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4.03.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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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과 관련한 『교남공적』이라는 문건이 있다. 이 문건은 영해혁명 후 조선 정부가 영해부 관아를 습격한 동학군들을 잡아들여 심문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아직 완전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일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동학 지도부는 영해부 관아를 점거하여 일시적 통치행위(?)를 하였다. 그 시간의 경과는 16시간이었다. 3월 10일 밤, 10시 30분경, 영해부 관아를 기습 점거 후 3월 11일 날 오후 3시경에 해산할 때까지였다. 병풍바위에서 출발하여 영해부 관아 점거 후 다음 날 각자도생으로 흩어진 날 수로 이틀이다.


그날 밤 영해부 관아 동헌에 불이 밝혀졌다. 어수선했던 관아도 일시에 정적이 흘렀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흐릿하다. 음력 보름이 닷새나 남았지만, 반달은 부풀어져 보름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한 무리의 동학군들이 영해부 관아 서쪽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최시형 일행이었다. 시각은 자정이 넘은 시각인 미시(未時)였다. 지금 시각으로는 밤 01시-03시이다. 철수 시각도 필자의 추정일뿐이다. 그들이 영해부 관아에서 일찌감치 철수한 것은 사전계획 된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아마 영해부관아 기습 진행 과정에서 지도부가 최시형 선생의 안위를 걱정해 미리 도피시켰을 수도 있겠다. 이때 함께한 인물은 영양 정치겸, 이군협, 장성진, 강수 등이었다. 이들이 가는 곳은 일월산이었다. 

 

일월산은 최시형이 수운 선생이 대구 감영에서 순도 직후 숨어들어와 있었던 곳이다. 아무래도 일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라 숨어지내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일월산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산(1293미터)이다. 영양군 일월면과 청기면에 걸쳐 있다. 두 개 봉우리가 있다. 동쪽 일자봉(日字峰, 1,219m)과 서쪽 월자봉(月字峰, 1,205m)이 있다. 산세가 웅장하고 평탄하다. 해돋이와 달맞이를 하기 좋아 일자, 월자봉이라는 설과 산마루에 천지가 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 모양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다. 

 

해월 선생은 아마 판단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1863년 수운 선생 순도 후 해월 선생은 7년여 동안 일월산 상죽현(윗대치)에 골짜기에 은거하며 동학 조직 재건에 나섰던 곳이기도 하다.


해월, 너는 높이 날아 멀리 나아가라! 

최시형 일행은 영해부 관아를 빠져나와 걸음을 재촉해 영해들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서둘러 나아갔다.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영해부 관아를 벗어나자 너른 영해들판이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동녘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그 너른 들판에 봄기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어느새 봄바람에 성큼 자란 풋보리가 살래살래 잎을 흔들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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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와 영양을 이어주는 울치재 모습(디지털영덕문화재단)


그들은 영해와 영양의 관문인 울치재(창수령)를 향해 인천리 쪽으로 사라져 갔다. 저 멀리 동해파도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가고 있었다. 형제봉 밤하늘에는 스승 수운 선생의 유시(遺詩)처럼 달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영해와 영양 경계의 이름 모를 고개를 넘어가면서 수운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시형 일행이 영해부 관아를 퇴각하면서 영해와 영양 경계를 넘어간 퇴각로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①영해부 관아→송천들판→인천리→울치재→영양읍 기산리→문암동→일월산 용화리 윗대치(상죽현)

 

②영해부 관아→송천들판→인천리→허릿재(홀리령)→오령(옷재, 영덕, 영양, 울진 3군의 경계 지역)-영해 창수면 백청→영양읍 기산리→문암동→영양 일월산 용화리 윗대치(상죽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두가지 설에 대해 영양에서 동학모임(인시천)을 이끌고 있는 이상국 회장(인시천 회장, 영양 일월산 밑 거주)은 ②번이 영해에서 영양 일월산 윗대치로 오는 가장 빠른 지름길(백청과 옷재)이라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②번 길을 택한 것은 당시 가장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다시 한번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수운 선생은 순도 전 체포를 두 번 당했다. 한번은 1861년 6월 동학 포덕 이후 폭발적으로 동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경주 유림은 수운의 가르침을 서학으로 몰기 시작했다. 이때 혐의는 수운 선생이 교묘한 사술(詐術)로서 백성을 속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윤선달이라는 사기꾼이 경주 부사와 짜고 수운 선생의 보석금을 갈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제자들과 동학도들이 탄원하고 항의하여 석방되었다. 

