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천년 전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전해져오는 한국 고유의 전통 무도인 태권도는 긴 역사를 거치면서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국제적인 스포츠로까지 자리 잡았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의 무용총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겨루기를 하는 두 젊은이’의 모습은 한 젊은이가 왼쪽을 향해 왼손으로 몸의 중심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대방이 왼쪽 손을 뻗으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등 오늘날의 태권도와 유사한 무예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고구려 벽화에는 오늘날의 태권도 도복과 비슷한 형태의 무술 수련복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도 발견되고 있고, 백제 또한 왕실에서 무예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 또한 국력의 뿌리였던 화랑도에서 맨손 격투기인 ‘수박도(手拍道)’등의 각종 호신 무예를 익혔고, 이것은 곧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맨손 격투인 ‘수박도’는 매년 왕실의 지원 아래 각종 시범경기와 시합이 장려되면서 점차 국민적인 무술과 스포츠로 자리잡아간다.
조선시대에 와서 국교였던 불교가 유교로 바뀌게 되었고, 이는 지배계층의 온갖 문화관까지 바꾸는 결과를 가져와서 양반들은 책이나 읽고 몸을 움직이는 무술은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수박도’에서 이름이 바뀐 ‘태껸’의 전통과 기술은 점차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다행이 1790년 정조임금이 이덕무와 박제가를 시켜서 무술 전반에 걸친 교재를 편찬하도록 지시했고, 그 당시에 성행하던 맨손 격투기까지 추가되어 발간된 책이 한국 무예의 초기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한국 고유의 전통 무예는 큰 위기를 맞는다.
조선의 정신까지 말살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던 일제는 각종 무예는 물론 집단 스포츠까지 엄격하게 규제하면서 탄압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의 전통 무술은 의식 있는 일부 사범들에 의해 비밀리에 교습되면서 겨우 명맥만 이어지게 된다.
이때 일본의 ‘가라데’를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무술이 소개되었고, 당시에 중국의 ‘소림사 무술’과 일본의‘ 가라데’가 혼합된 새로운 무술이 생겨나는데, 바로‘당수’또는‘공수도’로 불리는 무술이다.
지금까지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태권도 등의 맨손 격투 무술을 두고 흔히 ‘당수’ 또는 ‘공수도’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뜻있는 다수의 사범들에 의해 일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혼재되어 파생된 각종 무술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활발하게 무술인들을 양성하던 ‘무덕관’, ‘청도관’, ‘조선연무관’, ‘송무관’ 등이 한국 무도의 표준형과 통일된 지도 수련 방법에 대해 겨우 합의를 보게 되는데, 갑작스레 6.25 전쟁이 발발한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 임시 수도가 있던 부산에서 일부 태권도인들이 ‘대한공수도협회’를 조직했고, 그 후에도 유사한 명칭을 가진 단체들이 난립한 가운데 5.16 혁명을 맞게 된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포고령으로 사회단체 재등록을 명령했고, 1961년 문교부가 ‘대한수박도회’, ‘공수도송무관’, ‘강덕원무도회’, ‘한무관중앙공수도장’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통합을 주선했지만, 공식 명칭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결론이 나지 않다가 결국 명칭이 ‘대한태수도협회’로 결정 나게 된다.
‘대한태수도협회’는 1961년 통합창립위원회와 이사회를 구성한 후 공식적으로 출범하여 이듬해인 1962년 대한체육회에 가입했고,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라는 지금의 명칭으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고(故) 황기 무덕관 관장이 세운 ‘무덕관’은 당시에‘청도관’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무술계의 양대 문파였다.
고종황제 수비병 출신의 아버지…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대구에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무덕관에서 태권도를 배운 이래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한평생 울진 지역에 태권도를 보급시키는데 열과 성을 다해온 강두희(70세. 후포면 삼율리)씨는 온정면 선구리가 고향이다.
“원래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지만 미처 돌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부모님께서 온정면 선구리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온정 선구리는 윗대 조상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고, 아버님 또한 선구리가 고향입니다. 아버님은 ‘상’자 ‘하’자를 쓰셨는데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셨고, 어머님은 ‘박’씨 성에 ‘원’자 ‘정’자를 썼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해 있을 때였으니 교사였던 아버님이 양양에서 근무하다가 울진으로 쉽게 자리를 옮겨 오기도 하고 그랬었나 봅니다.”
