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
선거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여러 후보들의 장밋빛 공약들 속에서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체감도는 여실히 떨어진다. 재도전 무대에 오르는 후보는 그동안의 업적을 부각시키고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호소하지만, 새로 도전하는 후보는 바꿔야 한다는 것을 주된 이슈로 들고 나온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자신이 적임자요, 공약을 성실히 지킬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점이다. 과연 그러한가?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우리는 매번 선거 때마다 기대와 실망을 반복해 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기권할 수는 없으니 뽑아야 하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선택이 아니다. 누구를 믿어야 하나? 이래저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동서고금을 교훈을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를 배워왔다.
춘추시대의 진나라 헌공(獻公)은 애첩의 이간질에 속아 태자인 아들 신생(申生)을 죽이고, 신생의 동생인 중이(重耳)마저 죽이려 하였다. 중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 이후 19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초나라 성왕은 중이를 보고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환대하면서 물었다. “그대가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된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중이는 한참 생각한 뒤 말했다.
“미녀와 보옥, 비단 같은 것은 초나라에도 넘쳐납니다. 은혜를 입어 진나라에 돌아가 왕이 되어 훗날 초나라와 싸우게 되면, 일단 삼사(三舍)를 퇴각하는 것으로 오늘의 성대한 접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싸움을 걸어오면 그 땐 저도 무장을 갖추어 일전을 치르겠습니다.” 당시의 군대는 하루에 30리를 행군하고 야영을 위해 임시 숙사(宿舍)를 지었는데, 이것을 일사(一舍)라고 했다. 그러므로 삼사(三舍)는 90리의 거리를 가리킨다.
훗날 중이는 천신만고 끝에 고국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었다. 춘추오패(五覇) 중의 한명인 진 문공(晉文公)이 바로 그다. 그 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진문공의 비범함을 익히 알고 있던 초나라 성왕은 접전을 피해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장군 자옥이 철군을 반대하면서 진나라와의 일전을 요청했다. 이에 화가 난 성왕은 일부 병력만 자옥에게 남겨두고 주력부대와 함께 철수해 버렸다. 초군의 진격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성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나라 군대를 90리 후퇴시켰다. 자옥은 진나라 군대가 겁을 먹고 달아난다고 착각, 맹렬히 뒤쫓았다. 하지만 진나라 군대가 갑자기 돌아서 반격을 가하자 초군은 대패했고 자옥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는《좌씨전(左氏傳)》의 희공(僖公) 23년조에 실려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투지 않거나 양보하여 일단 물러난다는 뜻의 ‘퇴피삼사(退避三舍)’는 이 고사에서 비롯됐다.
《사기(史記)》〈계포전(季布傳)〉에 실린 이야기다. 초나라 사람 계포는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해 한 번 한 약속은 끝까지 지켰다. 그는 항우의 장수로서 출전해 여러 차례 유방을 괴롭혔는데, 나중에 항우가 패망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계포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이 걸려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천하의 백성들은 누구도 그를 고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고조(高祖) 유방에게 천거하기까지 했다. 그 후 그는 유방의 휘하에서 중랑장(中郎將)에 올랐다.
어느 날, 조구생이라는 자가 그를 찾아와 “우리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 황금 백 냥을 얻는다 해도 계포의 한마디 승낙을 받는 것보다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명성을 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초나라 출신입니다. 내가 천하를 다니며 당신의 명성을 널리 알린다면 그대 이름은 천하에 떨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이때부터 계포는 조구생을 상객으로 대하였고, 계포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계포의 고향인 초나라에서는 계포가 한번 한 약속은 결코 번복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뜻의 ‘계포일락(季布一諾)’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나가는 실천적 덕목이요, 그런 믿음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는 공감대 형성이다. 약속은 비록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요구한다. 특히 정치인들에 의해 양산되는 사회적 약속에는 무거운 공적인 책임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 환기시키는 방법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투표 밖에는 없다.
정치인들이 약속을 잘 지키는가에 대한 사회적 감시기구도 필요하다. 일부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짧은 선거기간 동안 후보들을 엄정하고 면밀하게 살펴보기에는 턱없이 정보가 부족한 것도 그 부족함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후영(侯嬴)은 집안이 가난해 나이 일흔에 신릉군(信陵君)이 맞아 상객으로 삼았다.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포위하자 조나라가 위나라 왕과 신릉군에게 구원을 청했다. 후영이 신릉군에게 계책을 올려 위나라 왕의 병부(兵符)를 몰래 입수하게 했다. 신릉군은 그 병부를 이용해 사령관 진비를 속여 죽이고 불법적으로 병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구했다. 계책이 성공하자 후영은 병부를 입수한 경위를 비밀에 부치기 위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당나라 때 위징(魏徵)은 “계포는 한 번 한 약속을 거듭 하는 일이 없고, 후영은 약속한 한 마디의 말을 중히 여긴다(季布無二諾 侯瀛重一言)”라 읊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의 덕목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온톤 불신의 늪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무슨 대책을 발표해도 사람들의 그 진정성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곤 한다. 새로운 인물을 등용한다고 발표를 하면 그 사람의 온갖 잡다한 사생활까지 들추어 집단적으로 몰매를 가하고 낙마를 시켜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 누구도 그 자리에 섣불리 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인물난을 겪고 있다. 어렵사리 낙점된 사람도 무대에 오르기를 사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다. 이제는 투명인간이라도 개발해야 할 듯하다.
이제는 우리 민초들이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개혁운동에 나서야 한다. 무조건 반대가 능사가 아니다. 대안 있는 비판만이 우리 사회를 살릴 수 있다.
후한(後漢)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할 때, 유비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한 마음이 되면 절대 당해낼 수 없다(萬人一心不可當)”는 명언을 남겼다. 백성이 일치단결하면 거기에서 강력한 힘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제 좋든 나쁘든 민심은 모아졌다. 이제는 모두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동안의 갈등을 화합으로 치유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해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온 나라가 깊은 애도 속에 잠긴 채, 슬픔을 가눌 사이도 없이 잔인했던 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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