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871영해+울진동학거사는 혁명이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영해동학혁명유적지』탐방 동행취재기
기사입력 2023.11.2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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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한국이 낳은 세계적 대학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이하 도올 선생)께서『1871영해동학혁명』(이하 영해혁명)유적지 탐방과 강연차 영해에 온다는 전갈이 필자에게 전해졌다. 더구나 이와 함께 대중강연을 한다고 하니 나의 관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도올 선생 하면 이미 그 명성이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1990년대 그의 최초 저서라 알려진『여자란 무엇인가』(동양사상입문특강, 통나무, 1993)를 읽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뒤 그가 쓴 여러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물론 최근 나온 동경대전 등을 읽고 동학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필자가 나름대로 도올 선생에 관하여 부족하나마 간략히 소개한다.
도올 선생 강연회(2023. 11. 2. 영덕군민회관)
그는 공부와 학문연구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대학에서 생물학, 신학, 한의학, 철학 등을 두루 공부하였다. 세계적 유명대학인 동경대, 대만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양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1986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보통 사람의 평범성을 극단으로 휘몰아가는 현실』을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강단을 미련 없이 떠났다.2010년에도『인류 지혜의 고전조차 강의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이 땅의 깨인 사람들아 모두 투표장으로 가시요.』라는 문구가 적힌 게시판을 들고 1인시위를 하여 당시 정부를 비판하는 돌직구를 날렸다.그의 돌직구 비판적 언사는 한국사회의 모순과 정치지도자들에게도 거침이 없었다. 더구나 사이다 같은 그의 발언은 일반 대중이 할 말을 대신해서 시원하게 응어리를 풀어내 주기도 했다. 그는 행동하는 철학자로서 확실한 면모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그는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강단을 떠난 후 철학자, 사상가, 언론인,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작가, 국악단원 등으로 여러 활동을 하였다. 또한, 동서양 철학과 다방면에서 학문적 탐구와 영화 제작은 물론 방송 활동도 활발히 했다.그간 저서를 80여 권이나 내었고, 최근 동학 원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새롭게 번역, 해설하여 펴냈다. 그는 동학사상이야말로 서양 근대 사상을 능가하는 탁월한 사유로서 인류를 구원할 사상으로 보았다. 해월 최시형 선생을 두고는『지게꾼 하느님이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순결한 조선인 표상』이라고 말한다.필자는 도올 선생을 모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가 쓴 책은 여러 권 읽었다. 방송강의도 들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도올 선생은 무불통달(無不通達)의 대학자요, 사상가요, 행동하는 철학자로 보인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쉽게 이해되지 않은 언어는 그냥 개소리일 뿐이다.』『대중과의 소통이 없는 학문은 문명의 장식에 불과하다.』『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대학자다운 말씀이다. 이런 말은 모두 학문의 대중화를 말하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런 경구는 사회에 경종을 울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끔 한다.어쨌든 그 유명하고 박식한 도올 선생이 온다! 『영해혁명기념사업회』측에서도 바쁜 일정의 도올 선생을 어렵사리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나로서는 그의 육성 강의를 직접 듣는다는 것은 앞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그의 방문을 앞둔 일주일 전 『영해혁명기념사업회』 권태용 사무국장에게서 영해동학유적지 탐방관련 동행 취재를 부탁을 받았다.이번 동행취재기는 필자가 월간 <울진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1871 영해+울진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와 밀접한 역사적 연관이 있기에 흔쾌히 취재에 응했다. 도올 선생 일행이 영해에 머무르는 일정은 2박 3일이었다. (일정 참조)1일째, 관어대에 오르다10. 31. 화, 15:00-20:00영해면사무소 도착(15:00) → 영해 3.18독립만세운동 야외전시물관람 → 송천 영해평야 → 박하선 마을 유허지(인천리) → 인계서원 유허지(인천분교) → 관어대(상대산)필자가 <1871 영해+울진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를 쓰면서 영해혁명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영해면사무소를 수차례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옛 영해부 관아였던 이곳은 『1871신미영해동학혁명(이하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났던 주요 무대로 역사적 장소이다.
도올 선생이 옛영해부 읍성터(현영해면사무소)를 둘러보고 있다
1871년 당시 동헌이나 서, 남쪽 문루, 객사, 아사 등의 옛 영해부 관아의 건물이 있다고 문헌에 전하나 지금은 그 자취가 거의 없다. 다만 면사무소를 둘러싼 담장 축대의 돌들이 성의 일부로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들어서 복원된 건물로는 현 영해면사무소 동쪽 귀퉁이에『책방』이라는 기와집이 있다. 책방이란 사무실은 현 지자체의 비서실 같은 정무 기능을 하던 곳이다.영해면사무소 둘레를 살펴보면서 도올 일행을 기다리는 가운데 오후 3시경 도올김용옥선생(이하 도올 선생)을 태운 승합차가 영해면 사무소에 도착, 영해면장(엄재희), 기념사업회위원장(권대천) 등 관계자 등이 환영 인사를 나왔다. 영해면장은 도올 선생께 꽃다발을 드리면서 방문을 환영했다.
