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4.06.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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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평야의 경제적 기반은 1871 영해동학혁명이 가능케 한 하부구조의 배경이 되었다.(송천하류, 영해평야, 동해 모습)


지난 호에서 조선 후기 민간에 전해온 대표적 예언서(도참서, 비기 등)이자 불온한 서적 정감록에 관해 대충 살펴보았다. 정감록의 요지는 어지러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정씨 왕조가 들어선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亡이씨왕조설』과『創정씨왕조설』이 유언비어처럼 민간에 떠돌았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이 예언서를 민간에 유포되는 것을 엄금하였다. 또, 이를 믿고 결사(結社)를 행하거나, 조짐이 보이는 무리를 체포하여 반역죄로 다스렸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감록 등의 도참사상이나 비결에 나타난 말세 현상과 진인설(眞人說)은 조선 민중들에게 심리적으로 난세에 세상을 구할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진인설은 유교적으로는 도덕적 이상 사회를 건설한 성인군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말세에 나타나는 구세주(메시아)이다. 불교적으로는 전륜성왕이나 미륵불이나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1871영해동학혁명』 시 사건 관련 기록인『영해부적변문축』등에 울진 동학도들이 말한 진인설과 이필제의 관련성을 짚어보았다.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은 그가 펴낸 용담유사(龍潭諭詞))에서 정감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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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이라는 책은 감결(鑑訣) 하나로만 된 책이 아니라 10여 종류의 비기를 한데 묶은 책인데, 이 비기류의 책은 보통 유서(儒書)와 달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아무렇지도 않은 상식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왕조의 필연적 쇠망을 자기 쇠퇴와 더불어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정감록은 민중에게 혁명의 필연적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혹세무민의 사설(邪設)이 아니라 혁명을 통하여 민족의 생명이 영속되리라는 신념을 불어넣어 준 예언서인 것이다. (이하생략)』 


또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수운 최제우 선생은 용담유사 권학가, 몽듕노소문답가 등에서『당시 민중이 정감록류의 도참비기에 홀려 있는 현실을 아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 정감록의 십승지나 궁궁(弓弓) 논의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민중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평했다. 

다시 말해 정감록에는 당시 민중의 소망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도 일어나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감록에는 비과학적 요소가 있으나, 그 밑바탕에는 도도한 민중의 혁명적 기운이 흘렀다. 어쨌든 당시 조선 후기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역성혁명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탈출구를 원했다. 

이 역성혁명은 예컨대 고려왕조에서 조선으로, 그래서 역대 왕조의 이름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정감록의 배경에는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들어선다는 역성혁명이 깔려있다. 당시 민중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왕조를 갈아치우고, 동시에 새로운 왕조(정씨 왕조)를 개창하려는 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조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末世의 조짐이나 진인 출현을 강조하면서『왕조교체』와『濟世安民』등을 명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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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강국 청나라가 영국군에게 철저하게 참패했다. 청나라 참패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조선 민중들이 서구 열강에 대한 공포심으로 떨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증기선 네메시스호가 청나라 정크선을 파괴하는 모습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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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대원군이 실았던 곳, 대원군은 1871 영해거사시 동학도 진압을 위해 배선달이라는 무관을 밀파했다. 위키백과


젊은 날, 이필제의 행적

이필제는 1871년 영해동학민중봉기에서 당시 동학혁명지도자로 평가받는 최고위 인물이다. 한 시대의 풍운아였던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지금 21세기에 와서야 동학 역사상 최초로 동학혁명을 영해에서 촉발하고 진행 시켰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영해는 우리나라 최초로 동학혁명 발상지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필제의 젊은 날 행적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에서 태어난 향반(鄕班:시골 양반)이었다. 그는 전의이씨 후예이다. 이들은 공주, 예산, 홍성 일대에 퍼져 살고 있었다. 그의 선조들 역시 이 일대에서 행세깨나 하는 양반가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종원, 할아버지는 원규였으며 어머니는 안소사, 외할버지는 안규묵이었다. 

