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자의 삶 2

이산해가 본 평해지역 주민들의 삶과 풍토
기사입력 2021.07.01 12:15  |  조회수 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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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가 즐겨 찾았던 월송정 둘레의 솔숲 경관과 바다, 

그는 유배시 화오촌(현 평해읍 월송리 황보리 서촌)에 거주하면서 월송정 등을 배경으로 송림, 관로, 북교, 동천, 소금가마, 고기잡이 통발, 구촌 등 430여 편의 시를 창작하였다.

<사진 제공. 울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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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의 땅 이름 유래가 된 키산 일대. (현 기성면 척산1리, 서쪽으로 철도가 개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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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된 아계 이산해 기성록 초고본, 사진 출처/ 다음(한국시민뉴스 기사 사진) 


`기성은 평해의 옛 땅이름이다. 기성은 땅 모양이 키 모양같이 생겼다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기성면 척산1리 일부의 산과 마을을 보면 키 모양으로 되어 있다. 키는 농사용 도구로서 버들이나 대나무로 만든다. 앞은 넓고 편평하며, 뒤는 좁고 우긋하게 짜는데, 양 앞쪽에 작은 날개를 붙여 바람이 잘 일어나게 하여 검불 따위를 날려 보내고 알곡만을 남게 하는 농기구다. 예전에 민간에서 밤 오줌을 싸는 아이에게 키를 덮어쓰게 하여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으러 보낸다. 그러면 상대 집에서는 그 까닭을 알아차려 소금을 뿌리고 키를 두드리면서 『다시는 오줌을 싸지 마라.』하고 소리친다. 이렇게 하면 오줌싸는 버릇이 고쳐진다고 믿고 있는 풍속이 있었다.


아계 이산해(1539-1609)가 1592년 임진왜란시 서애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을 주장하여 선조임금의 의주 몽진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를 빌미 삼은 반대파인 서인들에게 탄핵과 파직을 당해 유배 온 곳이 강원도 기성(이하 평해)인 현 울진 평해지역이었다. 그의 나이 당시 54세였다. 그는 평양에서 파직되어 한계령을 넘고 강릉, 삼척 등을 지나 평해로 온 것이다. 그가 평해로 귀양살이 와서 3년간 머물다 남긴 유배 문학 기록이『아계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했다. 

 

『아계유고』가운데 기성록 제3권에는 평해 관련 시와 문이 있다. 문은 문체를 말하는데 기, 설, 전, 증서 등이 있다. 더구나 기와 전에는 이산해가 당시 3여 년간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통해 평해지역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해빈단호기, 기성풍토기, 황보촌기, 다천기 등이 그러하다. 현대판 기행문이다. 전은 특정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판 위인전과 같은 인물평이다. 평해지역 순흥안씨 가문의 안당장전(안선원), 안효자전(안응준), 안주부전(안응국)이라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남겼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인류 역사상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디지털 시대를 넘어 이제 4차 산업혁명인 인공지능 시대가 온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 조선의 사대부 양반들은 노예(종)를 부리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인공지능 로봇이란 유능한 노예(종)를 두게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와같이 이산해가 기성지역에 유배 온 시기가 1592년(선조25)이었으니 지금부터 419년 전의 울진 평해지역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당시 일반 서민들의 생활 모습과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산해가 남긴 기와 전 등은 조선 중기인 16세기 말 울진 평해의 사회상과 풍속사 등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번 글은 기와 전을 중심으로 당시 평해지역 사람들의 생활상과 풍토, 세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해빈단호기는 이산해가 본 울진 평해에 대한 첫인상을 기록한 글이다. 그는 평양에서 먼 길을 걸어 한계령을 넘고 울진 평해에 도착하여 서경포(현 기성면 사동2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곳에 도착한 날의 체험을 해빈단호기에 기록해 놓았다. 해빈단호란 조선 시대가 계급사회였던 만큼 신분이 미천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바닷가 마을로 이름한듯하다. 그는 여기에서 일반 백성과 전혀 다른 바닷가 미개인을 보았다고 했다. 어쨌든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요, 영의정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산해의 눈에는 그들이 미개인으로 비쳤을 법도 하다. 그들의 가난한 일상생활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다시말해 비록 생활환경은 그렇지만 그곳을 낙토로 여기며 사는 것은 마음만은 더러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유학자다운 성선설을 펴고 있다. 이러한 마을로 여음(여심이, 현 후포면 금음2리), 율현(후포면 삼율리), 구미(현 기성면 구산1리), 해진(현 평해읍 거일1리), 정명(정명촌, 현 기성면 정명1리), 박곡(박실, 현 평해읍 거일1리), 표산(현 기성면 봉산리), 장정(재장, 현 평해읍 직산 1리), 도현(옹기골, 옹구골마을, 현후포면 금음4리), 망양정(현 기성면 망양리), 사동(현 기성면 사동1리)라고 하였다. 괄호 안은 현재 마을 이름이다. 여기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현 거일마을을 울진 대게가 많아 나는 해진蟹津으로 표기해 당시에도 대게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성풍토기에는 민속신앙, 관혼상제 모습 등을 기록해 놓았다. 이산해는 기성풍토기 끝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덧붙였다.

