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자의 삶 1

아계유고를 통해 본 이산해의 평해 행적
기사입력 2021.07.01 10:28  |  조회수 2,92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083.jpg

이산해가 유배지 울진에 도착한 첫날 1박한 서경포(현 기성면 사동항)


아계 이산해와 한산 이씨


조선조 중종 대에 태어난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본관이 한산 이씨로 충남 보령 출신이다. 자(字)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綜南睡翁)이다.  

 

이산해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문 가문이다. 아계는 고려 말 최고의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한산이씨는 충청도 서산군 한산의 지방 관리로 세거한 집안이었다. 이들 집안은 고려 말 가정 이곡(1298∼1351)과 이색 부자를 배출하면서 단숨에 명성을 떨쳤다. 왜냐하면 문벌귀족 출신이 아닌 이곡과 이색 부자가 당시 세계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국제적으로 급부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산 이씨 집안은 단숨에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명문가로 자리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명문가의 가계를 이은 한산 이씨 가문은 아계 대에 이르러서 더욱 발흥을 하였다. 아계는 정치적으로 조선 중기 동인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에 속하였다. 마지막 붕당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된 인물로 선조 임금시대 영의정(국무총리급)을 두 번이나 역임한 정치가, 사상가, 서예가였다. 5세 때부터 숙부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서화에 능하여 글씨는 대자(大字)를 잘 썼고, 그림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文章 八家)라 일컬었다. 

 

아계는 젊은 시절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명을 날렸고, 대사성(대학총장급),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급), 대사간(언론, 문광부장관급), 대사헌(검찰총장급), 각조의 판서(각부장관급)를 역임했으니 관력도 화려했다. 그야말로 당시 조정의 최고관직은 다 거친 셈이다. 

 

나이 52세 때인 1590년(선조 23년) 처음 영의정에 올랐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정철 등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3년여 년간 평해로 귀양 와서 유배 문학집인『아계유고(鵝溪遺稿,기성록)를 남겼다. 


그는 왜 평해로 귀양 왔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서인들은 권력을 잡고 있던 이산해 등 동인에게 책임을 물어 탄핵했다. 왜냐하면 이산해는 전쟁이 일어나자 왕에게 난을 피해 서북쪽으로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의주까지 몽진했다. 몽진이라는 말의 뜻은『먼지를 뒤집어쓴다.』라는 말인데, 한마디로 임금이 도망가는 것을 점잖게 표현한 말이다. 왜군이 한성 점령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저들만 살 궁리로 선조 일행이 도망가자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우는 등 저항했다. 이 와중에 이산해는 선조를 호위하여 1592년 5월 1일 송도(松都, 현 개성)에 도착했다. 이때 왜군은 이미 서울을 함락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서인의 반대파들이 이를 빌미삼아『한성을 떠나게 된 것은 수상의 죄이다.』라고 그를 공격했다. 이에 선조는『한성을 떠나자고 한 것은 좌상 유성룡과 최명길도 말했는데 유독 영상만 죄주자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평양에 이르러서도 탄핵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선조는 이산해를 파직했다. 결국 국정을 그르치고 왜적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라는 유형(流刑)을 받아 산간벽지인 강원도 평해로 유배 온 것이다.


조선시대 범죄자를 다스리는 형벌인 유형(流刑)은 오형(五刑) 가운데 하나다. 이 유형은 사형 다음으로 중형에 해당되었다. 그래서 흔히 귀양살이 또는 유배라고 한다. 다시 말해 중한 죄를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대신 변방이나 외딴 섬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혹독한 형벌이다. 유배지는 죄질에 따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중죄인일 경우 함경도의 삼수, 갑산과 전라도의 흑산도, 거제도, 그리고 제주도 등지로 귀양살이를 보냈다. 하지만 유배에서 가장 슬픈 점은 형벌의 끝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임금이 사면을 내리기 전에는 종신형인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산해는 평양에서 중도부처(中途付處)란 유형(流刑)을 받고, 종자 하나만 데리고 한계령을 넘고, 강릉, 속초, 삼척 등지를 거쳐 울진, 평해로 진입한 것이다.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였다. 중도부처란 주로 관리에게 과해지는 형벌로서 유배지에서 가족과의 동거는 묵인하였다. 또한 왕족·중신(重臣) 등의 정치범 외에는 배소(配所)에 유폐(幽閉)하는 일이 없이 대개 행동은 자유로웠다. 이러한 까닭에 아계는 유배 시 부인과 딸이 방문하고, 본인 또한 유배기간 중 평해 지역을 자유롭게 유람할 수 있었다. 더구나 조정의 고관대작의 유배 시는 그 지역 수령방백과 부호나 선비들과의 교유가 빈번했다. 그 교유라는 것은 유배 온 고관대작들에게 융숭한 대접으로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어 출세의 방편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순수한 학문적인 사귐도 있었다. 이산해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평해 촌로들과 보리막걸리를 즐기며 어울리는 소탈한 면도 보였다. 그의 평해 생활은 대체로 평온한 것 같으나, 시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면 심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유배문학(현대판 옥중문학) 아계유고는 어떤 내용인가?

