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東窓)이 밝았느냐

기사입력 2008.10.31 20:02  
댓글 0
  • 카카오톡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남송(南宋)의 재상 진회(秦檜)는 금나라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첩자에게 매수되어 전쟁을 중지하고 금나라에 투항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악전고투하는 악비(岳飛)가 주전파(主戰派)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금나라와의 협상에 최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략을 꾸며 금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악비를 불러들여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옥에 가두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되는 중국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당시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던 악비는 옥(獄)에서도 무고를 주장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진회는 옥에 갇힌 악비를 빨리 죽이려 했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으로 꼽히는 그였지만 연전연승으로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면서 백성들의 우상으로 인기가 높은 악비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 동창(東窓) 아래에서 잔꾀를 내려고 온갖 궁리를 하던 진회에게 부인 왕(王)씨가 다가온다. 화로에 담겨 있던 부젓가락을 꺼낸 왕씨는 재 위에 글자를 쓴다.“호랑이를 놔주기는 쉽지만 잡아들이기는 어렵다(縱虎易兮擒虎難)”는 내용이다. 속뜻인즉 빨리 악비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악비를 살려내기 위해 사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악비(岳飛)와 유기(劉錡) 등과 함께 금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아내며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한세충(韓世忠)이 진회를 찾아가 격렬하게 항의하며 따졌다.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인가?”진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마 있을 지도 모르지(莫須有)”죄명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죄명이다.

 

한세충은 “그런 말로 어찌 천하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라고 개탄하면서 물러났다. 한세충은 더 이상 악비를 구해낼 수 없음을 알고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서호(西湖)로 돌아가 은거하게 된다. 

 

얼마 후, 진회는 부하를 시켜 증거를 위조하고 악비와 그의 아들 악운, 부장 장선을 함정에 빠뜨린 후 황제의 명(命)도 위조하여 몰래 그들을 살해하고 말았다. 희대의 충신이자 애국자였던 악비는 이렇게 비참하게 간신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회와 그의 아들이 차례로 죽자 불안해진 왕씨는 도사를 청해 제단을 쌓고 진회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도사에게 부탁하여 망자의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다. 도사는 도술을 부려 저승으로 내려와 먼저 꽁꽁 묶여 있는 진회의 아들을 만나 물었다.

“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고 묻자, 아들은 “풍도지옥(?都地獄)에 계십니다”고 대답했다.

 

도사가 풍도로 가보니 과연 진회를 비롯하여 악비를 박해했던 무리들이 모두 철로 된 칼을 쓰고 온갖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고 있었다. 돌아갈 때가 임박해지자 도사는 진회에게 부인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진회는 울면서 말했다.“부인에게 말을 전해주시오. 그 날 밤 동창에서 꾸몄던 일이 모두 다 드러났다고(可煩傳語夫人, 東窓事發矣)”도사는 현세로 돌아와 왕씨에게 진회의 말을 전해주었다. 왕씨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죽고 말았다.

 

명(明)나라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餘)’에 실린 이야기로서,‘몰래 꾸민 모략이 남에게 들통 나다’라는 뜻의‘동창사발(東窓事發)’이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 고사이다.

 

간신 진회가 영웅 악비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역사적 사실에다 영웅의 아까운 죽음을 기리려 민간에 구전되어 오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붙여져 약간 윤색이 되긴 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고사(故事)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결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묻힌 것처럼 보였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 진상이 드러나게 된다.

 

초가을 강물이 빠진 후 물 속에 잠겨있던 돌이 모습을 드러낸 적벽을 바라보며 소동파가 읊었던 ‘수락석출(水落石出)’이라는 시구(詩句)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부정과 부패로 고위층 인사가 구속되거나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는 이제 새삼스러운 뉴스가 아니다. 처음에는 ‘금시초문이다’느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라고 발뺌하다가 자고 일어나면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로 바뀌는 것도 이젠 식상하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매 번 그 부정한 돈의 단위가 점점 커지는 바람에 이제 어지간한 규모의 사건으로는 사회 전체가 별로 놀라지 않는 집단 불감증이 만연되어 간다는 것이다.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는 않고, 소나기도 종일토록 내리지는 않는다)’이라 했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지속되지 않는다. 소나기도 온종일 내리지는 않는다.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순리에 맞지 않거나 비정상적인 일은 그 기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오래가지는 못한다. 

 

사람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드러나는 부정과 부패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구린내가 물씬 풍기는 후진국의 전형인 ‘비리 공화국’에 머물러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벌써 10여 년째 더듬거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보노라면, 그동안 전 방위로 방향을 상실한 채 집단적 도덕불감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업자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남구만(南九萬)의 시조에서 전통적으로 우리 서민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동창’은 이제 더 이상 낭만적인 용어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갈수록‘노고지리 우짖는’동창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날 저질렀던 온갖 거짓과 부정이 남에게 들킬까 번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창부터 밝아 오는 아침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www.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울진뉴스/월간울진(http://uljinnews.com |   창간일 : 2006년 5월 2일   |   발행인 / 대표 : 김흥탁    |   편집인 : 윤은미 
  • 사업자등록번호 : 507-03-88911   |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말루길 1 (1층)   |  등록번호 : 경북, 아00138    |   등록일 : 2010년 7월 20일                         
  • 대표전화 : (054)781-6776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전자우편  uljin@uljinnews.com / ytn054@naver.com
  • Copyright © 2006-2017 uljinnews.com all right reserved.
빠른뉴스! 울진뉴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