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시내버스 종점, 북면 고포 마을 기행(봄)

쪽빛으로 손짓하는 고포의 봄 바다!
기사입력 2024.06.2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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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포항(포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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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포마을 사람들과 해녀들이 짬(미역바위)에서 미역을 건져 올리고 있다

 

아련한 추억, 1반 차타기

누구나 대중 교통기관인 버스 타기에 대한 경험 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버스로 여행을 가던지 또는 단순히 이동 편의때문이었다.

 

60년 전 농촌에서 자란 이들의 버스 타기 경험은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다. 필자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버스를 탔던 경험은 대구행 1반 차 타기이다. 그때는 버스라는 말보다 그저 1반 차라고 말했다.

 

1962년도 노음초등학교 2학년 때인 가을철로 기억하고 있다. 대구 친척 집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대도시 나들이 때였다. 전날에 셀렌 가슴을 안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날이 채 새기도 전에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어머니는 벌써 집 나설 채비를 다 하고 있었다. 나는 세수를 대충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산포1리 섬 들판과 수산 공동묘지를 지나 지금의 근남 경찰지서(현 근남파출소) 앞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는 일정한 버스정류장 시설이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울진에서 출발하여 대구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두 차례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반 차, 2반 차라고 불렀다. 

 

1반 차가 나가는 경적을 빵빵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수산, 노음이나 섬마을에서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거나 소죽을 끓이는 시각이었다. 그 시각쯤이면 집집에 호롱불이 켜져 새벽을 밝혔다. 한편으로는 월변 포교당의 예불 종소리에 잠을 깨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버스 경적이나 예불 시작 종소리가 시계 구실을 했던 셈이다. 우리 어머니도 월변 포교당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소죽을 끓이곤 했다. 


당시에는 통금이 있었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낯선 용어일지 모르나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때부터 모든 국민이 밤에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었다. 이른바 통행금지이다. 약칭 통금이다. 통금시간은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였다. 

 

당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지만, 이 통금은 1982년 1월 6일에서야 해제되었다. 36년 4개월 동안 국민은 통행금지 시간대에는 꼼짝 마라! 시대였다. 

 

울진 1반 버스도 통금 해제 시각인 새벽 4시쯤에 출발하여 근남 지서 앞에 새벽 4시 넘어 도착했던 것 같다. 버스가 수산 다리에 불빛을 비추면서 환하게 다가왔다. 도로가 일시에 밝아졌다. 

 

버스는 근남에서 가장 큰 가게였던 김석출씨 가게를 지나 지서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당시 한식 음식점으로 유명했던 박복만씨 집 앞 건너편인 지서 앞에서 우리가 손을 들자 멈춰 섰다. 

 

조수가 문을 열고 내려섰다. 우리를 보자 얼른 타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중간 좌석에 앉았다. 너댓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나는 앉자마자 새벽잠에 취해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나니 평해 정류소라고 했다. 평해 정류소에서 오줌이 마려워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일을 보고 얼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강구, 영해, 영덕, 흥해를 지나 포항에 들렀다. 포항부터는 널찍한 들판이 나왔다. 대구와 가까운 경주, 경산 들판은 드넓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또 다시 잠을 잤다. 대구에 다 왔는지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얼들 결에 내렸다. 대구 시내에 들어서자 포장도로였다. 둘레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버스에서 내린 곳이 지금은 없어진 신암동 정류장인 거 같다. 도착 시각은 낮 오후 두 세시가 되었지 싶다.  


울진에서 대구까지 11시간 걸린 버스 대장정?

울진에서 대구까지 장장 11시간 넘게 걸렸다. 새벽부터 하루해가 다 가는 시각인 것이다. 지금은 승용차로 3시간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다. 울진에서 대구까지는 통상 500여리. 버스 속도는 시간당 평균 60-70 킬로미터쯤 될까?

 

두리번거리면서 내린 대구 시내 거리에는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통순경과 함께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 알고 보니 중등 보이스카우트 학생들이었다. 