 

이후 수운 선생은 그러한 음해와 문중의 비난과 관의 지목을 피해 잠시 남원 은적암에 체류하다가 1862년 음력 7월에 경주로 돌아와 동학도 박대여의 집에 은신했다. 하지만 수운 선생은 포덕 활동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863년 조선 정부는(철종 14년) 왕명으로 선전관 정운구를 경주 용담으로 파견했다. 왜냐하면, 전국 각지에서 민심 이반 등으로 민란이 거듭되는데 설상가상으로 동학이 나타나 민심을 더욱 동요케 하니 수운 선생을 잡아들여야 했다.

 

선전관은 정3품 벼슬이다. 왕의 최측근에서 왕명 출납과 군무(軍務), 감찰, 감사, 민심 동태 등을 맡던 공직으로 권력이 막강한 자리다. 

 

수운 선생의 동학 활동과 민심 동향을 파악키 위해 경주부에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다른 기록은 정구룡으로 되어 있음)에게 수운 선생이 체포된 것은 1863년 12월 10일 새벽 1시경이었다. 


『정운구는 나졸과 장수들을 많이 거느리고 불의에 용담을 쳐들어왔다. 어명으로 다스리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 당시 장졸들이 휘두르는 방망이 아래 피비린내 나는 광경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같이 체포된 10여 인도 함께 경주부로 갔다.』(동경대전1. 도올 김용옥 지음. 대선선생주문집 235쪽 인용함. 2021. 통나무) 


정운구가 올린 보고서에는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 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라고 하므로 당시 동학이 민심에 끼친 영향력이 아주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운 선생이 자기가 펴낸 동학을 1861년 6월부터 민중에게 포덕한지 햇수로 3여 년째이다. 


어쨌든 유교 국가에서 임금을 절대자인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공자왈, 맹자왈, 하늘천따지 등 천자문을 외어도 시원찮을 판에 나라에서 금하는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주』(侍天主)니 하는 동학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골골 마을마다 가득 찼으니 조선 왕조와 유림 측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고 불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조정의 견해는 동학도인들을 일찌감치 토벌하여 법으로 철저히 다스리지 않으면 더욱 심해질 것이며 황건적이나 백련교와 같아질 것이 뻔하다고 했다. 결국, 동학을 서학이나 중국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와 같이 취급하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무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동학이 조선 민중들에게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지지받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지극히 민중 주체로서 자각의식으로 깨어난 민심이반 현상이고, 평화적 민중 저항의 목소리로서 조선 왕조가 쇠망해 가는 한 징조였다.


여기서 주문(呪文)이란 입으로 특정한 어구를 외움으로써 주술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글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가 믿는 신(하느님, 옥황상제 등)에게 바라는 바를 입으로 외워서 기원하는 신앙 표현이다. 동학 주문은 21자이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후 포덕문을 짓고, 일반인들이 쉽게 외우는 주문을 세상에 선포했다. 


『지기금지(至氣今至)원위대강(願爲大降)시천주(侍天主)조화정(造化定)영세불망(永世不忘)만사지(萬事知)』이다. 


그 뜻은 대강 이렇다. 『지금 이 순간 원컨대 하늘의 지극한 기운을 크게 내려주옵시고,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롭게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하겠습니다.』이다. 이 주문은 일반 백성들에게 희망과 같은 복음으로 다가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조선 민중에게는 앞길을 가르키는 계명성과 같은 희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일반 천주교(사도신경)나 개신교(주기도문)의 『신앙고백문』이라고 보면 되겠다. 

 

경주부 관아에 체포된 수운 선생은 다음 날인 양력 12월 11일 출발하여 한양으로 다시 압송되었다. 그는 압송되어 경기도 과천현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럽게 죽어(1863년 12월 7일) 조정의 지시로 다시 경상감영(현 대구시 포정동 경상감영공원부지, 통칭 대구감영이라고 함.)으로 환송되어 옥에 갇혔다. 왜냐하면, 국상 기간에는 죄인을 문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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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원주 高飛遠走, 높이 날아 멀리 나아가라. 

(신인간, 특집 수운대신사 탄신 195주년, 박홍규 화백 그림. 2019. 11. 4.)


