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구슬이 굴러 번창했던 광산촌, 옥방!

기사입력 2022.11.08 17:21  |  조회수 5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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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된 옥방광산

 

옥방, 땅 이름과 지리적 배경

우리나라 땅이름 유래에는 역사와 사회적 배경, 풍수지리 등 여러 요인이 깃들어 있다.

옥방이라는 땅이름도 그렇다. 옥방은 원래 거응동[巨應洞]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1560년경에 우씨(禹氏)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한편 풍수지리적 요인으로는 옛날에 어떤 지관이 이곳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지형이 금을 담는 큰 솥인 금부(金釜)와 같이 생겼으므로 앞으로 크게 번창할 것이라 하여 땅이름을 거응동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옥방(玉房)이라는 땅이름은 100여 년 전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아마 중석광이 발견되고부터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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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수(가운데)씨가 옥방광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22. 8. 28) 그는 70년대 옥방광산 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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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옥방마을 일대 모습(좌), 현 옥방마을(우)

 

玉房! 한자 말을 풀이하면 구슬 玉(옥), 집 房(방)이다. 그걸 다른 말로 하자면 구슬이 가득 찬 집, 구슬이 굴렀던 땅이라 할 수 있다. 구슬이 가득히 묻혀 있던 곳이 옥방이었다. 대체 그 구슬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옥은 바로 지하자원(광물)인 중석(重錫, 텅스텐)을 말한다. 그야말로 중석을 노다지처럼 캐내어 60년대 한때는 소위 잘나갔던 광산촌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거응동보다 옥방이라는 말이 짧아 부르기 좋고, 광산촌의 위상을 잘 나타내기에 살아남은 땅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옥방은 울진군과 봉화군 경계에 걸쳐있는 산촌이다. 36번 국도가 동서방향으로 울진과 영주로 나 있다. 굳이『옥방』이라는 마을을 한정한다면 옥방광산에서 북쪽 옥방천을 따라오면서 분천5리 마을회관, 옥방교회 일대와 옥방교를 건너 광회2리 마을회관, 광회 진료소 일대를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옥방은 행정구역으로는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2리 주민과 봉화군 소천면 분천5리 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지역이기도 하다. 옥방마을은 지리적 공동체 성격보다 산골 마을이라는 정서적 공동체로서 자리매김이 더 강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옥방마을(2020년)에는 62가구(분천 26, 광회 36)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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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된 옥방광산 입구(좌),  옥방천 산기슭의 생약수(우)003.jpg

 

1960년대 옥방천 출렁다리(좌),  옥방광산 앞을 흐르는 옥방천(우)

 

 


철강의 쌀, 중석 광산의 몰락

철강의 쌀이라고 하는 중석은 굳고 단단한 백색 또는 회백색의 금속원소이다. 이 금속은 1755년경 스웨덴의 광물학자인『A.크론슈테트』가 『tungsten(텅스텐)』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기원한다. 여기서『텅스텐』은 스웨덴어로『무거운 돌』이라는 뜻이다.

  

중석은 녹는 점이 섭씨 3,400도나 될 만큼 아주 단단한 금속 중의 금속이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중석은 다른 금속과 섞어 아주 단단하고 질긴 『합금강』을 만드는 데 필수 금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합금강은 고온에 견뎌야 하는 전기, 전자부품. 무기, 절삭공구, 골프채, 의료기, 우주 사업 등 그 쓰임이 광범위해서 세계적으로 그 물량 확보가 치열한 전략 광물이다. 철강을 산업의 쌀이라고 한다면 중석은 철강 중의 철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쌀이듯이 말이다.


우리나라 중석의 최대 생산지는 아무래도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이다. 상동 광맥은 최초로 1914년 조선인(황순원)이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1923년경 일본인이 본격 채굴하였다. 

 

광복 이후 상동광산은 1960-70년대 국내 중석 생산량의 80%를 차지했고, 전 세계에 15%까지 공급했다고 하니 가히 독보적인 전설의 광물이었다. 한때 중석은 1956-60년대 외화를 벌어들이는 유일한 수단으로 대한민국 수출액의 60-70%를 차지한 효자 수출 품목으로 단연 톱이었다. 하지만 상동광산을 운영했던『대한중석』은 1980년대부터 중국의 물량공급에 밀려 그 채산성이 낮아 1993년 4월 생산을 중지, 폐광했다.

 

이후『대한중석』은 1994년『거평그룹』이 인수 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에 부도가 났다. 지금은 다국적 기업인『캐나다 알몬티사』에 넘어가 있다. 


한편 광산 전문가들은 상동 일대 땅속에는 여전히 무진장한 중석이 묻혀 있다고 한다. 총매장량은 1억 300만 톤이 넘고 품질도 평균 0.45%의 고품위라고 한다. 매장량도 향후 100여 년간 채굴할 수 있는 규모다. 해마다 100만 톤 이상은 생산하면서 100년을 버틸 수 있는 고귀한 자원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알몬티』사는 미리 내다본 것이다. 