 

『아, 기성은 옛날 예맥이 살던 곳이니, 풍기와 토속이 내륙 고을들과는 현저히 다름이 괴이할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유독 영해(중국의 광동과 광서 지방을 합칭한 말이다. 그곳에는 북쪽에 오령五嶺이 있고, 남쪽에 남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밖만이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으리오. 죽음과 삶, 장수와 단명은 이미 생명을 받아 태어나던 당초에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풍토의 좋고 나쁨과 거처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그 사이에 따를 바가 아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스스로 심사를 달래는 지결旨訣이다.』라고 하였다. 유배 온 처지에 환경이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보다 적응하며 사는 게 운명이고 심사를 달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황보촌은 현 기성면 황보1리이다. 이산해는 임진년 가을에 곽씨의 집에 우거하였다. 이곳에서 소소한 일상을 즐기다가도 자신의 처지와 임금과 환란을 생각하며 울적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천기에서 다천은 현 지명 그대로 기성면 다천리이다. 황보촌에서 북쪽으로 가면 그윽하고 아늑한 동네로 차가 생산되는 곳이므로, 어떤 이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차를 끓였기에 알맞기 때문이라고 하여 다천이라는 땅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이산해는 좀 살만한 동네로 다천을 꼽고 있다. 마암기에서 마암은 현 평해읍 남대천 건너 『남산이 동해 쪽으로 뻗쳐 나간 모양새가 말처럼 생겼다는 유래』가 있다고 했다. 『기성에는 온통 산만 있고 너른 언덕이나 들판은 없는데 유독 군청 안 소재지 안은 토지가 조금 넓고 논이 많으며 맑은 시내 한 가닥이 들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서 들어간다』 하였다. 여기서 시내 한 가닥은 현 평해읍 남대천을 말한다. 당시에는 남대천이라는 하천 이름은 없었다. 달촌(현 삼달리)의 신래 태실이 있는 태봉 앞 냇가를 이산해는 수정계라 하였을 뿐이다. 현 월송정 남쪽 들판을 『마암들』이라 하다가 지금은 『말미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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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가 말의 형상을 한 말미들(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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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가 우거했던 화오촌, 화구촌 일대(현 월송1리)


조선 중기 평해지역 주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조선 중기 평해지역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대부분 넉넉지 못한 생활이었다. 필자는 『아계유고』를 읽으면서 느끼는바 일반 백성들은 가난에 찌 들린 고달픈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에도 사대부나 상업활동 등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주민들은 있었겠지만 대부분 궁핍한 삶이었다. 그래서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더구나 당시는 임진왜란이라는 격변기에 임금마저 백성들을 내버리고 중국으로까지 도망가 자신들을 보신할 궁리만 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산해의 눈에 비친 평해지역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해빈단호기)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중략)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해빈단호기)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가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궁향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보다 생각하였다. (해빈단호기)

 

동네 안에는 민가가 많은데 모두 다 찌그려져 가는 작은 오두막으로 산다. (황보촌기)

 

그의 집은 북쪽 짧은 산기슭 위에 있는데, 썩은 나무 기둥을 받치고 울도 담도 둘러치지 않았다. (안당장전)

 

그는 비가 오면 패랭이를 쓰고 볕이 나면 칠포립(베 옷감에 옻칠을 하여 만든 삿갓)을 쓰며,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고, 가느다란 오석 빛의 검은 갓끈을 드리웠다. (안당장전)

 

