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도부꾼으로 살았던 이복록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11.20 17:59
  • 글자크기설정

 

주변에 대형마트가 즐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고 편리하게 구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생계를 위해서 수백리 길을 마다 않고 걷거나 차를 이용하여 하루 종일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던 도부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도붓장수, 여상, 행상으로 불리기도 했던 도부꾼은 각종 생필품을 이고지고 걸어서 때로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먹을거리와 간단한 생필품을 팔던 장사꾼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울진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이 불편한 오지로서 전국적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런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울진은 내륙지방과의 교역이 힘들 수 밖에 없었는데,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해안지역인 울진과 내륙지방인 봉화를 연결하는 험준한 12령 길을 통한 상업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에 이른다.
 

울진과 봉화 지역, 동서를 연결시키며 상행위를 했던 상업교류의 선구자는 단연 보부상이 으뜸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보부상 조직이 중앙과 지방 단위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어 갈 무렵에, 울진과 봉화 지역의 시장을 연결하는 보부상 조직 또한 체계를 구체화시켜 갔다고 전문가들은 알려준다.
 

그러나 전국적인 규모의 보부상 조직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부터 일제가 제정한 ‘조선 회사령’과 ‘시장규칙’ 등의 법률에 의해 반강제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국적인 보부상 조직의 몰락과 때를 같이하여 울진 지역의 보부상단 조직 또한 와해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보부상 조직의 와해에 따라서 장사꾼들의 형태는 동일한 물목을 판매하는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는 개별 행상단의 형태로 명맥이 계속 이어져 나간다.
 

12령 길에 인접해 살았던 주민들은 ‘12령 길을 따라 이동하는 개별 행상들의 모습을 1950년 6.25 전쟁 이전까지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12령 길을 따라 쪽지게를 지고 다니며 울진과 봉화지역의 장시를 주도하던 선질꾼(등금쟁이, 바지게꾼)들의 명맥이 끊어진 후 등장했던 개별 행상에 이어, 1953년 6.25 전쟁 휴전 후에 새로 등장하는 행상이 도부꾼이다.
 

‘도부’ 또는 ‘도부상’이라고도 불렸던 도부꾼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울진 지역은 6.25 전쟁이 휴전된 1953년 이후에도 3~4년 정도 지역 출신 공비들을 포함하여 미처 이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잔당들이 산속에 숨어살며 민가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공격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 기간 동안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여자들이 딸린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도부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생업의 최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이들 도부꾼은 울진 지역에서 생산된 미역, 소금, 생선 등을 이고 가서 봉화지역 장시를 돌면서 팔아 돈을 받거나 쌀, 잡곡, 고추, 감자 등으로 바꾸어서 되돌아왔고, 다시 이쪽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이문을 남겼다. 

이들 도부꾼은 한국 전쟁 이후에 울진과 봉화 지역에 새로 등장한 물자교류의 주역이었다.
 

울진, 죽변, 북면 지역에서 출발한 도부꾼들은 처음에는 울진~샛재~소광리~봉화를 도보로 왕래하며 장사를 했지만, 현재의 36번 국도를 이용하는 버스가 정기적으로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로 완행버스를 이용하여 울진, 봉화 지역을 왕복하며 상행위를 이어갔다.


울진읍 대흥리 ‘밤나무골’에서 태어나 ‘미파골’로  
어쩌면 이 시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최후의 도부꾼으로서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내달렸던 완행버스를 이용하여 20여년 울진~봉화 지역을 오고가면서 어물 장사를 했던 이복록(여. 80세. 울진군 죽변면)씨는 도부꾼의 역사를 육성으로 들려줄 마지막 증언자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오래된 보부상과 개별 행상에 이어 등장한 도부꾼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온 이복록씨의 고향은 울진읍 대흥리 본동 북쪽 산 아래에 위치하는 ‘밤나무골’이다.
 

“지금은 태어난 집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지만, 대흥리 본동의 밤나무골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전주가 본관인 이석만씨요, 어머니는 최을랑이었지요. 예전에는 자식이 생기면 그저 숙명이라 여기면서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죄의식도 없이 어쩌다 자식이 들어앉아도 병원에 가서 손쉽게 떼어 내기도 하지만 그때야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할 때였지요. 7녀2남의 장녀로 태어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위로 딸을 다섯 낳고 아래로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내 밑으로 재록, 복동, 복만, 복자라는 이름의 여동생 넷과, 창해, 창수라는 이름의 남동생 둘이 있어요. 서면 삼근리에 살던 재록이라는 여동생만 수십 년 전에 생을 달리 했지요. 태어나서 열여섯이 될 때까지 밤나무골에서 살았어요.”
 