 (

유배문학이란 유배자가 귀양살이하면서 남긴 문학적 성취 결과물이나 학문적 성과인 저작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욕구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이듯, 고통은 문학의 어머니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척박한 유배지의 어려움과 고독 등을 문학 또는 학문 활동을 통해 극복하거나 승화시켜『유배문학』이라는 이름할 만큼 독특한 문학 작품과 저서를 많이 남겼다. 현대판『옥중문학』에 비견할 수 있다.

 

조선조에서 꽤나 긴 유배 생활을 한 인물로서는 정약용이 18년간, 고산 윤선도는 4번에 걸친 25년간 유배로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문학과 학문적 성취를 일궈 낸 사람들이다.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담양에 유배되어 있을 때 〈사미인곡〉과〈속미인곡〉등을 썼다.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을 남겼다. 강진에 유배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50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아계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평해에서 3년의 짧은 유배 기간을 보냈지만, 시詩와 문文(記, 說,贈序, 傳)으로 엮은 『아계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 가운데 『기성록』은 16세기 말 당시 평해 지역의 풍물과 사회(주민 생활 등)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문화지리정보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가 남긴 아계유고를 통해 500여 년 전으로 평해 유적을 돌아보고자 한다.


먼저 아계가 평생 남긴 시詩 840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편을 평해 유배 기간 중에 썼다. 아계유고 1권은 평해 황보촌에 머물면서 쓴 시로 대부분 임금에 대한 연모시, 자연풍광과 생활을 읊은 영물시(서정시)들이 주로 나타난다. 2권에서는 자연풍광을 읊은 음풍농월의 서정시가 주를 이루고, 당시 민초들의 생활을 읊은 사회시社會詩와 영사시詠史詩, 영물시詠物詩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사회시(백성들의 삶과 사회현상을 보고 읊은 시), 서정시(자연에 대한 서정을 읊은 시) 연모시(임금을 향한 그리움을 읊은 시) 등이다.

 

문文은 요즈음 문장 분류로는 산문에 해당된다. 문에는 기, 전, 설, 증서, 찬, 부 등이 있다.

아계유고의 기記로는 달촌기達村記, 정명촌기正明村記, 사동기沙銅記, 오곡연당기梧谷蓮塘記, 팔선대기八仙臺記, 응암기鷹巖記, 황보촌기黃保村記, 마암기馬巖記, 우암기牛巖記, 다천기茶川記, 해월헌기海月軒記, 월송정기越松亭記, 곡두기鵠頭記, 해빈단호기海濱蜑戶記, 망양정기望洋亭記, 서촌기西村記, 유수진사기遊修眞寺記, 유광흥사기遊廣興寺記, 유선암사기遊仙巖寺記, 유백암사기遊白巖寺記, 죽붕기竹棚記, 기성풍토기箕城風土記가 있다.

전(傳)으로는 안당장전安堂長傳, 안효자전安孝子傳, 안주부전安主簿傳, 김원성전金原城傳, 순리전循吏傳 등이 있다. 

 

설說로는 울릉도설鬱陵島說이 있다. 증서贈序에는 증옥보상인서贈玉寶上人序 등이 있다.


085.JPG

아계유고에 나타난 이산해의 유람지(기성, 평해, 후포, 온정 지역)

086.jpg

 

이산해가 먼 길을 걸어 평해로 가는 도중  도착하여 

 

1박한 서경포(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 2리 사동항 일대)

087.jpg

화오촌(현 평해 월송리 마을 일부)

088.jpg

이산해가 즐겨 찾았던 서촌의 온탕정은 국내 온천지로 유명한 백암온천이다(울진군 제공)

089.jpg

이산해가 경탄한 주령 풍광, 멀리 동해가 보이고 오른쪽에 영양수비로 넘어가는 88번 국도가 보인다

090.jpg

이산해는 주령 아래 모두를 서촌이라 하고 빼어난 경관에 경탄했다. 현재 돌표지석에『구주령』으로 잘못 표기했는데 『주령』이 올바른 표기이다. (울진향토사연구회,온정일대 옛길 등 유적답사. 2019. 4. 27.)