이필제는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보아 이필제 집안 역시 상당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열심히 하였고, 독서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랬기에 뛰어난 문장 솜씨를 보였고, 시도 잘 지었다. 그와 함께 진주작변을 도모했던 양영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문사와 언어를 보니 반고, 사마천과 소진, 장의와 다름없었다.』

이 말은 이필제를 반고나 사마천 같은 역사학자에, 또 소진과 장의 같은 전략가에 비유할 정도로 대단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실력을 가진 그가 과거를 쳤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선달 혹은 출신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다는 것은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알 수 있겠다. 선달이나 출신은 과거 초시에 합격하면 붙여주는 이름이었다. 그는 벼슬길로 나아가지 못한 요즘으로 치면 고학력 실업자나 다름없었다.


한편 이필제 외모 또한 특이했다고 한다. 그는 키가 크지 않았지만, 상체가 커서 전체 몸이 큰 느낌을 주고, 얼굴과 온몸에 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외국인과 같은 풍모를 갖춘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수염은 특이해 후에 조령작변에 함께 모의했던 정기현은 이필제의 턱에는 용수(龍鬚: 용의 수염)가 있다고 하였다. 

한편 그의 손바닥에는 <王>字 혹은 <天王> 字가 새겨져 있었으며 등에는 일곱 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필제의 외모에 대해 당시 조선 정부 공초 기록에는『외모가 흉악하며 평소 성정이 포악한 것』으로 낮게 평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그와 작변을 도모했던 동조자들의 진술은 그렇지 않다. 그는 신수가 훤칠한 미남에 언변이 특히 뛰어났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필제가 관의 지명수배를 받고도 끊임없이 무리를 모은 비결에는 바로 뛰어난 외모와 탁월한 말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모와 말재주는 대중의 이목과 관심을 끌어 동조자를 모으는데 한몫을 하는 것이다.

당시 민중들은 정감록 등에 나오는 진인 같은 영웅호걸이 나타나기 바라는 카타르시스 같은 대중심리 작용도 했다고 보여진다. 이는 앞서 1871 울진 동학도에 대한 심문·진술을 기록한 『영해부적변문측』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필제 외모에서 얼굴과 온몸에 털이 많은 외국인과 같은 모습은 사실일지 모르나, 손바닥에 왕자나 천왕자, 일곱 개의 점 따위는 아마 그 자신이 직접 문신을 했다고 보겠다. 

그것은 뭔가 자신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특별한 이미지를 연출해 주술적 신비스러움과 비범함을 노리는 대중홍보술이었다.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손바닥에 왕자(王字)를 써서 주술 논쟁)이 있었다. 


이필제의 멘토(mentor), 풍기선비 허선(許璇)

이필제의 삶은 젊은 시절부터 고향에서조차 순탄치 못했다. 그가 1859년(철종 1년) 사기죄로 영천에 1년간 유배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가 영천으로 유배 간 죄목은 사람들을 속여 재물을 모으는 등 양반으로서 불미스러운 일을 했다는 등의 공초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기 내용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는 왜 유랑지식인으로서 전국을 떠돌며 봉건왕조에 저항하는 변혁 운동에 목숨을 걸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필제가 조선사회의 변혁과 중국 정벌 등의 꿈을 꾸게 된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경상도 풍기 선비인 허선(許璇)과 만남으로 보인다.


풍기 선비 허선은 한의사이자 지식인이었다. 이필제(25세)가 외가인 풍기에 갔을 때 그의 외삼촌(안재백, 안재억)의 소개로 허선을 만났다) 고 한다. 당시 이필제가 허선에게 그가 쓴 시 10여 수를 보여 주었다. 허선은 그의 시 재능을 극찬했다고 한다. 

이필제가 이 시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바는 아마 북벌호(北伐胡)와 남벌왜(南伐倭)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북쪽으로는 청나라를, 남쪽으로는 일본을 정벌하는 원대한 꿈을 시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때 허선은 그가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로 보고 지도 조언을 하였다. 

