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인물 정담(鄭湛)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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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문화원장 김성준
개 요
임진년인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은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 왔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별다른 대비책이 없이 왜군의 급습을 당한 조선은 불과 3개월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6개월 만에 호남을 제외한 전 국토가 점령당했다. 조선은 모든 가용 병력을 소집하여 결사 항전하였으나 계속 열세로 몰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수가 이순신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남해에서 연전연승하여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 팔도 곳곳에서 육지전도 전개되고 있었다. 육지를 지키는 쟁쟁한 장수들도 수없이 많았으니, 권율, 신립 장군 등은 물론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낸 정담 장군도 매우 중요한 임무를 완수한 장수였다. 직책은 비록 김제 군수였으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시 육전에서의 공적을 논한다면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는 정담 장군이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의 공적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전주가 뚫리면 호남이 뚫린다, 호남을 잃게 되면 조선의 마지막 영토가 함락되는 것이며, 조선의 곡창지대가 적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전주는 조선 전체를 책임져야 할 만큼 중요한 요충지이다. 이런 요충지를 지키는 길목이 웅치熊峙고개와 이치梨峴 고개였다.
조선 조정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고개를 지켜야 했다. 따라서 이 고개를 지킬 만한 큰 장수를 물색해야 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상당한 고심을 했다. 선조실록에는 어전에서 김제군수 적임자를 차출하던 내용까지 기록하였다.
결국, 청주 목사로 재직하던 정담 장군을 김제군수로 지명하여 호남사수 책임자로 보낸 것이다. 정담 장군 또한 웅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던 터라, 모든 전력을 쏟아 왜군을 막아냈고, 왜군의 주력부대가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해야 할 만큼의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얼마 전 개봉된 「한산」이란 영화에도 웅치 전투장면이 몇 차례나 방영되었다. 웅치고개를 끝까지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장수들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연출되면서 정담 장군의 이름은 자막으로 소개되었지만, 필자는 정담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역사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군이 정담이며, 그가 바로 울진 기성면 사동리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공적을 영원히 기려야 한다.
울진은 나라가 위태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충신, 열사들이 많다. 정담 장군은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분이다.
정담이 태어난 사동리 해월고택
정담의 가계
정담은 조선 명종 3년인 1548년 9월 23일 기성면 사동리 해월 고택에서 태어났다.
부친 鄭昌國. 모친은 전의全義 이씨 사이에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들로서 둘째이다. 자는 언결彦潔, 호는 일헌逸軒이다.
정담의 나이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세에 부친마저 돌아가셨다. 그는 매부妹夫인 판결사 황응징黃應澄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무인의 기개를 보였다고 한다.
본관은 야성정씨野城鄭氏로 대대로 사동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영덕군지에는 21세 때인 1568년에 창수면 인량리로 분가하였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강원 감사 서정수의 지시로 삼척 부사 유언제, 평해군수 장제두가 조사한 보고서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영해로 이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향토사연구 3집 38쪽). 공교롭게도 정담은 그해 7월 8일 웅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래 정담의 선조들은 나라에 충성하던 충신의 가문이었다. 정송鄭松 시조는 고려말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그 후손인 정을현은 통훈대부였고, 사간원 사간을 지낸 정신수, 이조참의를 지낸 정태서, 중랑장을 지낸 정태진 등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던 가문이다.
정담 가문이 사동으로 입향한 것은 정담의 5대조인 정득화鄭得和 때부터이다. 정득화가 정9품의 말직 벼슬을 할 때 처음으로 사동리에 입향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정득화는 영양남씨와의 사이에서 자함自咸을 낳았는데, 이가 곧 정담 가계의 사성공파司成公派를 이룬 파조이다. 자함은 세종 21년(1439)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수와 강릉판관 등을 거쳐 종3품까지 지냈던 분으로 명문 가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다.
증조부인 신伸, 조부인 사교士僑는 각각 종9품 벼슬을 지냈고 정담의 부친인 정창국鄭昌國은 내금위에서 종6품인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
정창국은 다시 사동에서 정 담을 낳았고, 정담은 임진란이 일어나던 해에 영해로 이사를 간 것이므로 결국 5대를 살다가 영해로 이거한 것이다.
정담과 사동 골떡
정담은 어려서 부모를 잃어 매부인 황응징黃應澄 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매부인 황응징은 정담의 가정을 도운 것뿐만 아니라 정담에게 직접 학문을 전수하였다. 정담은 늘 이웃 어른들로부터 천부적인 용장의 기질을 타고났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정담은 어릴 때부터 손자병법과 같은 병서를 즐겨 읽었고, 중국 한나라 장량에게 전수되었다는『황석 공소서黃石 公素書』라는 병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정담이 태어난 사동 해월 고택은 강릉 이남 동해안에서 가장 좋은 명당터로 전해지고 있다.