 

세계적으로 중석 가격이 고공 행진하는 시대, 이제는 남의 것이 된 상동광산이다. 특히 세계적 전략 광물인 중석은 다시 수입해서 쓴다? 한마디로 알짜배기를 남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한편 최근 상동광산 재개발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다. 서울 경제 TV [2021-01-20]에 따르면『말로만 텅스텐 개발…알몬티 희망 고문』이란 제목 아래 지역 주민들의 기대와 우려 섞인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역 주민들은 상동광산 재개발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대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외국자본이 우리 땅에 묻혀 있는 전략자원을 캐내 개발이익만 챙기고, 이른바 먹튀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과 광산 재개발에 따른 환경문제』를 제기한다고 보도했다. 주민들은 과거 중석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유해 화학물질(비소 등) 검출로 우물이 폐쇄된 사실과 아직도 광물 찌꺼기가 1,000만 톤 상당이 폐재 댐에 쌓여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환경문제에 대한 확실한 보장 없이는 광산재개발을 반대하고 있어서 앞으로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한편 일부 주민들은 80년대 후반 광산 브로커들이 광산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광업진흥기금만 낭비하고 또다시 폐광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한때 25,000여 명이 거주하여 북적대던 상동광산! 지금은 상동 인구가 1천 명대로 몰락한 폐촌이 되었다. 이제 상동광산은 과연 부활할 것인가 귀로에 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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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방광산 폐광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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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수씨가 선광장에서 회중석을 보여주고 있다


중석 광산의 독특한 득대제도

필자는 이번에 옥방광산을 취재하면서 우리나라 광업사에『득대』라는 독특한 용어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득대』라는 용어가 순 우리 말인지, 아니면 한자어[得代, 悳代, 㯖代]인지, 용어에 대한 어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이 득대제는 조선 영조대에 본격으로 등장하였다. 이 용어 또한 이때 등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조대에도 민간인들에게도 광산채굴 자율권을 주고 세금을 받았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광부들 대부분은 득대 휘하에서 금을 채취하였고, 득대와 광부들에게는 광세(鑛稅)가 부과되었다. 

 

1905년『을사조약』체결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자본가가 대거 광산주와 물주로 등장하여 득대를 지배하였고, 마침내 득대는 독립경영자의 성격을 상실하고 피고용자 또는 하청업자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하청제로서 득대제가 일반화되었다. 


이후『득대제』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80년대 후반에도 관행적으로 지속되었다. 한마디로 광산업 경영에 있어서 국가(정부)→원청(민간 자본가:물주, 기업 등)→광업 소장(기업에서 파견한 관리자 등)→득대(중간관리자)→임금노동자(광부, 농민 등)로 광업 계통의 계급적 구조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득대』는 원청(광산 소유자)과 계약을 맺고, 광산채굴, 제련기술자, 광맥을 파는 노동자, 운반 등을 맡아 사람을 고용하고, 부리는 등 관리실무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들은 중간 권력자로서 현장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좀 심하게 말하면 노동자들에게는 중간 착취자였던 셈이다.


옥방광산 노동자였던 정한수(68. 현 옥방 거주, 인터뷰 참조)씨에 따르면 60-70년대에는 득대 1인이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 인부를 거느리고 광산을 채굴했으며, 옥방광산이 번창할 때는 20여 명의 득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득대는 광산의 노동자들 또는 노동조합과는 때로는 껄끄러운 갑을관계이기도 하나 원청회사인 경우는 경영의 한 축으로 작용했다고 보겠다.


옥방산골, 한때 5,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우리나라 중석 광산의 폐광 그늘은 짙고 깊다. 한때는 세계적인 중석 광산이었던 상동광산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닌 옥방광산이 그와 같은 역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옥방광산은 대한민국 5대 중석 광산(미로, 상동, 옥방, 월악, 응봉)의 하나였다. 옥방광산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주로 백중석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무기 제조 등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두고 채광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대에는 미군이 옥방광산에 주둔하여 직접 관여하였다고 한다. 채광된 중석은 전량 미국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전략물자로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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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옥방광산에 주둔한 미군용트럭과 찝차. 당시 전략물자로서 중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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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방교회 자료>

 

옥방광산이 미군정 이후에는 민영 광업으로 전환되어 국내에서도 그 생산량이 세 번째 광산이 되었다. 옥방 중석 품질은 상동광산에 버금갈 정도로 세계적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중석은 주로 일본·독일 등으로 수출되었다.


1960년대 이후 옥방광산이 활기를 띠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이곳 주민의 90% 이상이 광부로서 서면 소재지보다 더 많은 인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1956년대에는 한때 439t으로 생산 최고점을 기록했지만, 1982년 연간생산량은 27t, 1983년 5t으로 급감했다. 1980년대 후반 옥방광산은 경기가 나빠지면서 폐광하기에 이르렀다. 옥방 역사 전시 관련 자료는 옥방광산의 성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깊은 산촌 옥방이 중석 광산이 개발되면서부터 외지에서 몰려든 광부들로 한때 인구는 약 1,200세대 5,000여 명 이상 주민이 거주했다 한다. 한적한 산촌 옥방은 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전형적인 광산마을로 변모했다. 옥방천을 따라 형성된 시가지엔 약방, 당구장, 다방, 이발소, 술집, 미장원, 양복점, 구멍가게가 줄을 이었고, 광업소 노임이 지급되는 월말에는 마을 들머리(울진경찰서 광회지서)에서 옥방중학교까지 1㎞ 구간 양쪽으로 장꾼들이 길게 늘어서면서 장이 열렸다고 한다.

 

폐교된 옥방중학교에서 갱구에 있는 옥방터 쪽으로 가다 보면 『대구촌』이 나오는데, 대구관이란 요정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건너편 울진 땅은 대구촌의 동쪽이라 해서『대구동촌』이라고 했다. 광산노동자들은 주로 출렁다리 근처 사택에 기거하거나 옥방천 양쪽의 산비탈 판자촌에서 살았다.』[출처: 옥방교회 옥방역사전시회 자료]


옥방 광산촌이 소위 한창 잘나갈 때는 이 좁은 산간벽지에 5,000여 명의 주민이 북적댔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당시 주민 수가 5,000여 명은 좀 과장되었고 한 2,000여명 쯤 되지 않았나 라고 한다. 어쨌든 그야말로 인구 증가 요인은 옥방광산이 중석으로 호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에는 울진 바닷가 포구에는 봄가을에 꽁치와 오징어가 산더미처럼 쌓여 풍어를 구가했다. 그 대표적 항구가 죽변항과 후포항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울진군 서면 옥방에서는 중석 광산 호황으로 산촌이 들썩였다고 볼 수 있다. 풍어를 구가하던 항구의 선주나 호황인 광산에서는 노다지가 쏟아져 나와 하루아침에 광산 소유자나 득대가 거부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 그래서 생겨난 풍자 언어가 바로『개도 돈이 흔해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다. 

