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이제 수평선, 그 너머를 바라본다.

울진이 낳은 현대시단의 거목, 김명인의 시에 대한 오래된 기억
기사입력 2020.11.3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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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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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포항만

우리가 읽는 시(詩)작품 속에는 시인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시인이 생각하는 시대정신도 함께 녹아 있다. 하지만 시인은 독자를 떠나 존재할 수가 없다. 독자는 시를 감상함으로써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엿보게 되고,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읽어 냄으로써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작품과의 만남과 작가와의 대면, 이를테면 곧 소통이다.

울진 후포가 낳은 시인 김명인을 나는 순전히 독자로서 만났다. 첫 시집『동두천』을 통해서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나에겐 감동과 파격의 시였다.

『동두천』은 그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첫 시집(1979. 10. 20. 문학과 지성사)이다. 필자는 이 시집을 1980년대 후반 무렵에 어느 책방에서 구입, 단숨에 다 읽은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켄터키의 집, 베트남, 동두천, 영동행각 등의 시가 감동과 함께 파격적인 그 무엇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이란 산문 같은 서정적인 시! 하지만 내용은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였다. 나에겐 감동이었다. 한편으로 파격적인 그 무엇! 내가 생각했던 시에 대한 관념을 모조리 부수고 말았다. 그것은 『시는 정형이고 운율이 있어야 하고, 말을 아름답게 꾸며야 하고 대체로 짧아야 한다』 등이었다. 『아, 그렇구나! 자기가 경험한 현실 인식(세계)을 이렇게 이야기식으로 표현해도 되는구나.』였다. 또 하나는 그가 울진 출신이라는 점이 내 눈에 띄었다. 더구나 영동행각에는 울진 후포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앞서 말했지만 처음엔 독자로서 시집을 통해서 만났고, 두 번째는 첫 시집 동두천을 들고서 김 시인을 직접 대면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겨우 서른, 그는 마흔쯤 되었다. 그는 시집 갈피에다 『시와 삶이 하나이길. 1985. 1. 21. 金明仁』이라고 써주어 문학적으로 고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동두천에 실린 울진고향을 소재로 한 시<영동행각> 등을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고, 일개 독자가 평론이 아닌 두서없이 감상으로 쓰게 되었음을 먼저 말한다. 그래서 시인이 전달하고자는 바와 독자가 생각하는 감상과는 조금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현대시문학에 있어서 『김명인』이라는 거목 같은 시인 있다는 것을 울진 둘레에 알리기 위함이다. (이것은 문향울진의 위상과 품격은 물론 정작 울진사람들은 그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 순전히 아둔한 내 욕심이기도 하다.)

반세기 가깝게 시를 써온 김명인 시인은 시집 12권을 펴냈으며, 우리나라 대표 문학상 11개를 수상한 현역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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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후포국민학교 가을운동회 모습(후포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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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후포국민학교 전경(후포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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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후포고등학교 전경(후포고 제공)

그에게 우연히 시가 다가왔다.

그가 태어난 울진 후포는 서쪽으로는 험준한 태백산줄기가 남북으로 뻗쳐있고 낮은 산줄기는 동해에 닿아 있다. 높은 파도로 유명한 동해, 끝 모를 바다 깊이, 배를 타고 나아가면 더 없이 이어지는 수평선 너머의 태평양, 산줄기 외에는 평야라 할 것 없는 좁은 들판 등 다른 지방에 비해 척박했던 자연환경, 한편으로 그에게 덮친 청소년 시절의 가난과 방황, 한국전쟁과 가족사의 비극, 등은 한국 현대사의 슬픈 전형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환경에 못지않게 가족사의 둘레 또한 어린 나에게는 가혹했다. 6.25 전란을 겪어냈던 가족사의 비극 탓이었다. 동란이 일어났을 때, 나는 너무 어렸다. 두 삼촌과 고모부를 비롯해 사촌들까지 함께 잃게 되는 망실의 아픔을 상심으로 자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전란이 발발하자마자 큰삼촌과 고모부는 보도연맹에 연류되어 고향 바닷가에서 총살당했고, 방위군 장교였던 작은 삼촌은 읍사무소에서 작전을 지휘하다, 포탄의 파편에 맞아 개전 일주일 만에 전사했다. 피난길에서 돌아와 홍역으로 죽은 사촌들을 아우르면 집안 식구들을 절반이나 잃어버린 채, 가세(家勢)는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더구나 피난통에 보국대로 징발되어 전선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로 평생 동안 생업을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가계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으니, 이 장 저 장 떠도는 여인의 행상(行商)으로는 생계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가세가 기운 탓으로 나는 제때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해 안달했었고, 삭막해진 집안의 분위기에 떠밀려나 혼자 외로워질 때가 잦았다. 나는 피폐해버린 주변이 고향 탓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 폐허에서 미래를 본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사치라고 여겼었다. 전란은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으니, 내 안의 어린 소년조차도 생존이라는 절박한 장벽에 부처되었던 것이다.』(김명인, 나의 삶, 나의 문학에서 인용』