사라진 인천리의 박하선 등이 살던 석문안 동네필자는 평소 언론매체나 도올 TV(유튜브) 등에서 강의 모습을 자주 영상으로 보았지만,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그는 70대 후반의 나이로서는 주름살이나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였고, 베레모를 쓴 모습은 단아했다. 그 특유의 검은색 생활 한복처럼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대학자로서의 기품과 검소한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한 정장이었다.면사무소 마당에서 인사를 나눈 뒤 누군가에게 최근 발행한 그의 역작인 동경대전을 가져오게 하여 영해면장(엄재희)에게 속표지에다 그림과 함께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마중 나온 인사들과 대면이 끝난 후 도올 선생 일행은 곧바로 영해면사무소 동쪽 앞뜰의 옛 영해부 관아의 부속 건물인 책방 등 담장(성곽) 일부를 돌아보았다. 이후 면사무소 앞 거리에 조성된 1919년『영해3.18독립만세운동』역사에 관한 야외 전시물에 안내되어 설명을 들었다.영해『3.18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3,000명에 이르는 민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제의 총검에 다수가 현장에서 숨지거나, 부상, 체포되었다. 당시에 사망 8명, 부상 16명, 체포 489명, 실형 선고가 185명이나 된『영해3.18독립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곳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송천(영해평야), 사라진 박하선 마을과 인계서원영해동학혁명 관련 첫 탐방지는 송천이었다. 송천은 영해의 젖줄로 영해평야를 적시며 흘러 관어대가 있는 상대산 밑으로 빠져 동해로 직진하는 하천이다. 1871년 3월 10일 밤, 형제봉(703미터) 우정골에서 출발한 수백의 동학교도가 이곳 송천을 따라 펼쳐진 영해평야를 거쳐 영해부 관아를 습격한 공격로의 하나였다.
송천과 영해평야를 둘러보는 도올 선생과 권대천 기념사업회권대천위원장, 황용기 위원도올 선생은 송천에서 영상촬영을 하고 바로 이동하여 당시 박하선이 살던 인천리로 갔다. 왜냐하면, 당시 인천리의 석문(石門)이라는 곳은 『영해동학혁명』의 주역인 박하선과 그의 아들 박사헌이 살았던 동네이기 때문이다. 박사헌은 이후 관의 동학 탄압을 피해 병풍바위 아래 우정골로 가 움막집을 짓고 은신했다.당시 함양박씨인 박하선 등 동학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은 원래 살고 있던 창수 인량 동네를 떠나 인천리 쪽인 석문 안 동네 터를 잡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그들이 살던 석문 안 동네는 논으로 변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당시 석문 동네에는 몇 가구가 살았는지는 모른다. 동네로 들어가는 북쪽 산줄기에 수직으로 된 바위가 마치 큰문(門)과 같다 하여 동네 이름을 석문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바로 옆에 현 인천분교가 인계서원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이날 황용기위원(기념사업회)이 도올 선생께 박하선의 집터를 설명하는 가운데 새롭게 알려졌다. 황위원이 이곳 유지, 어른들로부터 구전을 전해 듣고 이같이 고증한 것으로 보인다.조선 후기 사회는 농업, 상공업의 발달로 평민계급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사회의 새로운 정치·경제적 세력으로 등장하던 시기이고, 더구나 영·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과 노비면천(奴婢免賤)등의 정책으로 신분 계급의 분화와 서얼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정책변화가 있었다.이와 같은 중앙정부의 정책은 자연 지역의 향촌에서도 작용하여 그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반, 재지사족 등의 기득권 유지 세력과 서얼허통 등으로 관직에 나아간 유림, 부를 축적한 일반 평민 등으로 분화되어 갔다.이에 따라 양반, 재지사족 등의 기득권 유지 세력과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를 혁파하려는 계급 간의 대립과 갈등은 필연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전자를 구향, 후자를 신향이라 한다. 이러한 조선 후기 향전은 주로 지역 향교의 지방 수령의 자문권, 문묘제향권과 향교 임원임명권, 조세수취권 등을 대립과 갈등이었다.영해에서도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이를 경자향전(영해향전, 영해항변, 영덕군지)이라고 한다. 당시 지역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유학자였던 박하선, 강수 등이 동학을 지지하게 된 배경에는 영해 향전이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이 향전에서 신분 상승의 신진세력이 집단으로 살았던 곳이 석문 안 동네였고, 그 중심지가 인계서원(현 창수초등학교 인천분교)이었다. 이 해묵은 싸움과 감정대립은 결국, 신향이 패배하였다. 이후 인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앞서 지적한바 같이 유학자 박하선은 서얼 출신으로 진보적 유학자였다. 그는 아마 창수 인량마을에서 출생하여 바로 위 동네인 인천리로 옮겨 갔을 것으로 추정되나 언제, 무엇 때문에 등 확실한 것은 모른다. 현재 함양박씨 족보에도 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동학 신봉자는 나라의 역적으로 취급되던 때이니, 족보 기록시 집안에서 축출되었다고 보이는데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의 직계후손이 확인된 바 없다.한편 현 창수면 인량리의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연·의열·의훈 사적비(통칭 삼의사비, 창수면 인량 2리 420)가 인천리 석문 안 동네 함양박씨 후예라는 설이 있으나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 그날 도올선생은 이 삼의사비를 둘러보았다.