 

마치 서당 개가 3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풍어나 노다지가 쏟아지던 항구나 광산에서는 동물인 개도 돈맛을 알아 종이돈을 마구잡이로 물고 다닐 만큼 흥청망청했던 모습을 풍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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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옥방국민학교 전경<옥방교회 자료>(좌), 1952년 옥방국민학교 개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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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옥방중학교(22. 8. 28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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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옥방중학교 여자 하키부 전국 4강 진출 동아일보 기사(중간 신문 기사), 옥방교회 자료

 

옥방국민학교와 옥방중학교 개교

인구가 불어나자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옥방국민학교와 옥방중학교 설립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곳 아이들은 광회국민학교에 다녔다. 거리(15리)도 멀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교실 부족으로 학생 수용에 문제가 있었다. 학교건립은 옥방광업소의 재정 지원으로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2월 1일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옥방초등학교(3개 학급)가 개교하였다. 이후 학생 수가 차츰 늘어나 1957년에는 11개 학급으로 확대 편성되었다. 한때 옥방국민학교는 400여 명의 학생이 다녔다. 1962년 5월 31에는 옥방초등학교 남회룡분교가 개교했다. 1971년에는 『광동국민학교』가『옥방국민학교』에 병합되어 옥방천 건너 울진 땅으로 자리를 옮겼다. 옥방광산이 폐광되어 가던 1981년에도 2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했으니 옥방의 성쇠를 가늠할 수 있다. 광회분교장은 2017년 폐교되었다. 옥방분교장(2022년 현재)에는 9명의 아이들이 재학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옥방국민학교 개교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뜻밖에『조인배』라는 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조인배씨는 옥방국만학교 개교시 상당한 역할을 했던 분 같다. 이분은 지금 고인이 되었지만 황해도 연백 출신의 독립유공자(애족장. 2018년 8월 전수)였다. 이분의 아들이『조광동』씨이다. 그는 언론인(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미국 특파원)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쓴 『60년 만에 만난 아버지』란 글을 일부 인용한다. 당시 옥방국민학교 개교 상황을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수년 뒤 아버지 어머니는 세 살 된 저와 어머니 배 속에 있는 동생을 데리고 멀고 먼 산촌의 중석 광산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갔습니다. 거기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옥방에 있는 옥방광업소였습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략)

 

아버지를 잊고 지냈지만 제 심장 깊숙이 아버지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일곱 살 때였습니다. 6·25전쟁의 상흔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던 때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광산촌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10리가 떨어진 광회국민학교를 걸어 다녔습니다. 옥방광업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아버지는 학교 건축의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던 건축위원장 같은 역할을 맡아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가 낙성된 후 저희 집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이 오셨을 때 어떤 연유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선생님 한 분이 아버지에게 삼일독립운동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만세운동과 일본 경찰이 아버지의 발을 묶어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물을 붓던 고문 이야기를 했습니다. 눈보라 휘날리는 만주 벌판의 추위를 이야기했고 발이 얼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뒤 아버지의 발톱을 눈여겨본 저는 아버지에게 발톱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었던 발톱이 석회석처럼 쌓여 있어서 아버지는 칼로 석회석 발톱을 긁어냈습니다. (이하 생략) [출처: 조광동의『60년 만에 만난 아버지』]

또 다른 변화는 1971년 3월 20일, 옥방국민학교가 있던 터에 3학급 70명으로 소천중학교 옥방분교가 개교한 것이다. 옥방광산이 기울어지던 1981년 7월, 250여 명의 학생이 재학했고, 그중 70여 명이 광산노동자의 자녀였다. 

 

이 작은 중학교 옥방분교가 한때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여학생 하키팀 때문이다. 전국소년체전에서 4강에 입상해서 지역은 물론 전국을 놀라게 했다(54쪽 동아일보 기사 참조). 옥방중학교는 22년 동안 졸업생 1,084명을 배출하고 1995년 폐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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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기 옥방교회(좌), 현재 옥방교회(우)015.jpg


지역사회의 한 축을 감당한 옥방교회

지난 8월 말, 폐광된 옥방광산을 둘러보기 전, 옥방교회에서 수집한 옥방 지역과 광산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았다. 더 구체적 자료는 옥방 출신인 황천호씨를 통해서였다. 그는 현재 울진군자활센터 소장이자 옥방교회 장로이다. 그가 전해준 자료는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옥방의 역사,『옥방역사전시회』란 자료였다. 주최는『옥방에 살어리랏다』와『옥방교회』이다. 

 

그 후원으로『봉화지역사박물관사회협동조합』에서 개최한 뜻깊은 전시회(2021. 10. 17.- 31, 옥방교회선교관)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때 옥방마을과 광산의 호황에 따른 역사적 모습을 이 전시회 자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옥방교회가 발굴한 자료들을 울진 향토사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산촌의 작은 교회가 큰 의미가 있는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자료제공을 해준 옥방교회(목사, 박형기)와 황천호씨(옥방교회 장로, 울진지역자활센터소장)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옥방교회는 안동에서 이주해온 광산노동자였던 구동방, 손귀남 부부와 옥방 토박이 여운석, 김노미 부부가 옥방 지역에 기독교 신앙을 뿌리는 겨자씨 역할을 했다. 그들은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옥방국민학교 뒷산 중턱에 초가집을 짓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최초로 옥방교회가 시작되었다. 1953년 옥방 제재소의 나무판자로 교회를 증축했으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 뒤 옥방광산의 경기가 좋을 때는 아동부가 120명 등 신도가 증가했으나, 불경기에는 신도 수가 거의 없어 예배당 문을 닫고 이웃 광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옥방교회는 어려웠던 광산촌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애환을 보듬으며 지역에서 그 소명을 다 했으리라 생각된다. 폐광을 앞둔 1982년 6월, 옥방광업소 의무실을 매입해 예배당을 산 중턱에서 마을로 옮겨 왔다. 옥방교회는 1980년대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해 지역에서 드물게 자연 친화의 생명 농업을 이끌기도 했다. 현재 옥방교회는 박현기 목사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와 교회를 잇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지역주민들과 함께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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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방광산 노동자들의 주거, 판자집, 옥방천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다. <옥방교회 자료>

