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마지막 유학자 무실재(務實齋) 남진영(南軫永) 선생

글, 사진 울진문화원장 김성준
기사입력 2021.08.31 15:27  |  조회수 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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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재(務實齋) 남진영 (南軫永) 선생


신라에서 고려 말까지 불교문화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배하였다면 조선 5백년 동안은 유교문화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개국과 함께 불교문화가 크게 쇠퇴했듯 갑오경장 이후 급속한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유교 문화 또한 급속히 분열 내지는 쇠퇴하였다. 

 

신 문명은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충절정신이나 경로효친과 같은 윤리 정신은 오히려 쇠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뜻있는 분들은 유학 정신의 쇠퇴를 아쉬워하며  그나마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유학의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유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사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계승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유현(儒賢)의 길을 걸어온 분이 울진의 대 유학자 무실재(務實齋) 남진영(南軫永) 선생이다.

 

무실재(務實齋) 선생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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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재 선생의 정림리 생가


무실재 남진영 선생은 1889년(고종 26)에 울진군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자와 호는 당초 ‘응팔(應八)’, ’신소재(愼所齋)’이나 스승간재(艮齎)가 ‘정함(靜涵)’, ‘무실재(務實齋)’로 명명(命名)하였다.

 

남진영 선생은 어릴 때 집안 아저씨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배웠다고 한다. 타고난 본성이 성실하고 영민하여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면서 성리학에 관심을 크게 가졌고 성리학의 심오한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과 고심을 했다고 한다. 울진은 지역적으로 산간오지다 보니 고명한 스승을 만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던 중 당시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간재 선생은 당시 서해안 지역에서 명망 높은 유학자로 그의 문하에는 많은 문도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울진 출신의 전열(田烈) 선비 또한 명망 높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헤매다가 간재선생의 명성을 듣게 되었고, 고향인 울진으로 돌아와 남진영 선생에게 함께 배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선생에 대하여 설명을 듣게된 청년  남진영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망설임 없이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당시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의 도보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재 스승은 서해안 중에서도 작은 섬에 기거했기 때문에 여간한 열정이 아니면 찾아 나서기가 어려운  모험의 길이었다.  

 

남진영 청년은 당시 21살이었다. 

청년이었지만 서해안까지 도보로 이동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행길이었다. 더구나 섬에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뱃멀미가 심하여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모든 괴로움을 이기게 하였다. 남진영 청년은 오랜 고생 끝에 간재 선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어렵고 힘든 수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산골의 생활은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산에 올라가 땔감을 마련하고, 물을 길어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 빨래하는 허드렛일까지 감내하면서 3년여를 간재 선생 수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남진영 청년의 성실함은 간재 스승도 감복하게 만들었다. 

 

남진영 청년은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심취하여 나날이 학문의 깊이가 깊어졌고 어느날 모상록(模像錄), 지각설(知覺說), 동이고(同異考) 같은 논문을 발표하여 스승을 크게 놀라게 하기도 했다.   


간재 스승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남진영 청년의 학문을 높이 치하하며 ‘나의 말이 동쪽으로 갔다(老夫之言東矣)’라고  극찬하면서  ‘무실재(務實齋)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남진영 청년은 그 후 3년을 더 공부하다가 일제의 핍박이 점점 심해짐을 느끼고 고향인 울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남진영 청년은 간재 스승에게서 함께 공부하던 남정제(南正齊), 김학산(金鶴山), 노창동(盧滄東), 주비암(朱毖菴) 등과 후학을 양성하기로 하고 신림의 덕은산(德隱山) 아래에 집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였다. 

 

무실재 선생의 강학 소식은 금세 퍼져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문도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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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스승의 소행제 현판 / 국학 진흥원 기탁


간재 스승도 제자들의 강학 소식을 접하고 너무나 기뻐하며 소행제(素行齊)라는 현판과 기문을 지어 보내 주기도 하였다. 무실재 선생의 명성은 어느새 전국으로 퍼져나가 강릉, 삼척 등 타 지역 유생들까지 찾아와 소행제는 밤낮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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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맞은편의 비봉산 / 남문열 前원장이 비봉산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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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 아래의 허물어져 사는 봉림사

 

날이 갈수록 학도들이 늘어나게 되자 강당이 좁아 찾아오는 유생들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부득이 인근 마을인 정림리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다시 강학소를 짓고 옮겨 오게 되었다. 

 

당시는 일제시대라 일경들의 감시가 심했다. 대부분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조국 독립을 위하여 직, 간접적으로 활동하였다. 소행제에서 무실재 선생과 함께 강학하던 전 열(田 烈) 선생과 주담암(朱澹菴) 선생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아주 만주로 이거해 버렸다. 무실재 선생은 고향에 남아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젊은이들은 배워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불리해 질수록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박해는 더욱 악랄했다.