해질 무렵 관어대에 오른 도올 선생
관어대에서 바라본 영해 평야박하선 동상을 세우자도올 선생은 오늘날 동학이 있기까지는 영해·영덕의 박하선과 강수와 같은 탁월한 두 인물의 지적이고 헌신적인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더구나 영해 초대 접주인 박하선을 해월 선생 못지않은 인격자로서 동학의 산파 역할을 했던 분으로 크게 평가하고 있다.왜냐하면, 그는 사서삼경에 달통한 유학자로서 동학 초기역사에서 동학이라는 지적 배경과 깊이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또한, 그는 수운선생이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옥바라지는 물론 순도 후 경주에 시신을 운구하여 모실 때까지 헌신을 다했기 때문이다. 박하선은 폭넓은 지성과 따뜻한 인간애를 간직한 고결한 인격자였다.도올 선생은 그를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일대기인 『최선생문집(대선생주문집)』을 기록한 저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대선생주문집』을 단군 이래 조선 역사에서 조선의 지식인이 이 민족에게 선사한 최고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하고 있다.하지만 박하선은 당시 영해지방 유림 등의 동학 탄압시 고발을 당해 관에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인천리에서 1869년 말 사망하였다.도올 선생은 이러한 박하선을 우리 민족의 진실한 지성의 표상으로서 영해에 그 대업을 기리는 기념비나 박하선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한다. (도올선생초청강연회자료집 10쪽. 2023. 11. 2.)동학의 실제적인 산실, 물산이 풍부했던 영해오후 4시 30분경 도올 일행은 인천리를 탐방하고 영해들을 적시며 동해로 흐르는 송천 하구인 관어대(觀魚臺)로 올라갔다. 말 그대로 이곳에 오르면 맑은 송천(松川)과 푸른 동해의 온갖 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고 셀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관어대가 있는 곳은 상대산(183미터)이다. 상대산 정상에는 관어대 정자가 있다. 이날은 정상에 약간 못 미치는 곳에서 서쪽 바위 절벽에서 송천과 영해들을 조망했다.도올 선생은 서쪽으로 펼쳐진 영해평야와 에스자(S) 모양으로 느릿하게 유유히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저 멀리 서·남·북으로 펼쳐진 낙동정맥과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가없는 동해를 전망하고선 그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마침 해지는 저녁 무렵이라 아스라한 영해평야의 장관이 연출되었다.그 가운데 도올 선생이 마치 바위의 풍경으로 오뚝! 사람과 자연과 인문학, 그가 품은 동학사상의 장엄한 세계! 그 모습은 또 다른 풍광이 되어 있었다. 시각은 오후 5시 15분경이었다.이날 저녁에는 영해 모식당에서 저녁밥을 함께 했다. 저녁밥이 끝난 후 영해, 울진 등지에서 도올 선생을 방문한 이들이 가져온 선생의 저작물에 직접 사인은 물론 사진 촬영도 함께 해주었다.2일째, 형제봉, 움막집터, 병풍바위여!11. 1. 수, 08:00-20:00영해보건소 출발(08:20) → 임도주차지점(09:40) → 형제봉(703미터, 10:40) → 점심밥(11:10-11:33) → 병풍바위(12:00) → 박사헌 은신처(우정골 움막집터, 12:10) → 병풍바위 앞, 고사 지냄(12:40) → 형제봉(13:50) → 임도 주차 지점(14:40) → 신기2리 동회관(15:25) → 영양 일월 윗대치(16:00) → 주실마을 조지훈 생가(16:40)
형제봉 가는 길
산행하기 좋은 맑은 날씨다. 오늘 도올 일행이 가는 곳은 영해혁명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박사헌이 피신해 은신하던 움막집터, 이필제 등 주요 간부들이 천제를 지낸 형제봉, 전국에서 모여든 동학교도 수백 명이 노숙한 병풍바위 일대이다. 현재 이 일대의 등산로는『1871동학혁명발상지탐방로』라는 이름으로 영덕군(김광열 군수)에서 정비하여 2021년도에 개설했다. 영해보건소를 출발 → 임도 주차 지점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고, 이후는 탐방로를 따라 걷는 산행이다.오전 8시 20분경 영해보건소에 모여 도올 선생과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일행 14명은 지프 차 등 4대에 나누어 타고 영해를 출발, 송천을 따라 우정골 방향으로 들어갔다. 우정골 입구 다리를 건너자 임도가 시작되고, 임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덜컹, 기우뚱거리며 차를 타고 이동했다.영해를 출발한 지 거의 1시간 20여 분이 지나 8부 능선쯤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내려 영해평야와 동해를 바라보았다. 영해면 소재지, 송천, 영해평야, 상대산(관어대), 동해가 한눈에 펼쳐졌다. 여기에서 도올 선생은 저 멀리 보이는 송천 하구의 상대산 관어대와 동해를 조망했다. 그는 전국에서 그 짧은 시간에 600여 명이 일시에 영해에서 여기 형제봉 일대에 모였다는 것은, 그들의 신심(信心)과 동학혁명의 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 우리 금수강산이 살아있구나』를 실감한다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형제봉에서 이형수 화백과 필자 등
일행은 잠깐 쉬면서 사진 촬영도 했다. 다시 조금 더 올라가 형제봉 아래 임도 지점(공터)에 주차했다. 시각은 9시 40분경, 차량 이동으로 1시간 20분이 걸렸다. 이곳부터 형제봉(제1봉)까지는 걸어가는 산행이다.도올 선생은 일행과 함께 느릿느릿 발목이 빠지는 낙엽 쌓인 산길을 걸었다. 그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면서 소나무, 참나무 등 우거진 숲과 낙엽 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이곳의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면서 또 감탄했다.도중에 권 위원장이 산행 중 헛갈리는 산길을 알려주며 앞장섰다. 형제봉에 오른 시각은 10시 40분 도착. 임도에 주차하고 나서 여기까지 거의 1시간 걸렸다.
