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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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목민관과 수령칠사(守令七事)
조선 시대의 지방행정 체제는 전국 8도 아래에 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의 각 지방행정 관청을 두고, 도호부사에 종3품을 군수에는 종4품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현령은 종5품, 현감으로는 종6품의 관원을 보임하여 그 지역 백성들을 관장하여 다스렸다.
1871년 당시 영해 · 영덕지역은 영해부와 영덕현으로 된 행정구역이었다. 따라서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1년까지 영해부에는 총 304명의 부사(府史)가 조정에서 임용되어 영해부를 다스렸다. 영해부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영덕현에는 종5품의 현령이 부임하였다. 현령 아래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다. 이 현감은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이었다. 조선 시대의 현감은 전국적으로 13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8도 관찰사를 제외한 지방관리들을 총칭하여 수령 또는 목민관)이라 했다. 이들의 임기는 대체로 5년이 기본이고, 변방(邊方)과 가족이 같이 갈 수 없는 곳은 3년이었다.
여기에서 신임 수령들이 부임지에 떠나기 전 3가지 부임의례가 있었다. 1. 사은숙배: 임금에게 인사 올리는 의식 → 2. 사조: 중앙 육조 관료인 선배 상관들에게 인사 → 3. 출발: 부임지 향리들과 대면 등이다. 다음 글은 그 과정을 요약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수령의 부임 행차는 단지, 고을 초입에서 관아에 이르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수령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신임 수령이 관아 건물에 도착하기까지 ‘부임의례’라고 불러야 할 만큼 복잡하고 긴 의례 절차를 밟아야 했다. 부임 절차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임명돼 임금을 직접 뵙고 인사를 올리는 사은숙배(謝恩肅拜), 서울 경내에서 여러 선배 관직자들을 찾아 하직 인사하는 사조(辭朝), 서울에서 부임지까지의 여정과 관아 입성 등이다.
수령에 임명된 자가 지방에 있는 경우, 임명장을 전해 받은 뒤 서둘러 한양으로 올라와야 했다. 물론 사은숙배가 생략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은 다스릴 고을의 소식을 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은숙배 때 임금이 간혹 “수령칠사(守令七事)가 무엇인가” 하고 하문했다. 수령칠사란 수령이 맡은 중요한 업무를 일곱 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그 각각이 수령의 인사고과 항목이기도 했다. 하늘같이 어렵고 높은 임금을 뵌 자리는 그저 있기만 해도 땀이 흘러 등을 적실 정도였다. 황망하게 주저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신임 수령이 실록이나 일기에서 자주 발견이 된다.
사은숙배가 끝나도 신임관은 즉시 부임지로 출발할 수 없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과 육조의 관직자를 일일이 찾아 하직 인사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졌다. 인사권과 추천권을 갖는 중앙 관료들에게 신임 관원이 인사를 올리는 자리이자, 지방직 임명자가 행정 일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두루 인사를 하는 사이 부임지로부터 신임 수령을 모셔갈 여러 관속이 서울에 도착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향리를 포함한 관속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수령이 향리를 어떻게 제압하느냐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정도가 정해질 정도였다. 향리와 수령의 소리 없는 알력 다툼은 부임지로 행차하는 여정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한겨례21. 『조선목민관열전』에서, 이선희 한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 2010. 5. 2.)
사법권에 있어서 감사(현 도지사)의 허가가 있으면 사형까지도 집행할 수 있을 정도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한을 가졌다. 일개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가진 셈이다.
하지만 수령은 막강한 권한 이외에 수행해야 할 고유 임무가 있었다.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이다.
조선의 치국 이념을 담은 법전이 경국대전이다. 이 법전은 오늘날 헌법·민법·형법·상법·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과 같은 것으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이 이를 근거로 조선 사회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렸다. 지도자에게는 권한이 있다면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임금의 명으로 파견된 목민관으로서 일곱 가지 임무를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 수령칠사(守令七事)다.