본래 이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은 권조權組라는 사람이었다. 조선 초기인 세종 임금 때 정선 군수를 지낸 분인데, 평해에 입향하여 사동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의 사위인 이명유李命裕에게 물려 주었다. 이명유는 중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홍천군수 직을 버리고 사동의 처가로 돌아왔다.
장인인 권조가 “이 집터는 사위에게 물려주어야 그 가치가 영원히 유지된다 하니 너에게 물려주마” 하면서 이명유에게 물려주었고, 이명유는 그의 사위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정담의 부친인 정창국은 다시 그 사위인 판결사 황응징黃應澂에게 물려 주었는데 황응징은 사위가 없었으므로 대대로 황씨 종손이 살게 된 것이다.
벼슬길에 나간 정담
정담은 어려서부터 호걸스러운 기질이 있어, 병서兵書를 탐독하며 무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18세(1565)에 처음으로 무관에 종사하게 되었고, 24살 때 예금군隸禁軍이 되어 제주도를 지키는 장교가 되었다.
선조 8년 (1575) 장원급제하였고, 1577년에는 무관으로써 함흥부에 배속받았다. 다음해 경원, 종성, 등지에서 호적胡賊 니탕개尼湯介를 맞아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니탕개는 2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으나 정담 장군은 “한 치의 땅도 적들에게 내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500여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장인 니탕개를 생포하고 8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16년(1583) 겨울, 당시 36세의 나이로 알성무과에 급제하여 명실공히 무장으로서 확고한 인정을 받게 된다. 정담은 영남 동도 병마사 홍치무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병서를 연구하고 무예를 익혀 나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무장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외족인 북병사 이제신에 의해 김우서, 신립과 같은 쟁쟁한 장수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조선 조정의 이름난 장수들은 모두 정담의 인물됨을 탐내었는데, 당시 유명한 장수였던 신립申砬 장군이 그를 불러 아장亞將을 시켰다. 정담은 신립의 막하 돌격장이 되어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담은 신립 장군을 도와 열심히 보필하였고, 신립의 추천으로 다시 순무사巡撫使 김수의 심복 부하가 되었다. 정담은 책임감이 투철하고 매사에 능하여 윗사람들에게 항상 큰 신임을 받았다.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임관한 지 30개월 만에 용호위龍護衛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충주를 지키던 장수로 탄금대 일대의 전투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에게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명한 명장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壬辰 4월 13일 왜군이 조선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무려 7년 동안이나 조선의 국토를 초토화시킨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수난이었다.
역사를 보면 조선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한 것은, 주로 중국 등 북방 민족으로부터였다. 남방으로부터의 전면전 침략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사전 방비책이 아주 미약하던 때였다.
왜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 침략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16C 중엽에 조총과 화약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혁신의 주체로 새롭게 부상하여, 일본은 완전 새로운 나라로 변화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지형지물을 정찰했다. 병선을 건조하고 조총, 화약 등 무기까지 확보하였으며, 상륙전에 대비하여 백병전 훈련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심각한 음모를 감지하지 못 한 채 붕당정치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사전 대비 없는 상황이다 보니 화력이나 전술 면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왜군은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여 연전연승하며 북진을 계속하였다. 부산 동래가 무너지고 왜군들은 충주로 치달으니 지방 수령들은 적들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달아나 버렸다. 5월 3일에는 서울까지 진격하였고, 여세를 몰아 다음 달인 6월에는 평양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왜군들이 스치고 지나간 조선 땅은 완전 초토화되어, 조선 개국 이래 이렇게 큰 난리는 없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갖은 작전을 구사하여 군사들의 동원은 물론 의병, 승병들까지 가세하였지만, 사전 대비 없던 전쟁이라 승전보는 잘 들리지 않았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수전(水戰)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바다로 침투해 오는 왜군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왜군들은 이순신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이순신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러나 수전에서만 승리한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육지전에서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넓은 국토를 모두 지킬 수는 없다. 조정에서는 화급한 불을 끄기 위해 갖은 작전을 다 써 보지만 호남을 제외한 모든 조선 영토가 왜군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정담 장군 사적비/인량리 충렬사 앞
김제군수가 된 정담
임진왜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수가 이순신 장군이다. 물론 이순신의 활약은 조선을 구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수전水戰의 승리만으로 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 육지에서도 수많은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육군과 수군이 서로 연합 전선을 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육지에서도 수없이 많은 명장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 전국을 점령한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모든 전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호남을 지켜야 했다. 호남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모두 적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며, 호남의 평야는 곡창지대로써 조선 군사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곳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만 했다.
