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4.05.1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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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정치가 어지럽고, 전쟁, 대홍수, 가뭄, 역병 등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거나 세상이 불안하여 살기 어려우면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과 영웅의 출현을 꿈꾸거나 기대한다. 

 

조선 후기가 그랬다. 19세기 동아시아는 격동 시대였다. 서양 제국인 영국, 프랑스, 포르투칼, 스페인, 독일, 미국 등이 동양으로 진출, 식민 지배를 노리던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였다. 

 

더구나 조선이 믿었던 청나라는 영국과 아편전쟁)(1856-1860년)에서 패배하여 빠르게 망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시기 미국과 강화를 맺어 항구를 열고 통상을 시작했다. 이른바 1854년『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1868-1871)으로 국정 개혁을 단행하고 서구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국력을 키웠다.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은 일본제국이라는 강국으로 만들어 조선을 침탈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일제가 조선과 중국 침탈 야욕을 꿈꾸는 동안 조선은 반대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철종과 고종 초기(1849년 ~1873년)시대였다. 강화도령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왕이 된 철종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꼭두각시 임금 노릇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결과 오랜 몇몇 집안이 권력을 움켜쥔 세도정치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어지러웠다.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에 저항한 민란이 연일 터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도처에 유랑민들이 늘어났다. 


이후 흥선 대원군이 등장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억누르고 국정 개혁조치를 취했지만 잠시 그뿐이었다. 이들 또한 권력다툼으로 명성황후 집안인 민씨 척신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결국 또 다른 세도정치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권력다툼으로 국정은 혼란스러웠고 결국 외세를 불러들였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당시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음으로써 근대국가로서 발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다.

 

이와같이 19세기는 국제적으로는 서양 세력과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을 쳐들어올 기회를 노리던 시대였다. 한마디로 예측 불가한 불확실성의 시대, 민심은 불안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조선 후기사회였다. 조선 민중은 각자도생으로 살 궁리를 찾아 헤매던 시대였다. 그래서 일부 민중들은 전쟁과 환란 등에 안전한 곳이라 예언된 십승지를 찾아 이주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들은 이러한 불안이 우울처럼 사회에 만연되는 불확실성 시대에 구원자(메시아)가 나타나 이 현실을 타개하기를 고대한다. 더구나 구세자가 나타나 희망찬 미래를 예측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민중들에겐 빛과 같은 복음의 언어였다. 이러한 민중의 복음적 예언서가 바로 참서, 비기, 비결서, 점성술 등이다. 이러한 예언서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내가 세상을 구하노라』라 하는 예언가, 眞人, 異人, 道士들의 등장이다. 조선 후기 민중의 갈망을 담은 대표적 예언서가 바로 정감록이었다. 서양에서도 이와 같았다. 예를 든다면 구약의 세례요한) 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당시 지배자와 권력 횡포를 비판했다가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불온서적 정감록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한 대표적 예언서이다. 이 정감록은《송하비결》, 《격암유록》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예언서)로 꼽히고 있다.『1871영해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이필제와도 관련이 있어 여기에 언급하고자 한다. 

정감록은 지금은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신봉하고, 사이비 계통 종교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어 민중을 유혹하고 있다. 정감록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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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비기, 예언서인 정감록(위키백과사전)

 

①정감록은 어떤 예언서인가?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한 대표적 예언서이다. 정감록에는 조선왕조가 곧 망하고 정도령(정씨)이라는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연다는 것이 이 예언서의 주요 내용이다. 