또 하나는 임금은 지위고하 막론하고, 언제나 임지로 떠나는 지방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첫째, 출신이 어떠하며, 어떤 관직을 거쳤는가
둘째, 지방관의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가
셋째, 부임지의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가
이는 임금이 임지로 떠나는 지방관의 각오와 인품과 자질을 엿보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아니겠는가 싶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년 ~ 1806년 ?)의 <평양감사향연도중연광정연회도/平壤監司 饗宴圖 中 鍊光亭 宴會圖>. 연광정 안에서 평양감사가 가무를 관람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당시 지방 감사의 권력과 위세의 일부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터넷 블로그/송풍수월에서/작성자 ohyh45).
두 번째는 지방관의 중요한 임무가 수령칠사를 외우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라는 주요 덕목이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목민관으로서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절차는 대략 이렇다.
지방 군현의 수령이 처음 제수되면 경저리(京邸吏)가 수령칠사를 기록한 홀기(笏記)를 전달한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릴 때 임금이 특별히 전(殿)에 오르라 명하고 승지가 직관과 성명을 아뢰라 한다. 공직 초년인 수령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아무 벼슬 신(臣) 성(姓) 아무개』라 한다. 다음에 임금 앞에서 일곱 번 일어났다 엎드리면서, 아주 조심스레 칠사의 각 항목을 외우고는 차례로 빨리 물러나 임지로 출발하였다. 이 의식에서 차례가 틀리거나 잘못 외운 수령은 파면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방 수령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인 수령칠사는 다음과 같다.
1. [農桑興] 농업과 누에치기를 진흥시킬 것
2. [戶口增] 그 지방 인구가 늘어나게 할 것
3. [學校興] 배움을 권장하여 학교가 일어나게 할 것
4. [軍政修] 군대를 잘 다스려 방위를 튼튼하게 할 것
5. [賦役均] 백성들의 부역을 고르게 할 것
6. [詞訟簡] 송사를 잘 처리하여 백성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할 것
7. [奸猾息] 백성들이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없도록 할 것
이 수령칠사 의식은 오늘날 국가공무원이 최초로 임용될 때 소속 기관장 앞에서 선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령칠사는 지금의 근무성적평정과 같은 것으로 당시 수령들의 인사고과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지방 수령과 탄핵
『하지만 힘겹게 과거급제하여 수령이 된 이들 중 일부는 초심을 잃고, 민심을 배반하고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돈에 눈이 먼 관리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신들의 곳간을 채워나갔다. 세종대의 명재상으로 이름난 황희도 청탁의 대가로 뇌물을 받곤 했는데 그 때문에『황금 대사헌』이라는 멸칭을 얻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의 공무원들은 70세까지 일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소원은 70세에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이었다. 정쟁이 빈번했던 당시에는 4명 중에 1명이 귀양 갔을 만큼 정년을 채우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워 나라에서는 정년퇴임을 하는 관료에게 상을 내려줄 정도였다.』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거급제부터 은퇴까지 - 268쪽에서 인용함. 권기환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22.)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의 명재상이자 공직자의 청렴 표상이라는 황희 정승마저 이러했다고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교훈은 동서고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통하는 상식이다.
그 이후 조선 후기 민란의 대부분 원인과 사유가 지방 수령들이 위민정치는 하지 않고 자기 잇속만 차린 부정부패에 있다고 보겠다. 부정부패는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중앙의 고위관료와 지방 수령이 서로를 챙겨주는 등 결국 탐관오리라는 흑역사를 쓰게 되었다. 매관매직이 예사로 일어났던 조선 후기에는 수령 자리가 수만 냥에 팔리기도 했다.
뇌물로 지방 수령이 된 이들은 현지에서 본전을 뽑기 위해 온갖 수단으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런 관리를 만난 백성들의 최후 무기는 오직 하나, 저항뿐이었다.
동서고금의 왕조시대에는 이러한 백성의 저항 등으로 또는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바뀌거나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근현대에는 국가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결함이나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국민들의 합법적 저항이나 혁명으로 또는 제도적 선거(투표)행위로 정부가 바뀌기도 한다. 우리가 최근 흔히 말하는 탄핵이란 정치적 수단이 또한 그렇다.