 

당시 광산노동자의 현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산업재해로부터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전반적으로 열악한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광산 흔한 말로『막장 인생』이란 유행어가 있다. 일반적으로『막장 인생』이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오도 가지도 못 한 사람들, 돈도, 기술도, 빽도 없는 막가는 사람들, 죽기 아니면 살기랄까? 사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진 사람들을 일컫는 대명사다. 막장! 광산의 마지막 굴이란 뜻도 된다. 때로는 막장에서 노다지가 나와 대박이 나는 수도 있으니 희망도 걸어본다. 


광산노동자들은 지하에서 광맥 찾아 암반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해야 한다. 그 작업의 후유증은 다이너마이터공은 물론 광산노동자들에게도 소음성 난청, 발파 후 분진 등으로 규폐라는 질병을 가져왔다. 또한 60-70년대 안전사고 예방이 미흡, 빈번했던 광굴이 무너지는 낙반사고 등으로 생목숨을 잃었고, 특히 탄광 노동자들에게는 진폐증이라는 산업재해 병을 유발해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우리나라 석탄 최대 생산지였던 태백에서 광부로서 온몸을 던졌던 광부 시인이자 지금은 진폐 환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헌신하는『성희직』선생이 쓴『막장 인생』이라는 시에 광산 노동자들의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한 발은 일터에/또 한 발은 지옥에 걸치고 석탄을 캐는 광부들/절망보다 더 캄캄한 탄광 막장/유일한 희망은 손바닥만 한 안전등 불빛 하나/날마다 캐내는 석탄 생산량에 비례하여/폐 속에서 자꾸만 자라는 진폐증의 씨앗들/그런 막장 인생 광부들의 소망이 뭐냐고요?/남들처럼 오순도순 지상에서 사는 것 그런 작은 행복 [성희직 시집, <광부의 하늘이 무너졌다>]


위에 나오는 시 구절처럼 한발은 막장 일터에 또 한발은 지옥에 걸치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안전사고, 희미한 칸델라 불에 의지하여 광물을 캔다는 것은 목숨을 건 작업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노동 현실은 사업주가 어느 정도 개선해주겠지만, 노동자 스스로 쟁취,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노동 조건의 개선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이다. 이들 노동조합은 노동자 대중이 처해 있는 현실로부터 해방이다. 더구나 광산 일은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요구한다. 열악한 광산노동환경은 탄광의 경우는 진폐환자가 속출하고 일반 광산은 규폐환자를 유발한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노동 강도의 저하 등을 요구하며 투쟁한다. 때로는 정치적 요구도 주장한다. 이러한 노동쟁의는 노동자에게 주어진 합법적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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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전국광산노조 임금인상지침(좌), 옥방광산 노조지부 설립확인서(가운데), 옥방광산 노동조합 신고증(우)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의 전신은『전국광산노동조합』이다. 전국광산노동조합은 1949년 4월, 8개 지부, 조합원 14,00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1953년 노동조합법 제정에 따라『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전국광산노동조합은 산업별 단일조직과 연맹체 방식을 절충한 형태였다. 1960∼70년대에 광산노조는 보수통제법 철폐 투쟁, 민주노동당 창당 추진, 생활급 확보 투쟁, 득대제 폐지 요구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 광산노조 투쟁은 사북탄광 노동항쟁이 그 대표적이다. 이른바 사북사태이다. 이 노동항쟁은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있었던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에서 노사간의 극심한 갈등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이다. 그 배경에는 사측 입장만을 대변한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과 광부들의 생활고였다. 당시 탄광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갱도 매몰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진폐증에 시달리는 광부가 너무 많았다. 그들이 받은 임금은 당시 도시 주민의 최저 생계비인 20여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평균 15만 5천 원이었다. 

 

왜 그들은 수백 명이 무장한 국가 폭력에 대항하여 곡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사북 거리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정부 당국의 값싼 에너지정책 때문으로, 그 희생양이 탄광 노동자이었기 때문이다. 옥방과 쌍전광산 노동자의 경우도 월 임금이 평균 12-13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 비해 간부급인 광산 소장은 40여만원 수준, 기능직은 20-30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60-70년대 산업전사라는 미명으로 지하 수백미터의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광맥을 캤던 광산 노동자들! 그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소중한 땀방울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는 강원도 정선 탄광마을 아이들이 쓴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바로『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라는 어린이 시집이다. 1980년대 당시 사북초등학교 교사였던 고 임길택 선생이 지도했던 아이들의 글이다. 이 시집에는 당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상이 아이들의 눈을 통해 진솔하게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 임길택 선생은 필자와도 1980-90년대『참교육-글쓰기교육운동』등을 함께 했던 분이다. 여기 몇 편 아이들의 글을 싣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짠하게 다가오는 글이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하네./아버지 월급 쓸 것도 없네. (6학년 정재옥, 아버지 월급)


우리 삼촌이/처음 탄광에 들어가던 날/바람통이 터져서/이빨이 다 없어졌다./그래서 지금도/밥을 잘 못 먹는다/그때 삼촌은/다시는 광부가/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5학년 윤중원, 우리 삼촌)