집들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었고 뜰이 없어 낮에도 집안에 해를 볼 수 없으며, 누에치기를 좋아하지 않아 삼을 자아서 옷을 짓는데, 사람들은 존비를 막론하고, 모두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는다. (기성풍토기)

 

집안이 쓸쓸하여 양식거리라곤 없고, 쌀독은 텅텅 비어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다. (황보촌기)

 

들을 둘러싸고 민가가 많이 있으며 개울과 도랑, 논밭의 두렁들이 시야 안에 종횡으로 엇갈려 들어오는데, 쟁기질하는 사람, 김을 매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화답하는 사람, 땔나무 하는 사람, 김을 매는 사람, 가축을 치는 사람, 들이 줄을 이어 끊이지 않으니 의연히 태평의 기상이 있다. (마암기)

 

게다가 땅에는 등나무가 많아 백성들이 대다수 이것으로 종이를 만들어 팔아먹고 살므로 생계가 다소 넉넉한 편이다. (다천기)

 

논과 밭이 있다고는 하나 모두 합해봤자 10 이랑이 넘지 않아, 오직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 뿐 달리 생계에 보탬이 될 것은 없다. 매양 농번기가 되어 아내와 자식들이 앞서가고 계집종이 뒤서 가면, 그는 호미와 낫, 삼태기, 삽 따위를 들고서 뒤따라갔다가 저녁이 다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안당장전)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어머니와 누이와 아우, 세 사람과 서로 의지하여 생활하면서 손수 호미를 잡고 일구어 자급하였으되, 마음과 죽도 더러는 먹지 못할 때가 있었으며, 비록 쌀독이 텅텅 비어도 늘 즐거운 모습이었다. (안효자전)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가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왔는데 소반이며 집안이 쓸쓸하여 양식거리라곤 없고, 쌀독은 텅텅 비어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다.(황보촌기)

 

들을 둘러싸고 민가가 많이 있으며 개울과 도랑, 논밭의 두렁들이 시야 안에 종횡으로 엇갈려 들어오는데, 쟁기질하는 사람, 김을 매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화답하는 사람, 땔 나무하는 사람, 김을 매는 사람, 가축을 치는 사람, 들이 줄을 이어 끊이지 않으니 의연히 태평의 기상이 있다. (마암기)

 

게다가 땅에는 등나무가 많아 백성들이 대다수 이것으로 종이를 만들어 팔아먹고 삶으로 생계가 다소 넉넉한 편이다. (다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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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 전경(굴봉, 굴미봉) 구 7번국도 월송정 북쪽 솔숲 끝자락에 있다. 성황사가 있다. 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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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의 시 배경이 되는 북교(군무교) 동천(현 황보천)이 흐른다.104.jpg

북천 교비각

 

풍속과 민간신앙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건국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아닌 사상이나 종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무속 행위를 비롯한 민속종교를 배척하고 탄압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행한 것은 하늘에 감사를 올리는 천제였다. 상고시대인 고조선과 예맥의 무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마한의 소도라는 제사의식이었다. 그래서 소도라는 신성한 곳에서 동쪽을 향하여 재물을 바치고 북을 치고 장단에 맞춰 하늘을 향해 춤을 추면서 뜨는 해와 달을 맞이하는 의식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오늘날 굿의 기원이며, 지금도 무당들이 행하고 있는 일월맞이 굿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무속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그 시대의 정서를 일반 백성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굿이라는 형태를 빌어서 좁게는 개인, 나아가서는 마을 단위,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일반 민중들과 함께 왔다. 따라서 조선 시대는 이러한 굿과 같은 무속 행위의 민간신앙을 무조건 배척하고 탄압한 것이 아니라 일단은 제도권으로 흡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민속 종교적 신앙대상의 일부를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한 예가 읍치 성황사였다. 전국 지방 수령이 봄 가을에 국태민안의 제향을 올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 당시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무속과 같은 귀신 숭배 등의 민간신앙을 전승하였다. 울진 평해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흔적을 월송정기, 황보촌기, 안당장전, 기성풍토기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월송정기에 나오는 굴산은 굴봉, 굴미봉이라고도 하는데 구 7번 국도 월송정 북쪽 솔숲 끝자락에 있다. 군무교를 건너면『평해북천교비』가 있고, 모퉁이를 돌아가면 기성면 구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인『운암서원』이 나온다. 북천교비는 1603년(선조 36년)에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26)에 세워졌다. 현 황보천은 황보리쪽에서 흘러내려 굴봉 북쪽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고 있다. 당시에는 황보천을 북천이라 하였다. 굴봉에는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당이 현재도 남아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무당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민간에서 의복과 식생활이 넉넉한 사람은 무당이라 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당이 일반 백성들 개인의 병 치료와 심리안정,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등의 무속 행위에 대한 민간수요가 많았고, 그 대가를 지불받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한다. 이산해가 남긴 『굴봉』에 관한 시다.