강씨는 부친 강상하씨가 구한말에 대한제국 보병으로 근무했었다고 말해준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한때 구한말에 대한제국 보병 시위 제1연대에 근무하셨습니다. 고종황제의 수비병 출신이지요.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에 보병 시위를 관두고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포항쯤에 왔을 때 3.1 만세운동을 맞았다고 전해 들었어요. 그 후 한동안 집에서 생활하다가 교사 임용시험을 거쳐 교사생활을 하셨고, 기성면 구산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셨지요. 온정, 울진, 죽변, 후포국민학교 등 지역의 엔간한 국민학교는 다 거치고 난 다음에 정년을 맞으신 겁니다. 부모님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저는 막내로 태어났어요. 위로 형님 세분과 누님 세분이 계시지요.”
강씨는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국민학교만 4군데를 거쳤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면 온 식구가 따라서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정국민학교에 입학한 후에 죽변과 후포국민학교를 거치고 평해국민학교에서 졸업했어요. 그리고 평해중학교와 후포고등학교를 거쳐서 경북사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경북사대를 졸업한 강씨는 교사로 임용됐고, 전북 고창고등학교로 첫 발령이 나서 고창으로 내려간다.
“첫 부임지가 전북 고창의 고창고등학교였습니다. 그곳에서 1년을 보냈지요. 고창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춘천 유봉여고, 선산고등학교, 군위고등학교 등을 거치는 동안 7년이 흘러갔습니다. 객지생활을 한 7년 정도 한 것이지요. 그 다음에 고향 울진으로 되돌아왔어요.”
타지에서 7년여 교사생활을 하고 울진으로 돌아와서 지역에서 교편을 잡았던 강씨는 61세에 평해공고에서의 교사생활을 끝으로 명예 퇴직했다.
“서울에 김두한! 대구에 야스!” 경북사대 1학년 때 태권도 입문

강씨가 전북 고창고등학교에 재직할때 태권도부원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은 평화봉사단 미국인 제자
일평생 울진 지역에서의 태권도 보급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강씨는 1959년 경북사대 1학년에 재학할 당시에 태권도에 처음으로 입문했다.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만 하더라도 지역에 태권도를 배울만한 곳이 없었어요. 대구로 유학을 나가서 경북사대를 다니면서 태권도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무덕관 대구 북부도장이라는 곳에 다니면서 태권도를 배웠는데, 대학 재학 중에 2단까지 승단했어요. 그때 저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던 분이 차영수 관장님이셨는데, 대구에서는 ‘야스’라는 별명으로 훨씬 더 유명한 분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서울에 김두한, 대구에 야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주먹 하나는 정말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던 분이었습니다. 참 대단했던 분인데 6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80세 정도 되었을 텐데... 예전에는 태권도와 같은 무도는 무조건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우고 하다보니까 몸 구석구석 골병도 들었을 테고,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아마 그런 이유도 충분히 한몫했을 겁니다. 제가 전에 지역에서 도장을 할 때 울진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내려와서 관원생들 승단 심사를 직접 봐주기도 했고, 이래저래 두세번 울진을 다녀가기도 했지요.”

강씨는 대학 재학시 연극동호인으로도 활동했다. 1966년 현 대구 한일극장에서 대구연극동호인회 작품을 발표하며

1960년 경북사대 과대항 체육대회 배구우승 기념. 강씨는 후포고등학교 재학시 배구부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대구에 올라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태권도에 입문하게 된 강두희씨는 경북사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겨울 방학 때, 고향 울진으로 내려와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태권도장을 개관한다.
