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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 교수 |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부음(訃音)을 전해왔다. 서둘러 문상을 가기 위해 교외로 나오니 보이는 산과 들이 온통 오색으로 물들었다.
허수아비가 정겹던 들판은 어느새 추수가 끝나가고 길가에 늘어서서 싱그러움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하나 둘 힘이 부치는 듯 잎사귀를 떠나보내고 있다. 오가는 차량행렬 속에 단풍놀이 가는 관광버스가 부쩍 늘어난 것을 보면 시간은 이미 가을 깊숙한 계절 속으로 들어섰음을 느낄 수 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현관 벽에 ‘신종추원(愼終追遠)’이라고 쓴 커다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글귀를 보는 순간 문득 고향의 경치가 눈에 어른거린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은 늘 고향으로 가 있다. 추수가 끝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행사가 바로 시제(時祭)이고,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주 가보지 못하는 고향에 억지로라도 가야하는 명분이 바로 조상을 모시는 제사, 즉 시제이기 때문이다.
신종추원은「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신종(愼終)’은 ‘부모의 임종을 신중히 하다’라는 말로 장례를 극진하게 모신다는 뜻이며, ‘추원(追遠)’은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제사를 정성스레 올린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증자(曾子)였다. 증자는 ‘부모의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정성스런 제사를 통해 조상을 잘 모시면 백성들의 덕(德)이 모두 두텁게 돌아온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했다. 이 구문은 논어 전체를 통하여 가장 많이 인용된 것 중의 하나이면서 나아가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깊은 뜻을 지닌 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행동양식과 직결되어 있는 효행(孝行)의 연장선상에 있는 명언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치르는 기본적인 4가지 행사, 즉 사례(四禮)라고 하는 관(冠) 혼(婚) 상(喪) 제(祭)가 있다. 관과 혼은 삶의 의식인 가례(嘉禮)요, 상과 제는 죽음의 의식인 흉례(凶禮)이다. 신종(愼終)이란 곧 상례(喪禮)를 말하는 것이요, 추원(追遠)이란 곧 제례(祭禮)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종추원이란 흉례인 상과 제를 당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행동규범인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들도 많다. 후배들이 문상(問喪)을 하는 동안 기다리는데 일행 중 한 친구가 선채로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친구들이 두 번씩 절하고 상주와 맞절까지 마치자 그제서야 눈을 뜬다. 문상을 마치고 음식을 먹으면서 짐짓 모르는 체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다. 자기 종교는 기독교인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율 때문에 절을 하지 않는 거라고 한다. 집에서 제사를 모시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제사 같은 건 안 모신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부닥친 사건은 바로 이 땅의 조상숭배와의 마찰이었다. 조상숭배 즉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그의 저서「도올논어」에서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야기로서 기독교인들의 행동이야말로 제 눈의 티끌은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들추어내는 우행(愚行)에 불과한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는 결국 예수에 대한 제사요 예배인 것처럼 우리가 지내는 제례는 조상에 대한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愼終追遠)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신종(愼終)은 십자가이며 그에 대한 추원(追遠)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종추원(愼終追遠)이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이 땅에 있게 하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상례의 법도에 따라 행하고, 나아가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뜻을 제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예배를 올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비록 엄격한 법도에 따르도록 형식을 정해놓은 유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각각의 종족들이 각자 그들의 전통과 풍속에 따라 그 양태만 달리할 뿐, 인류 모두가 실천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미풍양속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죽어서 조상을 뵌다는 의식, 즉 내세를 믿는 것과 같이 죽어서 천당을 간다는 기독교의 내세의식 또한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며 저명한 사회과학자였던 허버트 스팬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그의 저서「사회학원리」에서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숭배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모든 신은 조상신이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근원은 하늘이며 인간의 뿌리는 조상이다. 사람이 오늘 자기를 이 땅에 있게 한 핏줄의 뿌리를 찾아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이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달부터 관공서에서는 호적등본 대신 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발급한다고 한다. 양성평등도 좋고 여권신장도 좋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혈통과 가계의 내력이 근본이므로 이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아지도 혈통이 있는 족보가 있어야 비싸게 팔리는 세상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에 있어서 그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으랴. 그래서 족보가 중요한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에도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무려 42대에 이르는 가계도가 실려 있다. 바로 인간 예수의 족보인 것이다.
예로부터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의 기본적인 절차가 바로 제사였다. 가문에 따라 제사를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다른 가문과 차별화되기도 하였고 제사 차림의 규모에 따라 사회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도 많이 달랐으므로 각 가문에서는 나름대로 조상을 모시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성 명문가문일수록 그 정도가 더욱 강하게 나타났던 것은 물론이다.
지방과 계층에 따라 또 각 집안마다 다양한 제사의 형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의 근본정신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며 각자가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예법과 관습의 차이에 따른 제사 절차의 다양한 형식은 제사의 근본정신인 공경을 실천하는 방법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마음의 고향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따스한 어버이의 품이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면서 그 자식의 부모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어버이를 모시는 자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온 산천이 붉게 물들어가는 이 계절에 단 하루만이라도 오늘의 나 자신을 있게 하신 얼굴도 모르는 먼 조상님들을 추모하기 위해 문중 구성원들이 모두 모이는 시제(時祭)에 참석해 봄이 어떠하겠는가. 돌아와서는 가족과 함께 족보라도 한 번 펼쳐볼 일이다.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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