병풍바위를 둘러보는 도올 TV 촬영팀. 뒤에 보이는 암벽이 병풍바위다
병풍바위에서 고천제 지내다형제봉에서 잠시 휴식과 사진 촬영을 하고, 다시 일행은 병풍바위와 박사헌 움막집터를 향해서 갔다. 이곳에서부터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발목에 빠지는 낙엽을 밟고 서늘한 산길을 내려갔다. 일행은 병풍바위로 가는 도중에 시장기를 느껴 모두 점심을 먹었다. 시각은 11시 10분이었다.평탄한 숲길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11시 33분경에 출발했다. 20여 분의 휴식과 꿀맛같이 먹은 점심 덕분에 병풍바위로 가는 길은 형제봉을 오를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도올 선생 告天祭로 혁명 고혼을 위무하다다시 이정표를 뒤로하고, 동남쪽으로 내려왔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 왼쪽에 범상치 않은 듯한 바위가 길게 서쪽으로 수직으로 둘러 처져 있는 곳을 만났다. 여기가 바로 병풍바위다!『기념사업회』측의 설명을 들었다. 이 병풍바위는 그들이 수년 전부터 수차례 형제봉을 답사하고 고증을 거쳐 확인된 곳이라고 한다. 도올 선생은 이 병풍바위 확인은 우리 역사와 동학에서 획기적인 공을 세웠다고 말하며, 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병풍바위에 이른 시각은 12시경이었다. 병풍바위는 동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쯤 되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높이는 대략 15미터쯤 되어 보이고 동서로 뻗쳐있다. 그 아래쪽은 평평한 기운 지형이라 당시 동학도들이 노숙했던 장소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숙장소(야영지)가 병풍바위에서부터 박사헌의 움막집터 골짜기까지로 짐작이 된다.필자가 이태 전 봄(2021. 5. 29.)에 병풍바위에 왔을 때는 참나무 등 숲에 가려져 있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낙엽이 지는 철이라 바위의 실체를 그런대로 볼 수 있었다.일행은 먼저 박하선의 움막집터를 둘러보기로 하고, 병풍바위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라 10여 분을 내려왔다. 움막집터 도착은 12시 10분경이었다. 도올 선생은 박사헌의 움막집터를 둘러본 뒤, 다시 병풍바위로 올라와 고천제를 지냈다. 간단한 제물이 차려졌다.도올 선생이 고사 제문을 읽었다. 다음은 고사 제문 일부이다.『維歲次 檀紀 사천삼백오십육년 십일월 일일, 檀君의 후손 檮杌과 그의 同志들은 영해동학혁명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사무친 바램을 형제봉의 風流에 실어 無極大道에 내재하시는 하느님께 감히 昭告하나이다.영해혁명, 신미년 그날의 함성은 천지신명의 仁한 마음을 울리었으며, 그 사무친 한이 갑오동학혁명, 신돌석 장군의 의병활동, 기미년 삼월 십팔일의 영해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역사의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모든 민주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진실은 외면되고 병풍바위의 함성은 두껍게 덮인 이끼 속에 묻혀 있습니다.(중략)하느님이시여 이 영해를 보살피소서!하느님이시여! 이 민족을 보우하소서!하느님이시여! 바다와 땅을 공유하는 모든 생명에게 侍天主의 자각을 일깨우소서!하늘과 땅의 神靈과 氣化가 응집된 청수 한 그릇을 바치어 恭伸奠獻하오니 흠양하시옵소서. 上饗!도올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병풍바위 언저리를 지나 저 형제봉에 닿는 듯했다.산천은 의구하고 인걸은 간데없듯, 영해혁명 당시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수백의 혼백들이 그의 목소리에 감읍, 위무가 되었으리라!
표기가 잘못된 이정표
박하선의 움막집터를 둘러본 도올 선생은 영상촬영을 했다. 그의 말에 이번 영해 박하선과 움막집터와 병풍바위는 표영삼 선생님도 여기까진 와보지 못한 곳이라 감회가 깊다고 했다. 표영삼 선생은 천도교도이자 평생을 동학 연구에 몸 바친 동학 최고 권위자이시다.