기암고목이 얽혀있는 갈림길 다들 말하길 

이곳 신은 모든 요구 들어준다네

세간에 곧은 도를 지키다 고초를 겪었으니

이제부턴 바라건대 갈고리처럼 굽어지이다


여기서 신神은 굴봉의 성황사 신을 말한다. 곧은 도를 지키다 고초를 사람은 바로 이산해이다. 임금을 의주로 피난 길에 오르게 한 죄로 탄핵당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너무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 유배를 당해 고초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갈고리처럼 때로는 굽진 삶을 살겠다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산해는 명색이 향교 유림들이 글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활과 같은 무예를 즐기는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다음은 그 기록이다.

 

솔숲 북쪽에는 바위가 불쑥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이름은 굴산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신령하다고 믿어 무릇 구원을 바랄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빌곤 한다. (월송정기)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지어 지전을 걸어두고서 홍수나 가뭄, 질병과 도적 등 우환이 생기면 반드시 이곳에 기도하니, 대개 영남의 풍속은 귀신을 숭배하여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다. (황보촌기)

 

이 동네(황보리)는 습속이 다투기를 좋아한다. 한번은 온 동네의 안씨들이 모두 뭉쳐서, 오만을 떨던 서얼 소생 이씨 한 사람을 성토한 적이 있다. (안당장전)

 

이 지방의 풍속이 귀신을 숭배하여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짓고 지전이며 삼베를 걸쳐두고서 드나들 때마다 반드시 기도하니,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다. 따라서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한 자는 모두 무당이다. (기성풍토기)

 

성씨는 손과 황이 많고 명색이 향교에 소속되었다는 이들도 글은 모르고, 모두 활을 잡는다. (기성풍토기)

 

인심은 순박한 듯하지만, 실상은 싸움과 소송을 좋아한다. (기성풍토기)

 

사람을 안장할 때는 대다수 산꼭대기에 묻고, 혼인할 때는 굳이 먼 곳에서 배필을 구하지도 않으며, 예법은 소략하나 적서의 구별은 분명하다. (기성풍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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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보 기록의 안응준, 안응국을 확인해주며, 가계도를 설명하는 

울진 순흥안씨 총무 안정원(오른쪽)씨와 필자(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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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촌<현 기성면 황보1리, 노동마을 전경,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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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제3파(문정공파) 5권 대동보


안당장전, 안효자전, 안주부전은 무엇을 말함인가

 

안당장전, 안효자전, 안주부전에는 이산해가 평해지역의 안선원, 안응준, 안응국의 세 인물에 대하여 기술한  인물 평전이다. 이 세 인물에 대해 말하기에 전 순흥안씨 가계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순흥안씨 울진 입향조는 안오상이라는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 년 전인 1548년(명종 3년)에 기성 황보리에 입향했다. 입향조 안오상(安五常)은 시조(안자미)의 14세 손이며, 고려말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유명한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齊)선생 안축의 후손으로 황해도관찰사겸수군병마절도사(黃海道觀察使兼水軍兵馬節度使)재임중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돼 평해군수에 좌천되자 관직을 버리고 기성면 황보리에 안착하였다. 안축의 시는 월송정, 후포등기산 망사정 등에 게시되어 있다. 울진에는 기성면 척산리 자산마을이 집성촌으로 70년대 최고 번성기에는 약 80여 호 모두가 순흥안씨였으나, 지금은 약 40여 호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한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아는 민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들을 배출하였고, 울진에는 항일 독립운동가 안천수(안용관) 등 있다. 울진의 순흥안씨 가문에서 최근의 인물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 장성 출신으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국회의원을 지내고, 재경울진군민회장도 역임하였던 안교덕씨가 있다. 2000년도에는 기성 자산마을 출향인 자손들이 사법고시에서 동시에 4명(안태영, 안주섭, 안복렬, 안종렬)과 2018년도 사법고시 1명(안미현)을 배출하였다. 2020년도에는 울진 거주 안정원씨의 손자(안용열)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가문의 영예를 한껏 높여 주었다. 

