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과 동학교도, 대동세상을 꿈꾼 사람들

울진 동학지도자『전의철, 남두병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기사입력 2020.12.31 10:59  |  조회수 3,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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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백성 마음을 사로잡은 동학!

조선말 19세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1860년대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서만 70건, 1876년부터 1893년까지 북부 지방에서는 50여 차례 민란이 일었다. 그 원인은 신분에 따른 차별, 세도정치와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신분 차별과 일부 특권층의 토지 소유와 농업생산의 독점은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해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임금이 정조였다. 그는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세금 제도를 개혁했다. 6만이 넘는 공노비를 해방시키면서. 창덕궁 앞거리에서 그들의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가 시행했던 개혁정책은 물거품이 되었다.

정조의 아들 순조가 열한 살의 나이로 등극하자, 그의 장인이었던 김조순 그리고 영조의 두 번째 정실부인이었던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어린 왕을 둘러싸고 대비를 등에 업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예를 들어 도지사 격인 ‘방백’은 1만 냥, 시장 군수급인 ‘현령’, ‘현감’ 자리를 3천 냥이었다. 돈으로 관직을 산 부정한 이들은 임기 동안 ‘본전’을 뽑기 위해 갖은 수탈을 저질렀는데, 이들조차도 더 많은 돈을 주고 관직을 산 후임자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기본적인 수단은 ‘세금’이었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인데, 삼정이란 논밭에 매기는 전정(田政), 군 복무와 관련된 비용인 군정(軍政), 춘궁기에 곡식을 꾸어주고 나중에 받는 환곡(還穀)을 말한다. 원래는 세금을 내지 않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징세 대상으로 삼고, 환곡의 이율을 멋대로 올려서 농민들이 추수한 것을 빼앗아갔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에는 이때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이하 생략)

백성들이 과도한 군역과 세금 수탈에 시달려 아이를 낳은 죄로써 남자의 양물(생식기)을 스스로 자르고 슬퍼한다는 시다. 당대에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정조 사후 정약용은 당시 노론 세력들에게 축출되었다. 유배지에서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약용이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당대 지식인으로서 백성의 고통과 슬픔을 시로 썼다. 정조에게 발탁되어 조선의 개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약용으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놓고 세력다툼이 벌어진 끝에, 당시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했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며 외척 세력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비리와 부패를 바로잡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으로부터 문을 걸어 잠그는 척화쇄국정책을 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충돌한 병인양요(1866), 미국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민씨 세력과 흥선대원군이 갈등이 심화되고, 곧이어 일본마저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이다.

혼돈의 시대! 고통이 클수록 백성들은 새로운 미래를 더욱 희구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때 경주의 몰락 양반이었던 최제우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 동학을 창시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사람이 한울이다(人乃天 인내천)』, 『양반 상놈 따로 없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외치며 신분 차별을 타파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하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개벽사상』, 동학의 인간중심 가치는 당시 봉건통치에 억눌린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동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자, 기득권 세력이었던 유림과 조정은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이단시하고 배척했다. 최제우는 이른바 사도난정邪道亂正 『사람들을 속여 정도(유교의 가르침)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1864년 3월 10일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울진 평해, 죽변에도 포덕활동을 한 최시형

제2세 교주가 된 최시형은 최제우 사후 지하활동으로 들어가 동학을 전도했다. 그러한 과정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측 기록물로, <해월 문집>에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행적이 나타나 있다. 그는 주로 산골짜기를 돌아다니며 포교를 했는데, 특이하게 죽변에서 2년을 머물렀다. 1865년 1월에서 1867년 3월까지, 약 2년 정도다. 죽변은 당시에도 어촌 포구로서 삼척 등 동해안 북로의 관문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객지인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이 신분을 숨기기가 오히려 나았는지도 모른다.