일제 강점기 어렵던 시절에 대흥리 ‘밤나무골’에서 태어난 이씨는 한달 동안 야학에 다닌 덕분에 간단한 셈을 하고, 기초적인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학교는 문턱에도 못가 봤지만 열 몇 살 때던가, 대흥리 본동에 있던 야학을 한달 동안 다녔어요. 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박도명이라는 분이었는데, 울진농민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던 분이지요. 일제 시대였던 당시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외우지 못하면 차도 못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야학을 다니면서 그것을 배웠어요. 야학선생님은 당시에 좌익사상을 가졌던 분이었는지, 6.25가 끝나고 인민군이 이북으로 후퇴하고 난 이듬해에 신림 어딘가에서 국군들에게 죽었다고 들었어요.”
 

16세가 될 때까지 태를 묻은 곳, 대흥리 본동‘밤나무골’에서 생활하던 이복록씨는 ‘밤나무골’을 떠나 온 가족이 함께‘미파골’로 올라간다. ‘미파골’은 ‘밤나무골’이 있는 대흥리 본동에서 도보로 20여분 더 올라가서 위치하는 더욱 궁벽한 산골이다.

 

이복록씨의 안방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이복록씨와 남편 이봉업씨의 사진


결혼, 보리쌀 한되와 좁쌀 한주발로 신혼생활 시작
‘미파골’로 이사를 가서 부모님 밑에서 가사를 거들면서 2년을 더 지낸 이씨는 중매를 통해 시집을 가게 된다.
 

“미파골로 올라가서 2년쯤 더 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년을 살고 3년 만에 시집을 갔어요. 미파골에서 가진재 가는 쪽의 ‘쉰배미’라는 곳에 살던 김씨 할매라는 분이 중매를 했습니다. 내 나이 19살인데 배필로 정해진 신랑은 나보다 16살이 더 많은 이봉업이라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열아홉, 남편은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서면 삼근리에서 태어나서 생활해온 남편의 형님집이 울진읍 고성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남편은 결혼할 당시에 울진읍 고성리에서 생활하고 있었지요.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아버지 되시는 분은 남편이 11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고, 시어머니 되시는 분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딴 영감을 얻어서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린 상태였어요. 그래서 남편은 맏시숙이 되시는 분 밑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나도 결혼하면서 자연히 손위 동서 밑에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남편은 3남 1녀 가운데 셋째인데 위로 누나 한분과 형님 한분이 계셨고, 아래로 시동생이 한명 있었어요.”
 

19살에 16년이나 나이 차이가 벌어지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이복록씨는 울진읍내에서 신림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오실골’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겪어야 할 고생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남편의 형님 집에서 오실골에 신혼살림이라고 내 주었는데 보리쌀 한되, 좁쌀 한주발을 주고, 삐루병(맥주병)에 간장 한병을 담고, 뚝배기에 장을 퍼 담아 주더라고요. 그것이 신혼살림을 꾸려 가는데 보태 쓰라면서 시댁에서 내어 주는 전부였지요. 보리쌀은 그날 남편과 밥을 해서 먹고 나니 바닥이 났어요. 힘들었지요. 그러나 그 시절에 대한 원망은 지금까지도 별다른 게 없어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 때였고, 남편의 형님집도 뭐라고 내어 줄 것이 있었어야지요. 굳이 셈하지 않더라도 너무 뻔한 사정이었지요.”
 

결혼을 했더라도 남자나 여자나 여전히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편하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씨는 얘기한다.
“살림하라고 남편의 형님 집에서 보태준 보리쌀은 하루 만에 떨어지고 어쩌겠어요? 할 수 없이 신혼살림이라고 난 ‘오실골’에서 ‘신림’을 거쳐 ‘쉰배미’를 지나고 ‘암지다람’을 넘어서 ‘미파골’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지요. 친정엄마에게 졸라서 좁쌀 1말, 쌀 2되를 얻어서 돌아왔습니다. 정말 큰 부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험하고 가파른 수십리 산길을 오가야 했고, 친정도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친정은 농사라도 짓고 있었으니 비빌 언덕은 거기밖에 없었지요.”
 

이복록씨의 남편인 이봉업씨는 결혼할 당시에 산판(山坂)에서 일을 하는 작업자였다.  

“남편은 산판에서 나무를 내는 일을 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돈은 꽤 버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까 월급이라도 타게 되면 여기도 또 저기도 외상술을 마신 술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술값을 갚기에 바빴으니, 당최 집에 가지고 들어올 돈이 있어야지요.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고 하다 보니 집안의 살림살이는 항상 쪼들릴 수밖에 없었지요.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내가 나서서 벌어야 했습니다. 새댁이라며 얌전뺄 시간도 없이 팔뚝 걷어붙이고 이집 저집으로 일거리를 찾아 다녔지요.
 