 

일경들은 항상 사람이 모이는 곳을 주시하며 유학자들을 요 시찰 인물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실재 학당의 문도들이 점점 늘어나자 일경들은 불안을 느꼈는지 어느날 무실재 선생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보통 일경에 연행되면 모진 고문을 받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무실재 선생은 일경에 붙잡혀 끌려가는 도중 ‘차라리 자결을 할지언정 너희들의 더러운 손에 죽을 수 없다’고 하며 단도를 꺼내 자결을 시도하였다. 일경들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황급히 응급치료를 한 후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실재 선생은 쓰러져 가는 국운을 보면서 식욕을 잃을 만큼 상심하였다고 한다. 수년간을 식욕을 잃고 심각할 만큼 건강에 위협을 받게 되자 동생 왈기(曰紀)가 동의보감 같은 고 의학서적을 탐독하고 직접 산에 가서 약초를 채취하여 수년간 무실재 선생의 건강을 보살펴 회복시켰다고 한다.


대동아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전쟁물자가 부족해 우리나라의 소나무 송진을 채취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V자형으로 톱질을 하고 끝에 깡통을 매달아 송진을 채취하는 것이다. 무실재 선생은 이 광경을 보고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왔음을 예고했다고 한다. 선생은 소행제 학당을 운영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간재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때는 식량을 짊어지고 서해안까지 도보로 갔다가 파도가 심해 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무실재 선생은 간재 스승이 타계한 후 기일(忌日)이면 그의 초상을 걸어두고 밤새껏 통곡을 한 적이 있을 만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투철했으며, 사상적으로 가장 존경한 스승은 주자 선생이다.  

            

무실재 선생은 주자 선생의 학문에 심취하여 주자의 초상을 책 갈피에 항상 끼워 놓고 수시로 초상을 보며 주자 선생을 생각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주자 선생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서로 대조하면서 초년에 주장했던 학설과 만년에 주장했던 학설을 시기별로 정리, 고증하는 작업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그는 현대 문명으로 세상이 바뀐 후에도 마지막까지 유학의 맥을 이어오다 1972년 향년 83세로 타계하였다. 타계할 때까지도 끝까지 일본의 단발령을 거부하며 상투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무실제 선생의 타계는 울진 유림계의 큰 타격이었다. 지역 많은 유림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던 분이었기에 유림계에서는 울진의 큰 별을 잃었다고 평하며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무실재 남진영 선생은 전 울진문화원장 남문열씨의 조부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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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의 '전우 초상(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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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재 스승의 친필 간찰/국학진흥원기탁

 

조선의 성리학은 크게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대립되며 영남학파는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주리론을 주장하였고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주기론을 주장하였다. 

 

간재(艮齋 1841~1922) 선생은 이이(李珥)의 학설을 지지하고 이를 계승한 우리나라의 걸출한 대학자였다. 

 

간재 선생은 전주 출신으로 초명은 경륜(慶倫), 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추담(秋潭), 구산(臼山)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한번 배운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총명함을 엿보아 9살 때 아버지가 시를 지어 보라고 말하자 즉석에서 매화꽃을 보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20세에 퇴계 선생의 문집을 읽고 성리학에 빠졌으며 다음해는 충남 아산의 고산(鼓山) 임헌회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다고 한다. 간재(艮齋)라는 그의 호도 스승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퇴계 문집을 읽고 성리학에 눈을 떴지만 학문에 깊이 심취했을 때는 율곡 이이의 기호학을 옹호하는 한편, 기호학파인 우암 송시열의 사상을 철저히 따랐다고 한다. 간재 선생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은 그의 심오한 학문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간재 선생은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았으며 그의 학문은 19세기 당시 기호학파 계열에서 ‘하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 등 모두 4개 학파로 나눌 때 명실공히 한개의 독창적인 학파로 인정받을 만큼 큰 학역을 구축한 대학자였다.

 

그는 고종 때 강원도 도사, 장령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침탈로 조선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1896년 착수치발(笮袖薙髮/ 옷 소매를 좁게 하고 머리를 깎음) 지시에 분개하여 모든 자손과 문인들에게 “죽음으로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자”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척참오적’이란 상소문을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국운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회생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해에 있는 ‘왕등도’라는 섬에서 다시 고군산도, 부안의 계화도에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는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였지만 임금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는 충정은 변함이 없어 1919년 고종황제의 석연찮은 붕어 때 3년 동안 상복을 입기도 하였다. 

 

간재 선생은 허물어져 가는 나라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 분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만도 3천여명이나 되어 공자 이래 가장 많은 제자를 두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상복을 입은 인원이 2천명에 달하였고 장례 행열에 나온 사람이 무려 6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60여권으로 이루어진 간재사고(艮齋私稿)가 전한다.

