼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겨우내 비틀비틀 비지땀을 흘리다가 해동(解冬)이 되면서부터 함께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고 기한이 있다”고 했던가.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있듯,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게 노인 건강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신록이 싱그러운 계절,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동유럽을 가리키며 배낭을 꾸리자고 부추겨 본다. ‘여행은 도전’이라며 살며시 웃는 그림자 같은 내 길 벗, 이쯤 되면 찰떡이 아니라 본드 종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개나리 꽃길을 산책하는 게 큰 낙이었던 어느 노(老)시인이 그 아내를 먼저 보내고 탄식처럼 읊은 싯귀가 있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체념과 달관의 애틋한 정감이 긴 여운으로 가슴에 닿는다. 내 몇 번이나 더 하늘을 날 수 있을까. 걸음걸음 저무는 삶, 매 순간이 소중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나는 분명 이 순간의 주인이요 이 순간의 산물이다. 삶은 이 순간의 연속이요 나의 내일도 이 순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두려움도 없고 죄의식도 없는 대 자유 속에서 나와 인연된 모든 생명과 더불어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가 내 몸이다는 유기체(有機體)를 통하여 경험하고 표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에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을 느낀다.
오월 초열흘, 서둘러 길을 나선다. 독일을 거쳐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에 점을 찍고 돌아오는 말 그대로 붕정만리다. 공항은 언제나 생기가 넘친다. 떠나는 무리들은 설레임이 파도를 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흐믓함이 강물로 흐른다. 내 늘그막에 아내와 함께 이 대열에 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맑고 푸른 하늘, 대지(大地)를 박차고 날아 오른 기내에서 멀어지는 산하(山河)를 내려다본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아도 크고 작은 것들이 다 거기서 거기다. 부질없는 세상살이, 내 이제 무엇을 위해 초조하고 황망해 하겠는가. 와인을 곁들인 기내식을 아내와 함께 느긋하게 즐긴다. 주름진 눈가에 번지는 노을이 나른나른 감미롭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돈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인(哲人) 아리스토 텔레스는 행복으로 규정하며 이성적(理性的)인 삶과 중용(中庸)의 도덕론(道德論)을 설파했다.
사람은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그릇이 다 다르듯, 생각이나 이성(理性)도 다를 수밖에 없다. 미꾸라지는 시궁창에 있어야 행복하고 원숭이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야 즐겁다지 않는가. 모호한 논리에 살며시 웃는다.
미로 같은 사유(思惟)에 헤매이다가 해가 기울 즈음,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린다. 이제부터 펼쳐질 새로운 풍물에 나는 금새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가 된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갈 소중한 순간들을 지혜의 눈으로 담아내리라.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설레임으로 즐기는 과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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