수운 선생은 대구 감영에서 거의 날마다 심문을 받았다. 그래서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도인들은 수운 선생 안위를 걱정해 대구 감영 근처에 은거하면서 관의 동향을 살폈다. 

 

일설에는 최시형 등은 사전에 옥리에게 뇌물을 준 다음 옥리로 변장하고서 수운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또 하나는 면회장면은 옥리인 곽덕원(옥바라지) 종으로 행세하여 수운 선생을 만났다고도 한다. 당시 해월도 지명 수배자였다.


『갑자(甲子, 1864) 3월 3일, 수운은 옥중에서 시를 남겼다. 이때 해월 선생은 대구주변에 은거하면서 수운 선생의 사형이 확정됨을 듣고 여러 접주들과 상의하여 대신사의 최후 유언이라도 한 말씀 듣기 위하여 돈을 모아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형제의 의를 맺은 후 옥리로 변장하고 황혼에 밥상을 가지고 옥방으로 들어갔다.』(김기현 저, 후천개벽의 횃불, 169쪽 참조함. 현우사. 2008.)


최후의 만남, 최후의 만찬, 저녁 무렵에 밥상을 들고 간 그는 수운 선생 앞에 밥상을 놓고 큰절을 올렸다. 선생의 모습을 본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철철 흘렀을 것이다. 제자를 만난 수운 선생의 두 눈은 빛이 났다. 그는 곤장형으로 넓적다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수운 선생은 이미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수운 선생이 제자 해월 선생과 헤어질 때 담뱃대를 하나 주면서 어서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해월은 또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을 했다. 

 

그는 감영을 나섰다. 그는 은거하는 곳에서 접주들과 함께 담뱃대를 쪼갰다. 그 속에는 문종이를 말아서 만든 심지를 꺼내 펴니 시가 쓰여 있었다. 수운 선생이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옥중에서 쓴 그 유명한『汝高飛遠走』이다. 해월에게 전해진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燈明水上無嫌隙/柱似枯形力有餘/吾順受天命/汝高飛遠走

『등불이 물 위에 가득 차 비추니 사악한 혐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기둥은 마른 것 같으나 그 생동하는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나는 순순히 천명을 받을 테니/너는 높이 날아 멀리 가라.』(동경대전2. 도올 김용옥 지음. 396쪽 참조, 통나무. 2021.)

 

수운 선생은 결국 41세의 나이로 갑자년(1864) 3월 10일에 대구 관덕당 뜰에서 참형당하여 순도하였다. 그가 활동한 기간은 1860년 4월에 득도한 다음 1년 후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겨우 2년 반이었다. 그가 남긴 글은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로 된 가사 8편 『용담유사』가 있다. 묘소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줄기에 있다. 그곳에 그의 생가도 있다.


영해부 관아를 떠난 최시형 일행이 울치재(창수령)를 넘어갔다. 달은 형제봉을 넘어가고 어둠이 밀려왔다. 지금은 울치재와 같은 산줄기인 창수령으로 되어 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려 편리하지만, 당시만 해도 평일에는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이 길을 수운선생이 순도 직후 너는 멀리 달아나라(汝高飛遠走)는 스승의 암묵유시(暗墨遺詩)를 받고 넘었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는 울치재를 또다시, 동학 재건을 위해 후일을 기약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 


탐관오리 부사 이정을 처단하다

조선 시대 부정부패 관리의 대명사 탐관오리! 

탐관오리(貪官汚吏)는 한자 그대로 벼슬을 탐하는 부정을 일삼는 더러운 관리를 뜻하는 낱말이다. 그 대표 인물이 서사 문학인 판소리 춘향전에 등장하는 사또 변학도이다. 변학도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정치적 풍자의 상징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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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벽에서 체포된 영해부사 이정과 치죄하는 이필제와 동학군들 장면. 

위사진에서 꿇어 앉은 사람이 이정. 동헌에 횃불을 든 동학군.

사진 3은 청포옷을 동학군.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이필제. 배우 김기주가 연기했다.

 

춘향전 중에서 어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거지로 분장해 들어간다. 그리고 술 한잔을 얻어먹고 남원 사또인 변학도의 혹정을 꾸짖는 그 유명한 『金樽美酒千人血』이라는 시를 읊는다. 변학도는 당대의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금단지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누락)/촛농이 떨어지는 곳에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 소리 높다.