박사헌이 은신했던 움막집터쓸쓸한 박사헌 움막집터도올 선생은 산행 도중에 이정표에『박학선 생가터』라고 한 것을 보고 지적하였다. 이름도 『박학선 아니라 박하선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박하선은 여기 움막집터에 살지도 않았다.도올 선생은 박하선은 이미 동학 탄압시 관에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인천리 집에서 1869년 말에 사망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박사헌이 아버지가 죽자 동학 탄압을 피신해서 여기에 은신했던 곳이다. 따라서『박사헌의 은신처』하고 해야 올바른 표기라고 지적했다.
움막집터를 돌아보는 도올 선생
이어서 곧장 영해혁명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움막집터를 돌아보았다. 그는 움막의 돌축과 병풍바위에 관해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이 돌담은 역사적 유물 그대로이다. 병풍바위는 문헌에는 나오지만 실제로 이 장소를 찾아낸 것은『기념사업회』 동지들이 갖은 고생 끝에 찾아낸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상 획기적인 새로운 동학 발원지를 찾아낸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동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그의 스승인 삼암 표영삼 선생님도 병풍바위는 찾지 못했던 곳』이라고 말했다.1870년 7월 이필제가 영해에 등장한다. 도올 선생은 이필제를 당시 직업적 혁명가이자 자유인으로 보았다. 그는 진주병영 공격 실패 후 영해로 잠입하여 박사헌에게 접근, 인천리에 머물면서 다섯 차례(五顧草廬)나 일월산 아래 윗대치에 은거한 해월에게 사람을 보내어 면담을 타진했다. 이러한 이필제의 집요한 면담 요청에 1871년 2월, 해월과 강수가 박사헌의 집(현 창수면 인천리)에서 이필제를 만났다. 이러한 문헌 기록에서 시간 차이로 볼 때 우정골 움막집터는 영해혁명 발발(1871년 3월 10일) 불과 수십일 전에 아니면 박사헌이 은신처를 물색, 1년이나 수개월 전에 미리 움막 등 임시 시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움막집은 『1871영해동학혁명』시 본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혁명 모의, 물자 조달 등이 이루어졌다.현재 움막집터는 돌담이 사각 형태이나 한쪽이 연결되지 않았다. 구조상 추정컨대 남쪽 공간은 방이었고, 돌축이 없는 쪽은 출입구이거나 목재 등으로 가죽을 단 부엌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후에 누군가가 다시 손을 대어 오늘날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남쪽의 움막집터 앞에는 200여 평쯤 되는 꽤 너른 평지 땅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 한쪽에선 샘이 솟아오르고 있다. 첩첩산중이지만, 한 가정이 능히 은신하여 거처할 만한 곳이었다.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당시 동학도인 박사헌은 아버지 죽음과 동학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이필제와 함께 혁명을 모의, 재기를 꿈꾸었으리라!현재 움막터 둘레는 바위산으로 수림이 울창하다. 도올 선생이 말하는 역사적 유물은 현재 방치된 채 남아있다. 그들의 역사적 공적에도 폐허가 된 유허지의 그 쓸쓸함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사실 돌멩이 하나라도 소중한 혼이 서린 역사적 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지게꾼 하느님이 은거했던 윗대치 마을도올 일행은 박사헌의 움막집터와 병풍바위 일대를 탐방하고 곧바로 창수령과 자라목을 넘어 영양 일월 윗대티마을로 향했다. 이곳은 수운 선생이 대구에서 옥살이할 때 제자인 해월에게 너는 멀리 날아서 도피하라는 그 유명한 고비원주(高飛遠走)의 명을 받고, 평해, 죽변 등지를 거쳐 영양 일월(대티마을)에서 장기간(7여 년) 은거하던 곳이다. 이 대티마을은 첩첩산중으로 관의 지목을 피하여 해월 선생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다시 동학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영해동학혁명으로 윗대티마을은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해월은 단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윗대치마을은 해월 선생이 5년여 은거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었던 동학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필자도 처음 가보는 곳이다.이날 도올 선생 일행은 영양 동학모임 인시천(회장 이상국) 회원과 농민회 관계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해월 선생이 은거, 공동체 생활했던 윗대티 마을을 둘러보았다. 오고초려로 유명한 이필제는 영해혁명을 위한 설득작업으로 해월에게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고 했다.
