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왜구(倭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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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 경민대학교 교수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죽음을 앞두고 당시 통일 직후 불안정한 나라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임종에 이르러 지의법사(智義法師)를 불러, ‘내가 죽거든 불교의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라. 나는 나라를 지키는 용(護國大龍)이 되겠노라“고 유언하였다. 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동해의 수중 큰 바위(大石)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큰 바위를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렀다.
한 설화에 의하면, 문무왕은 죽기 전,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면서 “나는 죽은 후에 동해바다의 용이 될 것이다. 이 피리를 불면 내가 나타나 나라의 안위를 지키겠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문왕은 대왕암 가까운 곳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으면서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된 부왕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대왕암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이견대(利見臺)라는 정자를 짓고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의 왜구의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 초기부터 있어 왔으니 그 역사가 무려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다. 왜구의 노략질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이를 정도로 극심하였다. 급기야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를 파견, 신라를 침입한 왜구를 경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오늘날 부산 동래 일대로 추정되는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러 마침내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왜구는 고려 중엽에 이르면 그 규모가 100척 이상으로 확대, 조직화되었고, 침략지역도 경상, 전라, 충청, 경기도 연안은 물론, 황해도와 평안도 해안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감행하였다. 왜구의 약탈대상물은 주로 식량이어서, 지방에서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로 올라가던 곡물운반선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해안을 상륙한 왜구들은 재물은 물론 사람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만행을 일삼아 연안과 농어촌 사회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약탈대상물도 갈수록 다양해져 왕릉을 도굴하고 각종 문화재를 훔쳐가는 등, 한반도 전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연중행사처럼 자행된 왜구의 침입은 정치의 불안정과 국가재정을 크게 기울게 하여 고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들 왜구의 침입은 여전했다. 조정에서는 회유책을 병행하여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조선 관직을 주어 우대하고, 투화(投化)하거나 향화(向化)하는 왜인에게는 집과 토지를 주기도 하였다. 또, 부산포 등 3곳에 왜인들의 거주지를 허락하고 무역장을 개설하여 각종 혜택을 부여했지만, 왜인들은 자주 왜변(倭變)을 일으켜 약속을 깨뜨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일본 본토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선린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일본은 늘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배신으로 갚으면서, ‘구(寇)’라는 해적과 도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종전70년 담화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확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출발시키려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한다.”며 일본 측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고 국제사회도 연일 압박의 강도를 높여왔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일본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역사인식을 제대로 해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기초적 수준의 국제사회 요구마저도, 일본은 그 요구를 간곡하게 애걸하는 모습으로 희화화하면서 여전히 노략질 대상으로 여기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혜공(惠公) 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 이웃 진(秦)나라로부터 식량을 사들여 고비를 넘겼다. 이듬해에는 거꾸로 진(秦)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로부터 식량을 사들이고자 하였으나, 진(晉)나라는 지난해의 고마움을 잊고 응하지 않았다.
진(晉)나라 대부 경정(慶鄭)은 혜공에게 지난해의 어려웠던 국면에서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은혜를 저버리면 외로운 처지가 될 것이며, 남의 재앙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背施無親, 幸災不仁)”라고 하면서, 식량을 팔아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혜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분노한 진(秦)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고, 혜공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左氏傳)》 ‘희공(僖公) 14년’조에 실려 있으며, ‘행재(幸災)’라는 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 주(周)나라는 장왕이 죽은 뒤에 희왕에 이어 혜왕(惠王)이 왕위에 올랐다. 혜왕 때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왕을 몰아내고 장왕의 아들 자퇴(子頹)를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웠다. 어리석은 자퇴는 매일 대신들과 음주가무에 빠져 지냈다.
이웃 정(鄭)나라의 려왕이 이 소식을 듣고 “때를 가리지 않고 슬픔과 즐거움을 나타내면 재앙이 반드시 닥친다고 들었다. 지금 자퇴가 가무를 즐기느라 피곤한 줄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즐기는 짓이다(哀樂失時, 殃咎必至. 今王子頹歌舞不倦, 樂禍也)”라고 말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장공(莊公) 20년’조에 실려 있으며, ‘낙화(樂禍)’라는 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 ‘행재낙화(幸災樂禍)’는 남의 불행을 함께 슬퍼하기는커녕 즐거워하는 그릇된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이웃 국가들에게 엄청난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안겼으면서도, 그들에게 보상은커녕 해마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즐기고 있는 일본에게 어울리는 고사라 할 것이다. 일본은 언제나 주변국을 ‘함께 해야 할 친구’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면서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신의와 성실은 물론, 의리조차도 모르는 행보를 계속해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일본은 우리 이웃국가들을 친구라고 부를 만큼 떳떳하고 당당한가?
중국 후한 말기, 관영(管寗)과 화흠(華歆)은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친구였다. 그러나 관영은 학문을 닦는 데 힘쓰고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나, 화흠은 언행이 가볍고 부귀영화를 흠모하는 등 성향은 많이 달랐다.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채소밭에서 김을 매는데 땅 속에서 금덩어리가 나왔다. 관영은 아무 일 없는 듯 호미질을 계속하였지만, 화흠은 그 금덩어리를 들고 저잣거리로 나가 탕진해 버렸다.
어느 날, 둘이 함께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집 앞으로 높은 관리의 수레 행렬이 지나갔다. 관영은 전과 다름없이 책을 읽는데 몰두하였으나, 화흠은 밖으로 나가 구경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와서는 관영에게 그 행차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떠벌리며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관영은 화흠의 태도에 화가 나서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던 자리를 칼로 잘라 버리고는 “너는 이제부터 내 친구가 아니다(寗割席分坐曰, 子非吾友也).”라고 말하며 절교를 선언했다.
나중에 화흠은 오나라 손책의 휘하에 있다가 위나라의 조조에게 귀순하여 한나라를 찬탈하는 일을 도왔으나, 관영은 위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내 사양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할석분좌(割席分坐)’는 ‘자리를 잘라서 앉은 곳을 나누다’라는 뜻으로, 친구 간에 뜻이 달라 절교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세설신어(世說新語)》의〈덕행(德行)〉편에 실려 있다.
일본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이른 바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단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저 이웃의 불행을 행복이라 여기면서 자신들의 말초적 이익에만 집착하며 끊임없이 주변국을 외교, 경제적으로 노략질하고 있는 ‘현대판 왜구집단’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에게 ‘일본(日本)’은 단지 지정학적 이웃에 불과할 뿐, 국제사회에서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낮은, 마땅히 할석분좌(割席分坐)해야 할 저질 ‘왜구집단’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