 

당시에는 대구 시내 교통신호등 체계가 없었던 모양이다. 시내를 걸어서 친척 집에 갔다. 가는 도중에 울진 산골과는 사뭇 다른 도회의 풍경에 촌놈 눈이 어리둥절했다. 도회의 풍경에 한눈을 팔다 보니 어머니 걸음걸이를 따라가기 바빴다.

 

필자는 당시 학교 결석을 3일간 하면서 촌놈 도시 구경을 학교 동무들에게 자랑스레 이야기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당시 버스에는 운전기사와 운전기사를 돕는 조수가 있었다. 조수를 사람들은 『꼬지깽』이라 했다. 『꼬지깽이』는 일본말인듯하다. 조수가 하는 일은 버스가 출발할 때 쇠막대기를 버스 앞머리인 엔진에 꽂아 시동 거는 일을 했다. 꼬지깽이라는 말이 엔진 시동 거는 도구인 쇠막대기 또는 쇠꼬챙이라는 말을 두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조수는 쇠막대기로 막 돌리면 버스 엔진이 탕탕 소리를 내면서 움직임을 시작했다. 예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낡은 버스는 시동이 잘 안 걸려 승객 모두가 내려 뒤에서 떠밀고 가속 시동을 해서 출발했다고도 한다. 


한편 조수는 승객을 태우고, 안전 관리를 했다. 그때는 아직 버스 여차장이 없었다. 여차장 등장 후 조수 제도는 사라졌다. 이후 한동안 유지되었던 승객을 태우고 『오라이』 했던 여차장도 사라졌다. 지금은 버스 운전기사가 모든 것을 관리한다. 자동차 문화 발달 과정에서 그야말로 신석기 시대 같은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하는 시대이다. 어쩌면 운전기사도 사라지는 인공지능 버스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인공지능 시대는 벌써 우리 곁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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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버스 모습. 엔진이 앞에 달려 있어 앞부분이 튀어나와 있다. KBS뉴스(2020. 11. 12.)

 

울진에는 언제 자동차가 들어 왔을까?  

일제강점기 1912년경부터 전국에 신작로가 지역마다 닦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사람이나 우마차가 다녔던 길은 아무래도 당시 근대 과학기술의 최첨단 교통기관인 자동차가 왕래하기에는 불편했을 터이다. 그래서 이미 자동차가 다닐만한 도로는 그대로 두고 넓히거나, 구불구불한 도로는 직선형으로 닦기도 했을 터이고, 아주 새로 내는 구간 도로도 다수였다. 

 

일제의 도로 개설은 1차 목적은 식민지배용 도로망 연결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도로라는 뜻으로 붙은 신작로(新作路)였으며, 70년대 초반까지도 사람들은 신작로라 불렀다. 이 용어가 사라지기 시작한 때는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공된 도로를 우리는 『경부고속도로』라 이름했다.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빠르고 직선인 포장도로를 두고 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권이 내세우는 경제발전 치적 중의 하나로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고 하겠다. 


『고속도로!』 당시는 낯선 이름이었다. 흙먼지 일고 구불구불하고, 우당탕거리는 신작로에서 직선화되고 깔끔하게 포장된 고속도로가 생긴 것이다. 역마차길 → 인력거길 → 신작로 → 국도, 지방도 → 고속도로 → 고속국도 등으로 이름이 변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웬만한 길에서조차 신발에 흙 묻히지 않고 살고 있다. 논두렁, 밭두렁, 임도에서조차 모두 포장길로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불과 1세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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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울진군청 앞 시내버스 정류장, 울진군농협지부 앞 정류장, 고포행 버스 정차 모습

 

울진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육지의 교통로가 불편한 곳이었다. 조선 시대 울진의 옛길은 크게 남북을 잇는 동해대로와 내륙의 서북을 잇는 보부상길이 있다. 동해대로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을 잇는 옛길이다. 이 길은 남쪽으로는 영덕, 영해, 청하,  포항, 경주, 부산. 대구 방면으로 왕래하는 길이다. 북쪽으로 삼척, 강릉 등으로 다녔던 길은 『동해대로』라 하여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다. 현재 7번 고속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부구, 죽변, 울진에서 봉화, 영주 등 내륙으로 왕래하던 길은

『12령보부상 길』이다. 울진방면 12령 보부상길과 평해 방면에서 내륙으로 나아가는 길은 모두 최종 목적지는 한양으로 가는 길이다. 이른바 영남대로다. 이 길은 반드시 문경새재를 거쳐야 한다. 

