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월리 일우정(一愚亭)

기사입력 2021.04.12 17:52  |  조회수 9,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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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문화원장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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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우정이 있는 왜고개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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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물어진 일우정 건물


울진읍 호월1리 무월동에서 호월3리 높은들 마을로 가는 얕은 고갯마루에 ‘일우정(一愚亭)이란  정자가 있다. 정자가 있는 언덕배기를  왜(瓦)고개라 부르는데 아마 옛날에 기와를 굽던 곳이 아닌가 짐작된다. 정자가 있는 왜고개 아래엔 남대천 상류의 푸른 강물이 휘감아 돌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일우정은 오랜 풍우로 허물어져 원형을 찾기 어렵지만, 정자에서 바라다보이는 경치는 옛 모습을 그대로이다. 모르긴 해도 울진 지역에서는 이만한 절경은 찾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자 아래는 너댓 채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나도 여기에 자그마한 한옥 한 채 지었으면’ 하는 욕심이 불같이 일어난다. 

 

일우정의 구조는 중앙에 마루를 깔고 양쪽으로 작은 방을 만들어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삼았고, 뒤편으로는 쪽마루를 만들었다. 

 

건물 한 켠으로는 아궁이를 만들어 온돌에 불을 땔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예전에는 이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일우정에 모여 학문을 논하였고, 타지역의 선비들까지 찾아와서 밤을 새우며 토론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울진의 누, 정기에 의하면 일우정(一愚亭)은 ‘일우(一愚) 장주신(張柱臣 1850-1928) 선비가 지었다고 한다. ‘일우(一愚)는 장주신(張柱臣) 선비의 호이다. 장주신 선비는 호월리 무월동 출신으로 선조들은 대대로 이 마을을 지켜온 문반가문이다. 조선 말기인 고종 5년(1868), 대원군은  전국의 사액서원을 제외한 1,000여 곳의 서원을 철폐하였는데 이때 울진의 월계서원도 철폐를 당했다고 울진 디지털 대전에 기록되어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고 1871년 다시 대대적인 철폐령을 내려 시골의 작은 서원들까지 모두 문을 닫게 하였다. 

 

월계서원이 철폐되어 지역의 유림들이 모일 장소가 없어지게 되자, 장주신 선비는 자기의 사유지에 일우정을 짓고 유림들이 계속해서 학문을 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일우정이 건립된 연도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이기 때문에 1872년 이후로 추정되며 대략 150년전 쯤으로 추정된다.  

      

일우정을 지은 장주신 선비는 울진 장씨 관조(貫祖) 장말익(張末翼)으로부터 29세손으로 철종 1년인 1850년(庚戌)에 월계서원 창건자인 장지연(張止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주신 선비의  증조부 장덕효(張德孝)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 左承旨)를 지냈고, 조부인 장석영(張錫永)은 정조(正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장주신 선비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장주신 선비를 ‘의관영감’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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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윤씨

 

일우(一愚)라는 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장주신 선비는 항상 유학의 근본인 수신(修身)에 힘쓰며, 자신을 어리석고 부족하다는 겸양의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장주신 선비는 울진지역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선비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후손인 장성윤(42년생)씨는 “장수신 조부님은 울진 지역 외에도 타지역 선비들과도 정기적인 모임같은 것도 하였다고 들었으며 지금도 강릉 최태순 선비의 시문이 남아있다”고 하며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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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구씨

 

또한 지역 원로인 장인구(37년생)씨는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우정에 모인 선비들은 일우정을 비롯해 명소들을 둘러보는 코스가 있었다고 하였어요. 그리고 특별한 것은 월계서원이 철폐되고 그 현판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에 이 마을의 장만호씨 댁에 보관했었던 것까지는 직접 보았는데 그 후에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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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승씨

 

또한 마을 원로 장대승(43년생)씨에 따르면 “유림들이 모여 행사를 할 때면 먼 곳에서 찾아온 선비들은 일우정에서 숙박도 했고, 실지 6.25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 두 가구가 일우정에서 꽤 오랫동안 생활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6.25 후에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구가 와서 꽤 오래 살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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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윤씨

 

장주신 선비의 현손인 장시윤(張時潤, 36년생)씨는 이렇게 말한다, 

“장주신 어른은 저에게는 증조부가 되시는데 당시에는 울진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증조부님과 함께 일우정에서 시회를 가졌다고 들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집에는 일우정에 관한 시판도 많았고 책을 만들었던 목판도 많았지요. 고서들도 참 많았고요. 그런데  도둑이 여러차례 들어서 중요한 것들을 전부 훔쳐 갔어요”  

