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晩隱(만은) 田銑(전선) 선생 문집 다시 부활하다

기사입력 2024.05.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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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晩隱集』(2024. 2. 21.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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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선생이 태어난 동네. 북면 신화리 선비골 전경

 

불타버린 만은 선생 생가를 찾아가다.

지난 3월 3일, 晩隱(만은) 田銑(전선) 선생(1599-1693)의 생가와 유허지를 찾아가는 산동네 봄볕은 따사로웠다. 만은 선생 생가가 있는 곳은 울진군 북면 신화2리(화동) 선비골이었다. 이곳은 신화2리 본동에서 서북 방향으로 산속에 있는 동네였다. 왜냐하면 선비골은 밖에서 보면 숨겨진 동네나 다름이 없었다. 산골이라 사람 사는 기척을 밖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난리가 나면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피난골이라 했다. 또한, 선비들이 많아 글을 잘하는 동네라 선비골이라고도 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는 후손들이 공무원 등으로 많이 진출했다고 한다. 이날 동행한 전호원(만은 선생 16세손, 울진읍 거주) 어르신이 귀띔해 주셨다. 산불이 나기 전에 피난골은 아늑하고 경관이 수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생가로 가기 전 옥계서원 유허지에 들렀다. 이 옥계서원은 신화2리 본동 구국도 7번 도롯가에 있다. 이 옥계서원에는 우암 송시열 석당 김상정, 만은 전선을 배향하였다. 지금 옥계서원은 현존하지 않는다. 유허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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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서원 유허비각. 옥계서원은 우암 송시열·석당 김상정 만은전선을 배향했던 서원이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옥계서원 유허지를 지나서 선비골로 들어섰다. 언덕배기의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올랐다. 만은 선생께서 태어나고 자란 선비골은 2년 전 산불로 동네 산은 아직도 숯검뎅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마을 들머리부터 소나무 숲들이 그을린 흔적들이 뚜렷했다. 

만은 선생과 조부 전필위 유허비각은 산 중턱에 있었다. 폐허가 된 유허비각에는 기와 조각이 흩어 있었다. 개석 일부가 열기에 금이 가서 곧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비신(碑身)도 위태롭게 서 있었다. 비각을 바라보는 전호원 어르신 얼굴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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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선생과 조부 전필위 유허비각. 2022년 울진산불로 소실되었다

 

『김 선생님, 이것 좀 보이소. 재작년 산불 난리에 산이고 뭐고 동네고 뭐고 새까맣게 재만 남았니더. 그 바람에 만은 선생 문집도 홀랑 다 태우고, 유허비각도 타버렸니더. 이번에 다행히 임경 조카가 책을 만들어서, 참 고맙지요.』


그 말씀에 필자가 한마디 보탰다.

『그렇지요. 외손 임 교육장) 이 큰일 했니더.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이 보통 집 한 채 짓는 것보다 힘이 드니더, 더구나 만은 문집을 한국국학진흥원, 대학교 등에서 자료를 찾고, 번역의뢰, 편집 등을 현대감각에 맞게 출판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전호원 어르신은 선비골 동네를 들머리 언덕길에서 둘레의 새까맣게 그을린 산들을 보면서, 종가에 보관했던 만은 선생의 유적과 송자대전 등이 불타버린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선비골 동네에 들어서자 아직도 산불 흔적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이 집을 짓기 위해 땅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만은 선생 생가도 불타버리고 지금은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예전 생가에는 『皥熙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건물에는 『취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호희당』편액은 최근 울진산불로 타버린 것을 이번에 다시 판각해서 현재 종손인 전전수(田準洙, 북면 신화리 선비골 거주)씨가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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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로 소실되었다가 새로 판각한 호희당 편액 (2024)


이 호희당 편액에 담긴 뜻을 볼 때 만은 선생의 유유자적 하면서 올곧은 모습으로 일평생을 산림처사 또는 숭정처사)로서 일관한 삶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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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전호원 어르신이 만은 선생 묘소를 찾아서 국역만은집이 출간되었음을 알렸다.(2024. 3. 3.) 2년전 울진산불로 비신이 많이 훼손되었다

 

晩隱集을 남긴 田銑은 어떤 선비인가?