동학은 대동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 세상(후천개벽)이 다가옴을 계시하는 계명성 같은 광명의 새 빛이었다. 당시 동학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거의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와 정치적 기득권 세력에게 동학도는 그야말로 반역자나 다름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상감사 서헌순이 장계를 올려 동학을 이단으로 지목하고 최제우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한다. 동학의 교세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으로 『비변사등록』의 철종 14년, 즉 1863년 기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여 리의 10여 주군(州郡)에서 동학의 이야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지 않음이 없고, 경주 주위의 여러 읍은 그 이야기들이 더욱 심하니, 주막의 부녀자들과 산골짜기의 아이들까지도 그 글을 전하여 읊지 아니함이 없다.』

여기에서 ‘읊는다’는 것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시천주조화정조화영세불망만사지) 13자와 至氣今至願爲大降(지기금지원위대강) 8자다. 앞의 13자는『하늘님을 모시어 조화가 내게 자리를 잡으니, 언제나 잊지 않으면 만사가 다 알아질 것이다』이고, 뒤의 8자는『지금 이 순간  원컨대 크게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뜻의 동학 주문呪文이다. 조령에서 경주까지 주막의 부녀자에서부터 산골의 아이들까지  이 주문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그 교세가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학이 초기 가장 성행한 지역은 동해안 영해와 평해 지역으로, 최제우 선생은 1862년 12월 두 곳에 처음으로 ‘접주’를 임명했다. 최제우 생일(1863년 10월 23일)에 영덕의 직천 마을에서 잔치가 있었다.  그때 모여든 인파만 해도 전국에서 3,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영덕, 울진 평해지역은 경상도 지방에서 동학 신봉자들이 가장 많았고, 그 활동이 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천도교 기록에 따르면, 최제우 선생은 제자들에게 “무극대도의 후천개벽 오만년 자존의 시대가 도래함을 널리 알리라, 우리의 도가 후세에 법이 될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한다.

영해, 동학혁명의 첫 시발지가 되다.

울진 관련 동학교도들에 대해 언급하자면 영해의 동학 관련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략히 영해가 동학교가 성행한 까닭을 짚어보아야 한다. 영해가 동학 포교의 전진기지가 되고, 혁명의 시발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첫째는 영해에 동학이 포교된 것은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부터였다. 초기 동학은 경주를 중심으로 동북지역과 동남지역인 해안가로 확산되었다. 이해 11월 박하선이 접주로 임명될 정동학교단의 첫 조직인 접이 조직될 당시 영해지역에 접주가 임명될 정도로 적지 않은 동학 교세가 형성되었다. 이후 해월 최시형의 적극적인 포교로 영해는 당시 동학교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학교단의 첫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둘째 이 지역에는 유림들 간에 해묵은 감정이 있었다. 이른바 1840년, 영해지역에서 벌어진 향전(鄕戰)이다. 향전이란 향반(鄕班)들이 조직한 향청(鄕廳)의 직임을 차지하려고 벌어진 싸움이다. 결국 신향과 구향의 세력다툼에서 구향 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결국 구향과 신향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때 신향에 속했던 함양 박씨와 안동 권씨, 영양 남씨 등은 1863년경에 새로운 세력인 동학을 받아들였다. 동학도는 신향세력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신향 세력이 구향 세력의 부패에 대항하는 영해 동학혁명을 지원한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 듯하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셋째 여기서 이필제란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필제는 이미 진천(1869년)과 진주(1870년)에서 혁명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영해로 잠입한 동학 접주였다. 이필제는 당시 지식인으로 체제변혁을 꿈꾸는 인물이었다. 그가 개인의 체제변혁 의지와 최제우의 신원 회복, 동학 이념인 제세안민 등의 명분이 당시 동학교도들을 움직여 600여명이나 봉기에 가담케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넷째 결정적인 것은 최시형의 결단이다. 이필제가 처음 거사를 목적으로 최시형을 설득했으나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거듭 자제시켰다. 하지만 이필제의 교조신원운동의 강력한 명분 등과 거듭되는 혁명 요구에 최시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최시형은 마침내 동학교도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로써 최시형은 영해동학혁명의 선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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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형제봉, 영덕군 창수면 신길리 소재
(영해동학혁명 연구자 김기현 제공)
영해동학혁명 당일(1871년(신미) 음 3월 10일, 양 4월 29일)에
동학군들은 형제봉 제단을 만들고 소 2마리를 제물로 천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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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바위 일부(영해동학혁명 연구자 김기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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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바위(영해동학혁명 연구자 김기현 제공)
영해동학혁명 거사 전 형제봉아래 병풍바위 부근에서
동학군들이 유숙했다. 