 

최근 필자는 아계유고에 등장하는 안선원, 안응준, 안응국 세 인물의 확인하고자 『울진순흥안씨종회(회장 안병찬)』의 안정원 총무(82세)를 만났다.

 

순흥안씨 제3파대동보(문정공파, 제5권)에 안응준, 안응국은 제19세 손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선원은 등재되지 않았다. 안선원이라는 분이 등재되지 않은 연유에 대해서는 안총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안응준과 안응국은 사촌 간이다. 

 

한편 한국판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인 안의기 선장도 대동보에서 확인해 보았으나 등재되지 않았다. 1819년 1월 강원 평해(현 경북 울진)에서 출항한 선박이 일본 돗토리번에 표착해서 9개월 만에 귀환했다. 이때 돗토리번에 표착한 조선인 12명이다. 이들 12명 가운데 안의기(53), 김일손(50), 안용태(39), 이동백(32)은 평해사람이고, 전성철(32)은 울진사람으로 확인되 바 있다. 그 외는 권인택(52), 김삼이(60), 안택이(43), 김일손(50), 심정손(40), 안용택(38), 최오복(22), 이덕수(43)이다. 안택이, 안용택도 평해사람으로 추측되고 이는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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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대동보의 안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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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대동보의 안응국

 

안당장전의 주인공 『안선원』의 처세술

 

첫번째 『안선원』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안당장전을 살펴보자. 안당장전은 황보리에 사는 『안선원』이라는 인물을 입전한 작품이다. 『안당장』은 향교의 명부에 나이가 동렬들보다 많아 부르게 된 이름(당장)이다. 한마디로 『안선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고 순박하지만, 당시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숙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처세술에 대한 이산해의 평가가 흥미롭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외모

체구는 여위고 키가 크며 검은 얼굴에 점이 있고 듬성듬성 수염이 누렇다.


■ 성격

남에게 멸시와 모멸감을 받아도 절대 성냄이 없고 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예로서 대하고 언제나 남에게 공손하다. 시 읊기를 좋아한다. 술을 좋아하나 늘 마실 형편은 아니고, 취하면 몸을 가누지 못하나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 가정형편

그의 집은 시내 북쪽 산기슭에 있고, 썩은 나무 기둥을 받치고 울도 담도 없다. 살림살이가 궁색하고 아내, 자녀, 홀어미, 계집종이 있다.


■ 두 가지 사건과 안선원의 당당한 자기주장

- 사건 1.

동네 안씨 사람들이 뭉쳐 어떤 서얼 이씨를 성토했지만 안당장만이 그 일에 가담치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겁쟁이라 했으나 사건 당사자가 관가에 가서 곤장을 맞아 기동하지 못하자 다른 안씨들은 죄에 연루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 사건 2.

어느 날 병풍 한 벌을 가지고 군수를 만났다. 군수가 이 자리에서 병풍에 쓰인 그의 ‘원길’이란 글자를 보고 자네도 ‘자’가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아전들이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난감한 기색이 없이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였다. 그 대답인즉 어떤 사람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마르면 그만이요, 내 앞에 볼기짝에 신근을 드러낸다 해도 그냥 똑바로 바라보면 그만이다. 내가 비록 영화는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마을 사람들이 징발을 당했다. 하지만 유독 나는 그 어리석음 때문에 아무 화를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편안히 살아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 이산해는 안선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다툼도 성냄이 없는 마음이야말로 흡사 어떤 경지에 도달한 보신保身의 도道다.

-이산해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안선원은 이미 내, 외면이 중인의 범속함을 벗어났으니, 이는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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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록 안효자전 원문, 국역 아계유고,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97

 

안효자전과 안응준의 지극한 효성

 

안효자전은 황보리 『안응준』이라는 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겨우 일곱 살 때 그 어머니가 병으로 숨이 끊어졌는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러들게 하여 살렸다는 단지 효자의 이야기다.