요즘에 와서 보면 단순 과거사 같은 흑백 영화의 한 편 같지만, 그의 가족사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후포초등학교 시절, 소먹이는 목동을 따라 노는데 정신이 팔려 40여일이나 학교를 몰래 빼먹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몹시 혼이 나기도 했으니 아예 공부와는 담을 쌓은 농땡이 아이였다. 후포중학교 시절에는 학비 때문에 쫓겨나 집으로 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이 좌절되어 안달했던 고등학교 삼 학년 늦가을 무렵 이종사촌형을 꼬드겨 후포 탈출을 꿈꾸고, 무작정 상경, 이모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공부하여 의과대학에 원서를 냈다. 일차로 낙방한 뒤, 가까스로 합격한 곳은 후기로 입시를 보았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였다. 막상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흥미를 가질 만한 공부가 없어 학업중단까지 고려하다 느닷없이 시와 마주쳤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까지에도 글 쓰는 방면에 추호도 뜻을 두지 않았다. 대학 시절이었다. 시 강의를 담당한  조지훈 선생의 와병과 결강으로 시험은 창작시 제출로 대체되었던 것, 그러던 과정에 시에 매료되어 습작은 계속되었다. 이후 용기를 내어 조지훈 선생을 찾아뵙고 습작원고를 제출, 첨삭지도를 받았다. 돌아가시기 전 두 해까지의 사숙(私塾)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었다. 등단 이후 문단사에 한 획을 그은 반시동인으로 활발히 참여했다. 반시동인하면 『삶은 곧 시다』,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들의 시화(詩化)가 중요하다. 예술성은 지키되 꽃이나 사랑 등의 귀족화된 관념적 어휘는 배제한다.』고 주장했던바 우리 문단사에서 한 획을 그은 혁명적 선언을 한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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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인 시집과 산문집 일부

등단 출세작 『출항제』드디어 대해로 나아가다

이제 그의 등단작 <출항제>를 살펴보자. 이 작품을 정작 그의 첫 시집 『동두천』에는 싣지 않았다. 독자인 나에게는 아쉬운 감이 든다.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순풍을 비는 출항제,/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내 목숨 같던 애인이여./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 대여./지난 봄 갈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어두운 밤길을 걸어/맨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눈 내리는 세계. (중략)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아, 실어올린 전 생애는 제 나이만큼 선창 속에서 보채고/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켜들고/먼 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가는/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중략)

내 울음이 시대의 물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 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다./풀려나는 긴장으로 또 한 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내고. (중략)

아아, 무한한 폐활량./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 속으로 떠난다./온 핏속에 또다시 떠도는 체험의/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순풍을 비는 출항제,/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출항제 부분 인용>

이 시를 읽으면 당시 우리 사회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명 같은 그 무엇<삶의 열정과 힘찬 박진감 - 겨울 바다 같은 어두운 시대를 박차고 우렁찬 뱃고동을 울리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의 전진, 희망 등>> 그 무엇에 대한 상상과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이 바로 <출항제>라는 시이다. 

김명인 시인은 이 시를 원양어선의 선장이 되어서 남태평양으로 참치 잡으러 떠나는 작은 형을 배웅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 속에서 썼다고 한다. 그해 신춘문예 투고 결과 등단작이 되었다.