『탄핵(彈劾)』이란 낱말은 ‘죄나 잘못을 따져 묻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다른 신하의 잘못을 따져서 왕에게 아뢰는 것을『탄핵』이라 했다. 근대국가에서는 탄핵은 일반적인 절차에 따른 파면이 곤란하거나 검찰 기관에 의한 소추가 사실상 어려운 대통령·법관 등 고위공무원을 국회에서 소추하여 파면하거나 처벌하는 행위이다.
근대적 의미의 탄핵제도는 14세기 때 영국 의회에서 확립됐다. 1376년 영국 하원은 장관직에 있으면서 폭리를 취한 라티모 상원의원을 처벌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했고 라티모 의원은 상원에서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탄핵소추는 하원에서, 심판은 상원에서 하는 관례가 굳어졌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는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직선거와 선거부정 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헌법 위반을 사유로 탄핵소추안 국회에서 가결이 되었다. 이후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 기각 결정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의 헌법과 법률 위반 혐의로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되었다. 이후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인용 결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또한, 현 정부 들어서 검사탄핵)이 거론되어 국회에 소추, 가결된 바 있다.
조선 왕조시대 수령칠사 의식은 국가 관료가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위민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국가에서도 그 철학은 일맥상통한다. 때로 여기에서 벗어나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하는 등의 정치지도자 행태는 때로 탄핵이나 반정부 시위 같은 국민 저항과 맞물리는 것이다. 동서고금에 민심을 배반한 왕조나 정치권력은 몰락하거나 성공하지 못했다. 만고의 진리라면 지나친 언사일까.
1871년 영해 부사 이정 또한 탐관오리로 지역민에게 낙인찍힌 인물로 역사에 등장하여 동학군들에게 탄핵 · 단죄되고 말았다.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마을인 <신기 2리> 버스정류장(918번 도로), 사진 왼쪽 작은 시멘트 다리(육조골 입구)를 건너 형제봉 병풍바위로 가는 등산길이 나온다. 여기 버스정류장에서 영해까지는 현재 거리로 8㎞이다. 병풍바위에서는 정류장까지 4㎞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병풍바위>에서 출발한 동학군들은 이곳을 통과해 영해부읍성을 점거했다. 오른쪽은 영양 일월로 가는 도로이다
동학도 박기준과 이방 신택순의 은밀한 내통
1871년 3월 10일 낮, 영해부 읍성 부근에서 장사를 하던 박기준이 영해부를 방문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방 신택순을 만났다. 박기준이 신택순에게 민심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박기준이 준 정보는 다름이 아닌 영해와 영양 접경인 서쪽에 부랑자 같은 행인들의 발걸음이 수상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미곡리(현재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이다.) 쪽에 어떤 행인들의 모임 정황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물론 거짓 정보였다. 박기준은 영해 동학군과 연결된 동학도였다. 그러면서, 그는 동학군이 올 때까지 영해부 읍성의 동정을 살폈다.
박기준에게서 이 정보를 얻은 이방 신택순은 곧바로 본관 사또인 이정 부사에게 보고하였다. 부사 이정은 이에 신택순을 시켜 관헌(교졸)들을 미곡리 쪽으로 보내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지만, 이방 신택순의 지시로 김일봉을 비롯한 교졸들이 수색 나간 지역은 동학군들이 모인 우정동 병풍바위와는 50여 리 떨어진 정반대 쪽인 미곡리였다. 우정동 병풍바위가 있는 곳은 현 행정구역상 영덕군 창수면 신기 2리이다. 미곡리는 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 방향으로 신기리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다. 신기리는 미곡리와 인천리의 남쪽에 있는 행정구역이다.