나는 지옥이/어떤 곳인 줄/알아요/좁은 길에다/모두가 컴컴해요./오직/온갖 소리만/나는 곳이에요.(6학년 노영민, 막장)


아버지가/집에 오실 때는/쓰컴헌 탄가루로/화장을 하고 오신다/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아버지 얼굴 예쁘네요./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그럼 예쁘다말다./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한바탕 웃는다. (5학년 하대원, 아버지가 오실 때)


오늘은 아버지 월급날/아주머니가 오시면서/어떻게 하실 거여요/돈을 주실 거여요/안 주실 거여요/하며 고함치는 소리가/내 공부방까지/들리어 오면/그 때 내 가슴은/ 말할 수 없다. (5학년 이순례, 빚)


사북탄광 노동항쟁으로 사북이 4일간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점거되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부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척했으나 결국 사태가 진정되자 당시 노사정 합의를 깨고 사건 관련자와 그들의 가족 81명을 군법 재판에 회부, 일부 노동자들은 2~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고문, 구타, 협박, 진술 강요 등 인권탄압을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후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짜 맞추기 수사』를 벌인 것으로 드러나 군사정권의 교활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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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방광산 노조원의 야유회(1980년대, 정한수씨 제공)


옥방광산노동조합

옥방광산 노동조합은 1952년 11월 1일 창립했다. 1961년 군사정권에 강제해산 되었다가, 그해 8월 산업별 조직 원칙에 따라 전국광산노동조합을 재조직하고, 산하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지부는 단체교섭권과 쟁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옥방 노조도 178명의 조합원으로『전국광산노동조합옥방광산지부』로 재출발하였다. 69년도에는 조합원 가입 수가 336명으로 증가했으나, 1970년대에 들어 조합원 수가 줄었다. 1975년『전국광산노동조합봉화지역지부』로 승격되어 산하 5개 분회(금정, 산막, 장군, 현동, 옥방)를 두었다. 옥방광산노동조합은 당시 열악한 광산노동자의 임금, 복지개선 등 단체협상을 이끌며, 봉화지역 광산노동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예전 옥방광산과 쌍전광산에 종사했던 일부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광산 노조위원장의 행태가 막장 광부들의 편이라기보다 광산주인 회사 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조위원장의 경우는 광산 경영자인 기업에서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어용노조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쌍전광산에서 일했던 ㄱ씨가 이른바 어용 노조위원장을 폭행한 사건. 이에 노조 측은 눈에 가시같은 폭행 당사자인 ㄱ씨를 20여명의 광산 노조원들이 합세하여 그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폭행을 하였다. 이들의 폭력에 대항한 ㄱ씨는 노조위원장을 폭행하여 울진경찰서에 입건되어 조사를 받았다. 노조위원장은 17바늘을 꿰매는 상해를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을 유발한 ㄱ씨도 정당방위를 주장, 이틀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이 사건은 결국 노조가 불리해서인지 유야무야 되었다고 한다. 


어용노조! 한국노동사에서 한때 강자 편에서 강자 이익을 대변했던 존재랄까? 

이후 198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분출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운동은 민주화와 맞물려 노동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어, 민주노조의 등장과 함께 어용노조가 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의 쌍전광업소 폭행사건도 기업 편이었던 어용노조가 노동자와 함께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했던 씁쓸한 노동현장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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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방광산 판자촌


옥방광산, 폐광의 그늘

폐광 옥방광산은 옥방천을 따라 1킬로미터쯤 영양 남회룡으로 가다 보면 동쪽 산기슭에 있었다. 광산을 가기위해 얕은 내를 건너 언덕으로 올랐다. 여기저기 채석한 돌덩이들이 발에 채였다. 산기슭에는 가건물과 컨테이너박스형 건물이 덩그렇게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채석 더미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광굴에서 캐낸 돌덩이를 부수어 선별하던 철골 구조물은 붉은 녹을 내뿜고 있었다. 구조물 사이로 잡초들이 우거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지 수십 년의 세월을 말하고 있다. 8월 말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산기슭에는 폐석으로 흘러내린 돌더미가 폐광의 그늘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어두컴컴한 입을 벌리고 있는 폐광의 입구는 산속 지하 깊이 꼬리를 감추고 있는듯 했다. 폐광의 둘레는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옥방광산 현장답사에는 70-80년대 옥방광산에서 종사했던 정한수씨가 동행했다. 그는 폐광 입구에서 광산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광산 입구는 반원형으로 천정을 받친 철골조는 튼실해 보였다. 하지만 세로로 받친 소나무 갱목은 썩어가고 있었다. 땅바닥과 천정에는 전선, 호수 같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입구 바닥에는 질척하게 물이 흘러내렸다. 입구는 10여미터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저 깊숙이 검은 장막이 처져 있는 듯 컴컴했다. 

그는 선광장에서 채석해 온 중석 원광을 선별하는 과정과 함께 옥방 중석이 세계적으로 품질이 우수했다고 설명을 했다. 그는 요즈음도 외국인이 광산에 다녀가기도 했다 한다. 그는 광산이 재개발되면 지역경제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경제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1995년 정부가『폐광지역개발지원법』에 따라 폐광지역에 지금까지 4조 원 가까이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다. 소위 폐광지역의 급속한 몰락과 폐허화를 막기 위해 진행된 대체산업육성 등의 정책자금이다. 전국적으로 적게는 천억여원에서 많게는 1조원 가까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강원도의 경우 탄광박물관, 각종 체험, 관광시설 등은 관리 유지비가 만만찮아 지자체가 운영하기에도 난감한 실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대책 없이 공적 자금만 잡아먹는 하마 신세가 될 게 뻔하다. 그런데 대체육성 산업 가운데 강원랜드만 잘 되고 있는가. 80년대 중반 이후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어둠의 거리였던 사북, 고한 탄광 일대가 지금은 삐까번쩍한 강원랜드 카지노로 변하여 세월을 무상케 하고 있다.  