유배지 거처의 행적과 유람지

 

1) 거처의 이동 경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산해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의 책임에 대한 탄핵을 받아 기성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그는 평양에서 평해에 이르는 힘든 여정 끝에 기성의 서경포(현 사동리 2리 바닷가 마을)에 도착을 시작으로 3년간의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이산해가 유배 생활 중 우거한 곳은 5군데이다. 화오촌에서는 2회 거주하였으며, 달촌, 서촌, 황보에서 각 1회 거주했다. 유배지 거처 이동 순서는 필자 나름대로 기술했으며, 그곳에서 머무른 기간도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었다. 서촌으로 이주해간 시기는 정확지 않아 필자가 추측하여 순서에 넣었다. 아계 유고에는 우거한 기간을 정확히 기술 한 곳은 달촌 뿐이다. 달촌에서 이산해는 5개월여 머물렀다고 기록(갑오년 1595년 여름까지)하고 있다. 황보에서 유배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물렀다. 약 2년 이상 머문 곳으로 생각한다. 서촌과 화오촌에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3개월쯤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가 울진 평해에 온 이후로 거처를 옮긴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서경포(현 사동 2리 바닷가 마을) 도착 유숙(1박)→ ②화오촌(2개월 정도 생활함. 현 평해읍 월송리)→ ③달촌(5개월간 생활함. 현 평해읍 삼달리)→ ④서촌(2개월 정도 생활함. 현 온정면 주령 일대-온정, 선미)→ ⑤화오촌(3개월 정도 생활함. 현 평해읍 월송리)→ ⑥황보(2년간 곽간의 집에 생활함. 현 노동마을)이다.


서경포(현 기성면 사동 2리) 도착, 하룻밤 유숙했다.

 

이산해는 평양에서 여러 날을 걸어 유배지인 기성의 관문인 서경포에 도착했다. 1593년 3월경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그는 서경포의 느낌을『해빈단호기』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 서경포에 임시로 묵게 되었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거리가 수십 보가 채 안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중략) 주인 남자의 행색은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에서는 비린내가 나서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다.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하 생략)』

 

여기에서 단호蜑戶란 이산해의 표현으로는 바닷가의 어민이 집단 거류하는 동네를 말한다. 


화오촌(현 평해읍 월송리)으로 옮겨 5개월 생활했다.

 

이산해는 화오촌에 2회간 총 5개월 거주했다. 이때 유배 생활에 관한 기記는 없다. 다만 시詩가 전한다.


월송촌月松村 농가에 처음 우거하며 / 행궁의 옥음을 다시 들을 수 없으니 / 아득한 꿈길에서나 찾아뵐 수 있을까 / 월송정 가에 뜬 삼경 달은 / 죽지 못한 이 신하의 일편단심일세

 

서촌(현 온정면 주령 아랫마을인 온정 일대)에서 2개월 생활했다.

 

서촌은 현 온정면 주령 아래 온정, 선미 일대이다. 이산해는 입선동에서 서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주령 아래의 서촌에도 잠시 살았다. 서촌은 백암산 기슭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타나는 선암사 뒷동네, 그리고 그 북쪽 주령 아래쪽 동구 일대를 말하는데, 주령 아래의 경관이 가장 빼어났다. 그곳에서 임금을 사모하여 읊은 시詩 온탕정溫湯井 외 서촌기西村記가 있다. 

 

091.jpg

평해읍 삼달리에서 온정으로 가는 남대천에 있는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팔선대 바위

 

서촌西村으로 우거寓居를 옮기다.

 

자석강 머리에 저무는 석양빛 / 백암 서쪽엔 멀리 노운봉이 보이네 / 산꽃은 피려 하고 새소리 재잘대고 / 언덕 버들은 막 푸르고 시냇물은 깊네 / 좋은 계절이 와도 여전히 나그네 신세 / 봄빛이 좋다 한들 마음만 아프게 할 뿐/군평이 내게 새해엔 신수가 좋다더니 / 새해 들어 눈물로 곱절이나 옷깃을 적시네   

 

온탕정

 