따라서 미곡리와 인천리로 현지 수색 나간 교졸들은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말았다. 박기준의 위계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관아로 되돌아와서는 안심하고 집으로 퇴근하고 말았다. 수색결과를 보고를 받은 부사 이정도 관아의 살림집인 내아(內衙)로 평소처럼 퇴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부사 이정의 운명을 갈라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600여 명의 동학군들이 영해부를 삽시간에 습격하여 점거한 것, 지금에 와서 보면 그 역사적 의거인『1871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871년 3월 10일, 동학군의 영해 의거 후 조선 정부의 5개월여에 걸친 수사 결과에는 박기준은 영해 사람으로 동학군과 내통하고, 이방 신택순에게 거짓 정보를 준 혐의로 지목되었다. 『교남공적』에 나오는 박기준의 진술)이다. 그는 관의 신문)을 받고 1871년 음력 7월 5일(양, 8월 18일)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 관덕정)에서 효수형이 집행되었다. 박기준의 죄목은 스스로 간첩이 되어 영해부 동정을 염탐하여 동학군을 도운 죄였다.
질문: 『(전략) 너는 이제발(이필제를 말함)과 어울려 그가 왔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이미 흉패한 말을 듣고도 어찌하여 고변하지 아니했고, 몰래 이방에게 통하였던가 했을 수도 있는데 이미 체포되기에 이르렀지 않았느냐. 이방 신택순 진술에도 3월 10일 저녁때에 박기준이 와서 동학군에 대한 설(說:정보)을 전하였다. 이때 이미 너는 읍내 동정을 미리 선탐한 자라고 했다.
(중략) 그날 성안에서 두 사람이 너를 마중 나왔고, 그 한 사람은 내응자다. 지난 문초에서 이미 탄로가 난 일이거늘 극히 흉패한 일을 똑바로 고하고 영해읍에 들어와 화응한 자가 몇이며 누가 관장을 죽였는지 인부를 감히 탈취한 자가 누구인지 조금도 숨김없이 낱낱이 진술하라.
답변: 『나는 박한용과 친척 간이고, 당초 조풍수로부터 전해 듣고, 이제발(이필제)과 친하게 사귀었다. 나중에 들은 이씨(이필제)의 반역 모의에 관한 말을 바로 관에 알리지 않은 것은 이방(신택순)에게 혹 예상하지 못하는 어려운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중략) 나는 이제발이 객지에 와서 서로 안면이 있고 박영관과 서로 어울렸다. 이번 우정동 동학인 모임에서 상의할 때 영관이 나보고 먼저 영해읍 중 탐방을 다녀오라고 해서 내가 3월 10일 낮에 읍내 이방 신택순을 만나보고 왔다. 동학군 모의가 있다는 뜻을 언급했더니 이방이 묻기를 그 출발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그래서 답하기를 미곡이라고 했다.
이방이 듣고 즉시 부사에게 보고했다. 나는 가게에 머무르다가 동학군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날 밤이 깊어가자 우정동을 출발한 동학군 대열이 영해부성 안으로 일제히 들어갈 때 나도 역시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안동진의 안핵소 신문자는 박기준에게 이필제가 흉패한 계획, 다시 말해 동학군의 영해부 점거 등 반역 모의를 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 더구나 이방 신택순 이외 영해부 안에서 동학군과 내통한 자, 부사 이정을 살해한 자, 인부(관인)를 탈취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추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기준은 이필제와 교제한 것, 이필제의 모의를 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이방 신택순의 안위 때문이라는 점, 영해부 읍성 동향을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박영관(박사헌)이 내렸다는 것, 그래서 이방 신택순에게 미곡리 쪽의 거동 수상자들의 모의가 있다는 정보를 건네주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당시 영해부 관아의 현직 관리였던 신택순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이 궁금한 대목이다.