이렇듯 호남을 지키는 일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중대사이지만, 마땅히 호남을 지킬 만한 장수를 찾지 못했다. 왜군들도 김제를 점령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능력이 출중한 장수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장수가 조정에 천거되었지만, 조정에서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때 추천된 장수가 정담이다. 정담이 추천되자 선조 임금은 “ 권실하기를 정담만 한 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정담을 김제군수로 지명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청주 목사로 재직 중이던 정담은 김제 군수가 되어 호남의 요새를 지키게 되었다.
정담 장군 학술대회 원고에 실린 정담 장군의 친필(1995.4)
웅치 전투와 정담 장군의 순국
임진왜란을 사전 감지하지 못한 조선군은 육전에서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땅에 상륙한 왜군들은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를 불과 석 달만인 6월에 거의 점령했다. 왜군들은 마침내 전라도까지 침략하여 무주, 금산, 진안 지역을 점령하고 남아있는 전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세로 보아 전주가 함락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전라감사 이광은 광주 목사 권율을 도道절제사로 삼아 영, 호남 경계를 지키게 하고, 방어사 곽영, 동복 현감 황 진,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을 웅치고개熊峴와 이치고개梨峴를 지키게 했다.
웅치 고개는 1진. 2진 3진으로 나뉘어 최전방인 아래쪽 1진은 의병장 황박이 지키고, 2진인 중간에는 나주판관 이복남이, 그리고 3진인 맨 위쪽에는 정담 장군이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때 전라감사 이 광과 전라 절제사 권율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원군만 보냈기 때문에 실지 웅치 고개를 지키는 최고 책임자는 정담과 이복남, 황 박이였다.
왜군은 웅치 전투에 사활을 건듯하였다. 산과 계곡이 완전히 왜군들로 덮일 정도로 많은 왜군이 웅치 고개를 기어올랐다.
왜군들도 어떻게 하던, 이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왜군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웅치 고개는 중요한 요처였다.
날이 지나갈수록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갔다.
1진의 황박 의병장 또한 최선을 다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이 무너져버렸다. 2진의 이복남 판관 군대도 죽기로 적을 막았지만, 왜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제 남은 진지는 정담이 지키는 3진 밖에 없었다. 3진을 지키던 정담은 더 이상 물러나면 전주가 함락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러나 정담 장군의 치밀한 작전이 주효하여 왜군들과의 전쟁 때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밀고 밀리면서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하루에 5번을 싸워 다섯 번 모두 적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적으로도 부족하지만 화력 면에서 조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왜군을 칼과 화살로 당할 수가 없었다. 정담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에는 왜군들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수하의 장수들이 작전상 후퇴를 청했지만, 정담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고 백병전을 전개했다.
장군이 전사하던 날이었다. 조선 군대를 포위한 왜군들은 조선 군사들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은빛 갑옷을 입은 적장이 백마를 타고 긴 칼을 빼 든 채 군대를 몰고 진격해 왔다. 조선 군사들도 일제히 화살로 응전하였으나 이내 백병전으로 변했다.
정담 장군은 화살통의 화살을 있는 대로 다 퍼부었으나 적군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정담 장군의 화살통은 어느새 빈 통이 되었다. 부득이 장군은 칼을 빼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적을 물리치다가 결국 왜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정담 장군과 함께 조방장 이봉, 강운, 박형길 등 모든 지휘관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가 1952년 7월로 장군의 나이 45세였다,
그러나 훗날 논공행상에서 정담의 공적은 없어지고 오히려 1진에서 패한 황박과 2진에서 방어하던 이복남의 공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정담 장군은 웅치 전투에 앞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살아오기를 기대하지 말라. 너는 내가 군君과 부父를 위해 죽은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 아비의 시체를 안장해라”하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의복과 갑옷에 이름을 써놓았다고 한다. 정담 장군은 싸움에 앞서, 이미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웅치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웅치를 넘어 전주까지 진격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자진하여 철수했다. 웅치 전이 너무 치열하여 왜군도 전의를 상실할 만큼 손실이 컸었다고 한다.
왜군들은 정담 장군의 용전분투하는 모습을 보고「조 조선국 충간의담 弔 朝鮮國 忠肝義膽」이라 팻말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이 웅치 전투는 전주 이남의 전 호남을 지킨 큰 싸움으로, 훗날 역사서에는 호남이 보전된 것은 정담 장군의 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담의 묘소는 정담의 아들 승서(承緖)가 부친의 시구를 동래로 운구하였다가 이듬해인 계사년 12월 25일 영덕의 창수면 인량촌 북등 임좌병향壬坐丙向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권율 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은 자신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서 “나의 장인인 권율 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이 공이 크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 싸움을 주도한 정담의 공이 가장 크고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적었다.
