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
시제를 마치고 둘러앉아 언덕 아래 탁 트인 산골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얼마 남지 않은 대선과 관련된 시국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던 대화들이 자연스럽게 집안문제로 이어지다가 자녀들의 진로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 동안 취업시험에 여러 번 낙방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시골에 내려와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며 세상을 등진 채 소일한다는 먼 조카 녀석의 이야기에 이르자,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마음이 아련해진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한다 해도 이미 자식에 대해 상당히 많이 포기해버린 듯한 친구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다. 모두들 먼 산을 바라보며 혀를 차기만 할 뿐 선뜻 꺼내는 말이 없다, 그래도 그냥 듣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산하는 길에 그와 나란히 걸으며 아직도 서른 살이 채 안 된 조카의 나이를 거론하면서, 조심스레 옛 어른들이 남겼던 고사 가운데 두보(杜甫)의 이야기로 말을 이었다. ‘장부(丈夫)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삶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將夫蓋棺事始定)’는 두보의 시(詩) 한 수를 읊었다.
두보(杜甫)가 쓰촨성(四川省) 쿠이저우(夔州)의 깊은 산골로 내려와 구차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 친구의 아들인 소혜(蘇徯)도 역시 유배되어 그곳에 와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가 이를 보다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 그를 격려하고자 했다. 《소혜에게 보내는 편지(君不見簡蘇徯)》이란 시(詩)의 한 구절이다.
君不見道邊廢棄池 너는 보지 못했느냐, 길가에 버려진 연못을,
君不見前者摧折桐 너는 보지 못했느냐, 부러져 꺾인 오동나무를,
百年死樹中琴瑟 백년이 지나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一斛舊水藏蛟龍 한 홉 오래된 물에도 교룡이 숨어 있다네.
丈夫蓋棺事始定 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
君今幸未成老翁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何恨憔悴在山中 초췌한 몰골로 산중에 있음을 어이 한탄하는가.
深山窮谷不可處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는 살 곳이 아니니라,
霹靂魍魎兼狂風 벼락과 도깨비에 광풍까지 있으니.
이 시(詩)를 읽은 소혜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마음을 다잡고 절치부심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후에 그는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 가서 마침내 유명한 설객(說客)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비롯된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성어는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한 때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큰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을 일러주는 고사성어다. 세상을 처음부터 평탄하게 순풍에 돛단배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차피 온갖 고난을 헤쳐가야 하는 것이 인생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작은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십 수 년 전에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기업의 총수가 써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의 이름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큰 꿈을 가지고 세상을 넓게 보라고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넓은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고 순간적인 좌절감에 사로잡혀 그 틀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미래는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고난 팔자타령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황하(黃河)의 신(神) 하백(河伯)이 황하 중류의 맹진(孟津)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금빛으로 빛나는 강물을 보며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이렇게 큰 강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 한 마리가 웃으며 서있었다. 하백이 자라에게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늙은 자라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해가 뜨는 동쪽에 북해(北海)라는 큰 바다가 있는데, 이 세상 모든 강이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가 실로 어마어마하지요.”
“과연 그렇게나 큰 강이 있을까?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맹진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을이 오면서 연일 쏟아지는 비로 물이 불어나면서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넓어진 황하를 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의 말이 생각났다. 하백은 자신이 다스리는 강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는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마침내 동쪽 끝 북해에 이르렀다.
그가 그곳에 이르자 북해의 신인 약(若)이 하백을 반갑게 맞았다. 약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가 가라앉고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하백은 천하가 모두 물로 이루어져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바다를 보고 너무 놀랐다. 그리고 그동안 세상물정 모르고 혼자 뽐내며 살아온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道)를 듣고서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약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에게 겨울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더불어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장자(莊子)》 외편 〈추수(秋水)〉에 실린 ‘망양지탄(望洋之歎)’의 고사로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탄식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한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 이 넓은 세상에 설마 내 뜻을 펼칠만한 곳이 어디 없겠는가. 다만 내가 그동안 작은 일에 집착하며 자신만의 틀을 고집하며 살아오는 바람에, 큰 그림 그리는 일을 잠시 잊었을 뿐인 것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천하는 너무 넓어 대장부의 큰 꿈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차피 대장부의 평가는 관 뚜껑이 닫힌 후에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쪽빛 하늘에 세상은 한없이 넓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친구의 환한 미소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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