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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산문 67]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 김진문 시인
  • 입력 2026.10.15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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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의열기념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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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열기념관 전경, 밀양시 해천변 김원봉 생가 터에 들어선 의열기념관(오른쪽)과 의열체험관(왼쪽) 아래 시내는 해천이다. (밀양시 제공)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2015년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약산 김원봉을 연기하며 던진 이 한마디가 오래 귀에 남았다. ‘밀양 사람’이라는 짧은 말에 고향과 삶,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무게가 함께 느껴졌다. 영화 《밀정》에서도 의열단(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 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 김원봉·황상규 등이 주도하여 창립하였다.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을 이끈 김원봉이 등장한다. 두 영화가 그린 모습은 달랐지만 한 가지 궁금증은 같았다.


과연 김원봉과 의열단원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밀정》은 1923년 의열단의 폭탄 반입과 국내 거사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제 황옥 경부 사건을 바탕으로 했지만, 인물과 사건을 극적으로 구성한 허구다. 그러나 영화 속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선 시대는 허구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젊은이들은 실제로 국경을 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중심에 밀양 청년 김원봉이 있었다. 영화가 남긴 궁금증에서 밀양의열기념관을 찾았다.

 

밀양의열기념관은 해천(의열기념관 곁을 흐르는 해천은 본래 산책로가 아니었다. 조선 성종 10년(1479), 밀양읍성을 쌓으면서 외적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한 해자였다. 2012년 생태하천으로 복원되어 오늘날 그 물길을 따라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되고, 의열기념관이 들어서면서 해천은 밀양 항일 역사를 만나는 길이 되었다. 밀양시청 홈피.)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천을 건너자 잔디밭으로 꾸민 작은 공원에는 의열 운동을 알리는 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화려한 건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박한 풍경 속에서 이곳이 품은 역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은 밀양 의열단 역사를 되새기고 계승하는 공간인 동시에 독립투사였던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라고 한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면 해천과 동네 골목이 이어진다. 1세기 전 이 길을 오갔을 밀양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의열단 창립 단원 13명 가운데 5명이 밀양 동화중학교 동창생이자 이웃사촌이었고, 이후로도 밀양 출신이 속속 함께했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만주로 갔고, 왜 의열단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을까. 무엇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게 했을까. 그 물음 중심에 김원봉이 있다. 

이제 영화 장면은 잠시 접어두고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밀양 의열단은 왜 만들어졌으며 어떤 활동을 펼쳤는가. 그 중심에 선 김원봉은 어떤 삶의 길을 걸었는가.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속 한마디를 뒤로하고 의열기념관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의열단의 빛나는 독립투쟁을 간직한 기억 공간이다. 전시된 기록과 흔적을 따라 100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를 온몸으로 건너간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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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독립운동기념관 전경(밀양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두 기념관, 하나의 독립운동사

필자가 국보인 밀양 영남루와 밀양의열기념관을 찾은 것은 2026년 4월 7일이었다. 밀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가 깊게 뿌리내린 고장이다. 이를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밀양에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경남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과 밀양의열기념관(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 25-12)이 있다. 두 기념관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다루는 범위와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밀양대공원 안에 자리한 밀양 독립운동사 종합 전시공간으로 2008년 6월 20일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3·1운동을 비롯한 국내 항일운동과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 밀양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역사 전체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밀양의열기념관은 의열 투쟁에 초점을 맞춘 전문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2018년 3월 7일 김원봉 생가터를 중심으로 밀양시가 그 둘레의 구도심 건물을 매입해 건립했다. 의열단 창립과 활동을 비롯하여 조선의용대 등으로 이어진 항일 무장투쟁과 그 바탕에 있던 의열 정신을 계승하는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더구나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태어나고 성장한 내이동 해천 일대에 자리하고 있어 역사 현장과 전시공간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따라서 두 기념관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곳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밀양 독립운동 전체 흐름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밀양의열기념관은 그 가운데 의열투쟁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의열단을 창립했나