장시윤씨의 동생인 장성윤씨도 도둑을 맞은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에 보관하던 책이랑 목판이랑 물건들이 많았는데 모두 도둑을 맞았어요. 한번은 서울 사는 친구가 전화가 왔는데 인터넷에서 우리 집 서책들이 경매에 붙여지는 것을 보았다고 연락이 왔던 적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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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윤씨

 

장주신 선비의 현손인 장만윤(72세)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 사당이 본체와 떨어져 있어서 서책이랑 예쁘게 생긴 제상도 있었고요. 제기도 많았어요. 그런데 도둑놈들이 어떻게 알고 몇 번이나 훔쳐 갔어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장주신 선비는 울진지역의 마지막 선비로 알려져 있는 ‘무실재 南軫永’ 선비와도 깊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무실재 선생이 보낸 행장이 남아 있음은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장주신 선비는 이 지역에서 유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분으로 짐작되며 월계서원 철폐 후 일우정은 지역 선비들의 구심체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장주신 선비의 「一愚集」 외에도 여러 가지 일우정과 관련된 서책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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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영 선비의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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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인 최태순 선비의 시문

 

울진문화원에서 펴낸 『울진의 유적』(1997)에는 일우정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우정은 울진읍 호월1리 무월동 왜(瓦)고개, 못 위에 있다. 亭子는 議官 장주신(張柱臣) 건립으로 정자아래에는 울진 남대천 맑은 물이 고이며 굽이쳐 흐르고 서쪽으로 단풍산과 북쪽의 고두박재  동쪽의 호월들판 위로 산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경관은 절경을 이루며 많은 시인 묵객이 찾아오며 현존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동쪽에는 산성이 병풍처럼 둘려처져 있다고 하였는데 산성(山城)은 ‘고산성(古山城)’을 일컬으며 울진의 유일한 임진란 유적이다. 이 산성을 중심으로 일우정이 있는 호월리는 자연부락 명이 ‘무월동(舞月洞)’이다. 임진란 당시 왜군들이 고산성 내에 진을 치고 장기전을 펼치던 울진의 병사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달밤에 무월동 앞 하천에서 고기를 굽고 여인들을 잡아다 춤을 추게 하여 고산성 내에 있던 울진의 병사들이 고기 냄새와 흥겨운 춤사위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성의 북문을 급습하여 고산성을 함락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왜군의 첩자가 지형 정찰을 나와 산성의 위치를 물었을 때 노파가 ‘ 만리 만리 구만리를 가야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구만동’이라 부르고 ‘고개 고개 천고개를 넘어가야 한다’고 대답하여 지금도 ‘천고개’라 부른다. 이렇듯 ‘일우정’ 주변에는 좋은 경치와 함께 역사적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무월동 입구에는 장대룡 장군의 유적도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장대룡 장군은 조선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는 삼전도 굴욕 사건이 일어나자 분기를 참지 못하고 청 태종을 암살하기 위해 청나라까지 찾아가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폭한 장군이다.

울진군지에는 일우정 기문도 전해지고 있다. 면암 최익현이 지은 일우정기(勉菴 崔益鉉 一愚亭記)를 소개한다.