 

이산해는 안효자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안효자전 글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아 인륜을 아는 천성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부모가 없겠으며 누군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왕왕 선량한 천성을 잃고 사욕에 뒤덮여 몽매해져서 죽음 부모를 살려낼 수 없음은 물론이요, 도리어 살아계신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이 응준을 본다면 아마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기를 지어 주고 다시 전을 지어 세상의 자식 된 이들을 경계하노라』하며 그를 극찬하고 하고 있다. 그 전문을 게재한다. 

 

안응준(安應俊)이라는 이가 황보리의 남쪽 재 아래 살고 있다. 안씨는 세계(世系)가 죽계(竹溪, 순흥順興)에서 나왔고, 응준은 측실 소생이다.

 

그가 겨우 일곱 살 때 그 어머니가 병으로 숨이 끊어졌는데, 그의 두 아우 중 하나는 겨우 말을 배우는 참이었고 하나는 아직 강보에 있었다. 그는 울면서 아우들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는 이제 어머니를 따라 죽을 터인데, 너희들을 장차 누구에게 맡길꼬. 예전에 들은 말에, 손가락 피가 능히 죽은 사람을 살린다 하였으니,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다.”하고는, 칼을 찾아 가운데 손가락 윗마디를 찍어 흥건히 쏟아지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래도 효험이 없자 다시 칼로 가운데 마디를 찍고 그 살을 짓이겨 쏟아지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은 다음 시신 곁에서 굳게 지키고 앉아 한편으로 울고 한편으로 기도하면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꼬박 기다렸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죽은 어머니의 가슴에 약간 온기가 돌면서 숨이 차츰 통하더니, 저녁이 되자 일어났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 후 5년 뒤에 고을의 수령이 관찰사(觀察使)에게 알리고 관찰사가 다시 조정에 이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미처 정려(旌閭)를 세우기도 전에 임진란이 일어나고 말았고, 그해 여름 내가 평양으로부터 귀양을 오게 되어 황보리의 곽씨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이 안씨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가 재차 듣고는 탄식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참으로 효자로다. 일곱 살 아이는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여 음식과 기거(起居)를 오직 어른을 따라 할 뿐인데, 이렇게 큰 변고를 만나서도 조용히 대처하여 살과 뼈를 칼로 도려내면서 아픈 줄 모르고 마침내 죽은 어머니를 살렸으니, 이는 근세에 듣지 못한 일일 뿐 아니라 옛날의 서책에서 찾아보더라도 좀처럼 없을 것이다.”

아, 손가락의 피가 어찌 죽을 병을 낫게 할 수 있으랴. 아이의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귀신을 움직였던 것이지. 그러기에 이미 끊어진 목숨을 다시 하루 밤낮 뒤에 소생케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생각함에 사람에게 공경스럽고 슬픈 마음이 들게 한다.

 

이에 관찰사 강공(姜公)이 글로써 기리고 칭찬하는 한편 부역을 면하게 하였는데, 그는 그것을 상자에 갈무리해 두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관가의 명령이 있으면 서둘러 달려가 오직 남보다 늦을 일을 걱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죽은 이와 일면식(一面識)이라도 있는 경우엔 문득 육식하지 않음으로써 조의를 표했으며, 철 따라 새로 난 먹을거리를 보면 반드시 품고 와서 그 어미에게 먹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어머니와 누이와 아우 세 사람과 서로 의지하여 생활하면서 손수 호미를 잡고 밭을 일구어 자급하였으되 미음과 죽도 더러는 먹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비록 쌀독이 텅텅 비어도 늘 즐거운 모습이었다. 아, 그는 훈도(薰陶)와 교화의 힘을 입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바탕이 아름답고 의를 행함이 독실하기가 이미 이와 같은데, 여기에 학문과 사우(師友)를 통해 연마하였다면 그 진취는 참으로 한량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한 고을의 선비가 되는 데 그쳤겠는가.

 

아아, 인륜을 아는 천성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부모가 없겠으며 누군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대개 선량한 천성을 잃고 사욕에 뒤덮여 몽매해져서, 죽은 부모를 살려낼 수 없음은 물론이요 도리어 살아계신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이 응준을 본다면 아마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내가 시를 지어 주고 다시 전(傳)을 지어 세상의 자식 된 이들을 경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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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 정명리, 정명촌 일부,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황응청의 집이다. 지금은 개축되어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이산해는 가끔 황응청을 찾아 벗으로 삼아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황응청은 해월 황여일의 숙부이다.