이방 신택순은 영해 토박이 출신의 중인계급이었다고 한다. 이방은 당시 서열로는 부사 다음의 수석 직위였다. 오늘날 군청의 기획실장쯤 되는 고위직이다. 이방 신택순의 행방에 대해 『교남공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71년 3월 12일에 영해부읍성 10리 밖인 축산 봉지산 아래 피신했다. 이후 가마로 하인들이 데려왔다고 한다. 부사 이정의 상여 행렬이 한양으로 상경할 때 영양안동 경계지역가지 전송하고 난 다음 안동진에 설치된 안핵소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는 동학군이 영해부 관아를 기습할 때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 죄, 동학군과 내통한 죄, 부사 이정을 보좌하지 못한 죄 등으로 물고, 옥사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직무유기죄』였다.
한편 동학군 쪽에서 보았을 때는 그는『1871영해동학혁명』을 묵시적으로 도와준 의인(義人)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표지판 뒤로 멀리 형제봉(왼쪽)이 보인다.
탐관오리 이정의 죄를 동학군이 탄핵하다?
1871년 3월 10일 밤, 한때 대포 소리, 총소리, 함성이 지나간 영해 읍성 동헌에는 횃불이 둘레를 밝히고 있었다. 하늘에는 초 열흘을 지나는 달이 제법 둥글게 부풀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동학군에게 부사 이정은 천으로 손이 묶인 채 동헌 마당에 끌려 나왔다. 그는 이필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 영해면사무소 남쪽 뜰에 있는 현령들의 송덕비, 부사 이정의 송덕비는 없다.
당시 영해 유림들이 기록한 『신미아변시일기』에는 부사 이정이 동학군의 인부 탈취에 저항하며 꾸짖었다고 했으나 그 구체적인 언사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없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 할 말은 많으나 유구무언이라, 한고을의 지도자로서 동학군에게 잡혀 온 수치와 조정의 임금에 대한 충성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임금으로부터 왕명을 받고, 영해 부사로 부임했을 때는 천하가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해부 백성들에게 군림하던 이정 부사가 졸지에 이필제에게 동헌 자리를 내주고 탐관오리로 치죄 당하는 꼴이 되었다. 권력의 위상이 바뀐 것이다.
조선 말기 자신의 집에서 가마를 타고 출근하는 젊은 관리의 모습. <사진으로 보는 서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한겨레, 2007. 03. 15>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당시 부사 이정의 탄핵 사유와 이필제를 비롯한 동학군들이 그의 죄를 논하는 장면을 되살려보자. 동학 경전인 『도원기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죄를 헤아려 말하기를 “너는 국록을 먹는 신하로서 정사를 어지럽혀 그르치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하기 비할 바가 없다. 너를 비방하는 방이 많이 붙어있고, 저자에는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니, 이것이 바로, 고을 민심이다. 죄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비록 용서하고 싶지마는 의(義)로써 탐관인 부사 이(李)를 죽여야겠다.”』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보면 이렇다.
『1. 이정은 국록을 먹는 신하이다. 2. 공직자의 사명을 잊고 정사를 그르쳤다. 3. 백성을 수탈한 탐관오리이다. 4. 고을 민심은 너를 원망한다. 5. 결론은 大義(대의)를 이루고자 즉결 처단하겠다. 』이다
술에 취한 수령이 송사를 처리하는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취중송사> (한겨레21. 2010. 5. 2.)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탄핵(彈劾)』이란 ‘죄나 잘못을 따져 묻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다른 신하의 잘못을 따져서 왕에게 아뢰는 것을 『탄핵』이라고 했다. 하지만 『1871영해동학혁명』 당시 탐관오리 이정의 탄핵은 동학군이 실제로 현장에서 행하였다. 주체는 동학군인 민중이었다. 그 논죄와 탄핵의 결과는 즉결 처단이었다.
영해부 관아 동헌에 앉은 이필제의 지시가 떨어지자 김낙균이 냉큼 칼을 빼 들었다. 김낙균, 그는 이번 거사의 제2인자로 맹활약을 했던 인물이다. 김낙균도 이정을 바라보았다. 칼날이 불빛에 번쩍이었다. 둘레의 동학군들이 일시에 긴장했다. 동헌 뜰에 정적이 흘렀다. 부사 이정은 눈을 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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