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2화(1회) 엄마 찾아 3만 리

효자 김천(金遷) 이야기
기사입력 2024.03.1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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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 몽골의 제6차 침입 당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간 어머니를 구한 효자 김천(金遷)의 실화를 정리한 것이다.

 

1259년(고종 46) 산길대왕(散吉大王) 등이 지휘하는 몽골군이 강원도 동해안 명주(지금의 강릉) 일대까지 침략해 왔다. 이때 동해안 지방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명주 지역도 그 피해가 극심했는데, 특히 많은 사람이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갔다.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도 이때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당시 김천의 나이가 불과 15세였다.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몽골군에 끌려간 사람 중에 도중에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김천은 어머니도 필경 돌아가셨을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14년 뒤 어느 날, 몽골에서 돌아온 사람을 통해 어머니가 원나라에서 노비로 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너무 놀란 김천은 몸값을 내고 어머니를 풀려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던지 마침내 1276년(충렬왕 2) 원나라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했다. 무려 포로로 끌려간 지 17년째 되던 해였다. 아버지 김종연과 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진부역(珍富驛)까지 달려와 부부가 서로 만났다. 다시 6년이 지난 뒤에는 동생 김덕린까지 몸값을 지급하고 데리고 왔다.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려 김천의 효행을 후세에 기리도록 했고, 사람들은 그의 고향인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의 두릉동(杜陵洞, 일명 효자리)에 효자각(孝子閣)을 세웠다. 강릉김씨(江陵金氏) 가문을 더욱 빛낸 효자 김천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고려사(高麗史)』권 121「효우열전(孝友列傳)」에 실려 오늘에 전한다. 

 

필자는『고려사』에 실린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김천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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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金遷) 효자비(孝子碑)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인연의 시작


시장통이 있는 큰길가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며칠 동안 집에 틀어박혀 뒹굴었더니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오늘은 5일마다 돌아오는 장이 서는 날이니 서둘러야 한다. 그에게는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려니 싶었다.

 

‘나 원 참… 궁금해서 견딜 수 있어야지…’ 

김순(金純)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에는 벌써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두 머리에 이고 등에 진 모습이 여느 때 그 모습이다. 

 

그가 이상한 소문을 들은 것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바닷가 해변 안목(安木)의 친척 집에 들러 임연수 몇 마리와 마른오징어 한 축을 샀다. 늘 그랬듯이 돌아오기 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누군가가 원(元)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서 시내 주막을 돌며 며칠째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일어서는데 귓전을 때리는 이름이 들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김순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지금 자네 뭐라고 했나? 찾는 사람 이름이 뭐라구?”

“아이… 깜짝이야. 자네 왜 그래…?”

김순이 순간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같이 있던 친구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 일제히 김순을 쳐다봤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찾는 사람 이름이 뭐라구? 해… 해장…?”

“아. 그렇다니까. 김해장이라 하더라고. 김해장.”

“정말인가? 김해장이라고 하던가?”

“아. 글쎄… 맞다니까. 어디 사는 사람이라는 건 모르겠고 그냥 강원도 명주사람이라는 거야. 뭐라고 그러더라? 아… 뭐 전해 줄 편지가 있다고 하더라고. 편지…”

“편지?”

“그 해장이라는 사람 모친이 쓴 편지라는 거야. 지난 전쟁통에 포로로 끌려가서 원에서 종살이한다고 했지…. 아마…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

“모친이 포로로…? 누군가? 그 사람이… 어디 있나? 응? 좀 만나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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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이 어머니를 사다(金遷贖母)『동국삼강행실도』에 실린 그림이다.

 

김순이 보따리를 내려놓으면서 친구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흥미가 당겨 귀를 쫑긋 세웠다. 김순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막걸리를 한 사발 가득 따랐다.

 

“나도 전해 들었는데… 시내 장거리에 가서 주막을 찾아보게. 그 원나라에서 왔다는 사람이 장날이 되면 장터에서 수소문하며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그런데 자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 이름이 같고…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

 

막걸리를 비운 김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안목마을 어귀를 돌아 시내로 향했다. 집이 있는 경포호 초입의 마을 초당(草堂)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

안목(安木)은 대관령에서 흘러내리는 남대천 하구의 바다와 연접해 있는 어촌으로 고려 시대에는 ‘견조(見潮)’라고 불렀다. 그런데 안목마을 앞의 봉우리인 견조봉(堅造峰)에 올라가 남대천에서 흘러온 물이 바다로 빠지는 것을 보면 물살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여 ‘견소(見召)’라고 부르기도 했다.『대동여지도』에는 ‘견조’로 표시되어 있다. 

 

견조봉은 원래 육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해류의 작용 때문에 육지와 섬 사이가 모래로 연결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 견조봉에 봉수대가 있었는데 소동산 봉수로 불렸다. 

 

견조봉에 오르면 탁 트인 동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솔밭 사이로 길게 늘어선 백사장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고개를 돌려 서쪽으로 바라보면, 강릉 시내 너머 멀리 병풍처럼 길게 이어지는 대관령 봉우리가 구름 사이로 아득하게 들어오기도 한다. 

이 마을을 ‘앞목’ 또는 ‘안목(安木)’이라 부르는데 이는 견소동 마을 전체의 지명이기도 하다. 원래는 물 건너 남쪽의 남항진과 한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남대천이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바람에 다른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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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관아(복원 후 모습)

 

‘앞목’이란 ‘남항진에서 송정으로 가는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강릉항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 단장을 했는데, ‘강릉 커피 거리’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동해안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안목마을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김순은 그길로 곧장 시내 장터로 향했다. 그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계속 심호흡을 했다. 논둑길을 가로질러 시내로 들어선 김순은 시장터에서 제일 큰 주막에 들어갔다. 친구가 알려준 바로 그 주막이었다. 