① 만은 선생 가계

만은 선생의 담양전씨는 순임금의 후손으로 중국 제나라의 왕실의 후예였던 전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시조는 고려 의종 때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전득시(田得時)이다. 전득시의 후손인 전록생(埜隱公派), 전귀생(牢隱公派), 전조생(耕隱公派) 3형제는 고려말 문신으로 지조와 절개로 그 이름이 높은 이른바 전씨 삼은(三隱)이다.


만은 선생은 耕隱公派(경은공파)이다. 담양전씨인 조선조 집현전 대제학(현 대학 총장격)을 지낸 전자수(田子壽)가 강원도 안렴사(현 도지사격)를 마치고 평해에 머물러 살았다. 그의 아들 진(晉)이 흡곡(지금의 강원도 통천) 현령(현 면장격)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냈는데 울진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분이 울진 입향조)이다. 현 종손은 17세손으로 전준수씨다. 


晩隱集(만은집)을 남긴 전선(田銑)은 자(字)가 사윤(士潤), 호는 만은(晩隱)이다. 만은 선생은 1599(선조 32)년 3월 22일 현 울진군 북면 신화(화동)리에서 아버지 몽구(夢龜)와 순흥안씨 사이에서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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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건축한 북면 신화리 만은 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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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선생 취한당 편액이 게시되었던 별당건물 터. 선생 생가 바로 옆에 있다

 

만은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신체가 건장하였고, 기상이 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효도로 이름났던 할아버지 묵암(黙菴) 전필위(田弼違)의 손자 사랑은 유별했다고 전해온다. 그는 손자 만은의 스승으로서 훈도하고 시와 예 등을 가르쳤다. 집에서 가학(家學)으로 유학을 가르친 셈이다. 


그는 이후 당시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고, 과거에도 여러 번 응시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병자호란 등으로 혼란 시대인 광해군 때 이이첨의 무리가 전권을 전횡하며 악행을 일삼는데 분개하여 이이첨 목을 베라는 상소를 조정에 올리기도 했던 선비였다. 한편 만은 선생이 태어났던 해는 조선이 막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1년 뒤였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 궁궐이 불탔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백성의 목숨 줄기인 논밭이 거의 황폐화가 되는 등 큰 피해가 났다. 이후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치는 어지러웠다.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는 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내세운 결과 병자호란이 터졌다. 


더구나 만은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인 17세기 초는 북방 만주 대륙에서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전체 만주족을 통일하고 후금(청)을 세워 조선을 압박하던 시기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한 명(明)나라가 신흥 강국 청(淸)의 도전에 밀려 무너지고 있었다. 


청은 조선과 명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7)을 일으켰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하여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예를 치르는 치욕을 당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이 삼전도 굴욕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대의명분을 삼았던 조선 선비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한편 이러한 혼란기에 만은 선생은 조정에 이이첨 탄핵 상소 사건, 병자호란 등으로 갈등을 겪었다. 이후 만은 선생은 과거시험 응시 등을 단념하고 서당골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자택에는 호희당)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유유자적하면서 초야에 묻혀 은둔하며 당시 여러 문인과 교유하면서 인생을 살아갔다. 

앞서 서술한 『호희당』에서 보듯이 그의 『숭정처사』로서 성리학 숭상과 조선 선비로서 삶의 사유가 묻어나는 당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로는 아주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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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이이첨을 목을 베라는 상소 내용(청참이이첨소)

 

② 간신 이이첨) 목을 베라! 

약관 23세 때 만은 선생이 조정에 대고 상소한 것이다. 광해군 시절 조정의 실권자였던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폭정을 일삼자 만은 선생이 지역 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능지처참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 요즘으로 치면 당시 임금인 광해군에게 국정농단을 일삼는 이이첨 무리를 탄핵, 처단하라는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이이첨의 방해 공작으로 실행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올린 상소문 전문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선이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만약 이러한 상소문이 언젠가는 발견된다면 역사 문화적으로 사료 가치가 아주 클 것이다. 만은집 권지 1에는 請斬李爾瞻疏(이이첨의 목 베기를 청원하는 상소)라는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만은 선생이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을 세보에서 알고서 상소문을 소장하고 사람이나 집안의 제보를 기다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한자 원문은 생략하여 소개한다.