백암산 아래에 온천이 있어 / 한 표주박 물로도 온갖 병이 낫는다네 / 이제부터 자주 가서 몸을 씻어서 / 이 늙은이/묵은 시벽을 치료해 봐야지


이산해가『우거를 옮기다』라는 시는 어떤 연유로 서촌으로 거처를  옮겨 갔는지 알 수 없으나 귀양 온 나그네 신세가 서러움이 배어 나오는 시다. 그에겐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고, 올해엔 신수가 좋다던 군평의 점에도 눈물만 난다는 한탄의 시다. 시에 등장하는 군평君平이라는 인물은 한漢나라 때 은자인 엄준 嚴遵의 자. 그는 성도成都에서 점占을 쳐서 생계를 이으며 하루 생계가 마련되면 발을 내리고 손님을 받지 않았다 한다는 점술가占述家 이다


서촌기에는 팔선대로부터 서쪽으로 수 십리 가면 바위산과 수석의 빼어난 경관과 배산임수의 지형,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고 수목이 울창하고 곡식이 무성하여 아주 좋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곳 세 골짜기(백암사 골짜기, 선암사 골짜기, 주령 아래 골짜기)를 모두 서촌이라 한다. 서촌은 바닷가 기성보다 빼어난 경관이라고 경탄해 마지 않으며, 더구나 주령 아래가 더욱 풍광이 좋아 문득 은거하고픈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이산해는 기성 팔경으로 월송정, 팔선대, 경파해, 온탕정, 조도잔, 해당안, 계조암, 망양정을 꼽고 있다. 그중 하나인 팔선대를 소개한다. 팔선대는 달촌(현 삼달리)을 지나 80번 국도에서 온정 쪽으로 가는 오른쪽 남대천에 있다. 그야말로 수십 명이 올라가 쉴 수 있는 붉고 검은빛이 나는 널따란 바위이다. 


이산해는 이 바위 풍광을 보고 팔선대기(八仙臺記)와 시를 남겼다.


팔선대기(八仙臺記)

 

『수정계(水精溪)가 태봉의 남쪽에 맑은 물을 그득 모아두었고 그 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것이 팔선대(八仙臺)인데 그 명명(命名)한 뜻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신라(新羅) 때에는 선인(仙人)과 도사가 많았으니 영랑(永郞) 수랑(水郞):신라 때 금강산 인근의 삼일포(三日浦)에 내려와 놀았다는 네 신선 중 두 사람. 수랑은 술랑(述㫰)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같은 이들이 한번 노닒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명명되지 않았을까.”하였다. 그런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옛날에 태수(太守)의 아들이 나그네와 이곳에 노닐었는데 마침 함께 모인 사람이 여덟 명이었으므로 이렇게 명명하게 되었다.” 하였으나, 이 또한 과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아, 신선에 관한 이야기들은 허탄(虛誕)하다. (이하 생략)』


이산해는 팔선대의 유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신라의 화랑들이 울진을 유람할 때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설과 옛날 태수의 아들 일행 8명이 노닐었다는 설이다. 아계는 이 글에서 신선에 관한 이야기는 허탄하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의 삶과 도덕을 추구하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신선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산해는 달촌 앞 하천(현 평해 남대천 일부)을 두고 수정계라 말하고 있다. 맑고 맑은 시냇물이라는 이름을 붙인 참으로 시인 이산해다운 지명이다. 다음은 팔선대라는 시다. 


팔선대(八仙臺)

 

관로 가에 불쑥 솟은 저 푸른 바위 천고의 신선 자취가 참으로 아득하여라 날 저물자 어부 초동 모두 가버리고 푸른 봉우리 그림처럼 시내 정자를 둘렀네.

 

092.jpg

달촌 전경(현 평해읍 삼달리)

 

달촌(현 평해읍 삼달리)에서 5개월 살았다.

 

달촌에서는 5개월여(1594년 여름까지) 평해군의 아전인 손씨와 이씨 집에 머물렀다. 집은 뜰도 없이 겨우 서너 칸에 기와와 띠풀과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이었다. 불을 때면 매캐한 연기가 늘 방안에 가득하고 비가 오면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앉아 있어야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달촌에서 다시 전에 우거하던 화오촌으로 이주했다. 