“그때가 1961년이었습니다. 1961년 1월 21일에 기성면 구산리에서 예전에 방앗간을 하던 허름한 창고를 얻어서 ‘구산도장’을 열었어요. 울진군내에서는 처음으로 태권도장을 개관한 거지요. 울진 지역의 태권도 역사로만 본다면 아마 1961년 1월 21일 ‘구산도장’개관일이 상당히 역사적인 날일 겁니다. 처음으로 울진 지역에 태권도 도장이 문을 연 거지요. 당시만 해도 구산리에는 전기가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을 때여서 밤이면 남폿불을 켜놓고 관원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1월 21일에 ‘구산도장’을 개관하고 난 다음 날인 1월 22일에는 평해읍에서 구 면사무소 건물을 빌려 ‘평해도장’을 열었어요. 연이어 그 다음날인 1월 23일에는 후포면 후포1리 동회관 앞마당을 빌려서 ‘후포도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동회관 앞마당을 빌려서 개관한 ‘후포도장’은 나중에 현재 미원회사 자리에 있던 창고를 얻어서 도장을 옮기게 됩니다. 어쨌든 1월 21일에 기성면에 ‘구산도장’을 개관하고 난 다음 3일 동안 연달아 3개 읍·면에 태권도 도장 3개를 연달아 개관한 거지요. 대학교에 다니면서 겨울방학 동안에는 제가 직접 학생들을 모아서 태권도를 지도했고, 방학이 아닌 평소에는 도장을 책임지고 맡아서 운영할 사범들을 대구에서 데려다가 관원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울진 지역에 태권도를 보급시켜 나가기 시작했어요.”
울진 지역의 태권도 대부로 불리는 강두희씨는 자신이 처음 태권도를 배울 당시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무덕관’, ‘청도관’, ‘지도관’, ‘창무관’, ‘송무관’, ‘오도관’ 등의 문파가 있었다고 전해준다.
“그때만 해도 태권도 문파가 꽤 여러 개 있었지요. 문파마다 태권도 형도 각기 달랐고, 지도하는 방법도 조금씩 차이가 났어요.‘송무관’은 북한 개성에 본관이 있었는데 6.25 전쟁 후에 북쪽 땅이 되면서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고,‘오도관’은 당시에 국군에서 보급하던 태권도 문파였습니다. 태권도 초창기에 5~6개 되던 태권도 문파는 1961년 5.16 군사 혁명 이후에 1관, 2관 등으로 불리며 잠시 동안 각기 다른 형태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결국 10년이 지난 1970년대 초반에‘태권도’라는 이름 하나로 통합하게 됩니다.”
태권도에 빠져 학보병제 혜택 무산되고, 2번이나 군에 입대

1965년 카투사로 복무할 당시 외국인 제자의 승단을 기념하면서
“김용수 군수는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무덕관 2년 선배이기도 한 그런 사이입니다. 김군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무덕관에서 태권도를 배웠고, 저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역시 무덕관에서 태권도를 배우게 된 거지요. 저와 김용수 군수가 대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방학을 이용해서 울진에 내려오면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는 했어요. 구산, 평해, 후포 도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두명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면 관원생들은 물론이고, 구경나온 마을사람들까지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신기하게만 쳐다보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김용수 군수와 제가 격파 시범을 보이면서 기왓장이나 벽돌이라도 몇 장 깨고 나면 다들 박수를 치면서 난리였어요. 그때만 해도 울진 지역에서는 태권도라는 무도의 명칭도 생소했고, 다들 격투 무예를 그냥 당수라고 부르거나 차력사가 하는 요술이나 마술 같은 것쯤으로 생각할 때였거든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때는 가리키는 사람도 열심이었지만, 태권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거의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도장을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했어요.‘구산도장’의 경우에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봉산이나 월송 등지에서까지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걸어서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태권도인 강두희씨는 경북사대 학업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까지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한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2년에 군에 입대했어요. 부산 화학학교 기술병과 교육을 마치고 육군본부 특별 참모 부서의 하나였던 화학감실(化學監室)에서 근무했습니다. 화학감실은 화생방전을 조사하거나 연구하는 군사 화학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부서였어요. 육군본부에 근무하다가 자리를 옮겨서 미 8군 카투사로 근무하면서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면서 군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대학에 재학 중이다가 군에 입대한 병사들을 빨리 제대시켜주는 학보병제 혜택을 받아서 동기생들보다 6개월 먼저 만기 전역했어요.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엉뚱한 문제가 생기게 됐습니다. 학보병제 혜택을 6개월이나 받고 전역하고 난 다음에 대학 복학 신고를 제때 하지 않아서 다시 군에 입대하게 된 거지요. 군을 제대하자 말자 곧장 울진으로 내려와서 전에 개관한 태권도장들을 돌아다니며 관원생들을 지도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복학신고를 제때 하지 못했는데 어쩌겠어요? 밤낮으로 기성과 거일, 직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기에 바빠서 복학신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에 끌려갔지요. 춘천 2군단에서 전령생활 6개월을 마저 채우고 난 다음에 군을 한번 더 제대하는 차마 웃지 못 할 일을 겪기도 했어요.”