『세보를 살펴보니 약관의 나이에 앞장서서 이이첨을 목 베라는 논의를 주관하였다고 하였으며, 행략에도 역시 일찍이 향시를 보러 가서 상소의 논의를 주장하고 이이첨이 그것을 막았다. 대체로 선생은 약관의 의기가 호방하고 씩씩하여 당세의 재목을 자처하였는데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목 베는 것은 이루지 못하고 흉악한 사람들이 요직에 앉아 겨우 시험을 없애버리고 마침내 그것을 거두어 들이라는 명을 받았다. 여러 번 불탄 나머지 그 말이 전해지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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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39호 우암 송시열 초상화·위키 백과사전


③ 우암 송시열과 인연을 맺다

만은 선생이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만남은 1675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송시열은 남쪽으로 귀양 가는 길에 강원도 울진지방을 거치게 된 것이다. 1674년 당시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일어난 제2차 예송논쟁이다. 예송논쟁이란 임금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때 상복 입는 기간을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인가의 논쟁이다. 이 당쟁에서 송시열 등 서인은 1년설을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남인의 의견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이 사건으로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아마 우암은 유배지 함경도 덕원에서 포항 장기로 가라는 이배 명령을 받고 울진 방면으로 내려오다가 비 때문에 울진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때 만은 선생은 우암 선생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우암 선생과 만남은 만은 선생에겐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우암은 당시 서인 노론계의 거두로서 중앙 정계의 정치인이자 주자학의 대가였다. 우암이 이별할 때 만은 선생에게 써준 시는 다음과 같다.


늦은 봄 역사에 귀양길 막히니/산새들이 짝을 찾는 소리에 깜짝 놀랐네/앞에 보이는 바다가 천척이나 깊다지만/전생이 날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한문 원문 생략함)


만은 선생은 우암 선생을 맞이하기 위해 흥부 역사(역원)에 나갔으리라. 우암 선생은 짙푸른 부구 앞바다를 보면서 전생田生(만은 선생을 가리킴)이 베푸는 깊은 정을 잊지 못함을 표현한 시다. 아마도 멀고 먼 귀양길에 시골 선비가 베푸는 환대에 회포를 풀면서 학문적 담론으로 고달픔을 잊었으리라. 우암은 시를 부채에 써주었다고 전해온다. 만은 선생도 화답으로 시 한 수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세 조정에 세 번 곡하느라 머리가 세었는데/북으로 유배갔다가 무슨 일로 또 남쪽으로 가는가/떠나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운 꾸짖음인 줄 알지만/임금께 하사받은 갖옷에 영광의 눈물 흘렸네/차가운 바다에 안개가 깊어 저녁에야 유배지에 닿으면/화산의 밝은 달이 귀양살이 오두막을 비추겠지/밤이 되면 더더욱 두견새 소리 쓰라리게 들리려니/서풍에 전송하니 눈물이 옷깃을 가득하네


이 시는 만은 선생이 78세 때 지은 시라고 한다. 이 시를 통해 만은과 우암은 깊은 교감과 각별한 정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④ 만은 선생과 교류한 인사들

전선은 일찍이 임영臨瀛(강릉의 옛 이름) 향교와 송담서원松潭書院 문회에 참석하여 시와 문을 발표한 후 관동의 4대 인물이라는 평을 얻으며,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이 무렵에 교류한 학자들은 省軒 崔文湜, 反招堂 李明翼, 鳩齋 金啓光, 三淵 金昌翕 등이다. 특히 전선의 성리학에 영향을 끼친 유현은 白洲 李明漢, 象村 申欽과 우암 송시열이다. 사실상 전선의 문명은 송시열과 인연으로 더욱더 공고해졌다.)

만은 선생은 울진에서 활동하던 유현인 임유후, 오도일, 주개신, 전구원, 주필대, 윤시형 등과도 교류했다. 만은 선생과 교류한 당시 인사들의 시편을 소개한다.


김창흡은 만은 선생이 산림처사로서 은거하면서 호방하게 지연과 벗하며 높은 기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시로 표현했다. 김창흡은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 김상헌의 증손자이다. 그는 관동을 유람하면서 울진 불영사 승경을 시로 읊기도 했다. 


멀리 오주를 그리워하며 백한과 노니네

인간세상 명리를 잊으려 굳게 마음먹고

도리어 세상 밖에 노닐며 한적함을 사랑하네

                              삼연 김창흡(1653-1722)


한편 청파 장만시는 울진 유생이다. 청파 선생은 만은 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 시에는 만은 선생이 거문고를 타면서 유유자적한 모습을 표현했다. 청파 장만시는 유고문집『청파집』을 남겼다.