『더러운 그리움』의 세계가 주는 감동

초기의 대표작 <동두천>은 문단에서 주목받은바 있었던 시집이다. 한국 현대사가 갖는 상징적 공간인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곳 특수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애환(혼혈아 등)을 읊었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 지배와 종속(미국과 한반도), 권리박탈, 주변부의 삶 등을 통해 식민지화된 인간과 우리 사회(정치)현실 등, 다시 말해 탈식민주의 인식론을 통해 우리 무의식에 집요하게 침투하여 안주한 서구 중심 우월적 사유를 파헤쳤다고 일부 평론가들은 말한다. 어떤 한 지역적 공간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압축한 문학 서사는 당시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 문학적(시적)으로  탈식민주의 인식론을 촉발한 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동두천에서 국어 교사 생활을 했다. 동두천 교사 생활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탐구가 더 확대되었다. 캔터기 옛집, 베트남, 아우수비츠 등의 시편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군 입대 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베트남』은 동두천 이후의 시편이지만 베트남과 조국<동두천>의 현실 인식이 동일 선상에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두고두고 포성에 뒤짚이던 산천도 끝없이/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너는 거기가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중략)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초등학교에까지 밀어닥쳐/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속에서도 가랑이를 벌려 놓으면/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이하 생략) <베트남 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중략)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동두천1에서>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다방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중략)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합중국이고/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민족/이 피 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동두천 3에서>

그의 시는 무의식적 각인과 회상, 반추와 드러냄이 현식 인식과 상승 작용하여 아름다운 서정으로 승화하여 한편의 작품으로 표현된다. 그것이 바로 더러운 그리움이 아닌가 한다. 그의 시에는 직접적으로 더러운 그리움이란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후포 바닷가의 가난과 외로움에 대한 각인은 그에게 시의 소재로 작용, 고향 후포가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고향에 대한 무의식적 호오(好惡)와 부정적 의식은 동두천에서 <더러운 그리움> 세계의 모순형용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고향 땅이야말로 나에게는 추동의 공간이자 침강의 공간이었으며, 열린 공간이자 닫힌 공간이었다. 일망무제의 수평선은 내가 그곳에 갇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망망대해 너머 무엇이 있어 나를 기다리는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운명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고향을 의식하는 이 호오(好惡)의 이중성은 어느덧 무의식으로 솟아올라 내 시의 지배적인 상상력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내 문학의 부정성 또한 그런 토양에서 자라났을 것이니, 상한 뿌리로도 어쩔 수 없이 피워 올려야 하는 잎들이 있는 법,『동두천』 연작에 쓰인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모순 형용이 그 표식의 일례가 아닐까 생각한다.』(김명인, 나의 삶, 나의 문학에서 인용』

사람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무의식이라는 정신기제가 있어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김명인 시인의 성장기는 고향에서의 가난과 방황, 폐광된 광산, 아버지의 실직, 가족들의 죽음, 어머니의 행상 등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김명인은 그러한 흔적들을 <동두천 1>이라는 시에서 <더러운 그리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는 시 구절처럼 그는 스스로 눈물이 되어 흐르는 시인이다.

한편으로 그가 자라온 환경 절망적 환경과 동두천에서 교사 생활에서 경험한 세계, 다시 말해 태어나면서 버려진 동두천의 기지촌 아이들, 살갗에 찍힌 혼혈의 주홍 글씨, 태어나 욕된 세상은 베트남이라는 시에도 나타나고 있다. 당시 베트남전은 한국전쟁과 같은 축소판 그대로였다. 무자비한 살육과 죽음, 파괴, 양공주 등 그가 느낀 현실 인식은 엄연한 역사적 인식으로 작용하여 우리에게 시대의 아픔으로 다가오게 한다. 나는 이것이 김명인의 시 동두천의 <더러운 그리움>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힘이요, 감동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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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배경이 된 지싯골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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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의 배경이 된 금음광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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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산가옥이 있던 자리.
현 후포초등학교 앞. 구 7번 국도 남쪽 방향

영동행각과 고향 후포 바다

이제 그가 쓴 시 <소년 어부>와 <영동행각> 등을 살펴보자. <소년어부>와 <영동행각>은 시인의 가족사와 고향 후포 뱃사람들의 애환을 담담하게 나타내고 있다.