영해, 평해, 울진 등 전국의 500여 동학교도들 영해부 관아를 점령하다.

1871년 음 3월 10일(양 4월 29일) 밤 10시쯤, 전국각지에서 모인 600여 동학교도들이 영해관아를 쳐들어가 점령했다.
천도교 측 기록(도원기서)을 살펴보면, 이필제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다양한 인물과 접촉했다. 그는 김낙균, 이수용, 유성원 등의 지역의 주요 동학교도들과 만나 거사 준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거사 전 1871년 3월 8일, 전국 각지에서 영해 우정동(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200여명이 모여들어 유숙을 했다. 그 이틀 후 거사가 진행되었다.

3월 10일 거사 당일에는 600여 명이 집결했다고 한다. 교남공적 기록에 따르면 봉가 참가자 중 동몽(어린나이의 남자)이 영양 동풍의 김성근과 평해의 동몽 전종이다.

이날 동학교도들은 형제봉 병풍바위에서 소 2마리를 제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해(오후 9-10시)시경 1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영해부 관아로 진입하여 관군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성을 점령했다. 동학교도들에게는 청, 일반 백성에는 홍의 표시를 하고, 머리에는 갓을 쓰고 손에는 죽창, 조총과 횃불을 들고 영해 관아를 쳐들어갔다. 당시 관군의 전투 기록인 『영해부적변문축』은 그날 혁명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시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한 수백 명이 머리에 갓(유건)을 쓰고 손에는 죽창과 조총을 들고 갑자기 영해부에 들어와 군기를 뺏고 관사에 불을 지르기 때문에 본관 사또가 총잡이를 시켜서 포를 쏘게 하고, 한편으로 관리와 교졸, 종놈들에게 방어하도록 했다. (중략) 사또는 관사에서 도망가지 않고 관인을 뺏으려는 욕심에 맞서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듣지 않는 것이옵다. (사또가) 목이 잘려서 죽고 나자 관인을 보고 떼어낸 것이옵고. (이하 생략)』

동학교도들은 관아를 접수한 후 부사를 처단하고, 영해관아 이방(吏房)이 보관하고 있던 140량의 돈 꾸러미를 빼앗아 이 중 100량을 인근 5개 동민에게 가난한 동민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관아 점령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기에 이튿날 이들은 오후에 관군과 교전하면서 최시형 등 일행은 영양 일월산으로, 다른 동학군들은 영덕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북쪽으로 퇴각하던 동학군들은 평해 군수를 잡았다 놓아주기도 하는 등 기세가 만만치 않았으나, 관군 측은 동학군들을 5개월여간이나 끈질기게 추적, 검거하였다. 그 결과 결국 혁명에 참여한 동학교도 등 100여명이 처형 등으로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지도부와 동학군 50여명은 최종 목적지 최시형 선생이 있는 영양군 용화리에 집결하여 다시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거사 성공을 자축했다고 한다.

영해부성 습격 후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이 때에 관문(關文)이 연달아 내려와 방백 수령들은 놀래 두려워할 짬도 없었다. 각 진영과 군·현 포졸들은 연달아 출몰하였다.』고 한다. 감시의 눈길로 영해, 울진을 비롯 동해안과 남쪽 청하, 영일 등 서쪽의 안동, 영양, 청송 등지에서는 동학도인들이 수상한 눈치만 보여도 체포되는 상황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숨어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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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지도자 남두병 선생 후손 남상균
(매화면 금매1리 65세)씨와 대담하고 있는 필자.
 
영해 동학혁명 당시 울진의 동학교도 13여명이 희생(사망)되다.

영해 봉기 시 전국에서 6백여 명의 동학교도, 농민, 지식인 등이 참여해 관군과 교전 중 사망, 추적 검거 후 처형, 고문치사, 도피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처형 36명, 자진(자살) 1명, 물고자(고문치사) 19명, 교전 중 사망 34명 등 사망자는 100여명에 이르고, 원악절도정배(귀양)를 간 사람은 21명이다. 도피를 해 종적을 감춘 사람도 66명(도피자)에 이른다. 또한 가족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 가운데 66명의 여인들이 관아에 붙잡혀가 심문을 당했다. 동몽도 2명이나 참가했다. 동몽은 15세 정도 나이다. 동몽은 김경중과 평해의 전종이이다. (김기현 지음,『자유를 향한 영웅들』. 2015. 한국지방세연구회(주) 참조) 다음은 울진사람들 중 사망, 귀양, 징역, 방면된 명단이다.