안주부전과 난쟁이 안응국의 강단

 

황보리에 사는 안응국이라는 난쟁이 대해 쓴 작품이다. 안응국은 턱에서 땅까지 한자 남짓 될 정도의 아주 작은 난쟁이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은 언어와 응대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인사와 조백早白(옳고 그름이 분명함)과 곡절이 명료하다. 그는 씨름을 아주 잘한다. 처음 상대와 맞붙었을 때는 마치 모기가 산을 흔들려는 것처럼 터무니없어 보였으나 무인이나 장사조차 그를 이기는 자가 드물었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다.


이 글에서 이산해는 형체(몸)은 멀쩡하면서 마음이 불구인 자 있으니 이를 견주어 볼 때 안응국이 훨씬 나음을 말하여,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정신과 재기는 형체가 아무리 작더라도(즉 신체가 아무리 불구라도) 그 마음에는 사단칠정이 있어 고유한 천성을 계발해 나간다면 나라에 충성과 부모에게 효도도 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인간 근본의 성선설을 주장하고 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안응국임을 이산해는 지적하고 있다.

 

이산해는 안선원, 안응준, 안응국이라는 특정 인물을 통해 비록 이들이 신분이 낮고, 가진 것과 배운 게 없고, 이목구비가 못나고, 신체 불구에다 어리숙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이들이 가진 사람들이나 배운 사람들보다 세상살이에 있어서 난세의 처세술이 슬기로우며, 마음가짐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인간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관이라 하겠다.  


당시 기성지역의 풍토는 어떠했을까

 

이산해는 유배 기간 중 기성지역의 사람들과 이 지역의 풍토에 대해 매우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가 선비 이전에 일국의 재상이며 정치가로서 당시 민초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달촌기, 정명촌기, 황보촌기, 마암기, 다천기, 해빈단호기, 곡두기, 서촌기에 당시 이곳 사람들의 행색이나 삶의 모습, 풍토가 담겨 있어 흥미롭다. 

 

① 자연환경

땅은 척박하나 산수는 빼어나다. 정명촌은 월송정에서 북쪽으로 시오리 거리에 있는데, 우뚝이 솟은 기봉과 준령도 없고, 드넓게 펼쳐진 평원과 대야도 없으며, 지세가 낮고 비좁은 데다가 토양까지 척박하여 벼, 삼, 콩, 조, 보리 등의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지 않다. (정명촌기)


기성의 땅이란 멀리 가 보았자 60리이다. 서쪽, 남쪽, 북쪽은 높은 산들이 많다. 논과 밭은 산과 구릉 사이에 있다. 바닷가에는 모래와 돌이 많다. (기성풍토기)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장기가 언제나 자욱이 피어올라 병이 들었다 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온 고을에 노인이 적다. (기성풍토기)

 

내가 황보촌에 우거하면서 재를 넘어 이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고 물은 그다지 깊지 않으며 들이 그다지 넓지 않았으나, 솟아오른 산은 빼어나고 흐르는 물은 맑고 평평한 들은 기름져, 맛좋은 나물을 캘 수 있고 신선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며, 경작이 가능하고 관개가 가능하였다. (다천기) 

 

아, 기성은 바닷가 고을이라, 독한 장기瘴氣가 피어오르고 역한 비린내가 풍기므로, 서울사람들은 이곳을 마치 중국 남방의 미개한 지방들인 조주潮州,월주越州,담주儋州,애주崖州 등과 같이 낮추어 보는데도 산수가 이토록 빼어나니, 내륙의 청숙한 지역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서촌기)

 

서촌은 양쪽 산이 둘러싸여 협곡을 이루고, 길을 벼랑을 따라서 높았다, 낮았다 하며, 협곡이 다하면 땅이 차츰 넓어져 언덕이 되고 들판이 된다. 이렇게 점점 멀리 가다 보면 민가가 줄지어 있는데 모두 배산임수형이다.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무성하다. (서촌기)

 

-이산해는 척박한 땅으로 정명촌으로, 기름지고 사람이 살기가 좀 괜찮은 곳으로 다천과 서촌을 들고 있다. 그래서 땅은 대체로 척박하나 산수만큼은 빼어남을 칭송하고 있다.

-그는 주령 아래 경관이 배어난 서촌을 유람하고서 문득 은거하고픈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서촌은 현 온정면 백암온천 일대이다.