『몰려가는 파도를 보셔요, 어머니/집 앞 어느 가지 휘어지게 바다 한 자락 걸쳐 놓고/그 눈물에도 출렁거리며 진종일 놀다 가는 나를/오래 온몸을 적셔 떨면서 보시나요?//

나는 기쁨 없는 나라의 연변으로 밀리기도 하지만/흐느끼는 밤물결 소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더러 들뜨며 철없는 저녁노을에도 묻혀서/어둠들이 부숴놓은 수평선 너머로 달려 나가는/아직은 열여섯, 어리다고 어머니도 말리셨지요?(중략)//
흐린 살도 푸르게 흩어 너, 물  속 깊이 풀렸으니/즐거워라 발바닥 간질며 오는 물방울 더욱 투명하고/마음은 늘 혼자되어 중얼거려도/내 커다란 자식 하나 언제나 품속에 보듬어 보네//

쓰라려 노여운 세상도 이 물결로 지우시고/어머니, 거듭 씻어 티 없는 눈으로 바다를 보셔요/파도가 뱃전을 갈겨 푸르디 뻗센 물보라를/나는 늦도록 모래벌에서 혼자 흙장난 쳐도/조금도 허기지지 않던 이 가슴을 펴 힘껏 껴안았지요.』 <소년 어부>

시집 『동두천』에 실린『소년어부』라는 시 일부이다.

이 시는 화자가 어머니의 심경이 되어 가난했던 시절, 과거사를 회상하면서 오징어 배를 탄 경험을 그려냈다.

<집 앞 어느 가지 휘어지게 바다 한 자락 걸쳐 놓고><그 눈물에도 출렁거리며> <흐느끼는 밤물결 소리><몸 비벼 조약돌마다에 은침 박는><가슴까지 환하게 물비늘 껴입으시면><흐린 살도 푸르게 흩어 너, 물 속 깊이 풀렸으니><즐거워라 발바닥 간질이며 오는 물방울 더욱 투명하고>등의 표현은 『후포 바다』를 특유의 감각으로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시에 등장하는 16세의 소년 어부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김명인이다. 그가 태어난 후포는 강원도(현재는 경상북도) 남쪽 끝자락 울진의 한적하고 조그만 항구였지만, 유독 오징어, 꽁치발이 풍어 때는 돈 벌러 도시로 간 아들에게『이까 개락』이라는 전보를 쳤다는 우스개가 있다. 이까(오징어)가 개락(풍년)이 되었으니 빨리 고향으로 와서 배를 타라는 뜻의 전문이다. 그 당시는 후포항과 죽변항에는 오징어가 산더미처럼 잡혀 지나가던 개들도 지폐(종이돈)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

그도 예외 없이 생업을 선택하고자 후포고등학교 1학년 때 오징어 배를 탔다고 한다. 시 <영동행각의 1> 삼각파도 위에 솟구쳤다 떨어진 청년도 김명인 자신이다.

<더러 들뜨며 철없는 저녁노을에도 묻혀서/어둠들이 부숴놓은 수평선 너머로 달려 나가는/아직은 열여섯, 어리다고 어머니도 말리셨지요?> 결국 어머니는 철없는 어린 자식이 밤바다의 배를 타는 것을 말렸지만 그는 오징어 배를 타고 만다. 하지만 그는 심한 배 멀미로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는 이튿날 아침, 어느새 배가 항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결코 뱃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만약 배멀미도 없이 그 날을 잘 버텨 냈더라면 그는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아니면 오대양을 헤쳐 다니는 마도로스가 되었거나, 고향에서 고기잡이배 선장이 되어 소박한 어부가 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그
무엇? 영동행각에는 삭제

원양선을 타다 온 친구는/상석을 잡아 울릉도로 떠난다 한다/번 돈도 없이/먼 바다에서 끌고온 그의 주정/뜰에는 장다리꽃들만 떨기로 피어/흔들리지 않아도 먼 수평선을 흔들고 섰다//왜 그리울까/올해나 작년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보다/더 생생한 우리들의 가난/ 그리움 밖으로/낚시를 물고 청년 하나가/삼각파도 위에 솟구쳤다 떨어진다(이하 생략)<영동행각 1>