도올 선생 일행을 환영하는 인시천 회원들
인시천 회원들과 간담회
도올 선생은 이곳 윗대치는 해월 선생이 인시천(人是天) 사상 등을 창시한 유서 깊은 곳 해월 사상의 시원지라 할 수 있다고 한다.해월은 그야말로 순결한 인간으로서 산골 지게꾼 하느님이다.당시 산골 사람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사람이 하느님이다. 사람은 하느님같이 고귀한 존재로서 모두 평등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설법했으니, 그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월은 사람을 대할 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해월 선생의 온건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지게꾼 하느님!이런 해월이야말로 한국인의 심상에 심어야 할 하느님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올 선생은 해월 선생을 인도 간디보다 사상적 측면이나 인격적 면에서 더 위대하다고 했다.지게꾼 하느님인 해월은 전국 200여 곳 이상을 떠돌아다니며 동학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언제나 보따리 하나를 품고 다녔다. 그 보따리 속에는 스승 수운선생의 동경대전 등 말씀이 기록된 문집과 짚세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보따리 하나 들고 도피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최보따리였다.그는 어디를 가도 부지런했다. 농민들과 어울려 일을 하거나, 멍석, 바구니 등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깡마르고, 눈빛만 빛나는 시골 노인네 입에서 나오는 설법은 당시 어느 누구에게도 듣도 보도 못한 복음이었으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부패한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는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세상인 만민평등, 인간존엄 등과 같은 설법을 펴니 그들의 가슴에도 희망이 솟고, 눈물 나는 이야기였으리라.이런 지게꾼 하느님을 누가 감히 관에 고발하겠는가.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지도자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등을 점령하자 위기에 몰린 조선 정부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격멸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동학지도부는 도피하였다. 해월 선생은 도피 중 원주에서 체포되어, 1898년 7월 20일(음 6월 2일) 교형으로 순도했다.(處絞罪人東學魁首崔時亨)지게꾼 하느님, 해월 최시형! 그는 우리 역사에 영원하리라.그리고 역사의 역설 하나 덧붙인다. 전라도 탐관오리로 민중의 원성을 사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유발하고 파직, 유배되었던 그 유명한(?) 고부 군수 조병갑이 판사로 임명되어 해월 선생을 재판하는 판사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세도정치의 부패상으로 유구무언일 뿐이다.이날 윗대치마을에서 인시천에서 마련한 간략한 의식이 있었다. 인시천 모임 이상국 회장의 인사말과 대금연주(부용산)와 필자가 지은 시,『민중의 벗, 보따리』낭독이 있었다.윗대치마을 둘러본 도올 일행은 해가 질 무렵 곧바로 영양 주실마을의 조지훈 생가를 찾았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시 조지훈 선생께 동학 강의를 들은 인연을 이야기하며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고 했다.이후 영양읍에서『인시천모임』에서 마련한 저녁 자리에서 참석한 분들과 동학과 농촌문제 등 간담회가 있었다.
강연회장 입구
강연회장에 전시된 동학혁명 그림을 그리는 화가 영덕 출신 이형수 선생 작품3일째, 도올 선생 강연회11. 2. 수, 14:00-17:30강연회 날 오전에 도올 선생은 한말 전기의병장인 신돌석장군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았다.한편, 강연회 시작 전 영덕군수,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도올 선생이 이번 영해 강연에 대해 그 소회를 말했다.도올 선생은『이번 강연으로 우리 사회의 사람과 지역 사이에 편견과 벽이 깨지는 계기가 되어 서로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당시 수운 선생이 동학에 대한 영남 유생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핍박하는 가운데 동학은 성장했다.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너무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이 많다. 우리나라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벽, 남과 북의 벽, 불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 벽이 깨어지고, 오해와 편견이 사라졌으면 한다. 그런 뜻에서 이 모든 전체적인 것을 해소하도록 강연하겠다고 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영덕군민회관에서 도올 선생 강연 모습
또한, 모 지역에서 도올 선생 초청강연회를 준비했다가 무산한 사례를 들었다. 모 지자체의 도올 선생에 대한 거부반응 등 지역 분위기를 전하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에 안타까워했다.그러나 영덕군에서는 그러한 편견을 버리고 초청강연회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함을 표했다. 더구나 그는 이번 강연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덕지역에 관한 역사 연표를 소개했다.그는 이번 강연회를 통해 영덕이 크게 관광적 선전 홍보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참석한 영해 관계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한편, 영해혁명 당시 울진지역 동학지도자인 남두병 선생과 전의철 선생 등 생가 방문이 무산되었다. 이에 대해 후손들은 도올 선생께 아쉬움을 표했다. 도올 선생은 그의 저서인 <동경대전>을 후손에게 증정하기도 했다.
영해혁명이 담긴 영화『개벽』영상물(강연회장)
도올 선생 강연회이날 강연회에는 기념사업회 권대천 위원장의 인사말, 김광열 영덕군수의 환영사가 있었다. 먼저 사회를 맡은 권태용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도올 선생 소개가 있었다.도올 선생은 단상에 오르자 처음 인사말에서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참으로 어려웠고, 참 감격스럽다. 제 인생 있어서도 잊지 못할 자리가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경상도 지역을 돌아다니면 불안하지만, 그런데 전라도 사람보다 경상도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하는데 ……. 그것은 편견과 오해라고 했다. 김용옥 머리에 무슨 도깨비 뿔이 난 사람처럼, 나는 뿔이 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며……』 썼던 모자를 벗어 보였다. 그의 반짝 맨머리(?)가 나타나자 청중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도올 선생 왈,『자기는 정치인도 아니요, 순수한 철학자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서 보듯이 경상도의 보수적 기질의 그러한 풍조가 자기와는 무관하고 아무런 제약과 경상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그의 열정적 강연은 오후 2시부터 시작, 예정 시간을 넘겨 오후 5시 30분경에 끝이 났다. 청중 모두가 기립박수로 도올 강연 마지막을 장식했다.이후 강연회 참석자, 독자들과 만남에서 도올 선생 저서에 직접 친필 사인과 사진 촬영이 있었다.
