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4.02.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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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분제도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인과 천민의 둘로 나뉘는 법적으로는 『양천제』였다. 하지만 실제 사회적으로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제』였다. 결국, 지배계급인 양반(문반, 무반)만이 정치 권력과 사회질서를 좌지우지하였다. 

신분에 따른 그 차별 대우가 엄격했다. 양반이더라도 서얼들은 관료가 되는 길은 엄격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전제한 사회구조이고, 인권을 우선하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선생도 그의 어머니가 재가녀였다. 재가녀란 한번 시집갔다가 다시 혼인한 여자를 말한다. 양반이더라도 재가녀와 혼인해서 낳은 자식은 양반의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까닭에 신분상으로 『서얼』이라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 수운선생은 재가녀의 아들로서 벼슬길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무반의 길로 출세하고자 무예를 연마하였으나 그마저 그만둔 경력이 있었다. 

조선 후기 영·정조대의 신분 완화 정책에 따라 지역에는 서얼 위상과 역할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영해지역도 같은 양반 출신이지만 혈통이 다른 서얼 등의 해묵은 차별로 그들끼리의 반복과 대립이 있었다. 소위 향전(鄕戰)이다. 

이 향전은 구향과 신향의 반목과 대립이 결국 『1871영해동학혁명』의 발단 배경이 되었다. 

이 영해혁명 주도자의 신분이 신향 출신들의 대부분이 재가녀의 서자였다는 것은 이미 앞 장에서 기술했다.


조선조 양반과 신분세탁 

조선은 철저한 신분 계급사회였다. 양반인 문반과 무반으로 짜인 통치 체제가 조선왕조 500여 년을 작동시켰다. 양반이 아니면 관리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가 하층민인 천민, 노비 등 계급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백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민은 면천(免賤)이 되고자 했고, 평민은 양반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양반의 수는 얼마였을까? 전 백성의 약 2%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등을 거쳐 신분제가 크게 동요되었다. 

전쟁 중 지배계급인 절대자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에서 일반 평민계급인 백성들은 일부 유생과 연합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그렇기에 임진왜란 후 지배계층은 백성들 보기에 그 위신과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름만 왕이지 지도자로서 무능할 뿐이었다. 


임진왜란시 천민 노비들은 신분 족쇄인 노비 부적(장부)을 끌어내 불태우기도 했다. 그들의 한 많은 인생을 이렇게 저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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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지방 관아인 동헌에서 수령(중앙)과 아전(댓돌 위 좌우)이 죄인을 문초하는 모습. 오마이뉴스(다음에서)


조선에서 한때 노비 수는 전체 백성 수의 40-50%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양반이나 양인이 되는 방법으로 면천제가 있었다.

 

노비가 양인으로 되는 신분 면천에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우거나, 나라에 큰돈을 기부하는 방법이 있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워 면천으로 양인이 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노비가 자신의 인생에서 면천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조선 초기 2%였던 양반 수가 증가하여 조선말에는 10%쯤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백성 대다수는 평민과 노비(전인구의 절반) 이상이었다. 

그런데 조선말에서 대한제국 시기 조선 민중 대다수가 양반을 자처했다. 왜일까?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분출된 민중의 강렬한 요구에 밀려 이루어진 것이 신분 차별 폐지였다. 그래서 같은 해인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분제 족쇄에서 해방된 많은 평민이 선호했던 것은 집안 족보였다. 그래서 양반만이 가질 수 있는 족보를 만드는 사회 분위기로 흘렀다. 이른바 양반족보를 위조한 신분 세탁이다. 그 방법이 족보 사고팔기와 끼워 넣기 등이다. 

사고팔기 수법은 가난한 양반이 족보가 없는 평민 부자의 집안을 양반 집안에 등재해주는 거다. 

또 하나는 노비계급이었던 사람들이 주인이었던 양반 집안 족보에 자기 집안 끼워 넣기다. 그래서 당시 절반 정도가 성도 없는 노비 신분은 민적법이 생기면서 주인의 성과 본관을 만들고, 이름을 갖는 사례도 있었다. 


이 민적법은 호적에 관한 법률이다. 요즘 주민등록의 원조다. 아마 민적법에는 본관 등을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 본관과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대다수가 족보를 갖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 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족보 만들기가 유행되어 족보 위조 전문 장사꾼이 활개 쳤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99%가 양반 가문이며 족보를 가졌다고 한다. 

21세기, 이제는 한글족보, 전자족보, 새롭게 창안한 가족 관련 문서가 등장하고 있다. 성씨도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고, 가족관계가 다양한 사회가 되었다. 