구산도장, 평해도장, 후포도장에 이어 죽변도장과 울진도장 개관
강씨가 군을 제대하고 울진에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이미 전에 강씨로부터 태권도를 배웠던 후배들 가운데 유단자가 나와서 각 도장을 맡아서 책임지고 관원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군에 갔다 오니까 각 도장마다 제가 지도했던 후배들이 유단자가 되어 사범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후포도장’은 김팔암이라는 후배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팔암이는 뒤에 김준호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현재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팔암’이라는 이름은 여덟팔(八)자에 바위암(岩)자로 그 뜻이 굉장히 깊고 대단한데, 주변 사람들이 다들 ‘파람이’나 ‘피래미’로 놀려대고는 했었지요. 아마 본인도 그런 놀림감이 되는 것이 싫어서 후에 이름을 준호로 개명하지 않았나 싶네요. ‘평해도장’은 지금은 돌아가고 없지만 김진호라는 사범이 맡아서 관원생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또 ‘구산도장’은 정원명이라는 사범이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원명 사범은 중국계 화교였어요. 지금은 미국 LA에 살면서 중국 무술 도장을 크게 한다고 전해 듣고 있습니다.”
강두희씨는 군을 제대하고 교사로 임용되어 전북 고창고등학교 등지를 돌며 타지 생활을 7년여 동안 하고 난 다음에 고향 울진으로 돌아와서 죽변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죽변중학교로 발령받아 와서 근무하던 1969년도 3월 달에 김진호와 김진한이라는 사범 2명을 데리고‘죽변도장’을 개관했어요. 저야 학교 교사로서의 제 일이 있었으니까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은 대부분 사범 2명이 맡아서 했고, 저는 수업이 끝나는 방과 후에 시간을 내서 격파나 겨루기 시범도 보이고 하면서 관원생들을 가르쳤어요. 개관하던 처음에는 죽변국민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운동장에서 관원생들을 지도하다가 그 후에 최해동씨 소유의 창고를 얻어서 운동했지요. 그 당시 ‘죽변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운 1기생 제자들이 도의원을 지낸 임원식, 박달수, 박상구, 백권석, 차용순, 울진군청에 근무하는 황인수, 박영길, 장병씨 등입니다.”
타지를 떠돌다가 울진으로 돌아온 1969년, 죽변중학교에 근무하면서 3월 달에 ‘죽변도장’을 연 강씨는 두달이 지난 5월에는 울진 천주교 성당 마당을 빌려서 또 다시 ‘울진도장’을 개관하게 된다.
“울진성당을 빌려서‘울진도장’을 개관하고 운동을 하는데 당시 신부님들께서 편의를 많이 봐 주셨습니다. 가끔 신부님들과 단체 기념사진도 찍고 하면서 참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울진도장’은 현재 온정농협장으로 근무하는 정종근씨가 사범을 맡아서 관원생들을 지도했어요. 그때 ‘울진도장’에서 조인식, 추영광, 조재환, 이상민씨 등의 유단자들이 배출되었지요.”
교사 사표 내고 재충전하며 울진, 북면, 죽변 성인 태권도반 개설

1970년 죽변도장에서 성인반을 개설했을때 야외 수련을 기념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죽변도장’과 ‘울진도장’을 동시에 개관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던 강씨는 사표를 내고 나와서 1년 동안 학교를 쉬게 된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까 지치기도 하고, 한동안 자유롭게 쉬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울진도장’을 개관하고 얼마가 지난 다음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1년 정도 쉬었지요. 그러나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진 읍내 연호정에서 수련할 성인 태권도반을 만들어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어요. 연호정에서의 성인 태권도반이 울진 지역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성인 태권도반이 되는 셈이지요. 연호정에서 지도했던 성인 태권도반에서 남영중, 주홍길, 백광일, 장운용, 진명화씨 등 20여명의 유단자가 배출되었으니 대단한 성과를 올린 겁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즐거웠지요. 연호정에서 운동이 끝나면 성인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막걸리 파티도 열리고, 관원생들 간에 단결도 잘 되었고 참 재미있었어요.”
학교를 1년여 쉬면서 울진읍내 연호정에서 성인 태권도반을 모집해서 태권도를 보급하던 강씨는 이어서 북면에도‘북면도장’을 열었고, 곧 성인반도 개설한다.