① 울진의 동학혁명 참여 인사 중 당시 검거되어 처형, 고문치사, 자살 등으로 죽은 사람이 13명이다.
남기환南基煥, 손경석孫敬錫, 전인철全仁哲, 전동규全東奎(동명 전의철), 전정환全正煥 외 전씨 집안 이름 모름 2명, 황억대黃億大, 김귀철金貴哲, 남두병南斗柄, 전영규全永奎, 남기상南基祥, 김씨金氏(이름 모름)이다.
② 울진 사람으로 귀양(유배형) 등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평해 역인 전제옥全題玉, 평해 동몽(어린아이)전종이全宗伊, 평해 야동 전세규(29세)이다.
③ 감옥에서 징역을 산 사람은 평해 전윤환, 황윤구, 전윤조, 전한규, 전서규 등이다.
④ 체포되어 매 맞고 풀려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울진 매일리(이하 현 매화 금매리) 남유추(42세), 울진 매일리 남유항(38세), 울진 매일리 전청오(48세), 울진 매일리 장지엽(34세), 울진 한웅가(?) 장경선(당시 28세), 울진 매일리 전원이(61세), 평해 월야동(현 기성 방율리) 전정원(20세), 평해 幼學(선비를 말함) 황치작黃致綽, 평해 유학 남시병南時炳이다.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울진 쪽 사람들이 영해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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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두병 선생 생가(2000년대 모습), 매화면 금매1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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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된 와가 앞에선 남두병 선생 후손 남상균
(매화면 금매1리 65세)씨

당시 주요 인물, 충청인 이필제, 울진 남두병, 전의철, 전영규는 누구인가?

영해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은 최시형, 이필제, 김낙균, 남두병, 박영관, 박한용, 전인철, 전영규, 강시원 등을 들 수 있으니 이 글에서는 주요인물 가운데서 이필제, 남두병, 전영규, 전인철만 간략히 기술한다.

① 먼저 이필제(李弼濟 1825 ~ 1871)는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 홍성) 출신이다. 그는 동학 접주로서 영해동학혁명에서 최시형 다음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필제는 향반(鄕班 시골 양반)이며,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생애 초기부터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근수, 필제, 제발, 주성칠, 주성필, 이홍, 주지, 진명숙, 김창석, 김창정 등이다. 이름을 자주 바꾼 것은 자신의 안전, 조직과 거사의 비밀유지 전략 등 보안책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필제는 진주, 진천 등지에서 혁명을 도모하다 실패한 인물이다. 영해혁명은 성공했으나 이후 문경에서는 사전 발각되어 실패했다. 한편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최시형을 비롯해 동학교도나 지역의 유림이나 부호들을 설득해 자금을 모으고, 거사 계획 모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시형이 영해혁명 후 단양까지 안전하게 도피시킨 인물이나 천도교측 기록에는 동학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고 하여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당시 그는 진취적이고 이상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어서부터 정감록적 사유로 조선을 체제 변혁시킨 뒤 중국으로 쳐들어가는 북벌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사가 성공하면 이필제는 중원을 차지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는 현지 세력이 하게 하자 등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지금 보아서는 좀 허황되나 당시로써는 모화사상에 젖은 유림 등의 지식인이 감히 꿈꾸지 못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그는 강한 민족주의적 의식을 소유한 자이기도 했다.

그는 1871년 3월 10일, 영해부 관아를 공격해 점령했다가 12일에 관군이 온다는 소식으로 단양으로 도피했다. 당시 진명숙(秦明叔, 명숙은 전봉준 장군의 호라고 함)으로 바꾸고, 그해 7월 5일 문경에서 봉기를 시도하다, 밀고로 8월 2일에 체포되어, 1871년 12월 23일 지금의 서울시청 뒤쪽 프레스센타가 있는 자리인 군기시에서 처형되었다.