「한 개결(介潔)한 사람이 두어 칸 초가에 나물 먹고 물을 마시며 선왕의 옷을 입고 고인의 글을 읽으며 멍한 사람처럼 있는 것이 세상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지나는 과객이 말하기를 “목하 하늘 아래에 사해의 넓은 곳에서 어디를 가나 양을 등지고 음을 지향해가지 않음이 없어 중화(中華)의 도가 오랑캐의 학설로 변하게 되고 충효의 세족과 예의의 명문들이 모두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머리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도를 높이고 그 사람을 스승으로 함이 자제들이 부형의 뜻을 좇고 수족이 자기 머리를 보호하듯 머리를 숙이고 복역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고원하게 가죽과 베옷을 입고서도 존경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위치에 거하면서 옛 생각을 굳게 고집하고, 변화에 영합하는 것도 알지 못하여 장차 재앙이 몸에 미쳐오는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인데 어찌 이다지 어리석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주인이 깊게 한숨 쉬고 말하였다. “자네가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은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자네의 그 말을 괴변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리석음(愚)이라는 것이 한 가지 것만을 가지고 논할 수 없지 않은가. 대개 사람 중에 재능이 출중하면서도 어리석음으로 자처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재능이 부족하면서도 잘난 척하는 자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우(愚)는 안자(顔子)의 ‘불위여우(不違如愚)’와 같은 우(愚)에 해당된다 하겠다. 백리해(百里奚)는 우(虞)나라에서는 어리석었지만 진(秦)나라에서는 지혜로웠고 영무자(寗武子)는 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지혜로웠고 도가 없는 나라에서는 어리석었으니 이 두 사람의 우(愚)는 지자(智者)의 어리석음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우를 잘하여 자기 몸을 지킨다면 입신을 하여 이름이 높아지고, 일을 하게 되면 일이 순하게 풀려서 사업이 빛날 것이요, 집을 다스리면 집이 바르게 되어 인륜(人倫)이 밝아질 것이요,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편하여 백성이 잘살 수 있고, 아비를 섬기면 효가 될 것이고, 임금을 섬기면 충신이 될 것이니 어디에서도 의롭지 아니함이 없고 어디를 가도 형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렇지만 만약에 도(道)와 정(正)을 배반하면 천도와 인성은 착함만 있고 악은 없음을 알지 못하여 이(理)를 어기고 욕심에 좇아 기회만을 엿보아 이(利)를 획득하지만, 하늘의 재앙과 사람의 재난의 종말은 피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채 권세를 훔치고 공(公)을 등지고 사(私)를 챙기다가 전복되는 화를 알지 못하며, 아울러 국가의 재난에도 미쳐서 장차 임금과 어버이에게 닥칠 것이니 이것이 모든 우(愚) 가운데의 우(愚)이며 불우(不愚)에 처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지자(智者)의 우(愚)를 지키면서 주어진 사명을 다할 뿐이지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것은 원치 않겠다.”고 하였다. 과객이 머리를 숙이고 무연히 물러 나와 이에 그 정자의 이름을 일우정(一愚亭)이라 이름하였다.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 장사문(張斯文)으로 이름은 주신(柱臣)이요 자는 군석(君石)이니, 유문연원(儒門淵源)들과 종유(從遊)하고 있었다. 나같이 글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간절하게 청하는 것은 앞서 선부군(先府君) 월호공(月湖公)의 묘문(墓文)을 지은 바 있어 무릇 주인의 마음 속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주신 선비의 시는 여러 권의 문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 시는 장주신 선비가 연호정을 차운한 시이다.


一愚 張柱臣 詩 <일우 장주신 시> 


秋水蓮花泛彼亭  가을물 붉은 연꽃 저 언덕 정자

湖山爽氣紊愁醒  호산의 맑은 운치 잡시름 사라진다 

翠璧無人餘古郭  옛 성곽 푸른 이끼 사람은 없고 

玉 ?在地虛在汀 돛단배 할 일 없이 허정에 있네 

低攀郞月階前白  밝은 달은 가까이 섬돌 앞에서 희고       

遠斥孤峯野外靑  외로운 산은 멀리 들 밖에서 푸르네      

沓然不見仙?跡  신선 배는 아득히 보이지 않는데 

只有寒雲海島停  바닷가 섬 산엔 찬 구름만 있네


일우정에는 여러 선비들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었으나 훼손되어 없어졌고 유일하게 강릉인 晩翠 최태순 선비의 시판이 남아있어 장손이 보관하고 있다.


泰和 一愚亭韻 <만취 최태순 시>

 

石奇泉洌界西東 기암과 차가운 샘 동서로 뻗었는데 

天不深藏錫此翁 하늘은 이곳을 숨기지 않고 이 늙은이에게 주었으니

一字名愚超俗熊 일우라 이름 한 사람은 시속에 빼어난 웅걸로서

百年基業繼前功 선현의 공으로 이루어진 백 년의 업을 이었네

道心如水印秋月 도심은 선명히 물 위의 가을 달에 비치고

野話通簾聾雨風 밭 너머 들리는 시끄러운 말은 풍우라도 들리지 않고

於世而痴於事拙 세상에는 어리석게 일에는 졸박하게 응하며

林亭退暇坐閑中 숲속 정자로 물러나 한가롭게 머무네

               

江陵 崔泰淳 晩翠 稿 강릉 만취 최태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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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오른쪽 두번째)와 함께 한 장성윤, 장시윤, 장대승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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