 

『죽장에 삿갓 쓰고 한양 천리길~』 유행가 가사처럼 영남 선비들의 일명 『과거길』로 유명하다. 울진으로 지나는 동해대로나 12령 보부상 옛길은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울진지역 사회는 1920년대 후반부터 전화, 전기, 자동차 등 편의시설을 줄기차게 당국에 진정하여 온 봐 당시 매일신보 기사 등의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전화는 1935년 7월에 울진에 들어왔으며, 전기와 전등을 켜게 된 것은 1936년 2월 1일이었다. 1923년 9월 7일자 매일신보는『울진자동차주식회사』설립을 알리고 있으나, 1930년까지도 기선으로 울진 죽변-삼척-강릉-포항 등지의 항구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1920년대 울진군수가 죽변항을 통하여 배편으로 부임하고, 관동학우회도 삼척에서 죽변항으로 들어왔다. (1926년 11월 15일 매일신보) 1933년 돼지 천연두가 유행할 때도 포항에서 배편으로 울진에 병균이 전염된 것으로 기사화되었다.(193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다음은 관련 기사이다.


울진영주간 2등 도로선 조사(1918. 12. 26. 매일신보)

조선총독부 기수 복전영부와 강원도청 토목 기수 추미차량 두 사람은 울진영주간 2등 도로선 선정하기 위하여 울진에 온바 이달 17일 울진군수 강성희씨는 울진면장 남석화, 군참사 장석균 두 사람을 대동하고 노선선정에 안내하였는데 머지않아 도로공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울진자동차사 설치(1923. 9. 7. 매일신보)

울진지방은 매우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교통 불편의 어려움이 많았는데 일잔유지들의 발기로 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머지않아 기성도로에 한해서는 운전을 개시한다고 한다.


승합자동차 전복 2명이 중상(1931. 10. 27. 매일신보)

(강릉)지난 22일 오후 0시 10분경 경주 양양선 도로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얼마 안 되는 지점에서 약 100미터쯤 낭떠러지에 울진자동차주식회사 소유(강58호) 영해발 복행 1번정기자동차가 승객 2명을 태우고 운행하여 오던 중 추락 전복되어 승객 2명이 모두다 좌복주에 중상을 당한바 소관 울진서에서 당지 공의를 파송하여 응급시료를 하고 있는 중이다. 


강원도 자동차 운전수 합격자(1939. 8. 4. 매일신보)

(춘천) 지난 6월 22일부터 3일간 도 경찰부에서 시행한 자동차운전면허 시험합격자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중략)박진학(울진) 박용완(울진) 유용득(울진) 긴인재 (울진) 강상원(울진) (중략) 이상 25명


울진지역 신작로 개설과 자동차 운행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1930년대로 추정된다. 매일신보 1931년 10월 27일 자에는 울진군 기성 사동리에서 『승합자동차 전복 승객 2명이 중상』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울진의 신작로가 본격 개설되거나 자동차 등 교통기관이 울진, 포항,대구, 삼척, 강릉, 영주간 등으로 연결 통과한 것은 1930년대 전후반으로 보인다. 교통기관의 발달로 새로운 직업으로 자동차 운전기사가 등장, 인기였다고 한다. 울진에서 운전기사 자격증 시험 합격 소식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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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구정류장(좌)과 삼척 호산(우) 시내 버스 정차 모습 

 

경북과 강원도를 넘나드는 울진 시내버스

인류역사상 교통 문명의 발달은 현재 최고도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나라 땅 위의 교통기관으로 지하철 또는 고속철과 버스로 촘촘히 연결되어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산간벽지에도 버스가 들어가 주민들에게 대중교통 편의 제공한다. 시골 버스가 그 하나다. 시골 버스는 주민들의 마당발이다. 울진의 깊은 산골, 금강송면 소광리까지 버스가 드나든다. 