오실골에서 살다보니 자연히 가까운 쉰배미, 신림, 울진 월변 인근을 다니며 논일, 밭일 하는데 품을 팔았어요. 논일과 밭일이야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배운 재주고,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밭도 매고 모도 심어주고 하니까 그래도 먹을 건 생겼어요. 이 사람도 곡식을 주고 저 사람도 곡식을 주고 그랬지요.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죽어라고 만드는 것이야 아니겠지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진읍 ‘오실골’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이복록씨는 대흥리 ‘건잠’으로 이사를 가서 또 한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예전에 신림을 거쳐 대흥리로 나 있던 신작로를 가다보면 가진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금장광산’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남편이 산판일을 접고 ‘금장광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남편을 따라 대흥리 ‘건잠’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미파골’ 윗동네에 자리하던‘안미파골’부근의‘웅굴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지요. ‘웅굴골’은 외진 산골이기는 해도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서 걸어서 삼사십분 걸리는 곳이었어요. 그런 만큼 의지하는 마음도 컸고 마음도 편했지요. ‘웅굴골’에서 8년을 살았으니 꽤 오래 산 셈이네요.”

 

이복록씨의 친정 아버지 이석만씨의 회갑 기념사진. 중앙 갓쓴 분이 아버지며 우측 바로 뒤가 이복록씨

 

인민군보다 더 악랄하게 주민들을 괴롭혔던 지역 빨갱이   
대흥리 안미파골 ‘웅굴골’에 살 때 이복록씨는 6.25 전쟁을 겪었다. 그곳에서 6.25를 전후하여 빨갱이들의 잔혹한 실상을 보고 들은 이씨는 인민군보다 지역 빨갱이들이 훨씬 더 악랄했었다고 기억한다.
 

“24살 때였지요. ‘웅굴골’에 살면서 6.25사변을 겪었어요. 그때 이미 큰딸과 둘째딸을 낳았을 때였습니다. 웅굴골에 있던 우리 집은 주변에 인가가 전혀 없는 독가촌이었어요. 사람이 죽어도 모르고 살아도 모를 만큼 외지고 후미진 골짜기 안쪽에 집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친정 부모님이 계시던 ‘미파골’에 터를 잡고 살고 싶었지만, ‘미파골’에는 집을 지을만한 집터가 없어서 ‘웅굴골’에 살게 된 거지요. 산중이 다 그렇잖아요?”
 

전후좌우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과 빠끔히 쳐다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외진 산중 독가촌에 살았던 이씨는 ‘6.25는 물론, 휴전 후 4~5년간 지역 빨갱이들이 산속에 숨어살면서 활발하게 움직일 때 죽지 않고 목숨 부지한 것은 다 조상덕’이라고 말한다.
 

“웅굴골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악구산’이라는 산이 있어요. ‘악구산’이 울진 지역 인근에서는 가장 유명했던 빨갱이 아지트였지요. 지방 출신 빨갱이들이 많았어요. 경찰이나 군인들로 구성된 토벌대가 ‘악구산’으로 공비를 잡으러 올라가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저들끼리 신호를 주고받고 해서 다 도망가 버리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어떤 때는 도망가는 빨갱이들 몇 명을 총살시켜서 끌고 내려오기도 하고, 언젠가 ‘악구산’ 빨갱이 아지트를 군인들이 급습했는데, 땅굴 안에서 꿀단지도 발견하고 소고기 뭉치도 발견하고 그랬지요. 모두 다 부근 민가에서 훔치거나 협박해서 뺏고 한 게 아니겠어요? 군인들이나 빨갱이들이나 참 많이도 죽고 다치고 했지요. 차라리 6.25전쟁동안에는 덜했어요. 6.25전쟁 때 울진에 나타났던 인민군보다는 6.25가 끝나고 난 다음에 ‘악구산’에서 활동했던 빨갱이들이 훨씬 더 지독스럽게 주민들을 괴롭혔지요. 몇 년 동안 다들 일도 제대로 못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이씨가 살던 ‘웅굴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미파골’에는 이씨의 여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인근에서는 그나마 먹고 살만한 집이었기에 빨갱이들에게 숱하게 약탈을 당했다고 이씨는 전한다.
 