“북면의 구 면사무소 건물을 빌려서 ‘북면도장’을 개관했습니다. 도장을 개관한 얼마 뒤에는 북면 성인 태권도반도 열었고요. 아침에는 연호정에서 울진 성인반을 지도하고, 저녁에는 북면 도장과 북면 성인 태권도반 관원생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했지요. 되돌아보니 저도 참, 꽤나 바쁘게 살아온 거 같네요. ‘북면도장’에서는 남영태, 김동현, 박해복씨 등의 유단자가 나왔습니다.”
울진과 북면 지역에서 성인 태권도반을 열고 일반인들을 지도하던 강씨는 그 뒤를 이어 ‘죽변도장’에서도 성인 태권도반을 개설한다.
“성인 태권도반은 주로 아침 식전에 운동을 했어요. 직장에 출근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죽변도장’ 성인 태권도반에서는 전직 교장 출신인 전용우, 김진옥, 김갑동, 김종복, 정철수씨 등의 유단자가 배출되었습니다. 특히 전용우교장은 이미 청도관에서 운동을 시작해서 빨간 띠를 딴 상태였고, 뒤늦게 다시 운동을 시작해 무덕관에서 유단자가 된 경우지요.”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울진, 북면, 죽변에서 각각 성인 태권도반을 개설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강두희씨는 얼마 뒤에 고향 울진을 떠나게 된다.
“훌쩍 고향을 뒤로 하고 경기도 동두천으로 올라가서 미 2사단 지관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에 의정부에 미 1사단이 있었고 동두천에는 미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저는 동두천 미 2사단의 각 지구를 관장하는 지관장으로 근무했어요. 한눈팔지 않고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열심히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교사 복직과 결혼… 부구중학교 전교생 대상 태권도 보급

강두희씨는 부인 황순이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었다. 2003년 큰딸 소영씨의 고려대학교 졸업식에서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난 다음 지역에서 태권도 성인반을 개설한데 이어, 고향을 떠나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미군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던 강씨는 다시 교사로 복직한다.
“그때는 교사의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때여서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가도 교사로 다시 복직하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교사로 복직해서 선산고등학교와 군위고등학교를 거쳐서 부구중학교로 발령이 나면서 다시 고향 울진으로 되돌아오게 됐습니다. 부구중학교에 부임해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태권도 지도를 시작했어요. 당시 부구중학교 재학생 정원이 500여명 남짓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상봉 교장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셨지요. 현재 울진태권도협회장을 맡고 있는 윤명길씨가 그때 부구중학교 태권도 사범으로 전교생들을 지도했습니다. 학생들 인원이 많다 보니까 승단 심사를 볼 때는 심사위원들이 대구에서 비포장도로를 타고 7~8시간씩 걸려가며 직접 울진으로 올라왔어요. 울진까지 올라오면 풀풀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써서 심사위원들 머리도 하얗고 눈썹도 하얗게 변해 있기가 보통이었습니다. 당시에 경북태권도협회의 전무를 맡고 있던 예조해씨가 승단 심사위원으로 자주 울진에 올라왔어요. 예조해씨는 경북도태권도협회 직전 회장을 지냈던 분이기도 합니다.”
한편 교사로 복직해서 처음 발령받은 선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에 강씨는 황순이(56세)씨를 만나 결혼한다.
“선산고등학교에 재직할 당시인 39살에 연애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해서 딸만 둘을 두었어요. 태권도를 하면서 돌아다니느라 양기가 다 빠져서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인가 봅니다. 큰딸 소영(30세)이는 후포중, 포항여고, 고려대를 졸업해서 현재 주택공사에 근무하고 있고 요, 작은딸 소은(21세)이는 후포중, 포항여고를 졸업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작은 딸 소은이는 울진 월변에서 ‘울진체육관’을 할 당시에 태권도를 배워서 유단자가 되었어요.”
후포중고·울진종고 태권도부 창단… 울진체육관 개관… 평해공고 전교생 태권도 지도

1986년 평해공고 교사로 재직할때 전교생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하며
북면중학교에서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하던 강씨는 2년 후에 부구중학교를 떠나서 모교인 후포중·고로 자리를 옮긴다.
“모교인 후포중·고로 와서 후포중·고 태권도부를 창단했습니다. 100여명의 희망자를 모아서 가르쳤는데 유단자만 60~70여명을 배출했어요. 제가 졸업한 모교다보니 어느 때보다 그 보람과 긍지가 컸지요.”