오랜만에 울진 시내버스를 탔다. 요즘은 승용차가 대중교통 편의 시대라 울진 곳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울진 시내버스를 타고 마지막 종점까지 느림의 버스 기행을 해보는 것도 또 다른 경험이 아닐까?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로 버스를 타고 울진 시내버스 종점까지 가는 노선의 풍광과 종점 마을의 역사,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한다. 

 

필자가 가보고자 하는 시내버스 종점 노선은 네 곳이다. 북쪽으로는 경북과 강원도 경계 마을인 북면 바닷가 고포, 서쪽으로는 금강송면 소광, 동남쪽으로는 근남면 덕신, 매화면 길곡, 후포면 금음리, 온정면 등이다. 한편으로는 꼭 시내버스를 타지 않더라도 승용차를 이용해 탐방, 울진의 최고 깊은 산골(오지)도 이번 기회에 소개한다. 


1차 행선지는 농협 울진군지부 앞에서 아침 07시 출발하여 북면 고포마을까지 가는 시내버스이다. 버스비는 1.000원, 현찰이다. 


오늘은 울진 장날(2024. 4. 27.)인데 울진군청 앞 버스정류소는 한산하다. 버스에서 내리는 장꾼들이 거의 없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다음 버스에는 울진군청 앞 버스정류장은 붐빌 것이다. 북면 고포로 가는 시내버스를 20여 분 기다렸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라 승강장 안을 둘러보았다. 승강장에는 버스 시간표를 붙여두었다. 한쪽 전광판에는 버스노선과 도착 시각이 실시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상북도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군이 맞닿은 도 경계지인 북면 고포 바닷가 마을로 가는 버스노선이다. 버스노선은 다음과 같다. 

 

농협 울진군 지부 앞 정류소(오전 07시)에서 출발→ 새마실→ 고성리 마을→ 고산성→ 명도리→ 울진환경개발 수거장→ 반정교→ 화방교→ 주씨열녀비→ 화성리 매니 골프장→ 죽변종합운동장→ 죽변 정류장(농협하나로마트, 7시 18분)→ 국립한국해양연구단지→ 고목 2리→ 부구버스정류장(북면 소재지, 7시 43분)→ 나곡(석호동네)→ 나곡 태실동네 고개→ 경북도 도화동산→ 강원도 삼척 호산 월천 내리막길→ 월천교→ 호산시외 버스정류장→ 호산면 소재지 버스 정류장에서 반환→ 월천 구 지방 도로→ 솔섬(사진 촬영 명소)→ 해안선→ 북면 고포마을 정류소 도착이다.

 

07시 고포로 가는 버스는 바로 죽변과 부구를 거쳐 고포로 가는 노선이 아니라 서북쪽인 고성리 구만 들판 앞 도로와 명도리 화성리를 지나 다시 동쪽인 죽변을 지나 부구리를 거쳐 도화동산이 있는 도 경계를 넘어간다. 

 

시내버스가 다닌 도로는 대부분 구 7번 국도이다. 거의 한적하다. 시내버스가 도 경계에 이르자 오르막이다. 숨이 가쁜지 느리 오른다. 멀리 고속국도의 차량은 날아가듯 달려간다.

