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
오랜만에 만나니 화젯거리도 풍성하다. 어느새 화제는 자연스럽게 며칠 전에 끝난 한, 중, 일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일본총리 아베의 행보에 모아졌다.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후안무치한 태도가 오늘의 한일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양국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이나 예의염치도 없는 당당한 그의 태도가 역겹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뭔가 단단히 수작을 부리려고 한 게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작(酬酌)’이라는 말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슨 일을 꾸민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이 말의 뜻은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수작(酬酢)’이라고 쓴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따라 주는 것이고, 작(酢)은 답례로 손님이 주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작은 주인과 손님 사이에 서로 술을 권하고 답하면서 정다운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자 어휘 중에는 수(酬)와 작(酌)이 들어간 말이 꽤 있다.
서양 사람들의 술 문화는 자기 술잔에 알아서 따라 마시는 ‘자작 문화(自酌文化)’이고,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은 잔을 마주쳐 건배하는 ‘대작 문화(對酌文化)’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 문화(酬酌文化)’이다. 술을 주고받는다 해서 술잔을 맞바꿔 가며 마신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잔에다 술을 따라 주는 것이다.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어온, 우리의 전통예절과는 거리가 먼 음주 방식이다. 권하는 것은 술이지 잔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한, 중, 일 모두 각자 아전인수식 해석과 자평을 내놓으면서 물밑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번 회담의 성사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과 일본의 면피성 회담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제외하고는 삼국의 이해관계가 합치되는 것이 아무래도 약하다고 지적해왔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라도 작정을 하고 나서지 않는 한, 어떤 만족할만한 성과물을 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해왔다. 결국 만난다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여러 상황을 참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짐작한대로 한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입장 표명을 요구받은 일본 측은 위안부 문제와 역사인식 등 여러 현안들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피해나갔다.
그러고 보니, ‘작정(酌定)’과 ‘참작(參酌)’, ‘짐작(斟酌)’도 모두 한자말이다. 짐작이라는 말은 대개 어림으로 따져 헤아려 보는 것을 뜻하는데, 그런데 이 말도 술을 따르는 행동에서 나왔다. 짐(斟)은 술잔에 넘치지 않게 따르는 것을 말하고, 작(酌)은 흘러넘치도록 많이 따른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도록 알맞게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일을 할 때 되풀이해서 따져 보고 꼼꼼히 살펴서 가장 알맞은 것을 골라 결정하는 것을 두고 ‘짐작’이라고 하게 되었다. 또는, 짐(斟)을 속이 보이지 않는 술병으로 해석하여 술을 따를 때 도대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술을 알맞게 따르듯,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 결정하는 것이 짐작이다. 참작(參酌)은 살펴 헤아린다는 의미로 술을 알맞게 따라 준다는 데서 나왔다. 짐작(斟酌)의 원래 의미와 비슷하다. 작정(酌定)은 사정을 따져 보고 나서 결정한다는 말이다.
술은 인류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온 음식이다. 술 마시는 데도 갖추어야 할 예절이 있다. 처음 술을 배울 때 잘못 배우면 술버릇이 고약해진다. 술에도 도(道)가 있다. 그것을 일러 ‘주도(酒道)’라 한다. 일본총리 아베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주도조차도 입에 올리는 게 무색하다 할 것이다.
‘염치(廉恥)’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즉,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를 차릴 줄 아는 체면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는 일에 ‘염치’만큼 중요한 덕목이 어디 있는가?
속담에서도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느니,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달라고 우겨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느니 등의 표현을 써가며.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면서 제 욕심만 차리려고 덤비는 자를 꺼려하고 멀리했다.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조상들은 얼굴만 봐도 그 사람됨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눈빛만으로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둘을 합친 면목(面目)은 사람 됨됨이를 뜻한다. 어떤 일의 성과가 기대보다 보잘 것 없을 때 ‘면목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면목은 체면(體面)이나 염치(廉恥)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면목이 없으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범죄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드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고 하고,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고도 하였다. 면목이 서지 않아서이다. 그러니까 옛 사람들은 면목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 초나라의 항우(項羽)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에서 탈출하여 가까스로 오강(烏江) 기슭에 이르렀다. 빨리 강을 건너 한나라의 추격병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훗날을 도모하자는 부하들의 재촉에, 그가 말하였다. “내가 강동(江東)의 수많은 젊은이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넜는데, 이제 나 혼자 빈손으로 돌아간다 한들 무슨 면목으로 강동의 어버이(父老)들을 대하겠는가?” 그러고는 한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백성들 대할 면목 없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오늘날까지 후세사람들로부터 영웅으로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일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염치를 알고 면목 없는 짓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행동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나라 안팎으로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위안부 문제와 역사왜곡에 대하여 사과 한 마디도 없이, 정상회담 말미에 슬쩍 방사능 오염이 의심되는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를 해제해 달라는 카드를 꺼낸 아베.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 앞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며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놀랍다. 하물며 그런 자를 버젓이 자기 나라의 지도자로 국제무대에서 활보하게 만들어 주는 일본이라는 나라 역시 더욱 가관이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라울 뿐이다. 그 뻔뻔한 수작과 몰염치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런 일본이 내일은 또 어떤 수작을 부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려나? 그리고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항상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으니 이를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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