그날 밤 건넌방에 모인 사람들 모두/삼촌을 따라 지싯골로 갔는지/나는 늦은 아침 잠자리뗄 따라갔더니/총소리, 지싯골에는 총소리가/쫒기는 구름 바람 쫓기는/산비탈을 쓸며/잠자리뗄 쫓아가고 있었다/아버지, 내 집은 길 내 집은 물 내 집은/건너편 바위에/부딪혀 되돌아오는 산림/나는 허구한 날 애장터에 올라가/삼각파도에 걸린 수평선을 털어내면서(이하 생략)<영동행각 4>

시<후포>이다.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장마비 양철 지붕을 두들기다 지나가면/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떼 지어 날아오르는 세떼들/보인다/어느 새 비 걷고/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채 씻기다만 버드나무/한그루/이따끔씩 원동기 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려 있다//

바람은 성채만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 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글고 갈 무엇이 남아서/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 놓은/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그물코에 꿰어 삶들은 모른다하지 못하리//

흉어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키 큰 장다리 제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멈칫멈칫 나아가다 시저(恃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자다깨다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헤매며 길을 잃는다/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산과/산들이 끊어 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 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

<길 위의 시인>이 추구하는 그 무엇 수평선 너머’

김명인 시인을 누군가는 <길 위의 시인>이라 했다. 적절한 말인 것 같다. <길 위에 선 시인>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시집 <동두천> 등 초기의 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낮은 지대, 소외되고,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적 현실을 풍부한 서정적 언어로 나타났다. 그것은 기억(회상 또는 반추)과 시간이라는 기제로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천착해왔다.

이후 1980년대 말 무렵, 국외 활동을 통한 시적 변화(변모) 즉 멀리서 지켜보면서 물아를 꿰뚫는 관조적 세계를 풍부한 서정성, 다시 더 읽어보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많아진 것 같다. 일례로 열 번째 시집인 여행자 나무에서 살아온 날의 몸의 기억을 통해 늙음과 진정한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소년 어부』시 마지막 연에서 <쓰라려 노여운 세상도 이 물결로 지우시고/어머니, 거듭 씻어 티 없는 눈으로 바다를 보셔요/파도가 뱃전을 갈겨 푸르디 뻗센 물보라를/나는 늦도록 모랫벌에서 혼자 흙장난 쳐도/조금도 허기지지 않던 이 가슴을 펴 힘껏 껴안았지요.> 구절처럼 그는 꿈꾸고 있었다. 어린 시절 모래 벌에서 흙장난을 쳐도 조금도 허기지지 않던 가슴으로 말이다. 그는 오래된 미래처럼 또 다른 그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평선 너머, 그 무엇이었다. 아니 유타와 연해주에서 그 내면화의 지리가 구체적으로 자리했다. 그는 1988년 늦가을, 미국 유타주의 버리검 영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1994년 연해주의 극동국립종합대학에서 한동안 교환교수로 보내는 기회를 가졌다. 이 시기가 그의 시적 변모 -인간, 삶, 죽음 등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가 이루어지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소년은 이제 수평선, 그 너머를 바라본다.

열두 번째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에 실린 시 <너머>를 소개한다.

너머로의 출발은 일생을 바치는 여정,// 어릴 적에는 배를 타고 떠나보려 했다./하루 종일 저어가도/연무에 싸인 수평선은 수평선인 채/너머가 모인지 않았다, 아득해서 궁금한/그곳을 바라보느라 키가 자랐지만/너머는 여전히 너머일 뿐,// 여행은 목적지가 분명해서 좋았다/살아선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출발지가 목적지기도 한 여행,/그런데 네가 너머로 잠적해 버렸다면?/어깨 위에 산다는 짐승의 울음소릴 혼자 들었다//너는 왜 아직도 믿게 하니?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라 주장하면서/봄 들녘 초록처럼 번져오는/스산한 너머가 있는 거라고!//(중략) 약속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마주치리라는/채울 길 없는 갈증으로 너는 기다리니?/광활한 우주의 이 한자리/혼신을 다한 수평선이 내 앞에 펼쳐져 있듯이<너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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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령 보부상길 주막촌 시비 '너와집 한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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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령 보부상길 주막촌 김명인 시비 제막식
(오른쪽 앞에서 두번째가 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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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양 해맞이공원 울진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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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대종 표지석

울진의 절창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 쯤에나 가서/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들겠네, 거기서/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저 비탈마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그런 산길에 접어들어/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구름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외간 남자가 되어/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너와집 한 채)