“아래로 둘째 여동생이 ‘안미파골’에 살고 있었어요. 역시 우리 집과 다를 바 없는 독가촌이었습니다. 빨갱이들이 여동생네 소도 훔쳐가고, 토종벌통도 털어가고, 힘들게 짜 놓은 명주도 뺏어가고 했습니다. 여동생네가 대흥리 인근에서는 빨갱이들에게 제일 큰 수난을 당했지요. 부근에 살던 여동생네가 빨갱이들에게 소도 뺏기고, 벌꿀도 뺏기고 했다니까 무서워서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샌 날도 부지기수였어요. 언젠가는 애들을 들쳐 업고 수십리 산길을 걸어서 신림국민학교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 신림국민학교 옆에 ‘노랭이골’이라고 있는데 온 동네 소는 모두 다 그곳에 매어놓고 수십명이 학교 안에서 피난했어요. 급한 김에 빈손으로 피난을 갔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밥과 김치를 얻어먹었어요. 빨갱이들이 한창 설칠 때는 낮에 동네 사람들이 순번을 정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보초를 섰는데, 신림으로 피난 가던 날은 마침 남편이 망을 보는 날이었어요. 어느 순간 빨갱이가 온다고 동네를 향해서 입으로 ‘워워’ 소리를 치더니 혼자 도망가고 없더군요. 그때 목숨 앞에서는 누구나 참 매정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금장광산에서 돈을 많이 벌었던 남편, 그리고 시동생

이복록씨는 남편 이봉업씨가 ‘금장광산’에 다니는 동안에는 꽤나 큰돈을 벌었었다고 기억한다.
“그때만큼 계속 돈이 벌렸더라면 아마도 평생 돈 걱정 없이 부자로 살았겠지요. ‘금장광산’에 다니면서 한달에 한번씩 간조날(월급날)이면 작게는 큰 벤또(도시락) 정도의 뭉칫돈을 집으로 들고 들어왔고, 많은 달에는 작은 포대 가득히 돈을 담아서 들고 들어왔어요.”
 

이씨는 그 돈을 착실하게 모아서 기름진 논을 다섯 마지기나 샀다고 말한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모아서 기름진 논 닷마지기를 장만했지요. 2년 정도 그 논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다가 시동생이 먹고 사는 것이 너무 어렵다면서 형에게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해왔고, 그저 사람만 좋은 남편이 그 논을 몽땅 팔아 시동생 주고 나니까 하나도 남는 게 없더군요. 시동생 역시 돈을 빌릴 때는 빠른 시일 안에 꼭 갚겠다고 했지만, 어디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만만하던가요...?”
 

남편이 ‘금장광산’에 다니면서 벌어온 돈으로 어렵게 마련한 논 댓 마지기를 팔아서 시동생에게 고스란히 건네준 이씨는 다시 사는 것이 막막해졌다고 술회한다.
“남편이 땅속에서 광산을 파면서 힘들게 벌어온 돈이라고 그 돈은 무서워서 써보지도 못했어요. 고등어 한손도 사먹지 않았지요. 집안 식구들 먹고 입는 건 내가 다른 집 논밭일 거들어주면서 그렇게 충당했어요. 나무장사도 한 3년 정도 했습니다. 대흥리‘웅굴골’에서 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수십리 산길을 걸어서 울진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시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그 나무를 사주면 홀가분했지만 대나리나 말루 사람이 사게 되면 그곳까지 또 머리에 이고 배달해 주어야 했으니 그 고생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어요? 남편이 4년 정도‘금장광산’에 다니며 힘들게 번 돈은 논 닷마지기를 샀다가 팔아서 시동생에게 빌려 주면서 그렇게 끝이 난거지요. 고등어 한손도 안 사먹고 알뜰히 모은 돈인데 그 돈을 엉뚱한 사람이 먹고 삭힌 겁니다.”
 

남편이 다니던 ‘금장광산’도 폐광하면서 끝이 났고, 열심히 모은 돈도 시동생에게 모두 건네준 후 다시 살림살이가 쪼들리게 된 이복록씨 가족은 죽변면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우리가 뼈 빠지게 모은 돈으로 샀던 논 팔아먹은 시동생이 죽변에 살고 있었어요. 빌려준 논 값 받는다고 죽변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순진하게도 시동생이 사는 집 옆으로 이사를 와서 계속 조르면 그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시동생에게 빌려준 돈을 받겠다고 작심하고 죽변면으로 이사를 들어온 이복록씨는 현재 비상활주로 밑 굴다리 옆에 자리를 잡고, 죽변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은 비행장 굴다리 앞에 도로가 뚫렸지만, 그때만 해도 산 밑의 푹 꺼진 땅에 집도 있고 논밭도 있고 그랬어요. 그 당시에도 그곳은 외진 곳이었지만 세집이나 살았습니다. 남편은 죽변으로 들어와서 시동생이 하고 있던 건축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허구한 날 돈은 안 갖고 들어오고, 돈만 생기면 술이나 받아먹고 하면서 그렇게 고생을 시켰어요. 바가지도 참 많이 긁었지요. 그래도 인정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시집 식구는 물론이고, 처가 식구들이 찾아와도 그렇게 반갑게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생기기라도 하면 자기 주머니에 못 넣어두고 거꾸로 털어서 바닥에 쏟아놔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지요.
 