 

정감록은 정본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본(異本)이 많다. 그래서 온갖 비결서가 섞여 전해왔다. 정감록 등장인물은 이심(李沁, 조선의 조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 등과 금강산에서 서로 마주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물론 등장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다. 이중 한 인물인 정감이 나오기 때문에 정감록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이다. 또 어떤 전문가는 한자 鑑(감)자는 거울을 뜻하는 鑑字로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정감록은 풍수 사상과 도참 신앙, 십승지론, 해도 진인설, 미륵신앙 등이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 대화집 형식이지만 한문으로 은어 등 비유로 되어 있는 난해한 책으로, 국가 운명과 백성 존망(百姓存亡)에 관한 판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사람은 정도전, 정여립 등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은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 당시 왕조 세력에게는 반역사상을 담은 책인데 누가 감히 이름을 밝히겠는가. 이러다 보니 민간에서는 금서로서 골방이나 은밀한 곳에서 독서를 하였을 것이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숨겨 두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내용이 다르게 베끼기도 했을 터이고, 더러는 필사자가 의도하는 내용도 덧붙이거나 부분개작도 했다고 보아진다.

 

영조 때 실록에 처음 정감록이 등장한 뒤 조선조정은 이 책을 다시 펴내거나, 민간인들이 소유하거니 읽는 것을 모두 금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계룡산 아래 새 왕조가 세워진다는 그야말로 반체제의 불온사상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비밀리 필사본으로 만들어져 널리 퍼졌다. 

 

이 정감록은 조선왕조 지배계층에게는 혹세무민의 황당무계한 책이었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현재의 부패한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보국안민과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게 하는 복음서로 작용했다. 그래서 당시 여러 역모 사건과 관계되었고, 19세기 말 동학 운동, 민족 종교 등 신종교 출현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정감록은 지배 이념에 대한 피지배자인 민중의 저항이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민중의 이상세계를 구현할 구세주 신앙이자 복음서이자 현실 도피적 은둔사상이 담겨 있는 이기적 행태가 담긴 예언서이기도 하다. 

 

② 정감록과 같은 현대판 금서도 있었다.

그런데 정감록과 같은 금서 지정은 현대사에도 있었다. 7~80년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도 일반 대중이 읽어서 안 되는 금서들이 있었다. 이른바 불온 도서 목록이다.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반공·냉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서적을 제외한 모든 도서 출판을 탄압했다. 그리고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유신을 단행했다. 하지만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저술 활동이 활발해지자, 1974년『긴급조치』를 내려 국내 여론을 통제했다. 이때부터 많은 책이 금서처분을 받게 된다. 


그 대표 도서 가운데 하나가 김지하)(1941-2022)의 시집『오적五賊』)이다. 시집『오적』이 반체제 도서라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저자인 김지하는 반공법(현 국가보안법의 전신) 위반으로 체포되고,「오적」이 실렸던『사상계』는 폐간됐다. 김지하는「오적」이라는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 수혜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국회의원(國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등 신조어 한자로 표현하면서 ‘오적’이라 일컫는다. 다섯 도둑이『남녘 똥 덩어리 둥둥…구정물 한강가’에서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며 도둑질 대회를 벌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80년대 들어서서도 금서조치는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권도 금서목록 기준을 민주화를 희망하거나 자본주의를 적대시한 것, 공산주의에 편승해 노동투쟁을 선동한 것, 좌경 불온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비판서,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 철학서, 노동운동서, 민중과 소외계층을 주제로 한 문학 도서뿐만 아니라 제3세계 이론이나 한국 근 현대사와 경제를 다룬 책, 좌파사상이 담긴 교육서, 해방신학 도서, 민족주의와 통일 운동 관련 도서도 모두 판매가 금지됐다. 지금이야 격세지감이지만 한마디로 과거 권위주의 시대는『금서공화국』이었다. 

 

필자가 문학청년 시절 금지된 시집『오적』을 문학동인들과 어느 막걸리집에서 복사본을 보고 토론하던 때가 이제는 아련한 흑백추억으로 남았다. 


