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漢書> ‘소무전(蘇武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漢)나라는 대대로 북방의 흉노(匈奴)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무제(武帝)는 양국 간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를 사신으로 파견했다. 100여명의 대규모 수행원을 데리고 파견된 친선을 위한 강화사절단이었다.
소무 일행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하려던 차에 공교롭게도 일이 터졌다. 얼마 전에 흉노와 싸우다가 투항했던 장군 위율(衛律)의 부하 우상(虞常)이 위율을 죽이려다 실패하면서 엉뚱하게도 사신으로 파견된 소무가 연루된 것이다. 소무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결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하옥되었다.
이때부터 흉노의 추장 선우(單于)는 함께 갔던 사신들을 하나씩 죽이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투항할 것을 강요했다. 소무가 투항을 거부하고 버티자 선우는 땅을 파서 그를 가두고 굶겼다. 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이 뼈에 사무쳐왔다. 열흘이 지나 문을 열어보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목이 타면 눈을 녹여 마셨고 배가 고프면 담요의 털을 뽑아 먹어가면서 그는 절개를 지켜냈다.
선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숫양 몇 마리를 주며 “이 놈들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면서 지금의 바이칼호(湖) 부근으로 추방시켰다. 소무는 그곳에서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조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소무(蘇武)가 양(羊)을 친다.’라는 뜻의 ‘소무목양(蘇武牧羊)’은 고사성어로 회자되면서 후세에 이르러 ‘양을 돌본다’라는 뜻의 ‘간양(看羊)’과 함께 충절(忠節)의 상징이 되었다.
세상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다툼이 있으면 화해의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얼어붙었던 한(漢)과 흉노(匈奴)의 관계도 무제(武帝)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하자 풀리기 시작했다. 소제는 즉각 억류당한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소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특사는 선우를 만나 기지를 발휘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큰 호수(大澤)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며칠 후 흉노의 사자(使者)가 데려온 소무는 예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닳을 대로 닳아빠진 한나라 사신(使臣)임을 밝혀주는 증표인 부절(符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렇게 특사의 기지로 소무는 19년 만에 풀려나 한나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멀리서 전해오는 반가운 소식을 담은 편지를 ‘안서(雁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지난 8월 12일 서울가정법원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친손자가 소송을 통해 제기한 할아버지 단재와 자신의 아버지 간의 친자관계를 확정했다. 법원은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 재적등본과 고령신씨(高靈申氏) 세보(世譜)를 보고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상식적인 판단이 나오기까지 무려 6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단재의 두 아들은 소송을 통해 끊어진 부자간의 인연의 고리를 이을 수 있었지만,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단재를 도와 헌신했던 단재의 아내 박자혜 여사는 “법률상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단재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원혼(冤魂)이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광복 64주년을 맞는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단재(丹齋)가 누구인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며 초심과 절개를 끝까지 지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삼절(三絶)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도대체 누구 덕분에 얻은 광복인데 정작 광복의 주인공과 그 후손들이 구걸하듯 해서 국적과 호적을 되찾고 친자와 부부관계조차 법적 소송을 통해 애걸하듯 회복해야 한다는 말인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이들이 무국적과 무호적의 설움을 광복이 된 지 64년 만에야 겨우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한 없이 부끄럽다.
며칠 전에는 개성공단에서 일하다가 억류되었던 유 모씨가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를 석방시키는 데는 관련 기업인의 방북(訪北)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변명으로 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그 뿐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국군포로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피랍된 억류 선원 문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국가가 국민을 끝까지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해 그 절개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려 하겠는가? 흉노에 억류되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절개를 지킨 소무(蘇武)를 잊지 않은 한(漢)나라, 전장에서 실종된 병사 한 사람을 위해 특공대를 보내고 자국민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해 전직 대통령까지 자원해서 나서는 나라가 왜 초강대국이 되었는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대한민국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재산, 가족 등 모든 것을 바쳐가며 헌신했던 이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들을 조속히 해결해야만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완전한 광복을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광복된 지 64년이 지나도록 ‘광복의 그늘’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전반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폭넓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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