우리는 밀양하면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이 떠오른다. 의열단하면 김원봉과 윤세주가 떠오르고, 그들의 투쟁을 이론으로 뒷받침한 《조선혁명선언(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청주 출신이다. 단재(丹齋)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조선혁명선언」(1923)은 신채호가 의열단 요청으로 쓴 독립운동 선언문이다. 일제를‘강도 일본’으로 규정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투쟁을 통한 민족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는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부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신채호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이같이 1919년 3·1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에 맞선 큰 민족운동이었지만, 비폭력 만세시위만으로는 일제 무력통치를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이에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외교나 청원에 의존하기보다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밀양 출신 청년 김원봉과 윤세주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당시 지린(길림) 일대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병력과 자금 등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소수 결사대가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침략세력을 직접 공격하는 투쟁방식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에서 의열단이 창립되었다. 의열단 창립에는 황상규(황상규(1891~1931)는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다. 밀양에서 교육운동과 비밀결사 활동을 벌이던 그는 1918년 만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와 북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했다. 1919년 11월 길림에서 김원봉·곽재기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 기관 파괴와 일제 요인 처단을 위한 거사를 준비했다. 1920년 밀양폭탄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1년 9월 2일 밀양에서 순국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가보훈부공훈전자사료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김원봉은 단원들의 추대를 받아 지도자로 나섰다. 김상윤·윤세주·한봉근 등 밀양 출신 청년들도 참여하여 의열단의 초기 활동을 이끌었다.


1920년 의열단창립시 조직원은 10명으로 그 가운데 밀양 출신(5명)으로는 김원봉, 김상윤, 김상윤, 윤세주, 한봉근이다. 경북(3명)에는 서상락(달성), 이종암(달성), 신철휴(고령)이다. 함경남도 강세우(삼수), 경남(이성우) 1명이다. 특이하게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7명으로 김원봉, 김상윤, 서상락, 신철휴,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이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과 침략기구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 밀양경찰서와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투탄, 종로경찰서 투탄,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습격 등 여러 의열 투쟁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의열단 투쟁은 일제 식민통치에 직접 맞선 무장독립운동이었다. 이후 신채호가 작성한「조선혁명선언」을 행동지침으로 삼으면서 단순한 시설파괴 활동 등을 넘어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지향하는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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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창설당시의 김원봉(출처, KBS 화면)

 

밀양 청년 김원봉, 의열단 길을 걷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한 밀양은 점필재 김종직과 사명대사의 고장이자 전통 유학의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한편 개항 이후에는 신식학교와 민족교육이 일찍부터 뿌리내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화의 바람도 불고 있었다.

 

김원봉은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밀양공립보통학교시절 김원봉과 윤세주의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린 일화(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메이지 천황 생일인 천장절에 윤세주 등과 함께 학교의 일장기를 변소에 버리는 항일 행동을 벌였고, 이 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마이뉴스, 2011. 6. 25.)는 유명하다. 이들은 해천 둘레 같은 동네에서 자라나 훗날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서울 중앙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더욱 깊이 뛰어들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망명한 김원봉은 윤세주 등 밀양 출신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지린에서 의열단이 창립되자 단원들의 추대를 받아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열단은 폭탄과 무기를 이용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등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갔다.

 

1920년대에 들어 의열단은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을 바탕으로 독립운동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김원봉 역시 의열단 활동에 머물지 않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그의 삶은 한 시대 항일독립투쟁사와 맞물려 있었다. 

 

밀양에서 자란 한 청년의 삶은 이렇게 고향에서 3·1운동,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 창립 등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이같이 밀양 3·1운동이 남긴 항일의식과 밀양 청년들의 연대가 의열단이라는 새로운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김원봉 삶과 밀양 독립운동사는 서로 떼어 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해방후 김원봉과 일제 경찰

밀양의 한 소년이 민족 현실을 깨닫고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을 이끌게 된 과정은 개인 삶을 넘어 당시 밀양에서 자라난 민족의식과 항일운동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원봉 삶은 해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였던 그에게 해방 이후 역사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 들어선 미군정은 식민지 행정과 치안 조직을 단기간에 새로 꾸리기 어려웠다. 결국, 일제강점기 행정·경찰 조직과 그 인력을 상당 부분 그대로 활용했고, 그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악질 친일 경찰들도 있었다. 그 대표 인물이 노덕술(노덕술(1899~1968)은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고문한 대표 친일 경찰이다.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지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비호 속에 풀려났다. 이후 경찰을 거쳐 육군 헌병 중령으로 복무했으며, 1955년 뇌물수뢰로 파면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노덕술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국가기록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경찰로 악명이 높았으며, 해방 뒤에는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다시 경찰 조직 중심에 섰다.