“아유… 어서 오시라요. 호호…”

 

손님도 없는 초저녁이라 주막은 한산했다. 부엌에 있던 주모가 반갑게 과장된 몸짓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간단한 술상을 마주한 김순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주모에게 풀어놓았다. 주모는 장날에 와서 김해장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며 찾는 사람이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김순은 며칠 후 장날에 일찍 올 것이니 만약 원나라에서 왔다는 그 사람이 다시 오면 자기가 올 때까지 꼭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주모는 막걸리를 사발에 따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눈을 흘기며 웃었다. 화냥기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싫지는 않았다. 주모에게 두, 세 번 다짐을 시키고 김순은 일어섰다.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평일이라 오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 다시 논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바닷가 솔밭길로 들어서니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닷물 특유의 짠 냄새가 콧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맑은 하늘에 은하수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가로지르며 흘렀다. 강 건너 듬성듬성 켜있는 불빛이 보였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솔밭길을 걸으면서도 김순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전해 들은 소문이었지만 원나라에서 왔다는 사람이 저잣거리를 돌며 명주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찾는 사람 이름이 김해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느낌이 다르게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것도 모친이 원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노비로 생활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김해장이라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장이라고…? 혹시 내가 아는 김해장(金海莊), 그가 아닐까?’ 

 

오랜 전쟁 기간에 자신이 이렇게 살아남은 것만 해도 믿기지 않은 일인데, 어쩌면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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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실린 효자 김천의 기록

 

폐허가 된 고향


“애고. 아침에 나간 양반이 지금에사 오우?”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김순을 발견한 그의 아내가 두부를 쑤던 주걱을 들고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눈을 흘겼다. 평소 같으면 해가 지기도 전에 돌아왔을 터인데 오늘은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나간 사람이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됐던 참이었다. 

“오늘 장사는 좀 어땠소?”

 

김순은 아내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가마솥을 열어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두부가 몇 모가 남지 않은 걸 보면, 장사가 그런대로 된 모양이다. 

 

김순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는 어쩌면 우리가 아는 그 고향 사람 김해장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온다고 말했다. 소반에 담은 두부에 김치를 싸서 남편 앞으로 밀던 아내가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그래요. 그래. 그 사람이 맞았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그 사람이 맞는다면 모친도 살아있는 거고… 당신 빨리 옥계를 다녀와야 하는 게 아니오?” 

 

그러다가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원나라에서 노비로 생활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어디냐며 다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원나라에서 왔다는 사람을 만나보면 알겠지. 기다려 봅시다.”

 

김순에게 불과 5일 간격으로 이어지는 장날이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기다리는 것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이제 사흘 후면 장날이다. 그는 막걸릿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김순은 원래 강릉부 옥계(玉溪,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옥계면) 사람이었다. 옥계는 원래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으로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명칭인 옥계로 고쳐 삼척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 9년(1018)에 강릉부에 속하게 되었다.

 

김순은 옥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그는 몽골군이 동해안을 휩쓸고 지나갈 때 가족을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백두대간 산골짜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가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몽골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그의 눈에 이미 마을은 성한 곳 없이 폐허가 되어있었다. 부서진 집을 고치고 농기구를 다시 찾아 폐허 된 마을을 다시 복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피난 중에 잃어버린 가족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었다. 가족 모두가 온전하게 남은 집은 거의 없었다. 노부모들은 부모를 잃은 어린 손자와 손녀들을 안고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가 살던 옥계 현내리는 강릉김씨 집성촌이었다. 작은 마을의 몇몇 집을 빼고는 대부분은 강릉김씨 집안사람들로 친척들이었다. 이번에 소식을 들은 김해장도 같은 집안의 동갑내기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몽골군이 마을로 가까이 도달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다투어 골짜기를 따라 백두대간으로 숨어들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피난했지만, 김해장의 가족들은 들이닥친 몽골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해장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어린 그를 데리고 달아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은 실종되고 말았다. 

 

김해장의 부친 김종연은 가족을 골짜기로 안전하게 피신시킨 다음, 아내와 막내아들을 찾아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마을 사람 중에 그의 아내와 아들이 몽골군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고 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살아있다는 소긱을 들은 게 다행이지만, 그저 제발 죽지 않고 어디에선가 살아있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몇 년 후, 김순의 가족은 가산 일부를 정리하여 마을을 떠나 강릉부로 이사왔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경포호 주변의 초당마을에 주막을 열고 두부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을 통해 고향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김해장이 강릉부 향리(鄕吏)가 되어 옥계현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김순이 최근에 들었던 소식이 바로 고향 마을 친구인 김해장이 아닐까 하는 강한 믿음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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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5일장 장날이 돌아왔다. 김순은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와 강릉 시내 장터로 향했다. 멀리 대관령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걸음도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시장 앞에 이르렀다. 사거리를 지나 장터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뒷골목이라고는 해도 장날이었기 때문에 우마차가 오가는 대로변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김순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제법 널찍한 공터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섰다. ‘해동객잔(海東客棧)’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글자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주막 입구에는 해진 옷을 걸치고 동냥하는 아이들이 주막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구걸하고 있었다. 

 

객잔 마당을 들어서자 진하게 우려낸 해장국 냄새가 콧속을 후비며 들어왔다. 중천에 뜬 해가 제법 따갑게 느껴졌다. 주막 안과 마당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주막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시장기를 느낀 김순도 마당을 지나 객잔 안채로 들어서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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