 

무실(務實)의 어원과 의미는 무엇인가?


무실재(務實齋)는 그의 스승인 간재 선생이 지어준 남진영 선생의 호다. 

 

스승이 지어준 무실(務實)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실’이란 말을 한마디로 풀어쓰면 ‘실(實)을 힘쓴다’라는 뜻이다.

 

‘무실(務實)’이라는 단어는 최초의 유교 경전으로 알려진 서전(書傳)에서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천하를 양위하는 과정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夏), 은(殷), 주(周)나라의 제왕들이 모두 이를 따라 실행하였고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 율곡(栗谷) 등 성현들은 천본(天本)의 학(學)이라 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학에 있어 리(理)와 기(氣)는 논점의 핵심으로 많은 유학자들은 수세기 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인 퇴계 이황은 ‘기(氣)를 발하는 것은 실제 리(理)이다. 라는 주리론(主理論)적 관점에서 속칭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리(理)에 근원하며 칠정은 기(氣)에 근원한다. 즉 이(理)와 기(氣)는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호학파의 거두 율곡 이이는 ‘이(理)와 기(氣)는 따로 있을 수 없으며, 기(氣)는 리(理)와 항상 같이 발현한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속칭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오랜 기간 리(理)와 기(氣)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오면서, 유학이 실지 인간 생활에 쓰이지는 않고 학문으로 시작해 학문으로 끝나는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조선 유학사를 보면 무실(務實) 사상은 려말 선초에 이미 넓게 퍼져 있었으나 확실한 체계를 확립하지 못하다가 16세기에 들어와 이율곡(1536~1584), 우계 성혼(1534~1598) 선생에 의해 하나의 사상체계로 심화되었다고 한다. 이율곡의 무실(務實)이론은 율곡사상의 하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율곡 이후 지봉 이수광, 노서 윤선기, 명제 윤 중, 다산 정약용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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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선생의 친필 간찰/국학진흥원기탁

 

무실재(務實齋) 선생의 학풍


무실재 선생이 젊었을 때부터 성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자학을 비롯하여 퇴계 전서까지 두루 유교 경전을 습독하였다고 한다. 간재 문하에서 수업한 이후 성리학에 대하여 더욱 깊이 있는 연구에 몰입했다. 따라서 ‘학문이란 실지 인간 생활에서 응용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학문‘이란 점에 깊이 공감하면서 기호학파인 율곡 이이의 실학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무실재 선생은 「무실재 사고(務實齊 私稿)」에서 실학에 관한 많은 내용들을 설파하고 논변하였다. 

 

무실제는 심(心)의 지각(知覺)과 지(智)의 지각(知覺)의 차이점을 변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이를 변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무실재 선생의 철학적 관심은 주자의 지각설(知覺說)과 신설(神說) 및 심설(心說), 사단칠정설 등 심성론(心性論) 문제에 집중되어있으며, 이 문제에 관하여 타인들의 주장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타인의 주장을 비판하거나 논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학문이 상대방의 학문을 능가할 때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학문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타인의 학설을 비판할 수 없다. 따라서 무실재 선생은 타인의 학설에 대해 이론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무실재 선생은 주자 지각설의 정론에 대한 주체를 밝히려고 여러 방면으로 연구해 오면서 성리학의 근본 명제가 성즉리(性卽理)인가, 심즉리(心卽理)인가를 변별하는 새로운 분석법을 고안하여 주자 만년설의 실체를 밝히기도 했다.   


마무리 글 


울진은 지리적으로 오지로 알려져 있었다. 예전에는 유학이 활발했던 안동, 영주 쪽으로는 태백산맥이 가로질러있어 왕래가 힘들었다. 북쪽으로는 기호학파를 이룬 강릉이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울진의 유학 신봉자들은 배움에 대한 여간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고명한 스승을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열정만 있었지 실지로는 공부하는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더구나 무실재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는 우리 민족이 국권을 상실하고 백성들은 연명하기에 바빴던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학문을 위한 노력은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일제는 국권을 침탈하면서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은 요시찰인물로 모든 행동에서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이 통제된 상태였다.   

 

무실재 남진영 선생을 비롯한 울진의 많은 유학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골짜기에서 은거하는 선비라도 자유로운 학문 탐구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무실재 선생은 학문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어 서해 고도에까지 스승을 찾아가 스스로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탐구하였으니 참으로 존경할만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나자 잇따라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극도의 사회 혼란을 가져왔으며 사상 대립으로 형제간에도 이념이 틀리면 총부리를 겨누는 실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다. 사회는 온통 혼란의 도가니여서 올바른 유학의 계승은 힘들었다.

 

그러나 무실재 남진영 선생은 끝까지 유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하세할 때까지 상투를 고집하며 유학자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울진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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