선조실록에는 정담 장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정담 장군의 공적이 조정과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고 논곤 행상에서 3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또한, 선조 임금은 특별히 10단계나 뛰어넘어 병조참판 겸 의금부 부사에 증직贈職하고 이조吏曹에 명하여 그 자손 대대로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한다.
울진군 디지털 대전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량리 마을입구의 정담장군을 모신 충열사
충열사당 내의 정담 군수비각
충렬사 비각
영양군 일월면 壯烈公 종가/사진 김경종 제공
정 담(鄭 湛)
「기성면 사동인으로 1575년(선조 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92년 (선조 25년)에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있을 때에 출전(出戰)하여 웅치(熊峙)에서 역전(力戰)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지니 옷에 이름을 새겨두고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였다. 왜군이 이것을 보고 찬양하며 표목(標木)을 세워 “조조선(早朝鮮) 충간의담(忠肝義膽)”이라 써두었다 한다. 적의 정예부대가 이 싸움에서 섬멸되어 다시 웅치(熊峙)를 넘지 못하니 전주(全州) 서쪽이 지켜지게 된 것은 공(公)의 덕(德)이라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모든 장수의 공(功)을 의논할 때 웅치(熊峙) 싸움의 공(功)을 첫 번째로 꼽았다 하며, 김제(金堤)의 사림(士林)들이 임금에게 상진(上秦)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追贈)하였으니 이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 당시 울진에서 귀양살이한 아계 이산해 영상은 정담을 추모하며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만사(輓 詞)
領議政 李山海
「군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아가니
목숨 바쳐 싸우다가 장렬히 죽었더라
죽어도 그 이름은 천추에 길이 남고
임금은 병조참판을 추증해 주셨더라
고갯마루에 비 세우니 사람마다 눈물짓고
파산의 여인들은 노래를 그쳤더라
산천은 예와 같아 변함이 없는데
벗들을 여기 두고 어디로 갔는고?」
提兵曾卦難 許國背還家
死亦名猶久 官廳贈有加
峴碑人墮淚 巴杵女休歌
邱水渾依舊 親朋意苦何
- 향토사연구 3집 87쪽 인용
정담 장군의 유적
정담이 이사한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마을 입구에는 장군을 추모하는 유허비와 ‘ 충렬사’가 있다.
그 후 정담 장군의 증손인 정희주 공이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로 이거하여 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정담장군의 위패를 모셨다. (문화재자료 제27호)
장군의 묘소는 인량리 ‘나랏골 마을 뒷산에 높은 봉우리에 있다한다. 야성정(野城 鄭)씨 문중에서 매년 배향하고 있다.
정담의 공적이 인정되어 순국한 지 1년 뒤인 1593년 9월 3일 자로 선조 임금께서「사선대부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兼 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또한 숙종 16년(1690)에는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정조 5년(1781)에 마을 입구에다 비각을 세웠다.
장렬공 종택/ 사진 김경종 제공
정담 장군의 충열을 기리는 향현사(鄕賢祠)는 평해, 영해, 영양, 김제 등 4개소에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향토사 연구의 대 선배이신 고 윤병한 선생께서는 정담 장군의 기록을 찾기 위하여 당시 규장각까지 몸소 방문하여 자료를 복사해 왔으며 정담을 기릴 유적을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울진문화원 향토사 연구 3집에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평해 동쪽 1리 되는 곳에 향현사를 지어 증 병조참판 정담을 향사해 왔는데 고종 무진(高宗 戊辰)에 철향(撤亨)되었고 지금은 유지(遺址)조차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정담의 고향인 을진에서는 정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왔다. 조선조 말 향현사를 지어 배향하기도 하였으며 1995년 4월에는 울진문화원 주관으로 ‘정담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도 있다. 그러나 정담의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울진으로서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울진에는 아무런 유적지가 조성되어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정담 장군에 대한 공적을 다시 한번 조명하여, 울진을 빛낸 장군의 유적지를 조성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鄕土史硏究」. 제3집. 울진군 향토사연구회. 1992
「울진사향」제2호 2009 임승호의 「웅치대첩과 정담장군의 충의」
-「정담장군 호국충절」학술대회 자료집 1995 /민족사 바로 찾기 국민회의/울진문화원










문화원장 김성준 님께 질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담 장군께 깊은 감명을 받아 그분의 역사를 쫒던 중 좋은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은 니탕개의 난에서의 공적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질의드립니다.
니탕개의 난에서 기병대 돌격장으로서 공적이 있음은 알고있으나,
세부적으로 니탕개를 생포하는 전투를 지휘했고 결과적으로 니탕개를 생포하는
큰 공적을 이뤘다는 것은 처음접했습니다.
감회가 새로운데
근거가 되는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함께 전사하신 '종사관 이봉'의 정보가 있다면 지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