조선 후기 금서였던 정감록은 지금에도 정치 사회적으로 일정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위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재앙을 피하고, 목숨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길지(吉地)를 찾는 십승지 탐색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후보 중에도 누가 대통령이 되도록 예언하고 있다는 도참설) 이 나돌아 유권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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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위키백과사전)

 

울진 동학도 심문 진술에 나타난 진인설

『1871영해동학혁명』관련 문헌으로『영해부적변문축』이 있다. 이 문헌은 당시 조선 정부가 1871영해사건에 연루된 동학도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기록한 것이다. 일종의 군사작전 일지이다. 영해사건이 나자 조선정부는 야전군 수사본부(경순막)를 설치하고 5개월여 동안 동학도들을 잡아들여 수사했다. 이 문헌에는 당시 수사관들이 범인을 추궁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심문과 동학도들이 답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영해부적변문축』에는 울진동학도인 김귀출과 전인철의 심문에 정감록에 등장하는 진인설에 대한 진술이 나온다. 여기의 진인은 물론 이필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① 김귀출이 진술한 진인은 이필제였다

『영해부적변문축』에 울진사람으로서『1871영해동학혁명』(이하 동학혁명)에 참가한 김귀출의 진술에 다음과 같이 이필제가 진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전인철과는 처남매부간이다. 혁명 당시 그는 평해 관아에 속한 역인이었다. 그가 했던 일은 관아의 마차 바퀴 등을 수리하는 기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학혁명 당시 영해부관아 무기고에서 병기를 탈취한 죄명으로 엄혹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김기출은 당시 44세, 평해 월야동 출신, 평해 월야동은 현재 기성면 방율리다. 물고로 사망함. 당시 직업은 평해 역인이다. 그는 심문 취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다음은『영해부적변문축』의 1871년 3월 24일 자 심문조서 일부이다. (한자 원문 생략)

 

『나는 금년 2월 25일쯤, 간사 일을 맡아서 평해 월야동에 거주하는 나의 처남 전인철의 집에 갔다. 인철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미 들은 바 있겠지만 영해 병풍바위에 거주하는 박사언(박사헌을 말함)의 말에 따르면, 진인이 있다. 작년 7월부터 우리 집에 유숙해 왔다. 우리는 무극대도의 후천개벽 오만 년의 횃불을 밝혀 동학혁명을 이루고자 한다. 이미 서양에서는 임금을 4년마다 백성의 손으로 뽑아서 정하고, 임금을 처형한 나라도 있다.고 한다. 병인년에 그 나라들은 배를 타고 수만 리 우리나라 연안까지 드나들면서 우수한 무기와 큰 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은 모두 백성이 존귀한 후천개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하생략)』


우리는 김기출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1871년 영해 박사언 집에 진인이 유숙하고 있다. 여기서 박사언은 박영관 또는 박사헌을 말한다. 영해 초대 접주인 박하선의 아들이다.

둘째 이미 서양에서는 이미 대의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 

셋째 심지어 임금이 잘못하면 처형까지 한다.

넷째 서양에서는 이미 모든 백성이 존귀한 후천개벽이 되어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해 병풍바위 아래 박사헌의 집에 진인이 유숙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진인은 이필제를 두고 말한다. 이미 이필제는 당시 동학도들에게는 진인으로 통칭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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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추념비

『1871영해동학혁명추념비』건립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추념비 제막식은 2024년 4월 29일에 영해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있을 예정이다. 

 

② 전인철 심문조서에 나타난 해도진인설

정감록에는『해도진인설』이 나온다. 해도진인설이란 ‘해도(海島)’와 ‘진인(眞人)’의 합성어로,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서 진인이 출현한다.’는 도참이며 예언을 말한다. 

 

민중의 메시아인 진인은 왜 해도(海島)라는 섬이라는 곳에서 오는가? 그 믿음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17세기 말까지 진인의 출현은 주로 육지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면 해도가 이를 대신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여러 까닭으로 해도에 유입된 이주민이 증가한 사실에 바탕을 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 이후 조선 후기 정치 혼란과 민생 도탄으로 빈농층과 몰락농민층에서 일부는 유랑민 등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 많은 유랑민이 해도로 숨어들거나 이주하여 삶의 길을 찾고자 했다. 특히 서·남해는 동해보다 해도가 많고, 어염(魚鹽)이 풍부해 생업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재부(財富)를 쌓기에 쉬웠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철종 시대 반란 사건이 있었다.