오늘날 족보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족보는 진짜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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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가마를 탄 수령의 행차, 기산풍속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역의 민간 세도와 향회·향청

조선 정부의 고을 수령은 조정에서 공식으로 임용해 지역에 나가 백성을 다스렸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비공식 민간정치세력인 유력 가문이나 양반을 현실정치의 동반자로 인정하여 수령을 돕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고을의 수령은 외지 출신이었으므로 고을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든 민간조직이 향회·향청이었다. 이 조직은 처음에는 지방수령의 자문보좌기구 성격이었으나 차츰 지역 향촌에서 민간세도의 권력 기구로 발전하였다. 그것이 통치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역 민간 세도를 정치에 활용한 셈이다. 대체로 그 지역(향촌)의 토호세력이나 유력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 향청의 주요 간부인 향임은 지역 양반 세력들이 독차지로 구성되었다. 이들 일부는 지방 하급 관리인 아전세력으로 진출하였다.  

그래서 고을 수령은 한곳에 오래 살면서 지역 사정에 밝은 아전들을 장악해서 다스렸다. 

이들은 토착적이고 세습적인 성격을 가지며 해당 고을의 조세 징수, 공부(貢賦) 징수, 역역(力役), 지방군 동원, 호구 조사 같은 일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아전 세력은 조상이 양반이라는 덕에 한번 공무원이면 또 철 밥그릇으로 하급 공직을 세습했다고 보아진다. 조선 후기 이들은 탐관오리와 결탁하여 환곡 조작 등 부정부패의 원조가 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민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같이 조선 후기 중앙에는 몇몇 유력 가문의 세도 정치가 있었다면, 지역에는 양반 토호 세력의 지역 세도가 있었다. 윗물과 아랫물이 모두 흐려진 이른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아닌 상악탁수였다(上惡濁水)였다. 위아래 지배계층이 모두가 부패해 정치와 도덕이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황혼 녘이었다. 이를 동학과 관련하여 잘 표현한 현대 시가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한국 문단에서 4.19혁명 시인으로 유명한 신동엽(申東曄, 1930년 ~ 1969년)이 있다. 그가 쓴 장편 서사시『금강』이라는 작품 제2장에 수운의 주류팔로(1844-1854, 周流八路)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주류팔로란 말 그대로 수운이 사방팔방으로 10여 년간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기였다. 

이 시기는 수운의 생애에 있어서 국내의 세상 민심, 백성의 생활상과 국제정세의 탐문과 흐름을 알고, 그가『보국안민』,『광제창생』,『동귀일체』 등을 생각하는 종교적 사유기였다.


시인은 전반부에서는 수운 선생이 세상 체험한 조선 후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나타내었다. 수운은 『뼈만 앙상한 이왕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조선왕조가 명운이 다하여 가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예수나 석가 같은 인물로 세상을 구원할 수운 선생이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신동엽 시인은 동학을 『영원의 빛나는 하늘』로서 노래하였다. 그는 이미 동학을 우리 민족 사상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짚신 신고/수운(水雲)은 3천리/걸었다//

1824년/경상도 땅에서 나/열여섯 때 부모 여의고/떠난 고향//

수도(修道) 길/터지는 입술/갈라지는 발바닥/헤어진 무릎//

20년을 걸으면서//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農奴)/학정/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

2천년 전/불비 쏟아지는 이스라엘 땅에선/선지자 하나이 나타나/여문 과일 한가운델/왜 못 박히었을까//

3천 년 전/히말라야 기슭/보리수나무 투명한 잎사귀 그늘 아래에선/너무 일찍 핀/인류화(人類花) 한 송이가//

서러워하고 있었다//

1860년 4월 5일/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수운은/하늘을 봤다/바위 찍은 감격, 영원의/빛나는 하늘(신동엽 장편 서사시 『금강 제2장』 전문)


영해지역에도 민간자치기구격인 향회·향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위 5대 성씨인 양반 가문이 빵빵하여 소위 소안동을 자처하고 행세하던 부자 동네에 1871년 신미년에 영해가 갑자기 600여 명의 동학도에게 점거당했으니, 당시 지역 기득세력이자 소위 양반이었던 향촌 유림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양반 동네에 역적 무리라니 그것도 조정에서 엄금하는 동학이라고 하니 그들에게는 하늘까지 놀라자빠지는 경천동지였다. 이 사태를 기록한 민간문헌이 있다, 그게 바로 영해지역 유림에서 『1871영해동학혁명』을 기록한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라는 문헌이다. 