 

김원봉은 1947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전평(전평은‘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약칭으로, 1945년 결성된 노동운동 조직이다. 1946년 9월 전국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이를 계기로 미군정의 탄압을 받았다.)이 전국 총파업을 벌이자 미군정은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고, 민전 공동의장이었던 김원봉도 총파업 선동 혐의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수도경찰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4월 9일 미군정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이때 김원봉이 일제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동지들의 회고를 통해 전해진다. 유석현과 정정화(유석현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김원봉의 동지였다. 정정화는 의열단은 아니나 김원봉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등의 회고에 따르면, 일제 추적을 피해 평생 항일투쟁을 벌였던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친일 경찰 출신 경찰에게 빰 따귀를 맞고 수모를 당한 사실에 크게 분노하고 통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수모가 그의 심경 변화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이후 끝내 남쪽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북행을 노덕술에게 당한 수모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좌우 대립 격화, 미군정의 좌익 탄압, 분단 현실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을 탄압했던 식민지 경찰 출신 인물들과 다시 마주해야 했던 경험은 김원봉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의열기념관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기념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의열단을 비롯한 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항일투쟁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2018년 3월 7일 문을 연 전국 최초의 의열기념관으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밀양의열지사들의 독립투쟁과 삶을 소개하고 있다.


지상 3층 건물인 기념관은 1·2층을 중심으로 의열투쟁의 역사와 인물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의열투쟁사 주요 연표와 관련 영상, 전자방명록, 정보검색대 등이 마련되어 있고, 2층에는 의열단 창립 단원들을 소개하는 전시와 함께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다룬 웹툰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관람객이 쉬어갈 수 있는 의열단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옥상에는 휴게공간과 함께 해천 주변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생가터와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청동 지도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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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과 의열 단원들(좌), 의열단 창립과 조선혁명선언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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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립 배경(좌), 의열단 공약 10호(우)

 

1층 ― 의열투쟁 시작과 흐름

1층 전시실에서는 의열단이 만들어지기까지 시대 배경과 창립 과정, 의열투쟁 주요 사건을 살펴볼 수 있다. 의열단 공약과 주요 활동을 연표로 정리하고, 사진과 영상 자료를 곁들여 의열투쟁의 흐름을 보여준다. 전자 자료를 통해 관련 인물과 사건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의열투쟁 주요 연표와 영상, 전자방명록, 정보검색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을 비롯해 석정 윤세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 등 의열 투쟁의 주요 인물과 그들의 활동을 사진과 설명 자료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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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사의 서울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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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이후 의열단(좌), 밀양 출신 의열단(우)


의열단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2층)

2층으로 올라가면 의열단이 중국 길림에서 창립될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과 사진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의열단의 주요 의거, 체포와 고문을 겪은 독립투사들 사진과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는 의열단 강령 등과 의열단원들 사진과 함께 그들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는 자료, 여성 대원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은 의열단 활동 초기와 이후 조선의용대와 이어지는 항일무장투쟁 흐름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작은 공간에 담긴 큰 역사

의열기념관 특징은 많은 유물을 늘어놓은 박물관이라기보다 사진·영상·연표·설명문과 재현 공간을 통해 의열투쟁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데 있다. 더구나 김원봉 한 사람 이야기만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그와 함께 의열단을 만들고 항일투쟁에 나섰던 여러 독립투사의 삶과 활동을 함께 보여주는 공간이다.

기념관을 둘러본 뒤에는 건물 옆에 있는 의열체험관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다. 두 시설은 이름은 비슷하지만, 역할이 다르다.

기념관이 사진과 글, 영상, 전시물을 통해 의열투쟁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라면, 의열체험관은 직접 임무를 수행하며 당시 독립투사 활동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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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심장부에 폭탄을 던지다(의열 단원들의 활동상), 박차정 의사의 활동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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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체험관 일부. 밀양시청 제공(좌), 의열기념공원에서 필자(202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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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천, 의열테마거리 신문보도 조형물

 

의열체험관 ―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의열체험관 곁에는 해천이 흐르고 있고, 그 둘레에는 의열 테마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은 별도의 3층 건물로, 1층 체험 1관에서는 ‘과거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1919년으로 돌아가 의열단 퀴즈와 여러 체험을 한다.

2층에는 체험 2관과 체험 3관이 마련되어 있다. 체험 2관에서는 대적선전활동과 태항산 탈출하기 등을 통해 조선의용대 항일투쟁을 체험하고, 체험 3관에서는 ‘우리가 지키는 의열’과 ‘의열을 새기며’를 주제로 독립투사들 희생과 의열의 뜻을 되새긴다.

 

3층에는 운영사무실과 다목적실, 옥상정원이 있다.