강연회에 초청된 영해혁명 울진 후손들. (남상균씨 좌, 전동일씨 우)한편 이날 강연회에서는 영해동학혁명 당시 체포되어 고문치사 등 죽임을 당한 남두병 선생 후손(울진 매화 금매리 남상균), 전의철 선생 후손(기성 방율 범밭 전동일, 현 대구 거주)과 울진 사람들,『영양인시천동학모임(회장 이상국)』,『(재)포항동대해문화연구소(이사장 이석태)』 관계자와 회원 50여 명, 마산, 대구 등에서도 시민들이 참석, 모두 200여 명이 경청하는 등 타 시도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영해동학거사는 민란, 병란, 적변이 아닌 혁명이다.그동안 학계에서는 1871영해동학혁명(이하 영해혁명)을 두고 이필제난, 적변, 민란, 병란, 변란,교조신원운동 등으로 그 성격 규정에 따른 명칭이 분분했다.도올 선생은『영해혁명을 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 동학혁명이라고 하면, 1894 전라도 고부혁명인데, 영해혁명을 동학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혁명이 변질되는 거 아니냐고 시비를 거는데…… 이는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일갈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사회인문학 배경으로 걸출한 지식인 박하선과 강수를 꼽았고, 외부에서 진입한 직업 혁명가(?)인 이필제의 지략을 평가했다. 하부구조로는 영해평야와 동해바다, 산천 등 풍부한 농수산물이 영해지역을 풍요롭게 하여, 경제적 여유를 가진 민중에게 동학의 진보적인 깨인 의식이 내재 되어, 자연히 사회변혁 욕구를 가지게 했다.더구나 물산이 풍부한 영해지역의 경제적 여력이 수운 최제우 선생이 대구에서 감옥생활을 할 때 600금의 거금을 내놓은 곳이 영해·영덕지역이다.다시 말해 영해지역은 하부의 물적 토대인 경제적 여유가 마련되어 있고, 웬만한 아녀자들로 언문(한글)을 익혀 읽고 쓸 줄 아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깨인 의식이 내재하고 있었다.앞서 지적한바 같이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부사 등 지방관리에 대한 행정자문권, 조세 수취권, 문묘향사주도권 등 향권을 차지를 위한 구향과 갈등, 서얼 차별 등에 불만을 느낀 인계서원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신향 지식인들이 동학을 통한 사회변혁 의지를 혁명으로 표출했다고 보겠다.따라서 필자는 이번 도올 선생의 강연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영해혁명, 조선 왕조 명운을 끊다① 혁명이라는 것은 점이 아니라 면이다. 어느 한 시점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필자도 공감이 가는 명쾌한 정의이다.따라서 혁명은 모든 사건이 종합적으로 얽혀서 구조적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 변화, 즉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그의 혁명론은 주역의 (정괘)井卦, 혁괘(革卦)와 정괘(鼎卦)를 통해 말하는 독특한 풀이였다.②『영해혁명』은 민중이 조선왕조 명운을 끊은 최초의 사건(혁명)이다.영해혁명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 이후 모든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세계사적으로 프랑스 혁명도 황제를 단두대에서 처단했다.조선 후기 대표적으로 홍경래 난, 진주민란 등에서는 지방관리가 처단되지 않았다. 민중들이 지방관리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하지만 탐관오리인 영해부사의 처단은 이 영해혁명이 최초이다. 영해 부사 이정은 자기 생일날에 영해부민을 초대, 음식(떡국)을 제공하고는 그릇당 30금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불케 했다. 아주 취사하고 야비한 재물 착취방법이었다고 한다.영해혁명시 임금이 임용한 지방관리를 처단한다는 것은 조선 왕의 목을 친 거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이는 프랑스 혁명중 민중이 키요틴(단두대)으로 황제를 처단하고, 혁명의 불길을 지폈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대목이다.당시 민중들에게 영해부가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고 부시가 처단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조선 정부는 관군을 파견해 진압했다.이후 조선 정부는 영해혁명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동학도를 6개월여에 걸쳐 수사, 체포하고 가담자를 처벌했다, 수사 결과 처벌받은 물고, 자진, 효수, 교전 사망 등으로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외는 중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총사망자 포함 116여 명으로 당시 최대 희생자를 낸 역사적 사건이었다.혁명주모자급인 이필제가 능지처사 후 잠잠해지고,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의 모진 탄압에도 민중들 사이에 동학은 더욱 퍼져 나갔다. 그래서 동학의 잠재적 역동성은 23년 후 1894년 동학혁명, 한말 전기의병,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③ 영해·영덕이 실제적 우리나라 동학의 산실이다.조선사상사나 인간적 면모에서 박하선과 강수의 위대함이다. 왜냐하면, 박하선, 강수와 같은 걸출한 유학 최고의 지식인이 동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두 사람 모두 시대의 지성인이다. 더구나 박하선에 대해서는 최고의 평가를 했다. 박하선은 수운 최제우 선생을 끝까지 보필한 인물이다.그는 관의 고문으로 죽었다. 그래서 도올 선생은 지역에서 그의 역사적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나 기념비 등 건립이 요구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또한, 박하선은 최수운 선생 일대기(행장)인 『대선생주문집』을 남겼다. 강수의『도원기서』도 박하선의 저작을 참고하여 썼다. 