옥방광산! 한때 구슬이 굴러 번창했던 옥방 마을, 철강 중의 철강의 쌀! 회중석을 노다지같이 캐내던 폐광 옥방광산은 말이 없다. 폐광 이후 광부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당시 광산노동자들의 치열했던 삶의 현장과 모습을 흑백 사진 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역사의 파노라마가 되었다. 이 또한 자연스런 역사의 뒤안길인가. 

 

옥방 폐광산 재개발은 경제성과 맞물려 불확실하다. 이에 일부 지역 주민들은 폐광산 공간을 지역성에 맞게 재활용 방안을 당국과 지자체가 관심을 갖고 공유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도움을 주신 분>

옥방교회(목사 박현기, 전시회 자료 제공), 황천호(옥방교회 장로, 현 울진지역자활센터 소장), 정한수(전 옥방광산 근무, 현 옥방 거주), 강문필(전 쌍전광산 근무, 현 방주명가영농조합법인 대표, 현 쌍전 거주), 방한필(전 쌍전광산 근무, 현 울진읍 거주)

 


 

옥방광산 노동자 정한수씨 이야기  

  

·일시: 2022. 08. 28.   ·장소: 옥방교회

·대담자: 정한수(68. 전 옥방광산 근무. 현 옥방 거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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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된 옥방광산 선광장에서 회상에 잠긴 정한수씨

 

옥방광산이 생산성이 좋아 한때 잘 나갔던 시절인 1970년대 초부터 옥방광산에 종사했던 정한수(68세, 옥방 거주)씨에게서 광산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정한수씨는 옥방이 고향이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15여 년 동안 광산 생활로 생업을 유지했던 분이다. 1980년대 후반 옥방광산이 폐광되어 광산 일을 그만두었다. 현재는 옥방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대담에 흔쾌히 응해주어 당시 옥방광산 일반적 상황에 대한 경험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옥방광산 폐광 현장도 함께 동행해 주었다. 감사함을 전한다.(대담과 기록: 김진문. 2022. 8. 28.)


정 사장님 원래 고향이 옥방입니까?

예, 어릴 때부터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영양이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탄광에 징용 가셨다가 고향에 오셔서 다시 옥방광산에 종사했습니다. 옥방광산이 경기가 좋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죠. 고혈압으로 작고하셨습니다.


옥방광산의 처음 시작은 언제쯤인지 아시나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일제시대에는 개인이 광산을 했다고 그래요. 일본『아베』라는 사람이 처음에 저기 옥방 강을 따라오면서 샘플링(표본조사)을 했다 하거든요. 아베라는 사람이 광산을 개발했고, 이때 중석이 무기 만드는 총열에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옥방광산은 전성기를 거쳐 거성산업이라고 하는 기업이 운영하다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죠. 현재는 폐광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작년까지만 해도 광산에 외국 사람이 와서 어떻게 개발해 보려고 해서 나도 거기 몇 번 들어가고 조사했는데요. 아직 개발한다는 소식이 없네요. 


옥방광산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18세 때부터 군대 갔다 와서 또 광산서 일했으니 한 15년 됩니다. 쌍전 광산에서도 일했고요. 저는 주로 선광장 분석실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굴속에서 일하는 광부들보다는 편한 셈이었죠. 분석실보다 돈 좀 벌려고, 광내 생활도 한 5년쯤 했지요. 분석실은 중석이나 다른 광석을 캐오면 그걸 다시 깨트려서 돌가루 형태로 만들죠. 그 돌가루를 물에 넣어 중석만 가려내죠. 그걸 비중선별이라고 해요. 중석은 다른 광물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물에 가라앉아요. 그래서 가라앉은 물질이 중석이죠.

그런데 이게 수출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물에 가라앉게 하여 제1차로 선별해서 중석 성분이 70% 이상 되어야 미국으로 바로 수출을 했어요.


옥방 중석 품질이 세계적이었다고 하던데

옥방 중석은 회중석으로 그 품질이 아주 좋았죠. 회중석은 세계에서 유일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중국도 전부 흑중석이고, 쌍전도 거의 흑중석이 80%인가 그래요. 회중석을 백중석이라고도 해요. 선별한 중석 돌가루가 하얀색이거든요. 여기서 정광 분석을 해서 중석 함량이 70% 이상 되는 것을 말해요. 여기서는 정광만 수출했지요. 중석을 선별한 나머지에도 유화철이 있거든요. 이 철은 선광장에서 염산으로 제련을 다시 합니다. 유화철을 황철석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단단한 금속이죠.


그럼 굴에서 했던 일을 좀 얘기해주시죠.

굴이 깊은 데는 지하 500미터도 내려가죠. 굴 안에 가면 개미집하고 똑같아요. 길 잃어버리면 못 찾아 나옵니다. 거기는 360미터 내려가서 양쪽으로 편편이 1편 2편 3편 4편 그리고 6편까지 내려가서 양쪽으로 이렇게 이제 완전 개미굴이에요. 그래서 지금 통고산 휴양림이 있잖아요. 굴이 그 밑에까지 가 있다고. 그때 무슨 말이 있었는가 하면 그때 조금만 더 뚫으면 이제 덕거리로 관통 낼 수도 있다. 눈 많이 오면 옛날에 도로 닦기 전에는 차 몇 대 못 다니고 했을 때 그런 소리까지 있었어요. 그러니까 옥방광산에서 덕거리까지 요즘으로 치면 터널을 뚫을 정도라니까요. 


당시에 광산 사고가 많았는데, 옥방광산에는 사고가 없었나요?