② 남두병(1871∼1871)은 영양 남씨로 울진 매일리(현 울진군 매화면 금매1리) 출신의 유학자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남양파, 남양피, 남칠서이다. 모두 동일인으로 남두병을 지칭한다. 칠서는 그의 호다. 그는 영해동학혁명 거사시 창의민병을 모집하는 소모문을 쓴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유학자의 신분으로 동학에 입교하여 조선왕조에 반역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집안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이필제와 교유를 하면서 세계사적 조류와 시국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사회체제 변혁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으로 치면 선구적 진보 인사이다. 그는 영해동학혁명 후 체포되어 대구경상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이별시를 남기고 옥사했다. 당시 그의 아들이 옥바라지를 했으나 시신은 수습지 못해, 고향 금매리에 의관장을 했다고 한다. (후손 현 울진 매화 금매리 거주. 남상균 증언, 66세)

그가 쓴 소모문은 영해부적변문축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일부와 이별시를 소개한다.

소모문(召募文)/『(앞부분 생략) 서학이라고 일컫는 것과 동학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동학이 모두 서학에서 나왔는지는 원래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서학은 위로부터 조정(朝家=朝廷)에서 특별히 엄하게 금하여 남은 것을 멸하기 위하여 엄형에 처하니 그 무리가 남지도 못하고 근원을 전할 길이 없고 종류가 바뀔 수도 없다. 우리 동쪽을 일컫는 동학(東學)은 계해(1863)년과 갑자(1864)년 이후에 대신사 수운을 잡아 죽이고 이를 따르는 제자들은 서학을 금하는 것과 똑같이 다스리겠다는 위협을 하였다. (중략) 흉악한 무리들을 괴롭혀 없애는 것은 올바름과 어그러진 것을 끝까지 서로 응하여 합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500년 예의의 나라가 오랑캐와 금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인즉 어찌 임금을 위하고 스승을 위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만에 하나 나무에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와 천륜의 수레바퀴가 도는 천둥소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올바른 것을 돕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도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소모문에서 남두병은 조선 정부의 대신사 수운 선생(최제우)를 처형하여 동학을 탄압하는 부당함과 부정부패 등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여 나라가 외세침략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천륜이요, 그것이 올바른 것을 돕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제세안민의 길이요, 시대적 대의인 사회정의 실현임을 강조한 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건 한 문장이지만 깊은 뜻이 담겨있는 유학자의 글이기도 하다. 다음은 그가 남긴 이별시(離別詩)이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전신과 고문으로 얼룩진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동지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

『나이 사십에 자괴감을 갖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해 질 무렵에 무거운 쇠사슬이 전신을 짓누르는구나./천금으로도 죽지 않는 것은 모든 헤아림의 말이거늘/삼목에 매달린 몸이 능히 살아난 사람 몇이나 될까./지옥 같은 신음과 울부짖음이 영해 본래의 뜻인가./갇힌 사람의 눈물도 금하니 다시 상처받은 신이던가./광활한 중국을 잘 아는 형제들을 중도에 헤어지니/원컨대 다른 생에 다시 맺어 이번 세상 인연 전하리.』
(원문) 自媿無聞四十春 (자괴무문사십춘)/晩來縲緘重纏身 (만래류함중전신)/千金不死皆虞語 (천금불사개우어)/三木能生有幾人 (삼목능생유기인)/燕獄哺吟寧本意 (연옥포음영본의)/禁囚對泣更傷神 (금수대읍경상신)/那知兄弟中途別 (나지형제중도별)/願結他生此世因 (원결타생차세인)
그는 매 맺아 옥사하면서도『감히 살 속의 간이나 쓸개를 찢어 늘어놓고 피를 뿌리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敢不披肝瀝血敷陳 감불피간력혈부진, 영해적변문축 기록)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선비 기개를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은 모습이 숙연하다.

③ 전영규, 전인철(전의철, 전동규 동일인으로 추정) 2인은 모두 정선 전씨로 집안 사촌간이다. 전영규는 동학교도이다. 그는 평해 지역의 중심적 인물로 등장하고, 영해동학혁명시 참가자 무리 중에 두 번째 가는 우두머리급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반인 남시병을 훈장으로 들여 집안 자제들을 사교육을 시켰을 정도로 다소 재산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 후 관아의 수배와 검거 돌풍이 불 때 자진으로 생을 마감했다. 훈장 남시병은 심문 과정에서 무관함이 밝혀져 풀려났다.