어쨌든 이 두 인물은 이 같은 저작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동학사상의 맥과 흐름을 이었다는 점이다.④ 이필제! 끊임없는 사회개혁과 도전의식, 곧 혁명 정신이다.그의 아이디어로 교조신원 복위와 탐관오리 척결 등의 명분으로 영해혁명이 촉발되었다. 비록 영해에서 2일 천하로 혁명을 유발하고, 도피했지만 또다시, 문경에서 작변을 주도하는 등 끈질긴 의지의 혁명가로서 높이 평가했다. 실패도 혁명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지금 천도교에서는 이필제를 동학 조직을 와해한 인물로 보고 있지만 도올 선생의 평가는 달랐다.그는 체포되어 능지처사로 죽음을 맞았다. 그가 죽음으로써 조선 정부가 동학 탄압의 강도를 무르게 하였고, 최시형의 추적 시간 늦추게 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죽음은 동학에 빚진 것을 탕감했다.그는 난세의 풍운아 직업혁명가이자 자유인이었다. 진천, 진주, 영해, 문경에서 끊임없이 혁명을 기도하다 결국 목숨까지 버린 이필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도올 선생이 강연을 마치고 청중들의 기립박수에 인사하고 있다
전국을 뒤흔든 영해 민중의 꿈, 대동세상!⑤ 영해혁명 당시 전국의 민중들이 일시에 600여 명이 모였다.영해혁명 유발은 이필제도 해월도 아닌 영해지역 등의 민중 전체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시개벽에 공감한 당시 전국의 민중들이 한 사나흘 만에 600여 명이 모인 것이다.이들은『수운교조신원』회복뿐만 아니라, 광제창생 등 궁극적으로 수운의 다시 개벽이 오는 세상을 갈구했다. 따라서 영해혁명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개혁이 아닌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혁명하려는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지금에 와서 보면 조선왕조의 봉건적 체제를 거부하고, 만민평등, 자유 등의 인권 정신을 알게 모르게 민중의 자주 의식을 구현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3년 후 1894년『갑오농민혁명』도 궁극적으로 영해혁명의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영해혁명은 비록 좌절되고 실패했지만, 근세 이후 우리나라 모든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해월 선생은 영해혁명을 계기로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정치지도자로서 변신 되었다고 평가했다.한편 도올 선생은 인도의 간디보다 해월 선생을 사상적으로나 인간적 면모에서 더 위대하다고 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독자에게 사인해주는 도올 선생
이상으로 강연 요지를 서술했으나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씀 깊이를 다 못 전한 것 같다.한편,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52년 전, 그때를 생각해 보시라.그리고 당시 민중들이 가히 폭발적으로 왜 동학사상에 열렬히 공감하여 지지했는가를. 지배계급인 조선 왕조가 왜 그들을 그토록 핍박하고 모질게 탄압했는가를, 그리고 오늘 우리가 누리는 세상은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를 말이다.당시 교통수단이라곤 대체로 두 발로 걷는 게 예사였고, 신발은 짚세기를 신었을 것이다. 의복이라곤 겨우 추위를 면할 솜옷이나, 아니면 무명의 바지저고리였으리라. 그리고 식량과 휴대품을 넣은 괴나리봇짐을 메고 다녔다. 모두가 이런 차림으로 한강 이남 12지역의 영해, 영덕, 평해, 영양, 안동, 울진, 상주, 노성(충청), 울산, 칠원(경남), 진보, 남원 등지에서 농민, 보부상, 선비 등으로 구성된 동학도인들이 천리길을 바람처럼 달려 형제봉 우정골 병풍바위 아래 집결, 혁명의 횃불을 들었다. 이들의 온 가슴 속에는 시천주를 품고, 다시개벽을 꿈꾸면서 영해혁명 대열에 목숨 걸고, 참가 진격했으리라.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 세상, 여기까지 온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 평화롭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하나인 영해혁명이 그렇다. 당시 희생된 그들에게 감사할 뿐이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하나의 점이 아닌 면을 만들기 위한 혁명의 과정일 뿐이다. 모두가 살맛이 나는 모두의 대동세상으로!도올 선생은 이번 강연회에서 지역과 사람간, 남북간의 오해와 편견의 벽을 깨어야 함을 말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여, 남북통일로 가는 길이『다시개벽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런 뜻에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우리 역사를 잊은 자에게는 다시 개벽은 없다.며칠 전 병풍바위 앞, 도올 선생이 제문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나의 귓전을 때린다.박하선 선생님 나오소서!강수 선생님 나오소서!해월 선생님 나오소서!이필제 혁명투사여 나오소서!이날 필자는 도올 선생의 강연을 경청하면서 기록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가끔 강연장을 둘러보니 청중 모두가 모두 진지하게 경청하는 분위기였다.이번 도올 선생의 강연을 통해『1817영해동학혁명!』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학에 대한 성찰과 민중이 깨임으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진정한 역사의식을 성숙시키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래어 본다.한편 애초 이번 도올 선생의 방문계획에는 울진지역에서 영해혁명의 역사적 인물인 남두병 선생 생가와 전의철 선생 생가 등 방문이 예정되었는데, 바쁜 일정 관계로 무산되었다. 참 아쉬운 점이다.
[울진뉴스 기자 uljin@ulj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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