시의 배경은 산속 고즈넉이 너와집 한 채가 있는 풍경,  붉게 물든 만산홍엽, 그러나 쓸쓸한 죽음의 그늘과 같은 개옻나무들과  주저앉을 듯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너와집 한 채가 있는 곳,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안말래) 골짜기, 100여전,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12령 옛길로 선길꾼(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다. (중략)

문득 시인은 너와집과 길을 통해 우리에게 삶이란 아니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 진부하고 통속적 물음 같지만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진지한 물음을 묻고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한때 불붙는 자연의 단풍과 같을진대, 한사람의 인생에는 누구든 범접 못할 세월의 무게가 배어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닐까? 그러면서 아무 욕심 없이 살아가며 수제비 뜨는 산골처녀, 그 처녀에게서 느끼는 덜컹거리는 순수한 연모의 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끝내는 삶의 애환도 이제는 아주 지워버리고,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다 한다. (김진문, 울진신문 칼럼, 2006. 12. 12.)

나는 울진을 소재로 한 김명인 시인의 시 가운데서 <너와집 한 채>를 절창으로 꼽고 싶다. 오늘 같은 가을날, 이 시를 읽으면  분위기가 편안해지고, 마음이 행복해진다.

울진문학회가 주관한 1996년 문학의 해 행사에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 울진에 초청되어 문학심포지움과 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때 주제가 분단시대의 작가정신이었는데 김명인 시인은 <지역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날 청중의 요청으로 즉석 시 낭송이 있었는데 김 시인은 소월문학대상 작품 중의 하나인 <너와집 한 채>를 낭송했다. 이 시는 울진 북면 두천을 소재로 쓴 시이다. 참으로 고즈넉하면서 조금은 쓸쓸한 깊은 산골의 너와집 풍경,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수제비 뜨는 순박한 처녀의 모습과 오솔길조차 지우며 살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하는 아름다운 시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아무도 몰래 살고 있는 삶의 존재에 대한 마치 선승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김진문, 울진의 작가들, 경북작가회의기관지, 작가정신, 제2호, 2001)

<너와집 한 채>는 금강송 12령보부상길 주막촌에 시비로 세워졌다. 또 하나는 망양정 해맞이공원에 울진대종에 새겨졌다. 명문은 이렇다

『해와 달 첫 수레로 실어 날르는/천지가 열려 광대무변한/동해와 마주 서느니/벅찬 삶 끝없이 굽이쳐/길이 번성할 터전 서슬 푸른 영원이여/여기에 살아 이 누리에 마음 붙인/사람들 정성을 바쳐 쇠북 울려 보내느니/ 환한 염원 창랑 갈피갈피 사무치리라』

그런데 이 시는 울진대종 건립 당시 시구절만 새겨 작가의 이름이 빠져 논란이 되었지만 그 후 <김명인>이라는 이름 등을 넣은 표지석을 세웠다. 정작 그의 시문학의 배경이요, 산실이었던 후포에는 시비가 아직 없다. 아쉬운 점이다. 아니면 시인 전 생애를 다루는 김명인 문학관 건립의 꿈은 문단 말석에 있는 나의 희망 섞인 아직은 오래된 미래일까?