사라호 태풍때 대흥리 ‘미파골’ 친정집 뒷산에서 산사태가 나서 남동생 두명과 친정 엄마가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집에서 한달쯤 숙식하면서 병원을 다니고 요양했어요. 그리고 막내 여동생도 결혼해서 한참 살기 어려울 때 우리 집에 와서 일년 가까이 생활했는데, 남편은 처가 식구들이 와 있다고 그저 좋아하고 뭐라도 하나 잘 해주려고 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남편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그 양반은 창자 가득 맹물만 가득한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생기면 주머니를 거꾸로 털어서 쏟아버려야 하는 성격을 가진 남편으로 인해 집안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일은 항상 이씨의 몫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집으로 돈 한푼 안 가지고 들어오지만 애들은 커가고,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지요. 죽변 장날이면 ‘섭실’이나 ‘화성리’에서 장보러 오는 시골사람들 과일을 사서 시장 안에 좌판을 깔고 앉아 과일을 팔았습니다. 물건 값으로 돈도 받고 오징어도 받았어요. 좋은 과일은 팔고 나쁜 과일은 집으로 가져와서 애들에게 먹였습니다.”

 

‘엿 부스러기를 얻어 먹이며 키우더라도 자식들은 남 주지 마라’ 

이복록씨의 남편은 쉰여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씨의 나이 마흔이었다.
“남편은 평소 술병이 있는데다가, 어느 날 넘어지면서 바람이 살짝 와서 자리에 눕더니 그길로 영영 세상과 이별했어요. 그때가 막내딸이 해끗해끗 웃을 때였지요. 남편이 죽기 전에‘내가 죽고 나면 엿장수라도 얻어 살면서 엿 부스러기를 얻어 먹이며 애들을 키우더라도 절대로 시댁에도 애들 주지 말고, 친정에도 주지 말고 꼭 직접 데리고 살라’고 유언을 했어요. 내가 엿장수라도 얻어 주고 나서 죽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더니 한 사나흘 지나서 세상을 떠났어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몰랐습니다.”
 

이복록씨는 19살에 만난 남편 이봉업씨와의 사이에 아들 없이 딸만 일곱명을 두었다.
춘옥(64. 울진읍), 분자(59. 서울시), 두래(54. 부산시), 분옥(49. 태백시), 선자(45. 부산시), 성남(43. 부산시), 남미(40. 충남 예산)가 그들이다.   
“딸 많은 집의 맏딸로 태어났는데, 무슨 운명인지 나도 딸만 일곱을 두었어요. 여섯명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고, 한명은 남편이 데리고 들어왔지요.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남편과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딸이 한명 있는 줄은 몰랐어요. 결혼해서 울진읍 오실골의 남편 형님 집에서 생활한지 석달쯤 됐을 때 갑작스런 소낙비가 왔는데, 급한 마음에 맏동서가 남편보고 ‘춘옥이 아재요, 비설거지 좀 하소’하고 외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춘옥이가 남편의 딸이구나 하고 직감했어요. 남편에게 따져 물었더니 자기 딸이라고 실토를 했어요. 그때 춘옥이가 첫돌을 겨우 지났을 때였지요. 내딸 네딸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먹이고 입히며 키웠습니다. 지금은 그 딸이 가장 가까이에 살고 있으면서 내 속으로 낳은 친딸들보다 잘하고 있어요.”
 

자식들 얘기 끝에 이복록씨는 남편의 숨겨졌던 과거와 그의 여인들에 대해 담담하게 들려준다.
“원래 남편의 누나가 원남면 매화리의 장씨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돈을 벌겠다고 이북 함흥으로 올라갔는데, 남편도 누나를 따라서 이북으로 올라갔다가 어느 집 데릴사위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그 새댁이 지랄병이 있어서 울진으로 다시 몰래 도망을 왔고, 죽변 화성리 ‘용장’의 어느 집 과부와 일을 벌여서 딸을 하나 낳았다고 전해 들었어요. 그러던 도중에 그 과부의 신랑이 일본에서 돌아오니까, 과부 아닌 과부가 아이만 내 남편에게 맡기고 멀리 도망을 친 거지요. 죽기 전까지 강원도 홍천에 살면서 울진을 왔다갔다 한 걸로 듣고 있어요. 그 여자 인생도 참 기구하지요. 살면서 4명의 남자를 만나 각각 성이 다른 4명의 아이를 낳았다니까요...”