이후 그는 허선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재정적 지원도 받았음은 물론이다. 요즘으로 치면 선비 허선이 이필제에게는 멘토)였던 셈이다. 당시 허선은 이필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기를 당의 곽분양(郭汾陽)처럼 하고 한(韓)을 위하여 원수갚기를 진나라를 멸망시킨 장자방(張子房)같이 하라. 대양국은 오래지 않아서 천하를 어지럽힐 것인데 우리나라에 끼칠 해독이 심할 것이다. 서쪽으로는 대양을 다스리고 북쪽으로는 흉노에 이를 것인데 그대가 아니면 해결하기 어렵다. 그대는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고 늙은이의 이야기를 혼몽하다고 여기지 말고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도와서 큰 공을 세우도록 하라. 그러나 중간에 허다한 풍상을 겪을 것이고 머리가 하얗게 셀 때쯤 되어서 성공할 것이다.』


이 대목에 나오는 곽분양은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이다. 그리고 장자방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다. 장자방의 또 다른 이름은 장량이다. 장량은 초나라와 한나라가 대립하던 시기의 인물이다. 그는 한의 유방의 책사로 들어가 적국인 초나라 항우를 이기고 한 왕조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오늘날 중국 유명한 관광 명승지인 장가계가 바로 장량이 은둔해 살았던 곳이다.


한편 이필제와 허선과 관계는 『좌포청등록』에도 나온다. 이 기록은 이필제와 거사를 도모하다 체포된 박회진 진술이다. 좌포청은 조선 시대 도적들을 단속하는 등 치안을 담당하는 오늘날 국가 기관인 경찰청과 같은 기관이다. 『좌포청등록』이란 조선 후기 포도청에서 행정업무와 각종 범죄 사건 등이 기록된 문건을 말한다. 


『필제가 말하기를 내가 謫居할 때 이곳에 許野翁이란 사람이 있어 수년 전에 죽으면서 그 처자에게 글을 남겨 말하길 이후에 이필제라는 사람이 오면 이 글을 전하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 글에 이르길 풍기는 勝地인데 제1지(第一地), 제2지(第二地), 제3삼지(第三地)가 있다. (중략) 또 이르기를 필제의 필자(弼字)는 궁궁(弓弓)이다. 또 이르기를 필제는 을유생(乙酉生)이므로 을을(乙乙)이 되어 壬辰年의 松松之說을 방불케 한다. 그리고 선생이 있어 ‘필제를 도울 자가 있으니 그는 이용현이다’라고도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듯이 선비 허선은 풍기를 난세와 천재지변 등에서 안전한 명당복지인 십승지로 보았다. 그리고 난세에 나타나 조선왕조를 뒤엎고 세상을 구할 진인으로 이필제를 지목, 예언하고 있다. 

 

한편 허선은 생전 이필제에게 『앞으로 조선을 침략해 올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오랑캐 청나라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서 이후 이필제는 거사 동조자들에게 척양론과 북벌론을 대의명분으로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강국 청나라를 친다는 대륙정벌론은 허황할 만큼 무모한 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필제의 대륙정벌론 등은 외세에 저항하고, 난세를 극복해 자주 국가로서 면모를 갖추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또 다르게 평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필제의 이러한 의식배경에는 멘토였던 풍기 선비 허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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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는 1870년 7월, 진주에서 두번째로 진주작변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진주남강과 진주성 모습. 오마이 포토

 

직업혁명가 이필제와 진주, 진천작변

우리나라 역사상 19세기 후반 고종 6년(1869)에서 고종 8년(1871) 사이의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전국을 유랑하며 변혁 운동에 몸 바친 인물은 이필제 밖에 없었다. 그는 무일푼의 실업자였다. 그의 재주와 무기는 헌헌장부의 외모와 뛰어난 대중을 설득하는 언술과 문장을 짓는 지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무기는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왕조를 개혁하려는 굳은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목숨을 건 반왕조 반역 의지였던 셈이다. 그는 요즘 말로 치면 타고난 변혁운동가요, 직업 혁명꾼(?)이었다. 


