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 교수)
정유년 한 해도 저물었다. 사람들은 항상 연말연시가 되면 지난해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 누구나 바라는 대로 늘 만족해질 수는 없는 일이기에, 마음은 항상 더 채우려는 욕심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단단했던 그 각오도 흐지부지되기가 십상이다. 초심(初心)을 간직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원나라 때 학자 허형(許衡)이 말했다. “오만 가지 보양이 모두 다 거짓이니, 다만 마음 붙드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萬般補養皆虛僞 只有操心是要規). 여기서 말하는 ‘지유조심(只有操心)’은 마음을 잘 붙들어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원칙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묵직한 저울추가 되는 가르침이 네 글자의 행간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늘 말씀하신다. ‘매사에 조심(操心)’하라!‘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매사에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쉽게 흥분하여 결정하면 곧 후회가 따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어른들은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다잡기 위해 경구(警句)를 곁에 두고 되새겼다.
공자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노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방문했다. 사당 안에는 환공이 평소에 쓰든 그릇(欹器)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놓여 있었다. 공자께서 묘지기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그릇인가?” “환공께서 평소 앉는 자리 곁에 놓아두었던 그릇(宥坐之器)입니다. 속이 비면 기울고, 중간쯤 차면 바르게 서고, 가득 차면 다시 엎어집니다. 환공께서는 이것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그렇구려.” 공자께서 제자에게 그릇에 물을 붓게 하니 과연 묘지기의 말과 꼭 같았다. 공자께서 탄복하셨다. “아! 가득 차고도 엎어지지 않을 물건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제자 자로(子路)가 물었다. “가득 찬 것을 유지(持滿)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따라내어 덜면 되느니라.” “어떻게 덜어내는지요?” “높아지면 내려오고, 가득 차면 비우며, 부유하면 검약하고, 귀해지면 낮추는 것이니라. 지혜로워도 어리석은 듯이 굴고, 용감하나 겁먹은 듯이 하면 된다. 말을 잘해도 어눌한 듯하고, 많이 알더라도 조금밖에 모르는 듯이 해야 하느니라. 이를 두고 가득차지 않도록 덜어내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 방법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지덕(至德)을 갖춘 사람뿐이다.”
환공의 묘당에 놓인 그릇은 원래 농사에 쓰는 관개용(灌漑用) 도구였다. 약간 비스듬하게 앞쪽으로 기울어 있어 물을 받기 좋게 되어 있다. 물이 어느 정도 차면 기울었던 그릇이 똑바로 선다. 그러다가 물이 그릇에 가득 차면 훌렁 뒤집어지면서 받았던 물을 반대편으로 쏟아낸다. 마치 물레방아의 원리와 비슷하다. 환공은 이 그릇을 자리의 오른쪽(座右)에 두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곱씹었다. 매일 이 그릇을 보면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똑바로 서서 바른 판단을 내리라는 의미를 떠올렸다. 이른바 좌우명(座右銘)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가득 차 엎어지기 직전인데도 사람들은 욕심을 부려 퍼 담기에만 열중한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뒤집어져 몰락한다. 가득 참을 경계하라. 차면 덜어내라. 지만계영(持滿戒盈)이라는 성어의 가르침이다.
세상살이가 다 제 잘난 멋에 산다고들 한다. 잘 나고 못난 것도 모두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데도 작은 이익에도 눈을 부라리는 게 일상이다. 모든 시비가 이런 작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다. 세상 사함들이 다들 저 잘난 맛에 사니, 지거나 물러서기 싫어한다. 손해 보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결국 더 갖고 다 가지려다가 한꺼번에 모두 잃는다.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모자란 듯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현명한 처세가 된다는 옛 어른들이 가르침이 새삼 떠오른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에는 제대로 된 처세(處世)를 제일로 꼽는다. 처세의 기본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남을 잘 대해주면 그 공덕은 곧바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법칙을 일깨워 준다.
도연명(陶淵明)이 자식에게 편지를 보냈다. “네가 날마다 쓸 비용마저 마련키 어렵다 하니, 이번에 이 일손을 보내 나무하고 물 긷는 너의 수고로움을 돕게 하마. 그도 사람의 자식이니라. 잘 대우해야 한다(此亦人子也, 可善遇之).” 자식이 행여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것을 염려해서 보낸 당부의 글이다. ‘그도 다른 사람의 자식(此亦人子)’이라는 말 속에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그의 처세술이 담겨 있다. 이런 어버이의 간절한 당부를 듣고 자란 그의 자식과 후손들은 선대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고 바른 삶을 걸어갈 수 있었다.
인생의 빛깔도 나이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안타깝고 발만 동동 구르던 시간도 지나보면 왜 그랬나 싶다. 사납던 욕심도 덧없는 세월 앞에 자꾸 머쓱해 지기만 한다. 지난 일과 묵은 해는 기억 속에 묻어두자.
동해를 박차고 무술년의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지난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뜨거운 해를 바라보며 새해의 희망만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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