『신미아변시일기』, 도유사『남유진南有鎭』

『신미아변시일기』는 지금까지 영해 출신 도유사 남유진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문헌에는 개인 기록자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표제(제목)가 한자로 鄕會中 辛未衙變時日記로 되어있다. 그렇기에 기록자가 특정 개인이 아닌 공적 기록 의미를 지닌 향회중(鄕會中)이라고 했다. 영해민간자치기구인 향회가 이 영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1871년 음 3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날마다 기록되지 않았으나 총 27일간의 기록이다. 그 내용은 영해동학혁명 후의 수습 상황과 부사 이정의 살해와 그의 영구(靈柩)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기록했다.


또 한편으로는 영해동학혁명을 진압한 뒤 영덕 현령 정중우가 관내 유림을 초청해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에 관해 남긴 기록이 신미동학시영덕수호(辛未東學時盈德守護)에 관한 시첩(詩帖)이다. 

이 두 기록에는 남유진 등 향회 측의 개탄스러움과 수습 상황을 나타내고 있으나 동학군들이 왜 이러한 혁명 거사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분석 등은 없다. 


하지만 辛未衙變時日記와 辛未東學時盈德守護詩帖은 당시 150여 년 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주요한 1차 역사 기록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신미아변시일기』와 『신미동학시영덕수호시첩』은 최근 번역 발행되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삼을 뿐이다.


『적들은 성문에 들어올 때 먼저 사람을 시켜 사면 담장의 이엉에 불을 질렀다. 동헌이 불과 연기에 휩싸였다. 이런 중에 모두가 도망가고 어린 종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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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아변시일기 1871년 음 3월 10일 . 영해동학혁명 상황을 나타낸 영인본 원문 

 

그곳의 난리는 바깥에서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하늘에 가득한 불빛만 보였고, 대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백성들은 관아에 변이 일어난 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미처 어찌할 수 없는 사이에 감히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다만 숨을 생각만 하여 관아가 온통 텅 비게 되었다. 

이때 괴시(槐市)에 사는 남유진이 곧바로 위태로운 성에 들어가 관리들과 함께 전패를 병자각으로 옮겼다. 


이 각은 곧 남유진이 기거하던 정자이며, 네 번째 병자년에 지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남유진은 이어서 노비 장정과 정자 지기를 시켜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다. (이하생략)』

남유진은 1871 영해동학혁명시 도유사(都有司)였다. 영해지역의 향교를 관장하는 최고책임자로서 그 지위에 올랐다. 따라서 도유사는 부사나 군수의 자문에 응하는 등 민간권력자였다. 당시는 영해 부사 李정이 동학도에게 죽었기에 공적 권력은 공백 상태였다. 


그는 영해동학혁명시 초기 수습자로 등장한 인물로서 공적 권력을 대신하여 그 공백을 일시로 메웠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일부 관리를 이끌고 영해부 관아로 들어가 전패를 병자각으로 옮기는 등 상황을 수습한 것은 동학군이 3월 11일 오후에 퇴각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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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괴시리 소재 남유진 선생이 건립한 물소와 고택 전경


전패란 각 고을 객사에 봉안했던 왕을 상징하는 위패를 말한다. 이는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동지와 설, 국왕의 생일날 등 수령과 백성들이 이를 모시고 축하 의식을 치렀다. 

신미아변시일기는 뒤에 들은 이야기를 마치 그날 3월 10일의 사건으로 되돌려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丙子閣(병자각)은 곧 순조 병자년(1816년)에 지은 건물이다. 이 병자각에 전패(위패)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과 관리가 아주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 

그렇기에 도유사 남유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영해부 관아에 들어가 전패를 서둘러 병자각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병자각은 현존하지 않는다. 


한편 영해면 괴시리에는 영해동학혁명의 사후처리를 맡아 활약한 도유사 남유진 선생의 물소와 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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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패 모습. 충북일보 2014. 11. 04일자


동학군 3월 10일 밤, 영해부 관아 완전 장악하다. 

영해 관아 진입시 대포의 위력에 놀란 동학군들은 우왕좌왕했다. 일시에 주춤하고 진입을 늦고 일부는 흩어져 관아 밖으로 도망쳤다. 사실 그들은 훈련을 받지 못한 비정규군이었다. 