또(又)


동해변 가문의 만은당

전간의 긴 대나무숲이 고당을 호위하네

달떠서 그림자 희롱할 때 제 바람은 거문고를 타고

나그네 머무는 시내와 산의 한 초당이로다

                   靑坡 장만시(張萬始, 1696-1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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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만은집 출간 증정식에 참석한 임경 전 울진교육장(왼쪽에서 세번째) 울진연호센터. 2024. 2. 21.

 

현대판 국역 만은집 발간 경과

만은 선생은 일생을 사는 동안 상당한 분량의 시문을 남겼다. 하지만 사후 200여 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료의 훼손 등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그 후손들이 그 유고를 수습하여 일제강점기(1916)에 목활자본으로 인쇄하여 뚜렷한 정본(책)으로 발행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은이 남긴 문집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만은선생문집』이고 또 하나는 『만은집』이다.

『만은선생문집(121면)』은 일제 강점기(1916년) 후손 전병국(만은 선생 10세손)이 울진에서 발행했다. 『만은집 121면)』은 발간연도가 표기되지 않아 미상이다.

1916년에 펴낸 목활자본인 만은집, 송자대전 등 전선 선생이 남긴 유고와 소장했던 문헌 등이 후손에게 대물림했으나, 2022년 울진산불로 종가와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번에 발간한 국역 만은집은 임경 전울진교육장이 지난 2년여 동안 동분서주하고, 심혈을 기울인 결과로 다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실로 현대판 국역으로 된 만은집은 선생 사후(1694년 졸) 330년 만이요, 목활자본(1916)으로 펴낸 지 1세기가 지난 108년 만이다. 옛 선비들이나 유학자들이 남긴 고전들은 거의 한문으로 되어 있어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일반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번에 국역 만은집은 한글로 풀어서 출판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선비이자 유학자였던 만은 선생이 남긴 학문과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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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선생 국역문집발간 증정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만은 선생 16세손 전호원씨(2024. 2. 21. 연호문화센터)

 

현대판 국역 만은집 특색

2024년에 새로 펴낸 국역 만은집은 전선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330년 만이요, 목활자본으로 집자하여 순 한문책으로 발간(1916)한 해로부터 108년 만에 일반 대중들도 다가가서 읽을 수 있도록 한글판으로 환골탈퇴하여 부활했다. 이러한 뜻에서 필자는 그간 임경 선생의 노고를 기억하면서, 국역 만은집 발간에 축하 박수를 보낸다.


① 책 표지 디자인이 새롭다.

먼저 재색 바탕에 한자와 한글을 고딕체로 중첩한 것이 특색이다. 임경 선생에 따르면 만은 선생의 유허비문 글자(한문)와 논어의 옹야편 문구를 근거로 하여 고딕체로 표현했다.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다면 사는 동안에도 죽음은 언 듯 언 듯 보일 테지만』(임경 선생의 말, 이하 생략) 이는 삶과 죽음은 따로 아니라 그것은 하나임을 말하는 감성적 표현의 상징으로 임경 선생의 예술가 경지를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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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만은집에 임경 화백이 그려 넣은 삽화. 참새가 노니는 모습. 

 

② 책갈피에 참새가 생동한다.

1675년 우암과 만은이 최초로 흥부역사(지금의 부구)에서 만났다. 우암이 함경도 덕원에서 조정의 이배명령을 받고 포항 장기로 유배 가던 길에 울진에 체류했을 당시에 서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때 우암이 만은 선생에게 부채에다 시 한 편을 써주었다. 여기에 참새가 등장한다. 화가 임경 선생이 이번 국역 만은집에 참새가 서로 노니는 모습을 삽화로 그려 넣었다. 임경 선생의 예술가다운 신선한 발상이다. 이 삽화로 국역 만은집의 품격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 


늦은 봄 역사에  귀양길 막히니/산새들이 짝을 찾는 소리에 깜짝 놀랐네/앞에  보이는 바다가 천척이나 깊다지만/전생이 날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책갈피를 여는 순간 참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를 것만 같다. 독서하는 동안 참새들이 서로 호희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마음의 귀로는 짹짹거리는 묵음을 들으리라.


③ 국역판 편집 체제와 내용

이번에는 새로 펴낸 국역판 만은집 편집 체제를 간략히 소개한다. 