전인철은 평해의 현직 무관인 장교였다. 그는 자기 집(현 기성 방율리) 뒤편 대나무 숲에 대장간을 두고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이정로 기성 방율리, 88세, 동네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증언) 전인철이 만든 무기(죽창 180개, 몽둥이, 장검, 화승총  따위)는 혁명참가자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선왕조 기록인 『교남공작』에 전인철은 도적의 대열에 아우와 형, 아제비,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를 끌어들인 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쨌든 그는 최제우 신원 회복과 제세안민 등 동학의 기치 아래에 합세했다는 것과 현직 무관장교로서 쉽지 않은 결단을 역사는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말 당시의 상황이 신분계급이 다소 느슨해졌지만 근본적으로 씨족과 가문이 얽힌 향촌 사회였다. 울진에서 영해동학혁명에 참가한 인물들을 고찰해보면 정선 전씨, 평해 황씨가문에서 다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친형제, 숙질, 사촌형제나 사돈지간 등 친인척들이었다.

후세 평가와 교훈

시대에 따라 지배자가 기록하는 역사는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기들의 정치적 행위를 유리하게 기록한다. 절대 왕조시대가 더욱 그랬다. 영해동학 관련 기록으로 조선왕조실록, 교남공적, 영해부적변축문 등이 있다. 이 기록에는 백성이 일으킨 봉기를 난적, 폭도, 작변, 난동, 토벌 등의 용어로 쓰고 있다. 이는 백성들이 불평등한 봉건사회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정당한 정치적 행위를  역적으로 몰아 그들을 격하하는 표현이다. 이제는 운동, 혁명이라는 용어가 대세이다.

어떤 이는 1894년 전봉준이 봉기한 동학혁명에서 혁명 주체 세력이 누구냐를 놓고 농민주도를 기꺼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농민이 아니라 동학교도들이 주체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치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동학농민혁명』이라는 표현이 다수 설이 되었다.

한마디로 영해동학혁명(1894)은 한국 최초의 동학교도와 지식인, 일반 백성이 주도한 시민혁명이다. 왜냐하면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보다 그 시점이 23년 빨랐다. 프랑스혁명과도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근대시민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 『영해 동학혁명은 20년도 넘게 지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세계일보. 2014. 3. 19. 경희대 임형진 교수) 그러한 점에서 이 혁명은 현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후 동학혁명 참가 후예들 일부는 전기의병 대열에 합류하고,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에 맞선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영덕, 영해, 울진의 독립운동가 집안에는 그러한 사례가 적지 않다. 그 의혈 투쟁 정신이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면면이 계승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학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그 의미를 재조명하고 당시 영해동학혁명에 참가한 울진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명예를 선양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울진동학교도 관련 기록은 군지 등에 산발적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전문적인 연구는 아직 없었다. 관련하여 기념물 등 사적지는 기성면 방율리에 소재한 동학교 전의철 추모비(1기) 정도에 지나니 않는다. 후손들을 통한 유품이나 구전 등의 고증도 필요하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2019년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이 기념일은 전봉준장군이 일으킨 동학 혁명일이다. 하지만 울진지역에서도 이 법정기념일을 지역 상황에 맞게 울진인들의 영해동학혁명 참여에 대해 그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선양宣揚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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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저널 1994. 1. 10자
기획발굴, 울진동학농민전쟁발상지를 찾아(필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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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 방율리 마을 입구 영해동학혁명 지도자
전의철 선생 추모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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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철 선생에 대해 필자와 대담을 나누는
마을 주민 이정로(기성면 방율리 88세)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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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철 선생 생가.
지금은 현대식으로 지붕과 창문틀을 바꾸었다
(기성면 방율길 552-10 소재) 

<후기> 울진 동학지도자의 생가 마을 주민과 후손들을 만나다

필자는 1994년 12월경 1994년 동학농민혁명(1894) 100주년을 맞아 울진동학교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기성면 방율리를 답사했다. 26년 전의 일이다. 그 내용은 당시 지역신문인 울진저널에 기사화되었다.(울진저널 1994. 1. 10.<기획발굴, 울진동학농민전쟁발상지를 찾아> 사진 참조)