최시형이 보낸 사발통문을 받고 일시에 전국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의분 찬 동학군들이었다. 무기리고는 죽창과 칼, 몇 개의 화승총이었다. 실제 대포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대포의 위력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상당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 먼저 소리부터 화승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불랑기포 소리에 간이 떨렸을 것이다. 


불랑기포 탄생 기원은 중국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을 통해 유입된 것을 명나라에서 복제 생산한 것이 시초이다. 불랑기라는 이름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서양인들을 부르던 통칭 『파랑기』(프랑크)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대포 이름이 불량기였다.


불랑기포의 포격에 동학군 전열이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자 이필제가 겁먹지 말자는 벽력같은 외침으로 다시 재진입했다. 관군이 쏜 대포에 4-5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강수도 얼굴에 파편으로 보이는 것에 상처를 입었다. 


동학군들은 다시 관아를 수색하고 일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했다. 일부는 쌓아두었던 목재에 불을 놓았다. 정자에도 불길이 붙었다. 밤하늘에 불길이 치솟아 흐늘거렸다. 

이렇게 하여 3월 10일 밤 10시 30분경 동학군들은 영해부관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동헌과 둘레는 타오르는 연기와 부서지고 넘어진 관물과 옷가지들로 어지러웠다. 

한때 격렬했던 소요 사태는 잠깐 숨을 고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적막감이 영해 관아 둘레에 떠돌았다. 


당시 죄인 문초 기록인 『교남공적』에 나타난 진술자의 증언 한 토막을 살펴보자. 1871년 4월 22일 죄인 경주 양인 박명관(효수당함)의 진술이다. 오늘날 피의자의 진술조서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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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동학혁명군이 영해부관아로 기습 점거하는 장면. (영화 개벽에서)


『나는 지난 3월 7일에  영해 우정동 전국의 동학도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우두머리인 이제발을 만나보았다. 

또 그날 밤에 영해 관아에 들어갈 때 나는 횃불을 들고 동헌으로 바로 갔다. 갑자기 포를 쏘는 소리에 지휘자도 놀랐다. 


혁명에 참여한 동학도들이 성 밖으로 도망가려 하자 우두머리라는 사람이 여러 사람을 나무라면서 대포 소리 한 번에 겁먹지 말고 이미 시작된 것이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고 인솔해 들어갔다. 

이때 도인들 가운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는데 장기(지금의 포항시 장기면)에 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성)씨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강사원은 탄환이 얼굴을 스쳤는데, 부상이 있었으나 목숨에는 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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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포 발사 전투 장면. mbc


나는 대포가 겁이 나서 성 밖으로 물러나서 밭에 엎드려 숨어 있다가 다시 동헌으로 들어갔다. 이날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 가장 친한 사람은 강사원이다. 

그 밖에 이름 모르는 평해전씨 숙질, 충청도 김씨가 변란의 그다음 지도자이다. 나는 길 중간에 영해부 안에 움직임을 미리 살핀 사람과 횃불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위의 경주 양인 박명관의 진술조서에서 알 수 있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제발(이필제를 말함)이 사태의 우두머리이다. 대포 소리에 모두가 놀랐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도망가려 해서 이필제가 겁먹지 말라고 수습했다는 것,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고 강사원도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박명관은 겁이 나서 밭에 숨어 있다 다시 동헌으로 들어갔다는 것. 지도자는 평해 전씨가 있고, 그다음 지도자는 충청도 김씨라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총에 맞은 사람은 아마 대포에 맞은 사람 같다. 문헌에는 영해부 관아의 관헌이 총을 쏘았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대포로 동학군에 대응했던 것으로 나온다. 

강사원의 총상도 아마 대포 파편에 맞은 상처로 보인다. 


평해 전씨는 아마 전영규, 전동규 형제와 그 조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김씨라고 진술한 인물은 이필제의 참모격인 김낙균을 두고 말한다.


이들 동학군들은 관아에서 인부를 찾아 지도부가 가졌다. 인부는 관아의 행정공문서를 결재하는 도장으로서 오늘날 기관장의 직인과 같은 것이다. 

이들이 인부를 탈취한 까닭은 영해부를 점령하여 행정행위를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필제는 중군의 임무를 부여받은 박동혁이 영해부 진입전투에서 사망하자, 강시원(강수)에게 다른 사람에게 중군의 임무 부여를 하라고 지시한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중군 임무 부여시 이 관인으로 행정행위를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인부는 관인을 말한다. 관인은 중앙과 지방의 관청이나 군영에서 공무를 보는데 쓰였던 인장이다. 임금이 문서에 찍던 옥쇄도 관인이다. 관인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중요한 신표 중의 하나로써 신분이나 용도에 따라 재질이나 크기 등이 엄격히 규정되었다. 조선시대 관인 크기 규정은 조선 건국 11년 후인 1403년 태종이 처음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왕조의 관인제도는 몇 차례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1485년에 편찬된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영해동학혁명시 울진 동학도의 활동

1817 영해동학혁명시 울진지역 동학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참여자 수는 얼마였을까? 등이 궁금한 대목이다. 