국역 만은집 목차로는 <만은집 해제> <만은집 권지1><만은집 권지2><만은집 권지3><발문><국역만은집 발문>으로 편집되어 있다. 마지막 부록으로 각종 사진 자료가 실려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만은집 해제는 『기호사림의 큰 선비 만은 전선』(신두환/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만은집 서문, 만은문집 서문, 만은선생 유고의 서문, 만은선생 문집 순으로 되어 있다.

<만은집 권지1>에는 시 20여 수, 상소, 잡저, 자찬, 제문이 실려있다.

<만은집 권지2>에는 부록으로 행략, 가장, 묘갈문, 묘지명, 만사, 제문, 옥계별묘봉안문, 춘추향 축문, 구장사 봉안고유문, 화동유허비명, 비를 세울 때의 고유문 순으로 되어 있다.


<만은집 권지3>에는 부록으로 공경히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 차운함 외 시편이 30수가 실려 있다. <부록>으로 옥계서원에서 주고받은 통장(附玉溪書院往復通狀)인데 편지글이 12편이 실려 있다. <발문>은 9대손 禹豊우풍이 썼다. <국역발문>은 외손 林檾임경이 썼다. <만은집 影印영인>등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부록으로 사진 자료는 <소실된 유허각과 기문현판 사진><소실된 편액과 고문서 일부><만은문집, 한국국학진흥원소장본><친가와 외가><표지디자인과 삽화><만은집 영인>으로 짜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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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집 서문(발행 연도 미상, 위) 목활자본 만은문집 서문(1916년. 아래)

 

만은 선생 유고시 몇 편 소개한다.

만은 선생의 학문과 사상적 경향은 주자학으로 그의 할아버지 묵암공이 송강과 친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할버지때부터 당색은 서인이었고 노론의 가문에 속했다. 그는 강릉을 무대로 기호 사림으로 성장하면서 율곡 학통을 숭상하면서 계승) 하였다.


그의 문학 자질을 일찍이 엿볼 수 있는 시가 만은집에 있다. 만은 선생이 9세가 되어 외할아버지 생신 때 쓴 시다. 


팔순의 높은 연세 잔치 자리에  八十高年席

한잔 술을 올려서 만수를 비네  一杯獻萬壽

자손들은 안팎으로 자리에 가득하니  子孫多內外

즐거이 번갈아 가며 가무를 올리네  歡笑迭歌舞


다음 시는 집안의 형제인 우와遇窩 전구원田九畹에게 술을 보내면서 쓴 시다. 정칙은 전구원의 자이다. 전구원은 문집 우와집을 남겼다.


① 정칙에게 술을 보내다(送酒正則)

정칙 전구원은 집안 동생이다. 만은 선생이 정칙 선생에게 술을 보내면서 각별한 애정을 나타낸 시이다.


구십 년의 햇빛이 장차 저물려 하는데

머릿가 백발은 모두 첫서리 내린 듯

하루 시름을 쫓아내는 한잔 술이 있어야지

늙음을 쫓는 방법은 평생 풀 수 없지만


구슬 같은 시의 한 구절 낭독하며

서로 옛 꿈 속 고향을 종유하세나

올 풍년에 천 말의 곡식은 굶주림과 갈증을 풀고

한 구기 술은 어찌 폐와 장을 씻어주지 않으리


② 만은 선생이 백주 이명한에게 써 준 시

스스로 문을 닫고 오두막에서만 지내노라

뜰에 가득한 소나무와 국화꽃은 얼마나 피었던가

북창엔 매번 맑은 바람 상쾌하니

밤 침상엔 항상 휘영청 밝은 달이 따르네

대나무 기르며 사니 굳센 절개가 좋고

선저가 심은 홰나무는 그늘이 두터워 좋다

외진 곳 지나는 사람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문 밖에 때로 어르신들 수레가 보인다네


1639년 만은 선생이 강원도 감사 백주 이명한에게 써 준 시이다. 전선의 나이 40세 무렵이다. 만은 선생은 1623년 24세 때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은거를 선언했다. 이후 아름다운 전원에 묻혀   시를 읊조리며 학문을 연구하고 숭정처사로 지냈다. 마치 중국의 도연명의 귀거래사 같은 시이다.

어떤 재상이 만은에게 『모 역 찰방자리가 비어 있으니 공이 벼슬길에 나가고자 한다면 제가 마땅히 추천하지요』 했더니 만은 공은 응하지 않고 거절하자 만은 공이 절개가 꺾이지 않음을 알고서 특별히 존경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같은 점으로 볼 때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순리대로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려는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③ 생활신조에 관한 시

다음은 만은 선생의 평소 생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이다.