이필제!

그는 1871 영해 거사에서 최고 우두머리였다. 당시 이필제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무과에 급제하고도 군인으로 못 나간 사람들을 출신 혹은 선달이라 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자리도 못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을까? 

조선 후기는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과거를 자주 치러 급제자 수는 많았으니 미발령자인 실업자 상태가 아주 많았다. 과거 급제자들도 그나마 연줄을 대거나 뇌물을 써서 벼슬길로 나아갔으니 비리와 부패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노는 세상 속물과는 달랐다. 후술하겠지만, 풍기 선비 허선을 만난 이후로 야심 찬 꿈을 꾸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필제는 고종 6년(1869)에서 고종 8년(1871)까지 3여 년에 걸쳐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 네 곳에서 변란을 연속으로 기도했으나 영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다. 진천, 진주작변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① 진천작변(1869. 4.) 

이필제는 평생동지인 김낙균金洛均과 함께 처음 모의 기도한 변란이 진천작변이다. 때는 고종 6년(1869) 4월이다. 

이들은 근래 소문에는 흑인이나 서양세력이 타국과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는 것, 장차 어디에서 안전하게 살길을 도모할 것인가? 그래서 이필제가 진인으로 그가 알려주는 피난지가 안전하다는 것, 다시 말해, 정감록에 나오는 병란을 피해 안전한 곳과 서양 오랑캐의 침공이라는 전쟁과 위기의식을 결부시켜 동조자들을 포섭했다.


이들은 주로 인척 관계나 평소의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동모자를 포섭하는 한편,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가를 끌어들였다. 진천작변을 고발한 김병립(金炳立)은 김낙균의 당숙이었으며, 이필제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찾아온 공주의 진사 沈弘澤과 김낙균의 당숙 김병립은 그의 든든한 재정 후원자였다. 

따라서 이필제가 포섭하려는 이들에게 충의와 북벌을 주장한 점이나, 서양 침공에 의병을 일으켜 싸울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이필제는 동조자들에게 거사가 성공하면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이것은 거사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한편, 당시 이필제가 진천을 중심으로 어지러운 정세를 이용해 왜국과 청국을 쳐서 한 달 안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야말로 실체 없는 소문은 곧 드러났다. 김낙균의 당숙 김병립이 관에 고발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심홍택과 양주동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었다. 진천작변은 이렇게 무산되고, 이필제와 김낙균은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② 진주작변(1870. 7.)

진천에서 시도한 변란이 사전에 발각되어 도망한 이필제는 1869년 12월 진주로 잠입했다. 두 번째 변란을 기도한 게 진주작변이다. 

먼저 이필제는 거창으로 가서 고종 6년(1869) 8월부터 알고 있던 양영렬(楊永烈), 정만식(鄭晩植), 성하첨(成夏瞻) 등을 만나 남해에서 거사할 것을 모의했다. 이들과 합세한 이필제는 자기의 뜻은 중원에 있으며, 장차 조선은 동서남북 네 개의 제후국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정만식은 진인을 자처하며 남해에서 변란을 도모하던 중이었다. 이필제는 정감록의 정가(鄭哥)와 정만식을 동일시하여 함께 거사하면 조선의 국왕이 되게 해주고, 일이 성사되어 군사력을 빌려주면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가 천자가 되겠노라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거사에 필요한 병력 등 돈은 성하첨이 밭을 팔아 마련한 170냥으로 충당하였다.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 부족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명화적(明火賊)으로 위장하여 인근 부잣집 재물을 탈취하려고도 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필제는 거사 명분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지금의 시세는 洋擾가 자주 있고 북쪽이 소요하여 강을 건너올 우려가 있으며, 왜구가 엿보는 조짐이 있고 해도에는 또한 도적이 많으니 나라의 형편이 산넘어 산이다. … 만약 지금 한 곳에서 병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봉기하고 곳곳에 戰氣가 있어서 온 나라가 삼분사열되어 北憂를 막기 어렵고, 群鄭(여러 명의 鄭眞人)이 함께 나타나는 것 역시 저지하기 어려우므로 나는 義兵을 일으켜 해도(海島)에 들어가 安定을 도모할 것인즉 집과 나라를 함께 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慶尙監營啓錄≫ 6월 14일 梁永烈供).』(위키백과사전 인용 참조함)