광산인데 없을 수가 있습니까. 지하 360미터 이상 들어가면 아무래도 덥고, 물도 나오고 어렵지요. 하루에도 20-30리 걷는 게 예사죠. 걸어서 막장까지 갑니다. 채굴하다 보면 암반이 무너지는 낙반 사고 있지요. 제가 있을 때는 큰 낙반 사고는 없었습니다. 거기 이제 굴속에 들어가도요. 탄광에서는 선산부라고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는 기술자인데요. 암반에다 떡국 같은 기다란 20㎝ 되는 뇌관을 꽂아요. 거기 도화선에 불을 붙여 터뜨려요. 옛날에는 산소 용접 같은 것도 전부 카바이트를 했어요. 그런데 돈을 아끼려고 고급화약 안 쓰고, 좀 좋지 않은 것 써요. 터트릴 때는 모두 안전지대로 피하죠. 끝나고 들어가면 화약 연기가 자욱하죠. 그걸 마시면 골이 아파요. 그리고 어떤 광부들은 참 무지하죠. 다이나마이트 불꽃, 그거 들여다보면 안 되는데 가스를 빼는 줄 알고 들여다보다가 다이나마이트가 터져 크게 다치는 등 이런 사고도 있었지요. 옥방광산에서 죽은 사람만 해도 내가 알기로도 한 10명 가까이 될 겁니다. 

한번은 이런 사고도 있었지요. 이름이 홍00이라고, 그때가 15살인가 16살인데 먹은 애인데, 선광장에 일하는 애가 아닌데 바깥에서 일을 시켜야 하는데, 그 애가 기계 피대에 팔이 걸려서 사고가 나서 죽었죠. 영주 병원까지 나가다가 피를 많이 흘려서 죽었거든요. 요새 같으면 살았지요. 그래서 보상비로 쌀 10가마를 주고 해결했어요.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고였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사고가 났는데 빽이 있었는지 영주시 경찰서에 있는 놈이 오더니 10분도 안 돼 가더라고, 회사 측에서 한 보따리 줬다는 얘기지. 그래요.


탄광 또는 중석 광산의 득대제란 뭐죠?  

이 사람들은 한마디로 광산 경영자의 하도급자(하청업자)이죠. 예를 들어 제가 일했던 옥방광산의 경우 원청 기업은 애경산업이었거든요. 이 원청은 옥방 광업소를 직접 관리하는 소장을 두고, 그 밑에 득대들이 광산 노동자 모집, 채굴, 임금 지불 등 현장에서 실무 관리를 이 사람들이 다했죠. 그러니까 득대 1명이 광부들을 십수 명에서 백수십 명씩 거느리고 중석을 캤지요. 득대는 노동자들에게 이른바 물주 노릇을 했어요. 먼저 선금으로 쌀을 한 달에 40되, 보리쌀 16되씩 주었어요. 현찰이 없을 때는 쌀이나 보리쌀을 주었죠. 그걸로 광부들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아이들 학용품도 사주고 그랬죠. 다음 달 중석을 캐서 간조 하는 날에는 득대에게 갚아야 하는 거죠. 많이 중석 채굴량이 많으면 노임이 그런대로 괜찮고 그렇지 않으면, 득대에게 도리어 빚을 지는 거죠. 


득대가 중간자 역할을 했네요.

득대는 그 가운데서 중간 이익을 취하였지요. 원청인 애경산업 같은 경우는 광산을 살 때와 콤프레스 기본 설비할 때는 돈이 좀 들어갔겠죠. 중석이 경기 좋을 때는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봐야죠.

득대도 자기 밑의 광부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자기 돈으로 먼저 선금을 주고 경기가 나쁠 때는 자기도 돈을 날리는 거죠. 논밭전지 팔아 득대 노릇하다가 재산 날린 사람도 꽤 많아요. 한마디로 땅속 광산 일은 박사들도 몰라요. 중석이 대박 나면 팔자를 고치는 거죠

예를 들어 중석 가격이 가령 국제 시세가 ㎏당 1만 원이다, 하면, 원청 기업에서는 득대한테는 5천 원도 안 줍니다. 한 4천 원 줍니다. 득대도 자기도 먹어야 할 거 아닙니까, 자기가 투자했으니까. 결국, 광부에게는 노임이 얼마 안 가는 거죠. 득대도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영주 가서 논밭을 사고 했으니까요. 원청기업인 애경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었다고 봐야지요. 


광산노동자들의 노임은 어땠나요?

현찰로 노임을 안 줄 때는 득대가 돈 대신에 1인당 쌀이나 보리쌀을 주었어요. 보름에 쌀 스무되, 보리쌀 열되 이렇게 주었지요. 그걸 가지고 팔아서 아이들 학용품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랬지요. 요즘으로 보면 억지로 먹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정도이지요. 노다지를 캐면 현찰을 주었어요. 중석 채굴량이 많이 나오면 원청이 한 반 이상 먹고, 그 나머지를 득대가 70% 먹고 나머지를 가지고, 광부들이 똑같이 나누어 먹었지요. 


저는 분석실에 있어서 조금 더 받았지요. 1980년대 한 20만 원(?)쯤 되었다고 봐야지요. 그때 당시 보통 공무원 초임 월급쟁이 2배 정도 되었다고 봐요. 광굴에 들어가는 사람은 생명수당, 발파수당, 위험수당 등이 있었지요.


옥방이 한창 번창했을 때 어땠나요? 

옥방이 한창 번성할 때는 주민이 수천명이었지요. 다방도 5-6개나 되었어요. 술집도 많았고요. 지지부리한 술집은 술집도 아니었지요. 기생집 관하고 옥하고 집이 다르잖아요. 관은 서울의 명월관 같은 그런 관이 있었는데 그거는 기생들이 붓글씨도 쓸 줄 알고 가야금도 타고요. 어떤 게 관이고 옥은 이제 무용만 할 줄 아는데 그런 게 옥관 다 있고 그랬어요. 하여튼 옥방 경제가 잘 나갔지요. 흥청망청했지요. 광부들이 피땀흘려 광산 돈 벌어 술집에도 많이 갖다주었지요.