 

나이 마흔에 남편 잃고 죽변~봉화를 오가는 도부꾼으로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고 난 이씨는 4년 만에 비상활주로 굴다리 인근에 살던 집을 팔고 현재 살고 있는‘금바우’로 이사를 한다.
“굴다리 옆에 있던 집을 팔아봤자 헛간 값이었어요. 집과 딸린 작은 텃밭 하나를 팔아서 그때 돈으로 9만원을 손에 쥐었지요.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금바우’로 이사를 왔어요. 원래 이집은 문은 가마니로 둘러 쳐져있고, 지붕은 영개(이엉)를 엮어서 위에 돌멩이를 얹어 두었던 오징어 건조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네 번이나 집을 고쳐지었는데도 사는 게 이 모양입니다.”  
 

이복록씨는 남편이 죽고 난 다음 당장 먹고 살 일이 참으로 막막했다고 전한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가정에 별다르게 돈 보태준건 없었지만 죽고 나니까 딸린 애들은 많지... 우선 먹고 살 일이 급해서 당시에 생필품으로 잘 팔리던 사카린, 성냥, 술약, 비누, 실 같은 물건을 사서 가까운 범상골, 섭실, 화성리 등지를 하루 종일 돌아 다녔는데, 장사가 시원찮았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기장수를 따라 붙었지요. 저녁에 죽변 마축항에 가서 고기를 사서 다음날 새벽에 동네를 돌면서 팔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날은 애들이 아직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고, 어떤 날은 다들 학교에 가고 없었지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씩 고기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그날 팔면 그날 먹기 바빴지요.”
 

고기장수를 하면서 죽변 일대를 하루 종일 힘들게 돌아다녀도 벌이가 시원찮았던 이씨는 좀 더 먼 곳까지 장사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조금 멀리까지 장사를 다니자 마음먹었어요. 처음에는 서면까지 미역과 노가리 같은 물건을 사서 이고 장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벌써 이리저리 몸이 쏠리며 덜커덩거리는 비포장 길을 완행버스를 타고 장사를 다녔지요. 가진 밑천이 없어서 좋은 물건을 못사니까 역시 팔 때도 후한 값을 받지 못했어요. 또 여자 머리에 얼마 이고 다니지도 못해서 조금씩 가지고 다니니까 다 팔아도 남는 이문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죽변과 서면 지역을 왕래하면서 장사를 다녀도 먹고 살기가 빠듯했던 이복록씨는 울진 지역을 벗어나서 멀리 봉화지역까지 장을 보러 다니게 된다.    
“헌디(종기)가 커야 고름도 많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그 당시에 봉화 쪽으로 장사를 자주 다니던 영주에 사는 60살 된 주씨라는 아저씨가 춘양장을 보러 가면 재미가 쏠쏠하다고 알려주더군요. 춘양장은 멀리 철암, 서포 사람들까지 장을 보러 나오기에 큰 장이 열린다고 하면서요. 빚을 2~3만원 얻어서 미역, 오징어, 노가리, 말린 빵게 다리 같은 해산물을 사들고 무작정 춘양장으로 갔습니다. 그때 돈으로 2~3만원 들여 해산물을 구입해서 춘양장을 보고나면 밥값과 숙박비 제하고도 1만원이라는 큰돈이 남았습니다. 완행버스를 타고 춘양장을 보러 가면 하룻밤을 자고 와야 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애들 걱정도 됐지만, 언제나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지요.”
 

이씨는 완행버스를 타고 죽변을 출발하여 울진을 지나 신림 쪽으로 뚫린 구 신작로를 따라 춘양장을 보러 다녔다고 전해준다.
“지금은 행곡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춘양으로 가지만, 그때는 신림을 지나 구 신작로를 따라 완행버스가 다녔지요. 눈이 오는 겨울이면 내려서 걷기도 하고, 차를 밀기도 하고, 솔가지를 꺾어 버스 바퀴 밑에 깔아놓고 미끄러운 길을 지나가기도 하고... 4시간도 가고 5시간도 가면 춘양장에 도착했어요. 그때 버스 차비가 죽변에서 춘양까지 30원 했습니다. 사람값도 30원, 짐값도 30원 했지요. 차조수는 앞문에 붙어 서고, 차장은 뒷문에 붙어 서서 장꾼들의 짐도 실어주고 내려주고 그랬어요. 죽변에서 출발할 때는 대여섯명이 함께 출발하지만 장마당에 도착하면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장사를 했어요.”

