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이 황금색으로 바뀌고 하늘이 점점 높아지더니 마침내 우리 민족 고유의 큰 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왔다.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향 길에 오르는 까닭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함께 성묘하고 차례를 지내고 조상을 기리는 행사를 치르면서 끈끈한 연줄을 확인하며 정(情)을 나누기 위함이다. 주머니가 얄팍해도 마음만은 넉넉하고 푸짐해지는 때다.
예로부터 한가위는 가족 친지간의 사랑과 우애를 확인하고 추원보본(追遠報本)을 실천하는 것을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추원보본’이란 ‘조상을 잘 모시고 근본을 잊지 않으며 제사를 반드시 정성으로 모셔라.(追遠報本 祭祀必誠)’라는 뜻으로『소학(小學)』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즉, ‘추원(追遠)’이란 ‘조상의 제사를 극진히 모시는 것’을 말하고, ‘보본(報本)’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도 중추절에는 달(月) 모양의 월병(月餠)을 만들어 조상에게 바치고 달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다. 중국 속담에도 ‘매봉중추(每逢中秋) 배사월병(倍思月餠)’라는 말이 있다. 매년 중추절(仲秋節)에는 더욱 월병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월병을 생각한다는 것은 조상의 음덕을 추모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산소에 풀이 무성하면 자손들이 조상을 돌보지 아니한 증거로 여겨 이웃사람들이 효성이 모자란 불효자를 둔 집안이라고 흉을 보곤 했다. 그래서 추석을 앞두고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이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벌초를 하지 않으면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니라 불효한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추석에 벌초를 하고 차례를 지내며 성묘를 하는 것은 후손된 사람으로서 마땅히 조상을 기리며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일, 즉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것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가르쳐 온 큰 가르침이다. 따라서 객지에 살면서 비록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추석이 되어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으로 또는 자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도리라 여겨왔던 것이다.
추석날 아침에는 사당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4대조인 고조(高祖)까지 차례를 지낸다. 5대조 이상의 조상은 매년 가을에 추수가 끝난 후 시제(時祭)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차례 상에 올리는 밤, 대추, 감은 반드시 그 해에 거둔 햇과일을 쓰고 햅쌀로 빚은 술(新稻酒)과 햅쌀로 만든 송편을 올려야 한다.
조상에 대한 차례가 끝나면 가족 친지들이 모여 서로 덕담을 나누며 끈끈한 정(情)을 확인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확인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처가(妻家)와 친정에 대한 배려이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라고 할 정도로 추석을 전후하여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식으로서 양가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모님의 헌신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너무나 쉽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간과하고 있다. 살아계실 때 그 은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부모님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깨닫고 눈물을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목이 마르고서야 우물을 판다(臨渴掘井)’이라는 말이 있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 지내다가 일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황급히 서두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안자춘추(晏子春秋)》에서 유래된 말이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에 이르기를, “무릇 병이 이미 깊어진 뒤에야 약을 쓰고, 어지러움이 이미 심해진 뒤에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목이 마르고서야 우물을 파고, 싸울 때가 되어서야 무기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역시 때늦은 일이 아니겠는가(夫病已成而後藥之, 亂已成而後治之, 譬猶渴而穿井, 鬪而鑄錐, 不亦晩乎)”라고 했다.
항상 곁에 계실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다음, 자신이 자식을 둔 부모가 되었을 때에 이르러 비로소 어버이의 은공을 깨우치고 후회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늦게나마 깨닫고 후회하며 모시려고 할 때까지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먼 조상을 기리며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당장은 살아계시는 부모님을 극진히 생각하고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하고 진정한 ‘효도(孝道)’의 본보기이다.
내 아이들이 커서 효도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지금 나를 있게 해주신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하고 있는지를 한 번 돌아보라. 내가 평소에 부모를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며 모시는가를 내 아이들이 지켜보면서 자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 해 추석 때보다 주름살이 더 늘고 더욱 쇠약해지신 부모님을 뵈니 그동안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가 막심한데, 문득 부모님의 은공을 노래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조가 떠올라 가슴을 저미게 한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세상에 가장 무서운 ‘눈(目)’이 있다. 아무리 가식으로 꾸미고 거짓으로 행동해도 절대 속일 수 없는 ‘눈’, 바로 내가 정성을 들여 키우는 자식들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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