광부들의 생활이나 주거 환경은 어땠나요?

옥방광산에 노동자들이 300명이 넘을 때도 있었어요. 거주했다 해도 5인 가족에 천 명이 살았단 소리죠. 집이라야 조그만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에요. 사람들은 식구가 열이나 되는 집은 거기에서 못 살죠. 한마디로 사택이라고 그래 봤자 판잣집이죠. 그게 억지로 그래 사는 거지. 사택은 현재 옥방교회 뒤쪽에 많았어요. 인구가 늘어나니까 초등학교도 학생 수를 감당못해서 학교를 하나 지었어요. 현재 폐교된 옥방중학교 자리에 옥방국민학교가 있었으며. 옥방국민학교가 생기기 전에 이곳 아이들은 광비학교(광회국민학교)에 10리를 걸어 다녔어요. 뒤에 광동국민학교가 세워져 한때는 옥방마을에 두 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답니다. 두 개의 국민학교를 통합하여 옥방초등학교가 되고, 옥방국민학교 자리는 그 뒤 옥방중학교가 개교했지요. 옥방국민학교는 한때 학생 수가 400여 명이나 되어서 오전 오후반도 있었어요. 그만큼 옥방이 번창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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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 전국광산노조위원장 표창장을 받고서.(가운데가 정한수씨)

 

노동조합 총무까지 하셨다는데 그 얘기 좀 해주세요. 

그게 무조건 광산의 일을 하면 100% 다 가입을 하는 게 유니온(노동조합)입니다. 그다음에 오픈샵(신규가입)은 할 사람하고, 말 사람 말고 했는데 여기는 거의 100% 다 해야 돼요. 나도 옛날에는 노조운동도 했어요. 노조 총무부장도 하고 했는데, 노조가 그때는 참 절실했고요. 진짜 없으면 아까 얘기했잖아요. 그 쌀 그거 갖고 어떻게 살겠어요. 그래 회사에서 이제 기본급을 달라 최소한의 살 수 있는 그걸 달라 이게 그때 노동운동이고, 그거는 옛날에 우리가 할 때는 참 절박했어요. 그때는 참 진짜로 굶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 광산노동조합인데 전국 광산노동조합 봉화지역지부, 이제 군대 막 제대한, 여기 광산이 봉화군에 해도 열 몇 개 되거든요. 그래요. 거기 일월 지부 무슨 지구가 있었지요. 단체 임금교섭도 회사직원과 노조 임원하고 했지요. 광산소장이 회사를 대신하여 우리하고 교섭했지요. 협상 단체 협약을 1년에 한 번씩, 또는 2년에 한 번씩 이렇게 하거든요 하는데 그래서 사실은요. 노조가 한다고 그래도 큰 힘을 못 썼어요. 그때는 회사가 5공 때라 나도 한 번씩 경찰서 봉화경찰서에 붙들려 간 적도 있어, 뭐 파업했다고 파업한 적도 없는데, 그때는 파업권이 다 있었는데, 그래 파업했다고 그때 박운화 위원장 때 내 총무 부장할 때인데 무조건 내가 제일 젊으니까 타라는 거라고, 그래서 탔지, 그때 내가 군대 갔다 왔으니까. 스물한 여섯, 일곱이 되었을 거야. 그러고 말았지요.


애경에서는 왜 광산을 계속 경영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이제 제일 우리가 남는 거는 폐업을 할 때 문 닫는다고 그럴 때 폐강을 할 때 그때 우리 노조에서 올라가서 장영신 회장하고 직접 담판을 했어요. 당시 애경 사장이 연간 적자가 자꾸 나고, 노조에서 죽어도 광산폐업을 하면 안 된다고, 막말하고 쌍욕하고, 말썽나니 골치 아프니깐 광산 정모 소장한테 넘겼지요. 이 사람은 싫은 척하고 광업소를 넘겨받아 노가 낫지요. 한마디로 공짜로 넘겨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지요. 그러다 조금 운영하다가 국가에서 광업진흥자금 타 먹고, 또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이런 식으로 돌리다가 폐업되었죠. 


80년대 광산이 폐업 후 어땠나요.

광산이 막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죠. 여기 밭 한 뙈기 없어요. 당시 농사짓는 사람이 10명도 안 되는데, 광부들이 배운 게 있습니까? 탄광으로도 가고, 또 다른 광산으로 간 사람들이 많고, 나는 객지로 가서 조선소도 다니고 건설 회사도 다니고 막 그래 갖고 억지로 살며 애들은 금방 낳아서 그때 나이가 30대 초반이니까 뭘 해도 다 어렵게 살았다 아닙니까. 저도 열심히 살았지요. 객지에서 생활하다, 아이들 공부 다 시키고, 고향 옥방으로 왔습니다.


지금은 어떠세요?

고향에서 그냥 살고 있습니다. 여기 어떨 때는 후회가 많이 되고 해필 아버지가 솥단지를 여기다 놓아서 내가 그걸 잘못한 게 아닌데, 그런데 원래 그렇잖아요. 잘 되면 지 탓이고, 그래 할 필요 없어요. 부모 나무라는 놈이 제일 어리석은 그럴 때도 있고, 사는 게 다 그렇지요. 객지 나가서 내가 만약에 많이 배워 가지고, 높은 거 하다가 또 수갑 차고 끌려가는 거 뭐가 좋겠습니까?

지금은 편안합니다.


어떻게 하면 옥방 폐광지역이 되살아날까요?

글쎄요, 옥방광산이 다시 활성화되면 좋겠지만 경제성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가 태백·정선처럼 폐광지역 지원 정책이 있길 바랍니다. 특히 ㈜애경의 성장 기반은 옥방광산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산골 옥방마을을 지원하는 아름다운 상생을 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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