 
17년 동안 도부꾼으로 살면서, 딸 일곱명 키워 시집보내  
이씨는 17년 동안 죽변, 춘양, 봉화지역을 오가면서 도부꾼을 했다.
처음에 작게 시작했던 장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규모가 커졌고, 그런 만큼 먹고 사는 일 또한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다고 이씨는 전한다.
 

“처음에는 완행 버스 편에 큰 보따리 하나 정도의 해산물을 싣고서 장을 보러 다녔지만, 점점 욕심도 생기고 하면서 보따리 규모도 커져 갔어요. 오징어도 두가마니씩 장날에 맞추어 화물로 먼저 보내고, 미역도 한동이씩 옮겨 가고, 꽁치도 한광주리씩 싣고 가서 직접 시장에 앉아 팔았어요. 화물로 먼저 보낸 물건은 시장에서 일하는 나이든 일꾼들을 사서 장바닥으로 옮겼는데, 품값으로 10원도 주고 30원도 주고 그랬습니다.”
 

나이 마흔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씨는 울진군과 봉화지역을 왕복하면서 춘양장, 봉화장, 봉성장, 제성장, 명호장 등에서 장사를 했었다고 말한다.
“영주장은 어쩌다가 가고 춘양, 봉화, 봉성, 제성, 명호장을 주로 봤는데, 그중에 춘양장과 제성장이 제일 컸습니다. 장을 보고 팔다 남은 물건은 이튿날 꼭두새벽에 하숙집에서 일어나서 땅이 안 밝을 때부터 이고, 지고 골골마다 가정집을 찾아다니면서 팔아야 했어요. 춘양서 영월 가는 쪽에 있는 녹동역 부근, 솔평지, 소천, 서벽 골짜기마다 내 발로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서벽은 12서벽이라고 해서 하서벽, 중서벽, 상서벽, 새마을서벽, 서들말서벽 같은 이름이 붙은 후미진 동네가 골골에 있었고, 단대기 마을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기억조차 희미해집니다. 아침을 굶고 이른 새벽부터 골골을 다니며 물건을 파는 날은 눈에서 허깨비가 나오려고 했어요. 그런 날이 도부를 다닌 17년 동안 수도 없이 많았지요.”
 

이복록씨는 17년 동안 죽변과 봉화지역을 왕래하면서 도부꾼 생활을 해서 먹고 살았고, 일곱명의 딸자식들 학교 공부를 시키는 와중에서도 돈을 조금 모았었다고 말한다.
“돈도 조금 벌었지요. 그런데 큰 사위가 배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는데, 그때 보증을 서준 내가 당시 돈으로 470만원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 사위는 그 뒤에 죽변에서 한두해 엿장수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서울로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다시피 죽변을 떠났어요. 벌써 30년 전 얘기가 되고 말았네요. 큰 빚을 내가 떠안는 바람에 다른 딸들 시집갈 때 힘들었어요. 다들 학교를 마치고 객지에 나가서 자기들이 직장 다니면서 몇 해씩 벌어서 그렇게 결혼들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살면서 남편의 유언을 끝까지 지킨 셈이지요. 일곱명의 딸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 안 내보내고 다 내손으로 키워서 내 보냈으니까요... 참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이복록씨의 회갑 기념사진(앞줄 우측). 이복록씨는 회갑때 처음 사진을 찍어 보았다고 말한다

 

2남5녀 집안의 장녀로... 딸 7명의 어머니로 한평생 살아

이복록씨는 살면서 아들 한명 없이 딸만 일곱을 둔데 대한 아쉬움과, 재혼하지 않고 혼자 딸들을 힘들게 키우면서 살아온데 대한 후회가 없냐고 묻자,“타고난 팔자가 그런데 어떡하겠냐”며 웃는다.
 

“원래는 큰딸 분자와 둘째딸 두래 사이에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었는데 어릴 때 죽어서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게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복의 전부려니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시동생네가 아들 다섯명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언젠가 형수인 나더러 자기 아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양자로 들이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어요. 죽고 난 다음이라도 제삿밥 얻어 먹을 데는 있어야 한다면서... 가진 재산도 없는 나에게 자기 자식을 양자로 주겠다는 이유가 전에 논 닷마지기 팔아먹은 죗값으로 말막음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싫더군요. 남편의 대가 끊기는 거야 늘 아쉽고 미안하지만 재산도 없는데 양자는 들여서 무엇 하겠어요?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주변에서 중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내가 ‘개도 집이 있고 까막까치도 집이 있는데, 딸만 일곱이니 집을 일곱채 사주면 새로 시집을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씨껍을 했는지 두 번 다시는 주변에서 중신하겠다는 말을 않더군요. 자식들 일곱이 올망졸망한데 한눈 팔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저 열심히 물건을 이고 지고 이장 저장 장보러 다니기에 바빴는데...”
 