그 활동은 대체로 교남공적, 적변문축 등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진술을 근거로 몇 인물만 간략히 소개한다.

먼저 참여자 수만 해도 소수설과 다수설로 나뉜다. 학계에서는 울진 쪽 참여자 수는 소수설로는 100여 명에서 150여 명이다. 구전에서는 500여 명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다수설인 500여 명은 영해동학혁명시 전국에서 모여든 전체 숫자로 보인다. 

당시 지도자급 주요 인물은 울진지역에서는 남두병, 전영규, 전동규(전동규, 전인철, 전의철 모두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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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부(관인)를 기록한 문헌으로 1797년부터 1870년까지 중앙과 지방의 관인을 주조한 기록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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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방관리들이 행정문서에 결재하던 관인. 서울고궁박물관

 

① 영해혁명 창의 소모문을 쓴 남두병

남두병(1871∼1871)은 영양 남씨로 울진 매일리(현 울진군 매화면 금매1리) 출신의 유학자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남양파, 남양피, 남칠서이다. 모두 동일인으로 남두병을 말한다. 칠서는 그의 호다. 

그는 영해동학혁명시 창의 민병을 모집하는 소모문을 쓴 인물이다. 소모문은 일반인들에게 혁명 참가를 유도하고 격려하는 글을 말한다.

최근 남두병의 소모문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그 내용을 두고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어 다음번 기회에 검토하여 후술하도록 한다.

교남공적 등의 기록에 따르면 남두병 선생은(당시 유학자, 현 매화면 금매리)는 남씨, 김씨, 전씨 등(남유항, 남유기, 남유병, 전청오, 전원이,장지엽 등)의 집안을 인솔하여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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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벽중 푸른 옷을 입고 영해동학혁명군을 지휘하는 이필제 역의 김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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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벽중 수운 선생이 멀리 달아나라는 (고비원주)

지시를 받고 영양, 평해·죽변 등지를 떠돌던 장면. 최시형 역의 이덕화

 

또한, 그를 두고 인물평(교남공적)을 하기를 『남두병은 제발과 더불어 둘이면서 하나이다.(중략) 무리를 규합해서 울진에서 소리와 세력으로 일으켜서 영해의 동학을 모의하는데 호응하였다. (중략) 여러 번의 심문에서도 계속 잡아떼어 감히 잘못을 벗어날 계획을 세웠으니 소집하고 모이는 글(소모문)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을 승복함이 없이(이하 생략)』

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병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이필제와 교유를 하면서 세계사적 조류와 시국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사회체제 변혁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으로 치면 선구적 진보 인사이다. 그는 영해동학혁명 후 체포되어 대구 경상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이별시를 남기고 옥사했다. 

당시 그의 아들이 옥바라지를 했으나 시신은 수습지 못해, 고향 금매리에 의관장을 했다고 한다.』 (후손 현 울진 매화 금매리 거주. 남상균 증언, 68세)


이같이 남두병은 영해동학혁명 이전부터 이필제와 교유가 있었고, 이필제의 권유로 소모문을 작성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어쨌든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유학자의 신분으로 동학에 입도하여 조선왕조에 반역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집안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② 무기를 공급한 현직장교 전의철

전동규(전인규, 전인철같은 인물임)은 현 기성면 방율 출신이다. 전동규는 평해 역인으로 일했으나, 능력이 탁월해 무기를 만드는 공장의 책임자로 평해군 장교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장교는 지역 군현에 읍성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는 하급 무관이다.

그는 영해혁명시 동학군 별무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그는 죽창 180개를 만들어 영해 우정동 주막 삼거리에서 3월 10일 저녁 영해관아로 진격하는 동학군들에게 지급하였다고 한다.