② 기후

매양 동북풍이 불거나 바다가 울면 비가 그치지 않는다. 겨울보다 봄에 눈이 정강이가 파묻힐 정도로 내린다. 겨울은 따뜻하고, 봄이 되어서야 춥다. 한 달을 두고 볼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가 온다. 바람 불지 않거나 비가 내리 않으면 안개가 낀다. 맑은 날씨는 겨우 4, 5일뿐이다. (기성풍토기) 


- 울진 날씨의 특징과 변덕스러움을 말하고 있다.


③ 농사

이곳에서는 여름철이 되면 뽕, 삼, 벼, 기장 등이 빽빽이 우거지고 농부의 노래와 목동의 피리 소리가 어우러져 보고 들을만한 거리를 제공한다. (달촌기)


부유한 사람도 땅이 척박해 파종하여도 겨우 대여섯 섬을 수확할 뿐이다. 가난한 사람은 한섬도 채 수확하지 못한다.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을 심기에 적합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 두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이다. (기성풍토기)

기성에는 온통 산만 있을 뿐이고 너른 언덕이나 들판이라곤 없는데 유독 군청 소재지 안은 토지가 조금 넓고 논이 많으며 맑은 시내 한 가닥이 들을 가로질러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논에 물을 대면서 모두 이 시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마암기)

 

-여기서 이 시내는 현재 평해 남대천이다. 현 남대천은 당시(예전)에는 7번 구국도 쪽으로 근접하여 현 월송정 근처 선적사 앞으로 흘렀을 것이다.

-마암들은 현 용정촌과 남산마을 일대와 월송들이다. 


④ 과수목과 꽃

과수목 - 민가 근처에는 대나무, 탱자, 모과, 호도, 감, 배, 대추, 밤, 복숭아, 살구, 능금 등을 심는다. 

꽃 - 진달래, 철쭉, 동백, 매화가 있고 해당화가 가장 성대하게 핀다. 매화(매실) 맛은 마치 산살구와 같다. (기성풍토기)


⑤ 생산되는 어종 

은어, 복어, 광어, 방어, 대구, 문어 등으로 맛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했다. (기성풍토기)


⑥ 소와 양

마을 사람들이 봉우리 중턱에 늘 소를 방목하고 있고, 관가의 양 수십 마리를 봉우리 아래서 기르고 있는데, 대로 오르내리다 실족하여 죽는 놈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곡두기)


- 여기에 나오는 양이 염소는 아닌지? 의문이 간다. 하지만 평해 지역에 양을 길렀다면, 양 사육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현재는 양을 기르는 곳이 없다. 지역민들도 선조들로부터 양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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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기성중학교 남쪽 해변에 있다.(곡대) 

 

아계유고에 대한 평가 

 

아계 이산해는 울진 평해 태생은 아니지만 고려 말 그의 선조 대부터 울진과 인연이 많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은 성류굴을 유람하고서 여행기를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연굴 유람기를 가진 곳은 성류굴뿐이다.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은 조선 중종때 평해로 귀양 왔다. 이산해가 평생 남긴 시 840수 중 절반이 넘는 483수를 평해 유배시 창작한 것이다. 가히 그의 문학사에서 절정기라 할 수 있겠다. 더구나 그가 임진란시 평해로 3년간 유배 와서 기록한 아계유고 중 기성록 1, 2, 3은 조선 중기 당시 울진의 자연, 산업, 경제, 풍속, 풍물 등 그와 관련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 수 있는 『역사문화지리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계유고는 성리학자요, 당대 중앙정계의 거물 정치가였던 그가 당시 평해라는 산간벽지의 향토문화콘텐츠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조선 중기의 평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상당한 의미가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이 향토 문화콘텐츠를 시대에 맞게 잘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아계유고를 바탕으로 학술대회, 유적 탐방, 유허비 건립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아계유고>, 신흥인쇄주식회사, 1997.

- 김진문, 아계유고에 나나탄 이산해의 유배지 행적 살펴보기 <울진사향>, 제일인쇄기획, 2009.

- 이성무 외, <아계 이산해의 학문과 사상>, 지식산업사. 2010.

- 안응준 등 가계 확인에 도움을 준 울진순흥안씨 대종회 안병찬 회장님과 안정원 총무님, 안철호님께 지면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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