딸이 흔한 2남5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고, 결혼하여 자신도 7명의 딸을 둔 것을 팔자라고 여긴다는 이복록씨는 현재, 죽변면 후정리 ‘금바우’의 작은 집에서 익숙한 파도소리를 동무 삼으며 홀로 한달에 20~30만원 정도의 각종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체이짝 같은 내 팔자야, 암반 같은 내 팔자야...” 

청지노인학교 여행길에서
울진과 봉화지역을 오가면서 도부를 했던 이복록씨는 도부꾼 훨씬 이전부터 12령 길을 왕래하면서 울진과 봉화지역의 장시를 주도하던 선질꾼들과 개별 행상단이 있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하게도 어릴 때 흔하게 보았다는 선질꾼들의 일상과 그들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 한 토막을 들려준다.
 

특히 이번에 이복록씨를 통해 채록한 선질꾼들의 노래는 지역에 처음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대흥리에 살면서 어릴 때‘악구산’까지 소를 먹이러 다녔어요. 악구산 중턱에 마을 사람들이‘호박장군 묘’라고 부르는 큰 묘가 하나 있는데, 터가 넓은 그 묘 앞에서 선질꾼들이 밥을 해먹고 쉬어가고는 했습니다. 소를 먹이러 갔다가 다행히 선질꾼들과 마주치면 하얀 이밥을 얻어 먹을 수 있었지요. 그때만 해도 모두들 이밥을 먹어보기 힘들 때였는데, 그 사람들은 꼭 기름이 찰찰 도는 하얀 이밥을 해 먹었습니다. 대개 대여섯명씩 짝을 이루고 다녔고, 많을 때는 십여명씩 짝을 이루고 다녔지요. 주로 바다에서 나는 소금, 파래, 미역과 같은 해산물이나 손으로 만든 조고리(조리), 소쿠리 등을 지겟가지 한쪽에 얹어서 짊어지고 다녔어요. 나머지 한쪽 지겟가지에는 밥해먹는 솥단지 같은 걸 걸고 다녔고요. 
 

선질꾼들의 나이는 대개가 50대였고, 모두들 바짓가랭이 중간을 질끈 동여 묶고 다닌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들은 쉴 때도 지게를 떠받치고 허리춤만 뒤로 눕혀서, 바닥에 엉덩이가 붙지 않게 작대기를 밑에 받치고 쉬었습니다. 밥할 때나 볼일 볼 때만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어요. 선질꾼들이 밥을 해먹고 난 다음에 지게짝을 깔고 앉아 비스듬히 누워서 즐겨 부르던 소리는 하도 많이 듣고 불러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어머니에게 불러 주었더니, ‘그래, 맞다. 그 사람들은 그 팔자가 다인갑다’하고 말하더군요.”

 

「헌신짝도 짝이 있고 / 고리짝도 짝이 있고/ 농짝도 짝이 있는데 / 체이짝(체)같은 내 팔자야 / 암반(국수판)같은 내 팔자야 / 홍두깨비(홍두깨)같은 내 팔자야」                               

ⓒ 울진뉴스 & www.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문의 054-781-6776)

추천뉴스

  • 금강송배 전국 유소년클럽 축구대회, 울진서 열전 돌입
  • 울진국유림관리소, 지자체와 더불어 하천·계곡 불법행위 합동 점검 실시
  • 제293회 울진군의회(임시회) 의사일정안
  • 울진군, 지방도917호선∙군도20호선 4차로 확장 추진
  • 왕피천공원서 펼쳐지는 '2026 야(夜) 울진' 호러 퍼레이드
  • 울진군 지역자원 창업의 기회로! ‘2026 울진군 창업아카데미’ 첫 문 열어
  • 2026년 찾아가는 어린이 구강보건교실 운영 !
  • 울진군, 울진군청년연합회와 소통 “순수한 열정으로 지역 활력 이끌어 달라”
  • 울진군 드림스타트, 여름방학 맞아 ‘가족 나들이’행사 실시
  • 울진군청소년수련관·청소년상담복지센터, ‘청소년 함께 ON 문화여행’ 운영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이 시대의 마지막 도부꾼으로 살았던 이복록씨 이야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