자찬 自贊

오래  살아야  90년을 넘기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부는 아침에 저녁 때거리를 걱정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았느냐

강녕함은 몸에  괴로운 병이 없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호덕은 그 올바름을 순리로 지키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고종명은 잠자리서 목숨을 지키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다섯 가지를 이미 갖추어졌으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랴

간략하기를 힘쓰고 제사를 깨끗하게 하여 친압하거나 풍성하게 함이 없어라

자손들은 이 늙은이를 잊지 말아라.


이 자찬은 자손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장수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 땟거리 걱정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편안함을 유지해라, 순리대로 관계를 맺고 일을 할 것, 죽음은 자는 듯이 맞이할 것, 제사도 간소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고전, 국역 만은집을 살펴보면서

만암 선생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면서 유학의 도와 예의로서 집안을 일으켰다. 만암 자신은 율곡의 학풍과 성리학을 사숙하면서 기호 사림의 선비로 성장했던 인물이다. 

만은 선생은 임진왜란이 참화가 막 끝난 1595년에 태어났다. 또한, 젊은 시절 병자호란을 겪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요동치고, 국내 정치가 당쟁으로 어지럽던 시기였다. 그는 일찍이 선비로서 당시 당쟁으로 어지럽고 국정을 농단하던 이이첨 등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던 의기로운 울진 선비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유학자로서 충만한 실력과 선비로서 의기로움을 단 한 번의 탄핵 상소 건으로 젊은 시절의 과거시험과 출사를 단념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 북면 화동 선비골에 은거, 초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한편으로는 관동지역의 강릉 선비는 물론 당대 시인 묵객과 교류했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삼연 김창흡) 등은 당대의 이름난 문사이자 유학자였다. 김창흡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삼학사 김상헌의 손자이다. 그는 관동을 유람하며 불영사 승경 13경에 대한 시문을 남겼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의 편액(시)들이 지금도 기성 사동 해월헌에 게시되어 있다. 한편 만은 선생으로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다름 아닌 우암과의 역사적 만남이다. 그에게 있어서 우암 송시열과 만남은 일생일대의 짧은 교류이었지만 동시에 깊은 인연이었다. 당시 우암은 조선의 거물 정치인이자, 후학 유현들이 조선의 공자로 일컫는 송자라 했다. 이로써 만암이 관동 일대는 물론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만은 선생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논어에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란 말이 있다. 이 명구는 『날씨가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충신과 간신은 나라가 어지러워져 봐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라는 의미이다. 진실로 세상이 혼란한 때라야 정의로운 선비가 드러나는 법이다. 역사 속에서 정의로운 인물을 찾아 후세에 드러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마땅한 역사의식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왜 선인들이 남긴 고전을 읽는가? 새삼스럽게 묻고 싶다. 필자가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옛것을 읽고 좋은 것은 오늘날에 되살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둘째 고전을 통해서 당시 그들이 살아온 지혜를 깨닫고, 오늘에 되살려 삶의 순간마다 자신을 갈고닦아 인격을 키워야 한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마음가짐이다. 

셋째 『배워서 남주자』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그래서 널리 세상과 남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정신(弘益情神)이 아니겠는가. 

넷째 하지만 뭐니해도 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통해 개인마다 마음의 행복함을 느끼는 데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심리학상 정서적 안정감 때문이다.


국역 번역으로 더욱 새롭게 부활한 만은집!

 

그 가치가 새로운 것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에 국역으로 발간한 만은집은 조선 후기 울진지역 유학자이자 선비였던 만은 선생의 삶을 통해 그가 은둔하면서 유유자적하여 가문의 가풍과 유학을 전승하며 일평생을 올곧게 살다간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은 선생을 두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출세를 멀리 하고 오직 벽촌 울진에서 일평생을 청빈하게 살다 간 선비였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언사는 아닐 것이다. 

그 선비정신이 후세에 귀감이 되어 더욱 빛나기를!


<도움을 주신 분들>

·전호원 어르신(만은 선생 16세손, 울진읍 거주) 

·임경(전 울진교육장, 한국화가, 울진읍 출신, 

   현 경주 거주) 

·전준수(만은 선생 17세 종손, 북면 신화리 선비골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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