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기사입력 2024.10.1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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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노나라에서 법 집행을 관장하는 사구(司寇, 오늘날 법무부 장관)라는 직에 올랐다. 공자는 취임 후 첫 조치로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잡아들여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 시체를 3일간 궁정에 내걸도록 했다. 소정묘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대부(大夫)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제자 자공(子貢)이 놀라서 물었다. 

“소정묘는 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주살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사악한 행위가 있다. 첫째, 만사에 빈틈이 없으면서 마음이 음흉해 나쁜 짓을 하는 것이고 둘째, 하는 일이 조금도 공정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공정한 체, 강직한 체하는 것이고 셋째, 거짓말인데도 구변이 좋아 그럴싸하게 잘 꾸며대며 넷째, 성품은 흉악한데 기억력이 좋아 많이 꾸미고 행사하여 선량한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다섯째, 독직과 부정을 일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너그럽고 청렴결백한 체하며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의 영웅이 되어 있으니, 마땅히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꼭 죽여야 할 사람은 남의 집 담을 넘는 도둑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뒤엎을 짓을 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바로 백성을 미혹에 빠지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소정묘를 다섯 가지 악(惡)을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순자(荀子)』를 비롯한 여러 고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는 늘 역사를 공부하며 자신의 통치행위를 반성하고, 신하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에게 ‘3개의 거울(三鑒)’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즉,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구리거울(銅鑒)’, 나라의 흥망성쇠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역사의 거울(史鑒)’, 직언으로 자신의 언행과 그 득실을 밝혀주는 ‘사람 거울(人鑒)’이 그것이었다. 

 

우리에게 ‘측천무후’로 알려진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다. 그녀는 엄청난 권력욕과 능수능란한 처신, 그리고 치밀한 정치적 수완으로 당 왕조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를 세워 15년 동안 황제로 군림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을 달성한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백성들의 인심도 많이 잃었다.

 

705년, 무측천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전 그녀는 자신을 황제 칭호 대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부르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자기 무덤에 “비(碑)는 세우되, 비문(碑文)은 적지 말라”고 했다. 후대에 평가를 맡기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 무덤의 비석은 ‘무자비(無字碑)’로 남았다. 역사상 수많은 제왕(帝王)과 장상(將相)이 자신의 공덕을 후세에 자랑하려고 비석에 글로 새기도록 했다. 그러고 보면, 무측천 역시 죽는 순간까지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를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다. 

 

1752년(청 건륭 17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항저우(杭州) 출신의 진간천(秦澗泉)이라는 젊은이가 서호(西湖)에 있는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의 무덤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의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내 성(姓)에 참담해하는구나.”

 

그는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기 조상이자 희대의 간신 진회(秦檜)의 부부상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글로 남긴 것이다. 1141년 명장 악비가 간신 진회의 모함으로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한 지 600여 년이나 지난 즈음에, 장원급제한 젊은이가 어찌하여 일부러 악비의 무덤을 찾아 이런 시를 읊었을까? 

 

악비의 ‘충(忠)’은 황제 개인에 대한 ‘충(忠)’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에 대한 ‘충(忠)’이었고, 간신 진회의 ‘충(忠)’은 황제 고종과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풍파정(風波亭)에서 악비는 황제 고종과 진회의 교활한 웃음을 뒤로한 채 억울하게 죽어갔다. 충신 악비 부자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간신 진회와 그의 가족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사는 충신의 억울한 죽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후대 사람들은 간신 진회의 죄상을 잊지 않고 그들 부부를 조각상으로 만들어 포승줄로 묶어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역사는 영원히, 그리고 단호하게 그를 천고의 간신이자 만세의 죄인으로 단죄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간신이 나라와 사회를 망치고 백성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대부분 부귀영화에 천수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다 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간신들과 그 덕을 보고 있는 후손들에 대해 지금도 치를 떨고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언젠가는 그들의 간행(奸行)을 하나하나 밝혀내어 서슬이 시퍼런 역사의 법정에 세워 가차 없이 응징하기 때문이다. 어떤 간신도 역사의 응징은 결코 피해 가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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