『교남공적』에는 그를 평하기를 『전인철(전동규)은 본래 역에 속한 천한 신분에서 읍교의 반열에 오른 무관 장교로서 간교함이 넘치는 습성을 가지고 이제발과 공모하여 명색이 동학 대열에 중군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죽창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여 공급하고(중략) 화를 불러들인 것은, 형제 숙질 조손들을 함께 불러들여 한 덩어리를 이루었으니(이하생략)』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영규, 전인철(전의철, 전동규 동일인임) 2인은 모두 정선 전씨로 집안 사촌간이다. 전영규는  평해 지역에서 동학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영해동학혁명시 참가자 무리 중에 두 번째 가는 우두머리급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는 양반인 남시병을 훈장으로 들여 집안 자제들을 사교육을 시켰을 정도로 재산을 가진 인물이었다. 전영규는 영해동학혁명 후 관아에 체포되어 자진(자살)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집안 훈장 남시병은 심문 과정에서 무관함이 밝혀져 풀려났다. 평해사람 황억대가 그의 매형이었다. 황억대는 보부상으로 영해관아공격시 연환(화승총의 납탄환)을 차고 돌격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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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방율마을에 사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이정로(88세) 어르신이 필자가 방문(2020. 11) 시

전의철 장군에 대해 구전을 증언하던 모습.

 

이 같은 사실에서 영해동학혁명 당시 기성 평해 일대의 정선 전씨가문에서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영규(전동규 사촌)는 1871 영해동학혁명 전 평해를 방문한 해월 선생에게 이필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만나 볼 것을 권유했다. 

해월 선생은 이필제의 영해부관아 점거 계획에 대한 지역 동학도인의 의견을 청취코자 평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전동규가 영해동학혁명시 무기 관련 담당으로, 죽창과 칼을 제조, 공급하였음을 알 수 있는 구전이 지금도 기성 일대에 전해오고 있다. 


『전동규는 기성 방율의 자기 집 뒤에 대나무 숲에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영해동학난리 때 죽창, 몽둥이, 장검, 화승총 따위를 만들어 공급했다고 한다. 

또한, 500명을 이끌고는 영덕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대패하고 다른 곳에 숨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이 같은 구전을 전의철 생가 동네 이정로(88세) 어른이 필자에게 증언했다. 


『교남공적』에서는 남두병을 두고 인물평을 하기를 『남두병은 제발과 더불어 둘이면서 하나이다. (중략) 무리를 규합해서 울진에서 소리와 세력으로 일으켜서 영해의 동학을 모의하는데 호응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같은 기록에서 전인철은 『도적의 대열에 아우와 형, 아재비,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를 끌어들인 자(이하생략)』라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동규의 생가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에 제2의 민가가 있는 대숲에서 대장간을 두고 무기를 만들었다고 후손인 전동일씨(대구거주)가 필자에게 증언하여 현장을 방문하여 확인한 바 있다.(2021. 9. 12.)


당시 평해, 울진지역 동학도의 참여 수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정확한 숫자는 미상이다.

그리고 전동규, 전인철, 전의철은 동일 인물임을 전동규 후손(전동일 대구 거주)에 의해 확인되었다. 전동규는 족보에 등재된 이름이다. 

기성 방율 마을 들머리에 세워진 전의철 추모비에는 전동규와 전의철 두 이름이 같은 인물로 새겨져 있다. 

문헌기록에 나타난 1871년 영해동학혁명시 울진동학도의 참여자 상황은 다음 표와 같다.


이 표는 영해동학혁명이후 체포되어 관의 심문 진술에 나타난 인물들의 명단이다. 

체포되지 않은 참여자는 지금까지 확인 미상이다. 이 밖에도 다수의 관련자들이 도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1871영해동학혁명시 울진 지역에서 참여한 동학군들의 활동을 대략 살펴보았다.


남두병 선생은 선비이자 유학자였다. 당시 조선왕조에서 엄금하는 동학 신봉은 역적이었다. 그것은 성리학에 반하는 이단 사상이자 『좌도난정』이었다. 그래서 보수 유림의 공격 대상이었다. 

더구나 수운 선생 신원 운동에 동참한다는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었다. 

남두병 선생은 선비로서, 선비답게 그 생을 의롭게 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전의철은 현직 무관(장교)으로서 『영해동학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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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관아를 방어해야 할 의무를 가진 지역의 무관으로서 근무한 그가 이러한 의거에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관리들도 조선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조선 민중에 깊숙이 포덕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당시 불온한 진보 사상이었다. 불온한 진보사상인 동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한 남씨 일가와 전씨 일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시대마다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희생의 태도로 용기 있게 당시의 세상을 바꾸고자 동시대인보다 조금 앞장서서 나아갔을 뿐이다. 


역사에서 용기 있게 조금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더욱 평등해지고 자유는 더욱 자유로워졌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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