따라서 기념관에서 의열단과 독립투사들의 역사를 먼저 만나고, 체험관에서 그들의 활동을 몸으로 따라가 본다면 밀양 의열 투쟁을 더욱 실감이 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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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테마거리 안내판(좌), 해천둘레 의열테마거리(우)

 

대륙의 불꽃 박차정 의사

여기에서 김원봉의 부인이자 동지였던 박차정(1910~1944)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박차정 의사는 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417번지(현재 칠산동 319-1)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연의 3남(문희 문호 문하) 2녀(수정 차정)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박차정(1910~1944)은 부산 동래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오빠 박문희·박문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외가 쪽 당숙인 김두봉(김두봉(金枓奉, 1889~1960년경)은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주시경에게 한글을 배운 국어학자로,『조선말본』등을 저술하였다.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한국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지내며 북한 정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58년 숙청되어 모든 직위에서 축출된 뒤 평안북도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60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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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박차정 의사(1931년 추정, 밀양의열기념관 제공)


박차정은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항일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31년 김원봉과 결혼했다.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 민족혁명당 부녀부 활동을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부녀복무 단장으로 여성 대원들을 이끌었다.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1944년 충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밀양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남편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조선의용대 등을 이끌었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과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등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해방 뒤 남북 분단이 굳어지자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북한 정권에서 초대 국가검열상(현감사원장격)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이후 1958년도 북한 정권의 반체제인사 몰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밀양의열 단원 중에서 유일하게 남한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울진에는?

앞서 영화 《암살》과 《밀정》을 이야기했지만, 밀양의열기념관에서 의열단 역사를 마주하고 나니 영화 속 장면들이 단순한 허구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폭탄 하나를 품고 국경을 넘고, 목숨을 걸고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겨누었던 젊은이들!

그들의 선택에는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들의 조국 해방 염원과 시대의식은 영화 《암살》과 《밀정》은 의열단과 약산 김원봉에 대한 대중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경향신문은 밀양시가 김원봉 생가터 150㎡를 매입하고 총 12억 원을 들여 의열기념관을 추진한다는 기사와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김원봉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보도했다. 경향신문, 2017. 4. 3.). 이러한 관심이 이어지는 가운데 밀양시는 약산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단과 밀양 항일독립투쟁 역사를 기리는 의열기념관을 세웠고, 2018년 3월 7일 문을 열었다.


밀양시 독립유공자는 93명에 이른다고 한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 포상 현황을 보면 올해(2025) 3월 말 현재 1만 8258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본적이 밀양인 인물은 93명이다. 국가보훈부전자공훈사료관.). 기념관이 자리한 해천 일대 내이동에서만 29명이나 된다. 이는 밀양시 독립유공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더구나 밀양 독립투쟁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약산 김원봉과 윤세주의 생가터가 있는 해천을 중심으로 밀양의열기념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남다른 역사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의열기념관은 밀양의 독립투쟁 역사를 오늘에도 살아 있는 역사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기억 공간으로서, 후손들에게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기념관을 나와 공원 의자에 앉아 해천(垓川)을 바라보았다. 한때 이 골목을 오갔을 김원봉과 윤세주를 비롯한 밀양 젊은이들! 이들은 이곳에서 자라 만주로 건너가 독립을 위해 젊음과 목숨을 걸었다. 그들의 발자취를 간접이나마 체험하니 자연스럽게 울진 독립운동가들이 떠 오를 수밖에 없었다. 

 

울진에도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가 88명(광복회 울진지회 사무국장 남상균 제공.)이고,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던 마을에는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역사를 한자리에서 보여주고 기억할 공간인 가칭 울진독립기념관은 아직 없다. 왜?인가.


역사는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누군가 기록하고,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찾아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오늘의 기억이 된다. 밀양 해천의 물은 과거를 뒤로하고 흘러가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려보낼 수 없다.

 

밀양에서 의열단의 항일투쟁 역사를 간접이나마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울진의 항일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할 것인가? 기억할 공간을 만들고 역사를 이어가는 일은 이제 우리 몫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그러한 의미에서 점필재(김종직)의 선비정신과 사명대사의 호국정신, 그리고 의열단 독립투쟁을 품은 밀양을 다시 보게 한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이어가야 할 현재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쓰는데 친절한 안내와 함께 자료 제공 등에 도움을 주신 밀양시청 박나영 주무관과 밀양의열기념관 이유진 피디 등 관계자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지면으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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