여기서 사또는 사도(使道)가 변한 말로서 조선 시대 지방에 파견된 정3품 이상의 관리를 총칭한다. 사또 변학도는 남원부에 파견된 부사로 인물로 오늘날 시장급에 해당하는 관리다. 사또보다 낮은 관직으로 현감, 현령은 오늘날 면장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서사문학이자 판소리인 춘향전이 등장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는 민중인 춘향과 어사또인 이몽룡의 사랑을 나타낸 작품으로 당시 탐관오리의 비리와 부패의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양반과 천인의 신분적 해방과 춘향의 신분 상승 대한 욕구도 은연중에 나타나 있다.


위의 시, 金樽美酒(금준미주)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에 관한 이견이 있지만, 이 내용은 조선 후기 지방관리 부패상을 정치풍자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중 원성을 가감이 없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해 부사 이정도 당시 영해민중들에게 탐관오리로 지탄받던 인물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신미아변시일기』에는 그의 이력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원문은 생략한다)


『지부(이정)는 성이 이(李)요, 이름이 정(政)이며, 우봉인(牛峯人)이다. 고(故) 상국(相國),相臣, 재상을 말함, 요즘의 장관벼슬), 광정(光正, 이휘정의 초명)은 그의 아버지이다. 이배(移拜)되어 왔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아의 터전인 주산이 하루에 세 번씩 울렸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서 고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신미아변시일기, 권호기역, 영덕문화원. 문자향, 2022.)


다시 말해 부사 이정은 우봉 이씨고, 그의 아버지는 재상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요즘으로 치면 부사 이정의 이버지가 조선 조정의 장관급 벼슬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로는 상당히 빵빵한 사대부 양반 집안이었다. 이정 부사는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이곳 영해로 전근을 왔다는 정도의 이력이다. 

 

그리고 관아의 터전인 주산이 하루 세 번 울렸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 고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고을의 진산인 주산이 세 번 울렸다 함은 앞으로 이정 부사의 개인신상이나 영해에 무슨 변고를 예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주산(主山)이라 함은 풍수지리상의 개념으로 진산(鎭山)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진산은 예전에 도읍을 정함에 있어 공간 배치에서 그 주된 역할을 하는 산을 진산 또는 주산이라 한다. 대체로 각 고을(소재지)의 뒤(주로 북쪽)에 있는 큰 산을 말한다. 주산은 북쪽 뒤쪽에 듬직하게 앉아서 고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영해 영덕의 주산은 칠보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각 고을에서는 해마다 주산(진산)에 제를 올렸다.

 

공교롭게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영해 부사 이정의 유사점은 생일날을 핑계하여 민중들에게 고혈을 빨았다는 점이다. 영해부사 이정이 영해 민중들에게 원성을 산 것은 다름 아닌 떡국 사건이다. 그는 자기 생일잔피에 영해민을 초청, 밥값을 빙자해 금품을 뜯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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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또 출도로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인터넷뉴시스 

[다시 쓰는 춘향전]에서(2016. 09. 01.)


다음은 그 내용이다.

『탐관오리 이정이 영해읍을 다스릴 때 뇌물을 탐하는 정도가 세상에 비할 때가 없었다. 이정은 영해 부사로 부임한 첫 번째 생일에 경내의 대소민들을 빠짐없이 모두 불러다 잔치를 베풀면서 한 그릇도 채우지 않은 떡국에 30금을 거두어들였다는 지탄을 받았다.』(울진군지, 상, 306쪽. 울진군. 2002,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동학연표, 402쪽에 당시 예천선비 박주대의 나암수록 인용)


최시형 일행이 울치재를 넘어갈 그 시각쯤, 영해부 관아에서는 부사 이정이 체포되어 동학군들 앞에 끌려 나왔다. 동학군 두세 명이 이정을 호위해 나왔다. 웅성거리던 동헌이 조용했다.

 

영해부 관아 동헌에 횃불이 대낮처럼 밝았다. 동헌 마루와 아래에는 동학군들이 죽 늘어섰다. 부사 이정은 봉두난발이었다. 얼굴은 초췌했으나 부사로서 위엄을 갖추려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 그가 앉던 자리에는 낯선 이필제가 있었다. 그는 눈을 지긋하게 내리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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