후포중·고에서 태권도부를 설립해 유단자를 수십명 배출한 강씨는 3년이 지나서 다시 울진종고로 자리를 옮겨‘울진종고 태권도부’를 창단한다.
“당시 울진종고에는 김재윤교장 선생님이 재직하고 계셨는데, 그분이 태권도 유단자였습니다. 서로가 태권도를 했다는 공감대로 인해 자연스럽게 의기 투합할 수 있었고, 김재윤교장 선생님의 도움을 얻어서 울진종고 태권도부를 만들었어요. 당시 장영조사범이 울진종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울진종고 태권도부를 한 5년 정도 지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후포중·고와 울진종고에서 태권도부를 창단해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던 강두희씨는 뒤이어 울진 월변에 ‘울진체육관’을 개관한다.
“월변에 자리를 얻어 ‘울진체육관’ 간판을 내걸었어요.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시간도 부족하고 도장을 직접 운영하기가 힘들어서 관장은 현 울진태권도협회 회장인 윤명길씨에게 맡기고, 사범은 현재 울진읍내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장일용씨에게 맡겼어요. 장일용사범은 뒤에 ‘근남도장’을 개관해서 근남으로 나갔고, 지금 서면 옥방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이응창씨가 후임 사범을 맡아서 지도했지요. 그래도 실질적인 운영은 제가 책임져야 했으니 많이 바빴어요. 관장과 사범 월급 챙겨 줘야지, 차량 운행해야지, 실제로 체육관을 하나 개관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다보니 태권도장 관원생들이 부족할 때는 제가 받는 교사 월급에서 돈이 빠져 나갈 때도 있었고,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도 많았고... ‘울진체육관’을 3년 정도 운영했는데, 세계 최초의 태권도 줄넘기 시범단의 남중진관장과 서울 시경 강력계에 근무하는 장영택씨 등 200여명의 유단자를 배출했습니다. 특히 장영택씨는 중학교에 다닐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늘 태권도를 배워서 경찰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결국 경찰이 되더군요.”
울진종고 교사로 근무하면서 ‘울진종고태권도부’를 창단하고, ‘울진체육관’을 개관해 후배들을 지도하던 강씨는 평해공고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몇 년이 지나자 평해공고로 발령이 났습니다. 당시 한영철 교장 선생님의 도움을 얻어서 평해공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가르쳤어요. 사실 학교를 옮겨 다닐 때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거나 아니면 따로 태권도부를 창단해서 학생들에게 태권도의 혼을 심어주려 노력했는데, 가끔은 비협조적인 교장 선생님들도 계시기는 했어요. 그러나 별문제 없었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제가 울진 지역 출신이지, 주먹도 세지, 태권도와 관련한 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방법이 없었던 것 같아요. 평해공고에서는 전에 울진태권도협회장을 역임했던 손승복씨를 사범으로 초빙해서 전교생에게 태권도를 수련시켰는데, 1년 만에 유단자만 200명을 배출했습니다. 한꺼번에 200여명이 승단 심사를 보는데, 인원이 많다 보니까 이례적으로 심사위원들이 학교를 직접 찾아와서 심사를 했습니다. 승단 심사를 보는 인원이 작은 태권도장은 지금도 포항이나 영천까지 직접 관원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심사를 봐야 되잖아요? 지역 내에서는 심사위원들이 직접 울진까지 내려와서 200여명을 대상으로 승단 심사를 했던 것이 아마 평해공고가 처음일겁니다.”
“교직 30년! 태권도 40년!”, 퇴직 후 ‘동해 공인중개사’ 사무실 운영
전교생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해서 1년 만에 200명의 유단자를 배출해내기도 한 강두희씨는 평해공고에서 3년 동안 근무한 것을 끝으로 교감으로 퇴직했다.
“평해공고에서 61살 되던 해에 퇴직했습니다. 퇴직하기 전날까지 태권 도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직접 학생들을 지도했어요. 돌아보면 교직 30년에 태권도 40년입니다. 평해공고 학생들을 지도한 것을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는 태권도와 끝을 맺은 셈이 됐습니다.”
강씨는 수년전부터 후포면 삼율리에서 ‘동해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사단법인 해동장애인봉사단 울진군본부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울진종고에 근무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남들 몰래 숨어서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했어요. 공인중개사 시험 1기생으로 합격했지요. 5년 전에 사무소를 개업했는데, 직원 한명 두고 사무실 현상 유지할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특히 장애인봉사단 활동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고요.”