『철종 4년(1853) 11월에는 경북 영양현에 살던 정우룡과 그의 아들 정자성이 환술(幻術)을 믿고 흉계를 내어 도당을 불러모으고 거사를 기약했으며, 울릉도의 도적들과 합세하기로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진인이 해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현재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해도기병설이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변란의 강력한 이념으로 가능하였다.)고 보겠다


신미(辛未 1871)년 3월 21일 1차 심문 당함. 전인철(全仁哲) 나이 45세 (효수형을 당함), 강원도 평해 월야동(月夜洞, 현 기성면 방율리) 출신이다. 현재 그의 후손 전동일씨가 대구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 영해에서 개최하는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다음은 전인철의 심문조서 일부이다.


『수사관: 질문에 대하여 말하되 너는 붙잡힐 때 장졸(장교와 졸병)들이 너에게 반드시 범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동안 일을 낱낱이 거짓 없이 똑바로 말하여라.


전인철: 나에게 추궁하므로 답한다. 이번 3월 2일, 4촌 형인 전영규(全永奎)가 나에게 동해 섬에 정가(鄭哥)가 있는데 장차 크게 귀하게 될 사람이다. 나와는 이미 친하고 익숙하여 허물이 없는 사이이다. 너도 함께 가서 원대한 일을 이루도록 하자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못 들은 것으로 했다. 초아흐렛날 다시 영규가 영해는 고래 잡는 왜선이 많이 정박하는데 사람들이 다 피난 가야 한다.)』고 했다.(이하 생략)

위 진술에서 4촌 형인 전영규가 동생 전인철(전동규, 전의철이라고도 함)에게 동해 섬에 정가라는 사람이 있는데 함께 가서 큰일을 도모하자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경북 영양현의 정우룡 부자(父子)의 반란사건에서 보듯이 여기에 나오는 동해 섬은 혹시 울릉도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② 그 동해 섬에 정가라는 인물이 장차 세상을 구할 진인으로 보고 있다. 정감록의 진인인 정씨가 메시아로 새로운 세계의 왕으로 본 것이다. 동학이 꿈꾸는 원대한 일은 조선왕조를 바꾸는 혁명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해동학혁명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③ 영해에 왜선이 많이 정박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난 가야 한다는 말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전인철 심문조서에 정가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필제는 아니다. 정감록에서 민중이 고대하는 메시아인 정씨이다. 또 하나는 전영규와 전인철(전동규를 말함)는 당시 1871혁명 주도자로서 이미 둘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촌끼리 대화를 나눈 때가 거사를 하루 앞둔 날(초아흐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인 전동규는『못 들은 것처럼 했다.』는 진술로 볼 때 4촌 형인 전영규에게 책임을 미루는 듯한 회피성 발언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감록은 조선 시대 민중들이 가졌던 이상세계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민중의 사상체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민중의 예언서이자 경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지배계층인 조선왕조로서는 반역을 꿈꾸는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으로 척결해야 할 사상체계였다. 그래서 민중들에게 접근 금지의 도서로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정감록은 소외당한 지식층과 혁명을 꿈꾸는 변혁운동가들에게는 일종의 금과옥조 같은 지침서였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민간에 스며든 진인 사상은 민중들에게 이상세계를 구현할 메시아를 고대하는 복음서 구실을 했다.『1871영해동학혁명』에서 참여하여 체포된 김기출과 전인철의 심문조서에서 보듯이 진인 사상은 그들의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은 서양의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대의 제도와 절대군주도 민중혁명을 통해 민중의 손으로 처단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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