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 (경민대학교 교수) |
1986년 어느 날, 성적에 대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한 중학생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그 당시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치고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그의 안타까운 절규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었다.
자살 사건까지는 기억하지는 못한다 해도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당시 많은 학생들이 동료의 죽음을 놓고 자기가 어른이 되면 절대로 아이들에게 ‘성적’을 강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랬던 학생들이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어느덧 그때 그 시절처럼 초, 중학생이 되었다. 어릴 적 다짐했던 그 말을 실천할 때가 왔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고, 성적 때문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아이들은 그때보다 더 늘어났다. 피해자였던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가해자로 바뀌었을 뿐 상황이 달라진 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여전히 이 문제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입시에 내몰리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로 희생됐다. 그러나 이제는 초등학생들까지도 성적을 비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이런 어이없는 현실을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을 하겠다고 나서도 부족할 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또 한 명의 아이가 고작 성적 때문에 온갖 공포를 다 겪으면서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성적이 나쁘면 그 아이는 장래는 정말 평생 불행해 지는가?
당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이 쓴〈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에 보면 나무 심는 농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무 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곽(郭)씨 성을 가진 농부가 있었다. 곱사병을 앓아 등이 높이 솟아 구부리고 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탁타(槖駝, 낙타라는 뜻)’라 불렀다. 그가 심거나 옮겨 놓은 나무는 살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크고 무성하며 일찍 열매 맺고 수량도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곽탁타의 나무 가꾸기를 가만히 엿보고 부러워하며 따라해 보기도 했지만 그와 같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잘 기르는 방법을 물었다.
“나무를 오래 살거나 번성하게 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무의 본성에 따를 뿐이지요. 나무는 뿌리가 바르게 뻗고, 북돋은 흙의 높이가 평평한 것을 좋아합니다. 처음 뿌리를 내렸던 흙을 좋아하고, 뿌리 사이에 흙이 들어가도록 꼭꼭 다져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는 걱정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처럼 사랑하고 내버려 둘 때에는 버린 듯이 하면, 나무는 온전히 보존되어 잘 자라게 되지요. 저는 나무의 성장을 해치지 않을 뿐이지 저에게 크고 무성하게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나무가 자신이 지닌 본성대로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더군요. 뿌리의 흙을 자주 바꾸며, 흙을 덮어 돋우는 일도 지나치지 않으면 부족하게 합니다. 나무를 너무 아끼고 근심한 나머지 아침에 돌봐 주고 저녁에 어루만집니다. 심한 경우 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시험하기도 합니다. 뿌리를 흔들어서 흙이 꼼꼼히 채워져 있나 살피기도 하지요. 이러면 날이 갈수록 나무는 시들어 갑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너무 아껴서 그렇다.’라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심은 나무만 못한 것이지요.”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단기간의 성과를 요구하며 여러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 조금만 성적이 떨어져도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아이를 나무란다. 자정이 넘도록 숙제를 도우면서 아이가 졸기라도 하면 소리를 지르며 다그친다. 아이가 무언가에 조금만 재능을 보여도 당장 그것으로 무언가 보여 주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면서 “너는 이것도 못하냐.”며 핀잔을 준다.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내 아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들이 어리더라도 사랑하는 만큼 믿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내 아이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을 갖고 그저 아이들이 딴 곳으로 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만 해도 충분하다. 성적은 아이가 올리는 것이지 부모가 올리는 것이 아니다.
중국 송(宋)나라에 욕심 많은 한 농부가 있었다. 모내기를 해놓고 벼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서 논에 가보니 다른 사람의 벼보다 덜 자란 것 같았다. 농부는 궁리 끝에 벼의 순을 잡아 빼보니 약간 더 자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하루 종일 벼의 순을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자 식구들이 기겁했다. 이튿날 아들이 논에 가보니 벼는 이미 하얗게 말라 죽어 있었다. 농부는 벼의 순을 뽑으면 더 빨리 자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 것이다.
급하게 서두르다 오히려 일을 망친다는 뜻으로 쓰이는 발묘조장(拔苗助長)의 고사로서,《맹자(孟子)》의〈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도 ‘서둘러 가려다 보면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欲速則不達)’라고 했다. 우리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빨리 서두르면 도리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는 교훈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부모들은 말한다. 한 살이라도 더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뒤처지고 말 거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자식을 위해서인가?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자식의 인생 전체를 통째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 사람의 인생이 판가름 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방식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자녀의 20년 후나 30년 후 삶의 질과 가치를 염두에 두고 교육하는 사람이라면 초, 중, 고교 시절을 준비 단계로 생각하는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성적이 내일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봄날이 오기도 전에 꽃이 다 피어버리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될까? 꽃샘추위만 와도 소리 없이 지고 말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花無十日紅)’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여름의 열기와 가을의 쇠락, 겨울의 침잠은 대체 어떻게 극복해낸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조기교육의 광풍은 인간의 ‘본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욕망의 덫’이다. 곽탁타의 말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아이들에게 원수가 되는’ 격이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더 괴로움을 줘야 만족할 것인가.
이제 우리 부모들은 지혜로운 낙타 아저씨가 되어야 한다. ‘성적’을 강요하며 아이를 괴롭히는 이런 현실이 지속된다면 아이의 ‘본성’을 해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이미 늦다. 이제라도 부모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생이다. 부모부터 성적에서 해방되자.
어느덧 나무 심기 좋은 계절이 왔다. 나무는 스스로 자란다. 혹한과 무더위를 겪으면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자란다. 아이들의 본성을 믿고 응원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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