이들이 거사에 착수한 것은 12월 11일이었다. 먼저 남해안 섬에 들어가 군기를 탈취한 뒤, 섬사람들을 동원하여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나가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했다. 이후 곧장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진행하는 동안 동조자들과 약속한 품삯을 주지 않거나 혹은 어사(御史)로 가장하여 부잣집 등에서 재물을 탈취한다는 말을 듣고 거사하는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그러던 중 남은 동조자들과 남해 죽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관군 장교 한 사람이 배에 오르자 이필제 일행은 거사가 탄로 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모두 배에서 내리는 등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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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가 처형된 곳(서울시 중구 무교로 16번지), 서울시청 뒤편 서울신문사 앞 도로 건너 서울중앙우체국우체통과 대한체육회체육관이 있는 일대로 추정된다.(우체통앞에 선 필자)


남해 거사에 실패한 이필제 등은 다음 해 2월 28일 또다시 덕산에서 초당(樵黨)을 모아 진주읍성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24일 이름이 없는 고발장이 진주병영에 접수되었다.)

그 내용은『하동, 진주, 덕산 일대에 수상한 놈들이 나타나 흉패하고 불궤한 말을 퍼뜨리며 재물을 편취하고, 사람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이같이 이필제는 진주 일대에서 정감록의 내용이나 혹은 당시 사회모순을 거론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동모자를 포섭하고 자금과 장정들을 모으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동모자로 포섭한 진주 유학자 조용주(趙鏞周) 형제의 투서와 홍종선(洪鍾宣), 전낙운(全洛雲)의 고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함께 거사를 공모했던 정만식, 양영렬 등은 대부분 체포되어 추자도와 흑산도 등지에 유배되었다. 

주모자 이필제에게는 또다시 관의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필제는 진주작변이 실패한 이후로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 은신하였다. 도피와 은신 중에 진천작변에서 도망친 김낙균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또다시 거사를 계획했다. 1870년 7월, 이필제는 동해안 영해로 잠입하였다.                                   (계속)

 

1871영해, 최초의 동학혁명발상지 기념비 제막하다

당시 평해·울진지역 동학 참가 20여 명 고문·처형 등으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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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 기념비 제막식

 

영덕군은 1871 영해 동학혁명 제153주년을 맞아 지난 4월 29일 영해면사무소 앞 소공원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1871 영해 동학혁명 기념사업회(위원장 권대천)가 주최하고 영덕군(군수 김광열)이 후원한 이번 행사엔 도올 김용옥 선생, 고재국 전국동학농민혁명 연대 대표, 정갑선 천도교 교무관장, 김영진 동학학회 총무이사, 박형대 전남 장흥도의원 등 무안, 영양, 예천, 상주, 포항, 울진 등 전국 각지의 동학단체 관계자와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번 기념비 비문을 직접 지은 도올 김용옥 선생은 “영해 동학이 역사의 구조를 바꾼 진정한 혁명”이라며, “영해면의 신미동학혁명은 조선민중 혁명정신의 근원이자 시발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날 행사는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권태용사무국장의 개회로 시작되었다. 주요 프로그램은 지역단체, 동학단체소개, 기념비제막식(컷팅)청수봉전, 비문낭독과 해설, 비문건립경과보고, 용담검무, 살풀이공연, 연대체붓글씨퍼포먼스, 추모연주, 시낭송, 어린이합창, 후손꽃다발증정, 헌화순으로 진행되었다.