1961년 대구 하모니카합주단 창단 기념 발표회. 강씨는 하모니카계의 전설적 인물인 최영진선생께 사사받아 대한하모니카협회 경북지회장까지 지냈다.

1990년 후포고등학교 재직시, 특별활동 하모니카반을 지도하는 광경
태권도를 제외한 강두희씨의 특기이자 취미는 하모니카 연주이다.
“평생 태권도를 보급하기에만 바빴던 제가 하모니카를 남들보다 잘 분다고 하면 대부분 의아해 합니다. 제 이미지가 남들에게는 발차기와 주먹을 내지르는 기술이 뛰어난 무도인으로만 비치는 모양입니다. 대학 다닐 때 하모니카 연주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지는 최영진선생님께 직접 사사받았는데 다들 수준급이라고 평가합니다. 한때는 하모니카에 빠져서 체신부 차관을 지낸 조응천박사가 초대회장을 맡았던 대한하모니카협회 경북지회장까지 지냈어요. 또 후포고등학교에 재직할 때는 특별활동 하모니카반을 지도하기도 했고요. 언제 기회가 되면 하모니카 연주를 꼭 한번 들려 드리겠습니다.”
한편 강두희씨가 배출해낸 울진 출신 태권도 유단자들 가운데 20여명은 현재 서울·경기지역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강씨의 애정은 각별하다.
“울진 출신 유단자들 중에 20명 정도가 서울·경기지역에서 도장을 운영하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항상 변함없이 저를 포함한 태권도 선배들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임 이름이 ‘무향회’인데, 30여년 전에 힘들 때 서로 도우면서 보탬이 되어 보자고 제가 만들었지요. 제가 초대 회장을 지냈고, 당시 강만석씨가 사무국장을 맡았었는데 지금은 돌아갔습니다. 2대 회장은 황중구씨가 맡았고요. 지금도 여전히 서로 간에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만나고 하면서 함께 땀 흘리면서 운동했던 도타운 우정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보람 있는 일이지요.”
울진 주민들이 태권도의 현란한 발차기, 지르기, 막기, 격파 등의 다양한 기술을 시골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으는 차력사의 마술쯤으로 치부할 때, 1959년 처음 태권도에 입문한 이후 1961년 기성면 ‘구산도장’ 개관을 시작으로 지역에 최초로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한 강두희씨는 현재 태권도 공인 7단의 무도인이다.

울진 출신 태권도 유단자들 가운데 20여명이 서울 경기지역에서 활동중이다. 이들은 30여년전에 `무향회'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다.
30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으로 받은 돈은 울진 지역에 태권도를 보급시키겠다는 욕심에서 각 지역마다 도장 만들고 태권도 협회를 탄탄하게 꾸리는데 아낌없이 다 사용했고, 변변히 돈 벌 시간조차 없었다는 강씨는 울진군태권도협회 1,2대 박상인회장과 3대 황중구회장에 이어 4대 회장을 지냈다.
그 뒤를 이어 5대 손승복회장과 6대 윤명길 현 회장까지 울진 지역의 태권도 역사도 어느덧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강두희씨는 울진 지역 태권도의 산 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지역의 태권도인들은 ‘울진 태권도의 대부’또는 ‘울진 태권도의 큰 형님’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두희씨는 ‘일격필살(一擊必殺), 일발필도(一發必倒)’를 얘기하면서 태권도는 단순한 격투술이 아니라 심신 수련과 자아 완성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심오한 무술이자, 그 의지를 실천하도록 하는 행동철학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강두희씨가 한평생을 통틀어 그토록 보급하기에 애썼든 태권도가 지역의 수많은 제자들과 후배들에게서 수양과 절제의 예술로, 또 철학으로 대를 이어가면서 화려하게 결실을 맺을 것을 기대하며, 가톨릭인인 그가 지은「태권도 인생」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소개한다.
『고향 사랑하는 길이라고 / 태권도 보급이 그 길이라고 / 반백년을 도복을 입으며 살아왔다/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었다 /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 인생이 원래 그렇게 허허로운 것이기에 / 나를 바라보고 수련해준 / 모든 동지들에게 행복의 기원을 보낸다 /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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