지난 2020년 11월 말경 다시 기성면 방율리를 찾아 전의철 생가를 답사했다. 1984년 10월 후손들이 세운 마을 입구의 선 비석 전면에는『동학교주정선전공의철추모비』라 새겨져 있다. 비문에「교주」라고 명명했는데「접주」가 바른 명칭이 아닐까 싶다. 비석의 매끄러운 면이 겨울 석양에 빛났다. 추모비는 말없이 길손을 맞았다. 추모비 둘레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그의 혼을 지키듯 의연하다. 마을로 들어가 생가를 찾았다, 위치는 그대로나 옛 골기와는 현대식 기와로 한옥문은 알루미늄새시로 바뀌었다. 생가 뒤쪽 대나무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의 이정로(남 88세) 어르신에게서『조선말에 전의철 장군이 대숲에서 대장간을 두고 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전 장군이 무장한 동학군을 이끌고 평해를 치고 영해에 들어갔고, 나중에 영덕을 치면 다 된다고 했는데 영덕을 치려다 체포되었다』『관군과 싸울때 동학군은 청, 일반인은 홍으로 표시하고 유건을 쓰고 죽창으로 무장했다고 한다』고 예전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다.

두 번째로 남두병의 후손인 남상균(매화면 금매리, 66세)씨를 방문했다. 그와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 나왔으나 지면상 남두병 선생의 이야기만 싣는다.

현재 남상균 선생이 살고 있는 주택지는 21대조 할아버지가 경주에서 살다가 고려 말에 울진으로 이주하여 현 집터에 정착, 약 65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골기와 집이었는데 18년 전인 2002년에 현대식 한옥으로 다시 지었다고 하면서 옛 기와집을  그대로 보존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남두병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했다. 남두병 할아버지는 자기에게 6대조가 된다고 한다. 두병 할아버지는 자는 칠서, 호는 미촌이라고 했다.

조선말 어지러운 시국에 국내와 세계정세를 두루 알고 있는 유학자로서 나라의 앞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민중 운동가라 할 수 있는 동학 접주 이필제, 김낙균이 금매 할아버지 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통적 유학자 가문의 집안에 감히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두병 할아버지는 수용했겠지마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남상균씨는 그래서 드러나지 않도록 집안을 보호하고 비밀유지를 위해 자기 성명을 미파니, 남양파니 별칭했으리라고 짐작했다. 할아버지의 정체와 거사계획이 탄로 나면 역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당시 할아버지는 이필제의 견해에 의기투합 공감을 하고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이필제와 함께 영해 민중봉기를 꾀했지 않았나 했다. 영해거사 때는 300여명의 동지를 이끌고 참여했다고 한다. 남상균씨 추측으로는 기성 방율 접주는 전인철인데 울진 접주는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두병할아비지가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라고 했다. 당시 가세가 부유했고, 최제우 생존시 350금의 성금도 냈다고 한다.

남두병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하루는 명화적이 집안에 들이닥쳐 쌀을 내놓으라고 하자 그는 두 장정이 함께 들어야 하는 한말짜리 되를 한 손에 들고 갑자기 들이미니 그들은 놀라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는 영해혁명 후 체포되어 대구 경상감영에서 고문치사로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남재민) 또한 아버지 죽음에 대해 원통해서 옥바라지를 하다가 대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남두병이 사망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서였다. 그래서 시신 수습도 못한 집안에서는 금매리 장새목에 의관장을 했다 한다. 또한 그 할아버지가 남긴 유고시 등 문집이 있다고 한다. 문집 정리 등 그의 일생에 대한 유학자와 혁명가로서의 생애담도 쓰여져야 할 것 같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남두병과 같은 혈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매화면 금매리 남씨 집안의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 매화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손으로서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올해 초 할아버지의 직계 후손이 서울에서 고인이 되셨다며 그분이 계셨더라면 그래도 뭔가 일을 하셨을 텐데 아쉬워하며 이제는 두자병자 할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지고, 공적비라도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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