김명인 연보
 - 1946년 9월 2일(음력),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삼율리(1963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울진 
    군은 경상북도로 소속됨)에서 부친 김석광, 모친 이양선의 10남매(4남 6녀) 중 넷째로 태어남.
- 1950년 6·25 전란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됨. 부친의 5남매(3남 2녀) 중, 큰 숙부와 고모부가 보도연맹
   에 연루되어 고향 바닷가에서 총살당했고, 방위군 장교였던 작은 숙부는 개전 며칠 만에 전사하였음.
   부친은 생업을 놓아버렸음. 보다 못해 모친이 보따리 장사로 생계를 책임짐.
- 1953년 고향의 후포초등학교에 입학함. 저학년일 때 어지럼증으로 교실 바닥에 몇 번 쓰러져 업혀
   돌아오곤 했음. 4학년일 때, 소먹이는 목동들을 따라 산속에서 노느라 40여 일이나 몰래 학교를 빼먹
   고는 들통이 나서, 부친께 몹시 혼이 났음.
- 1959년 초등학교를 마쳤으나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진학을 포기하였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한 달
   이나 늦게 후포중학교에 입학함. 학비 때문에 집으로 쫓겨 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공부는 뒷전이
   었음. 바닷가나 산속을 혼자 배회하는 경우가 잦았음.
- 1962년 진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후포고등학교에 입학함. 여전히 공부는 뒷전이었음. 그래
   도 생업이 걱정되어 1학년 가을에 오징어 배를 타고 한바다로 나갔다가 배 멀미로 죽다 살아났음.
- 1964년 대학진학의 희망이 없어, 고 3의 늦가을에 같은 반이었던 이종사촌 형을 꼬드겨 함께 서울로
   무작정 상경함. 사촌 형은 시골로 내려갔으나, 끝내 고집을 부려 이모님 댁의 단칸방에 기숙하면서 입
   시 준비에 몰두함.
- 1965년 의과대학에 지원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한 뒤,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음. 이모부
   의 간곡한 권유로 그 한 해 후기로 입시를 보았던 고려대 국문학과에 응시하여 합격함. 
- 1966년 2학년이 되면서 각오가 달라졌고, 우연히 시와 조우하게 됨. 공부뿐 아니라, 습작에도 맹렬히
   몰두함. 2학년 가을부터 학교에서 뵙기 힘든 조지훈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다니며 시를 보여드리기
   시작함.
- 1968년 학부 졸업반이었던 이해 가을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취직이 됨.  이듬 해 10월부로 입대 영장
   을 받음.
- 1969년 2월, 졸업. 동두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 생활을 함. 그 해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하여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함.
- 1972년 10월 하순, 3년을 꼬박 채운 군 복무가 끝남.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 당선
- 1973년 3월부터 상명시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받음. 이 해의 신춘문예 당선자들과
   두루 만남. 특별히 시인들만 따로 모여「1973」이라는 표제의 동인지를 3호까지 간행함.
- 1975년 건국대학교 병설중학교로 옮김.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현대 
   문학을 전공함.
- 1976년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야간부로 직장을 옮김. 이해 김창완, 김성영, 이동순, 정호승 등과
 ‘반시(反詩)’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反詩』를 간행하기 시작함.‘반시’이전의 시들을 모두 폐기함.
- 1979년 말에 처녀 시집『동두천』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198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함. 고려대, 숭실대 등에서 강사 생활을 시
   작함.
- 1981년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전임강사로 임용됨. 이후 시작을 포기한 채 논문 쓰기에 몰두하
   면서 동인활동에서 점차 멀어져 갔음.
- 198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1930년대 시의 구조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 1987년 그동안 절필하다시피 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함.
- 1988년 두 번째 시집『머나먼 곳 스와니』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고 미국 유타주의 브리검 영
   대학교로 1년간 연구교수로 떠남.
- 1992년‘김달진문학상’과‘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세 번째 시집『물 건너는 사람』을 세계사에서
   간행함.
- 199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국립종합대학교의 한국학과에 강의 교수로 7개월간 체류함.
   귀국해서 네 번째 시집『푸른 강아지와 놀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1995년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로‘동서문학상’을 수상함.
- 1997년 다섯 번째 시집 『바닷가의 장례』를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1999년 경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로 직장을 옮김. 여섯 번째 시집  
  『길의 침묵』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2000년‘현대문학상’을 수상함.
- 2001년 시집『길의 침묵』으로‘이산문학상’을 수상함.
- 2002년 일곱 번째 시집『바다의 아코디언』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2005년 여덟 번째 시집『파문』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이 시집으로‘대산문학상’을 수상함.
- 2006년 시집『파문』으로‘이형기문학상’을 수상함. 시선집『따뜻한 적막』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2007년 시집『파문』으로‘지훈상’을 수상함.
- 2009년 아홉 번째 시집『꽃차례』를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2010년 시선집『아버지의 고기잡이』를 휴먼 앤 북스에서 간행함. 시집『꽃차례』로‘편운문학상’을
   수상함.
- 2012년 2월에 고려대학교에서 정년(停年)을 함.
- 2013년 시집『여행자 나무』를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 2014년 시집『여행자 나무』로‘목월문학상’을 수상함.
- 2015년 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를 민음사에서 간행함.
- 2016년 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로‘한국서정시문학상’을 수상함.
- 2018년 시집『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를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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