1871영해동학혁명은 당시 전국 16개 지역에서 모여든 600여 명의 동학도들이 교조최제우신원회복과 광제창생, 탐관오리 척결 명분을 내걸고, 1871년 3월 10일(음) 최제우 순도일을 맞아 영해부를 기습 점거하여 탐관오리 영해부사를 처단한 역사적 의거이다. 당시 평해와 울진지역 다수 동학도가 이 의거에 참가해 남두병, 전동규, 전영규, 김귀출, 황억대 등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해동학혁명은 1894 동학혁명보다 23년 앞서 거사했기에 지금은 우리나라 동학 역사상 최초의 동학혁명인 동시에 민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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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기념비 제막 행사 이모저모

 

<기념비 전문>

1817 영해! 동학혁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혁명은 전율이다! 혁명은 한 시각의 생멸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를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뒤바꿈뿐만 아니라 인민人民 다수의 삶의 가치가 조화로운 창조적 전진을 해야 한다. 근대혁명의 대표적 사건으로서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들지만 19세기 중엽에 조선대륙에서 흥기한 동학혁명사상은 프랑스의 인권선언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범인류적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서양은 신 앞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지만, 동학은 하느님과 인간 평등, 그 양자가 협동하는 역사를 말한다. 이 인내천의 사상은 경주 용담에서 태어났지만, 수운의 철학을 사회화시키고 조직적 운동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영해·영덕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수운은 고향 경주에서는 영남유생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영해는 경주에 인접해 있는 동해안의 유니크한 대평원지대로서 농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교양수준이 높았다. 신구향의 대립으로 개화된 신향의 사람들은 반상서얼의 차별을 철폐하는 동학사상을 충심으로 수용하고 그 운동을 신향의 기치로 내걸으며 동학운동의 하부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중심인물이 훗날 수운의 일대기를 집필한 인천리의 박하선朴夏善접주였다.

 

수운이 처형된 후 도통을 전수받은 해월은 고비원주高飛遠走의 피신생활을 계속했지만 결국 보호막이 탄탄한 이 지역 일월산에서 ‘다시개벽’의 비밀아지트를 마련한다.

 

이필제는 조선왕조를 뒤엎는 정치혁명이 없이는 동학도, 이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전문혁명가였다. 그는 ‘교조신원’과 ‘광제창생’의 명분을 내걸고 영해로 와서 해월을 만난다. 필제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해월은 이필제의 주장에 대다수 동학도인들이 찬동하는 것을 보고 기포를 명한다. 불과 나흘 만에 의관을 정제한 육백 명의 도유들이 모인다. 1871년 3월 10일 인간평등의 깃발을 든 민중들은 정확한 판결문을 포고하고 탐학을 일삼는 영해부사를 처단한다.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어 동학운동이 좌절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동학은 정치화되고, 사회화되고 조직화되어 해월의 피신행각을 위대한 거국적 혁명의 행진으로 만들었다. 이필제는 문경에서 재차 기의하여 같은 해 12월 14일 서울에서 처형됨으로써 해월지도부에게 의리를 지키고 혁명가답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영해의 신미동학혁명이야말로 조선민중 혁명정신의 근원이며 시발이다. 명銘하여 말한다.

 

月逝闢世寧海朗 

달이 가니 세상은 개벽되고, 영해 앞바다의 해맑은 기운은 낭랑키만 하다.


新鄕升龍不移象 

영해영덕의 뜻있는 선비들이 용담의 용을 하늘로 올리고 인간이 서로에게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하늘의 모습을 지었다.


革命生生鼓躍易 

혁명은 생하고 또 생하는 우주창조의 과정, 지금도 여기 우리 삶의 와중에서 약동친다.


勿忘庰風天德廣 

잊지 말자!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모인 신미년 그날 육백 영웅들의 포효는 하늘의 덕을 이 땅에 끝없이 펼치셨도다!

  

2024년 4월 29일

도올 김용옥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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