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후소(繪事後素)

기사입력 2007.10.2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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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가 뭔데 왜 남의 아이에게 뭐라 나무라는 거예요?”
점심시간이 되자 음식점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입구에 들어서자 한쪽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가 너무 천방지축이잖아요. 이러는 걸 보고도 아무 말씀 안하시니까 보다 못해 한마디 하는 겁니다. 주변을 보세요.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하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 마주 선 아주머니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말했다.
 “내 애는 내가 알아서 가르쳐요. 나 참, 웃겨서…” 자칭 자기가 여교사라고 말하는 여자가 계속 눈을 치켜뜨고 씩씩거리자 여교사의 친정엄마라는 분도 흥분해서 삿대질하면서 일어섰다.

처음부터 조용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참다못해 이구동성으로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아주머니의 편을 들었다. 여교사라는 여자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친정어머니와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사라졌다.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뻔 했지만 결말은 의외로 싱거웠다.
 

“아직도 이런 일이 있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으로 공부를 하던 아이가 마루로 나오면서 푸념하듯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빌려온 책을 들어 보인다. 중간에 약 10여 페이지 정도가 면도칼로 잘려져 나가 있다.
누군가 빌려가서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칼로 도려낸 것이다. 아이에게 뭐라고 해 줄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자하가 여쭈어 말하였다. “「어여쁜 웃음의 입맵시며, 아름다운 눈맵시여, 흰 바탕에 고운 채색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子夏問曰 巧笑?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그림을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을 만든 후에 하는 것이니라. (子曰 繪事後素)”

말하기를“예가 뒤입니까? (曰 禮後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일으켜 세우는 자는 상(商 : 자하의 이름)이로구나.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 하도다.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하가 공자에게 질문한 내용은 춘추전국시대 당시 위(衛)나라 사람들 사이에 널리 불려지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위나라 장공(莊公)이 제나라 동궁(東宮) 득신(得臣)의 여동생인 장강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그녀의 미모가 너무도 빼어났기 때문에 그녀가 시집올 때 위나라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라 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 시경(詩經)에 위풍(衛風) 석인(碩人)으로 편집되어 남아있다.

석인이란 훤칠하고 늘씬한 여인을 뜻한다. 자하는 공자의 제자로 본시 위(衛)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위나라의 노래, 위풍(衛風)의 한 수를 인용하여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한 것이다. 여기에서 천(?)은 입을 예쁘게 다문 모습을 이르고, 반(盼)은 눈자위의 검고 흰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이런 천반(?盼)의 아름다운 바탕을 가지고 있을 때 거기에 빛나는 채색을 더하여 꾸미면 마치 밑바탕에 채색을 더해 더 아름다워지는 것과 같은 것인데, 자하는 그 반대로 기본기가 없는 밑바탕을 인위적으로 장식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한 마디로서 아주 간결하고 명료하다. 회사(繪事)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고, 후소(後素)는 흰 바탕을 만든 다음이라는 뜻이다. 고공기(考工記)에도 이르기를,「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을 만든 뒤에 하는 것이다.(繪?之事 後素功)」라고 하였으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을 만든 다음에 비로소 원하는 채색을 가할 수 있음을 이르는 것이다.

이에 다시 자하가 “예(禮)가 뒤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곧바로 칭찬으로 제자의 총명함에 답하고 있다. 즉, 사람에게 진실로 그런 기본적인 바탕이 없으면 예(禮)를 배워도 헛되어 제대로 행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곧 그림을 그리는 일이 먼저 바탕을 희게 만든 다음이라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공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을 때 먼저 밑바탕을 희게 만든 다음에 비로소 온갖 채색을 통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아름답게 완성해 나갈 수 있듯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는 먼저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이 형성되어 있어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사람으로서 기본기에 가장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지난 6월에 서울의 한 지자체에서 색다른 행사가 있었다. 시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자동차 운행 줄이기 등의 목적으로 자전거 200대를 구입해서 각 동별로 고르게 배치했다.  

아무나 이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날이 저물면 그 자리에 그냥 도로 가져다 놓으면 되도록 했다. 이름하여 ‘양심자전거’라 했는데 다른 지자체에서는 모두들 부러워했고 시민들의 반응도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물론 방송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며칠 전 3개월 만에 다시 방송에서 그 사용실태를 조사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어이없었다. 남은 자전거가 몇 대에 불과했고 그나마 몇 대 남은 것도 모두 자물쇠를 채워놓아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었다.

구청에서 자물쇠를 채워 놓은 것이 아니라 개인이 채워놓고 자기 혼자만 주인행세를 하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용해도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이 기관이다. “내가 이렇게라도 쓰고 있으니까 잃어버리지 않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반문한다. 그 뻔뻔스러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며칠 전 지하철에서 추락한 60대 노인을 구출하기 위해 20대 대학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인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다시 건너편으로 돌아온 대학생은 황당한 일을 겪었다. 급하게 뛰어들면서 잠시 놓아두었던 가방이 사라진 것이다. 가방 속에는 어렵게 마련한 노트북과 취업준비와 관련된 각종 정보 등 자료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은 인터넷에 취업관련 자료가 들어 있는 노트북만이라도 꼭 돌려달라고 글을 올렸지만 아직까지도 돌려받았다는 소식은 없다. 경찰에서 CCTV를 확인한 결과, 대학생이 황급하게 선로에 뛰어들자 뒤에 서있던 양복을 입은 신사가 그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고는 가방을 그냥 든 채로 유유히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잡혔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위험을 그냥 보지 못하고 뛰어든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아이를 왜 나무라느냐고 매섭게 노려보는 그 여교사를 통해 우리는 비뚤어진 자식교육의 한 단면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도서관의 그 찢겨져 나간 책을 통해 우리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본다. 사라진 자전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실종된 공중도덕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또, 지하철에서 보여준 그 중년신사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보편타당한 가치관의 상실, 옳고 그른 행위에 대한 판단 불능, 그리고 도덕불감증의 한 단면을 느끼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워낙 포괄적인 질문이라서 한마디로 요약해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공자가 후세에게 남긴 한마디 -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떠올리기를 권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먼저 만들고 난 다음에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기, 즉 됨됨이가 충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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