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 교수)
1004년 요나라 왕 성종(聖宗)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 송나라 수도 부근인 전주(澶州) 북성(北城)을 포위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다급해진 송나라 황제 진종(眞宗)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주의 남성(南城)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요나라 군이 생각보다 강하자, 전쟁을 피하려는 재상 구준(寇準) 등 관료들의 권유에 따라 평화 협상에 들어갔다. 두 나라는 협상 끝에 세 가지 조항에 합의하는 이른 바,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을 맺는다. 첫째, 송과 요는 형제로 하고 둘째, 송은 해마다 은 10만 냥과 명주 20만 필을 요에 보내며 셋째,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은 현상을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송나라 내부에서는 굴욕적인 협상이라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조정은 오히려 굴욕 외교가 아니라 ‘여유 있고 풍요로운 나라가 보잘 것 없는 북방 오랑캐에게 약간의 경비를 원조해주는 너그러운 대국적인 태도’일뿐이라고 일축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오랑캐에게 대승을 거두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40년 후, 1044년에는 서하(西夏)가 쳐들어오자 이번에도 송나라는 전쟁을 피하고 이른 바 ‘경력의 화약(慶暦和約)’이라는 화친을 맺었다. 송이 매년 은(銀) 7만2천 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을 서하에 제공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하여 교역을 허용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번에도 백성들에게는 외교적 대승이라고 선전했다.
이렇게 되자, “온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서의 송나라 황제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지만, 돈으로 얻은 평화는 황제의 재임 기간을 보장해주었다. 이때부터 송나라 내부에서는 외부의 위협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오랑캐가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매년 들어가는 거액의 비용도 문제였지만, 정작 국경 너머에는 외침에 대한 불안 요소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송나라가 요와 서하의 침공에 치욕적인 화친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화친을 맺은 후,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왕안석(王安石)이 내세운 군제개혁안도 당쟁에 휘말려 좌절되었다.
다시 80여 년 후인 1123년, 송나라는 요를 멸망시킨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다시 교섭에 들어갔다. 그 결과, 요나라에 지급하던 공물을 금나라에 돌리고도 국토의 상당 부분을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1126년 금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수도를 침공해오자 황제 흠종의 주변에는 ‘일부 땅을 더 내주고 화친을 청하자.’는 자들만 남아있었다. 황제는 이듬해 초, 포로 신세가 되었다. ‘정강의 변(靖康之辱變)’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북송은 망하고 말았다. 군사력 대신 문치(文治)를 앞세워 태평성대를 누리던 송나라의 멸망은 지나치게 많은 관리와 병사들의 급여, 세수(稅收) 부족으로 인한 재정 위기, 개혁의 실패와 권력의 남용, 외교 정책의 실패가 가져온 결과였다. 구걸로 얻은 평화와 풍요로움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면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자, 1938년 9월 29일 영국 수상 체임벌린과 히틀러,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모였다. 이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제시킨 채, 밀실 야합을 통해 체코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평화에 합의하였다. “나는 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습니다(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뮌헨 회담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이 공항에서 이렇게 선언했지만, 1년 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독재자를 상대로 평화를 구걸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야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는 이유로, 오늘날 외교 역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꼽히고 있다. 유화정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대에게 유화정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보여준 사례였다.
남과 북의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우리 민족의 항구적인 평화를 약속하고 통일을 다짐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저자거리에서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주머니 사정을 두고 한숨이 깊어지는데, 정부는 ‘항구적인 평화 구축’이라는 구호에 매달려 민생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급기야 ‘돈으로 평화를 구걸하는 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사회의 일각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예로부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는 마땅히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답을 찾으라.’고 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잘못된 판단과 미봉책으로 평화를 구걸하다가 위기에 이르렀던 나라들의 사례를 다시 되짚어보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우리 정부의 한반도 유화정책은 도저히 우리 스스로가 의도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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