 

화오촌 생활의 일단을 죽붕기竹棚記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갑오년 여름에 화오촌으로 이주하였는데, 집이 비좁고 낮아 드나들 때마다 늘 천정에 머리를 부딪치곤 했다. 게다가 마침 찌는 듯한 복더위를 만나 마치 뜨거운 화로 속에 있는 듯하고, 모기와 파리까지 귀찮게 달려들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에 이웃에 사는 이생 우열과 피서할 방도를 강구한 끝에 월송정 숲속에 죽붕을 매달기로 하였다.(이하 중략) 죽붕이 이루어지자 이웃 노인들과 함께 보리술을 마시며 축하하였다. 이로부터 식사며 기거奇居, 좌와坐臥, 침수寢睡를 날마다 여기서 하였는데, 언제나 솔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그 시원한 기운이 뼛속에 스며드니 아무리 드센 더위도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모기와 파리 따위도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이하 생략) 』


이같이 유배 생활에서도 소나무를 이용해 피서와 기거할 곳을 마련하는 여유가 있기도 하며, 촌로들과 보리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이때 그의 생활 모습은 유배자의 죄인이라기보다, 그저 촌로인 필부의 소탈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관대작이 잠시나마 당시 민중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093.jpg

마을 표지석

094.jpg

황보1리 전경

095.jpg

곽씨네 집

096.jpg

황보(노동마을) 대나무 숲

 

황보촌(현 기성면 황보리, 노동마을)에서 2년 6개월 살았다.

 

아계는 임진년 중양절에 화오촌에서 이주하여 황보촌(노동)으로 왔다. 아계는 황보촌에서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 기간인 2년 6개월을 보냈다. 곽간은 당시 이 마을에서 경제적으로 꽤 부유했으며, 이산해에게 집을 내어주고, 자기는 이사를 가기도 했다. 황보촌이 있던 곳은 월송정에서 평해읍 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황보천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보이는 노동서원이 있는 바로 그 인근이다. 황보마을은 7번 국도인 구도로가 있는 월송리에서 서쪽으로 황보천을 따라가면 동쪽으로 삼태기처럼 둘러사인 아담한 마을이다. 당시 이산해가 황보촌에 이르렀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푸른 대숲이었다. 긴 대나무 천 그루가 빽빽하게 서 있어 푸른빛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 동회관 앞에 있는 정미소 둘레에 그리 크지 않은 대나무 숲이 있었다.(시눗대를 말하는 것이 아님) 이 동네에는 이곳 밖에 대나무 숲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나무를 사랑한 이산해는 자신의 호를 죽피옹이라 하였다. 이산해는 황보촌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임금을 사모하는 글이다. 결국 선조 임금의 사면을 바라는 은전 혜택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셈이다.

             

황보촌으로 옮겨 살며

 

벽옥 같은 천 그루 대나무가 에워싸고/푸른 산등성이가 한 면을 막고 섰네. / 가을 소리는 자주 비를 뿌리게 하고 / 산 기운은 절로 노을을 만드네. / 나그네 되어 도리어 은자와 같건만/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집 없구나. / 흰머리로 그저 임금만 그리워하여 / 꿈에서는 늘 대궐을 향한다네.


곽간의 집은 공교롭게도 이산해 부친이었던 이지번이 1536년 중종 31년에 이곳으로 유배 와서 머물던 인연이 있는 곽생의 집이기도 하다. 곽간은 곽생의 손자가 되는 셈이다. 곽생은 이지번이 벽에 써둔 시를 떼어내어 보관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시 구절에『창에 시편을 적어준 후의 선대의 일이요』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곽간은 병으로 계사년 여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이산해가 곽간을 추모하는 시다.


주인 곽간을 곡하다.

 

창에 시편을 적어준 후의 선대의 일이요. / 집을 빌려준 깊은 정 백미에 몸을 의탁했지. / 근래에 만난 날 드묾이 한스러웠는데 / 오늘 이렇게 사생이 어긋날 줄 몰랐구나. / 잡힐 듯한 맑은 모습에 그대 잊기 어렵고/탁주를 걸러도 다시 누구에게 권할 건가 / 매실은 누렇게 익고 죽순은 새로 자라는데 / 떠나간 주인은 원망하듯 꾀꼬리가 우는구나.

 

현재 황보리에는 곽씨가 유일하게 1가구가 살고 있으나 필자가 답사를 갔을 때는 주인이 부재로 곽간의 직계 후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웃 사람의 증언으로 주인은 도시로 이주하여 집은 오랫동안 살지 않아 낡았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www.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97630
 
 
 
 
 
    울진뉴스/월간울진(http://uljinnews.com |   창간일 : 2006년 5월 2일   |   발행인 / 대표 : 김흥탁    |   편집인 : 윤은미 
  • 사업자등록번호 : 507-03-88911   |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말루길 1 (1층)   |  등록번호 : 경북, 아00138    |   등록일 : 2010년 7월 20일                         
  • 대표전화 : (054)781-6776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전자우편  uljin@uljinnews.com / ytn054@naver.com
  • Copyright © 2006-2017 uljinnews.com all right reserved.
빠른뉴스! 울진뉴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