 

버스 차창 밖 풍경은 봄빛이 완연했다. 2년 전 울진산불로 숯 검댕이가 되다시피 한 산들이 이제는 녹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자연이야말로 자연치유 회복이 빠른 것 같다. 군데군데 산불을 피해 용케 살아남은 소나무나 다른 나무들은 조상하듯 서 있다. 도 경계인 도화동산의 아카씨 나무는 하얀 꽃 무더기를 달고서 향기를 내뿜고 벌을 부르고 있었다. 오르막 들머리에는 고포 바닷가 마을로 가는 선전조형물이 있다. 버스는 고포마을 고개를 넘지 않고 북쪽 도로를 따라 오른다. 조선조 울진 현령 이보혁 공덕비 알림판이 나타난다. 당시 공덕비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가에 세웠다. 이를 보아 이 고개가 조선 시대 동해안에서 울진과 강릉으로 가는 큰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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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포마을 정류소 정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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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호산 월천 속섬(솔섬) 둘레에 엘엔지가스 탱크가 들어서 있다

 

버스는 다시 내리막길을 달려 월천교를 건너 삼척 호산리 시내 정류소에 도착했다. 잠깐 정차한 후 돌아서 월천교를 건너 해안마을을 끼고 달리다 고포 마을에 닿았다. 월천교 하류에는 사진 촬영 명소인 솔섬이 있다. 소나무 숲으로 된 자그마한 섬이다. 이제는 사진 촬영 명소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월천 강 건너에 커다란 엘엔지 가스탱크가 들어서서 바다 풍경이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해돋이 광경 등 아름다운 풍광도 찍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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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혁 휼민유애비(고포로 가는 구 7번 국도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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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길이 경북과 강원도를 경계선으로 된 울진 고포마을(좌)과 삼척 고포마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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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울진 고포마을 회관(좌), 삼척 고포마을 회관(우)、 아래 고포마을 성황당(좌), 해당화 핀 모습(우)

 

버스 종점 고포는 지금 미역 채취 중!

버스가 해안선을 달려 바닷가 고포 마을에 닿았다. 마을 정류장에서 내렸다. 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을 손질하고 있었다. 미역 줄거리마다 바다 내음이 난다. 

고포 앞바다는 지금 가을이다. 산천은 녹색으로 덮이는 봄철이지만 바닷물 속은 바위짬마다 미역이 황금 갈색으로 물이 드는 가을이다. 

 

올해는 미역 생산이 어떠냐고 묻자

『아이고, 작년보다 못하고, 해마다 예전보다 미역이 없니더.』

『미역이 풍년 아닌가요?』

『아니시더, 작년에는 일주일 넘게 해녀들이 작업을 했는데 올해는 작업일이 일주일을 못갈 거 갔니더』

『여기 미역 일하는 분들이 울진 고포분들입니까?

『아니요, 삼척 고포 분들도 있어요. 모두 같이 하니더』

뒤에 알아보았더니 이곳 미역 채취는 공동작업, 공동판매, 고포항구도 공동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고포항은 부지가 삼척지역이란다. 바다도 북쪽은 삼척바다? 남쪽은 울진바다? 그래서 바다에 실제 그어 놓은 선은 없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구역 관할 소속이 달라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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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포마을에서는 미역 채취와 말리는 작업을 모두 공동으로 하고 있다.

 

어느 할머니 한 분이 필자에게 미역 꾸덕지(미역귀)를 먹어보라고 건네준다. 꾸덕지에 미끌한 진액이 손에 묻어난다. 오랜만에 생미역을 먹어본다. 짭쪼름하고 상큼한 바다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예로부터 고포 돌미역은 임금에게 진상했던 미역으로 이름나 있다. 고포미역은 찰지고 좋아서 국을 끓이면 뿌연 국물이 우러나서 미역국을 끓일 때 참기름을 붓지 않아도 된다. 반면 양식미역은 국물이 새파랗단다. 고포 돌미역이 명성이 높은 까닭이다.

 

그리고 미역은 산후조리에 특효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더구나 봉화, 영주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미역을 산모에게 주는 최고 선물로 생각해 울진 바다에서 나는 미역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그래서 산모에게 주는 미역을 살 때는 미역을 동강 내어 꺾거나 그 값을 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태아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해를 바라보며 골 안에 자리 잡은 고포마을. 마을 안길 사이를 두고 남쪽은 울진 고포마을, 북쪽은 삼척 고포마을이다. 서로 마주 보고 마을을 이루고 있다. 두 마을 합쳐도 20여 가구쯤 되어 보인다. 고포에 사람이 들어온 것은 430여 년 전이다. 이 마을 성소라 할 수 있는 성황당 안내에 그 유래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마을은 1592년(조선 선조 때) 박씨 부부가 개척했다. 마을 이름은 처음에 할무계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후 1680년(숙종)경에 고포라 하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한다. 

 

필자가 울진버스 종점 기행으로 고포마을에 왔다고 하자 이장 최석기(74세)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포 미역 채취 현장에 작은 동력선을 타고 함께 나섰다. 벌써 바다에는 해녀들이 작업 중이다. 거울보다 더 맑아 물속이 훤히 보인다. 각종 해초들이 때를 만난 듯 맑고 투명한 햇살을 받아들여 일렁인다. 짬에서 자라난 미역들이 너울대고 있다. 육지는 초록 봄이요, 바다는 갈색 가을이다.

 

바다는 잔잔한 쪽빛이다. 하늘도 쪽빛으로 구름이 없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수평선과 하늘이 구분 없는 듯하다. 맑고 푸른 바다와 하늘이다. 동력선이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나아간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역 짬이 있는 곳에 동력선이 멈췄다. 짬이란 미역이 자라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짬 둘레에는 해녀 아지매 서너 명이 작업 중이다. 포항에서 올라온 해녀들이란다.


최석기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미역 망태를 끌어 올려 배에다 실었다. 미역을 가득 싣고 다시 고포항으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작은 트럭이 대기했다가 미역을 싣고 마을 작업장으로 나르고 있다. 싣고 온 미역은 다시 상품이 되도록 그물망에 반듯이 붙여 햇볕에 말렸다. 미역 말리는 채반들이 마을 길가에 정렬되어 있다. 고포 미역은 채반에서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다에서 금방 올라온 갈색 미역은 또다시, 짭조름한 바다향을 머금은 감색으로 변신을 하고 있다. 품질 좋은 고포 돌미역으로 상품이 되고 있다.

 

미역 운반용 차에서 필자가 

『미역 채취 작업에 힘드시겠어요』 

했더니 최석기 이장은 마을 숙원 사업을 봄바람이 흘러가듯이 말했다. 

『그런 일이야 늘 하는 일이라 뭐 힘들게 없니더, 그런데 마을에 꼭 필요한 것은 고포항에 시설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거든요.』

『그게 뭔데요?』

『크레인 시설인데요. 고포항은 작은 자연암벽 항구이라서 큰 파도나 폭풍우가 바다에 몰아치면 배를 미쳐 끌어 올리지 못할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인력으로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안전사고와 선박 파손에 대비했지만, 지금은 인력으로 갈수록 힘들어요. 동네 사람들도 자꾸 고령화되고 해서 힘들지요. 동력을 이용하는 크레인 시설이 있다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각종 재해 대비에 아주 좋지요. 시설 설치에 또 하나 애로사항은 고포항은 삼척소속이고 해서 허가 절차도 까다롭나 봐요.』

 

그는 미역을 마을 작업장에 부러 놓고 운반차를 몰고, 고포항으로 달려갔다.

고포항은 아주 작은 포구이다. 바위가 둘러쳐지고 그 틈에 움푹 파여 들어간 곳에 배를 대기에 안성맞춤의 자연 항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개가 바다에 의지하여 그 생산물을 팔아 가계를 꾸려간다. 앞으로도 고포 바다에서는 수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고포항은 재해에 대비한 크레인 등의 시설이 갖추어지는 마을 숙원사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바다에는 해녀들이 아직도 자맥질 중이다. 해안가에 붉게 핀 해당화가 고포마을의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작은 포구 고포항을 울진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고포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오전 10시 05분 출발이다. 울진군청 앞 정류소에 도착 시각은 11시쯤 될 것이다. 

 

울진 시내버스는 고포마을 재를 넘어 울진읍 쪽으로 향했다. 종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 중이다. 고개 정상에서 바라본 동해 바다는 쪽빛 그대로다. 고포의 종점 봄 바다가 또다시 손짓하여 부르고 있다. (2024.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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