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영해+울진동학혁명 이야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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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시 동학군의 북쪽 퇴각로였던 영해면 구 7번 국도 바닷가 백석리 마을 일부 모습. 울진·영해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1871영해+울진동학혁명 이야기』는 종결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에는 영해읍성 관아에서 동학군 퇴각, 영해부성민 반응, 관군 반격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71년 3월 10일 밤에 영해부사 이정은 동학군에게 처단되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을 돌보지 않고 수탈한 죄를 물은 결과였다. 그리고『적변문축』에 따르면 부사 이정의 시신은 3월 11일 동학군들이 퇴각한 뒤 그의 자제들이 관아 향리청에 안치되었다. (김기현, 자유를 향한 영웅들, 39쪽, 한국지방세연구회. 2015)
그 이후 동학군들은 이튿날 퇴각할 때까지 무엇을 했을까? 동학도들은 3월 10일 해시(밤 10시)경 영해읍성 관아를 점거하여 이튿날 음력 3월 11일, 미시未時인 오후 1~3시쯤에 퇴각했다. 날수로는 2일이고, 시간으로 길어야 15~17시간쯤 영해 읍성 관아에 머물렀다.
필자가 시간대별로 그들의 활동내용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추정하는 바에는 역사기록에 없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면 경계 세우기, 인원 점검 등이다.
영해 우정동 형제봉 아래 병풍바위 출발 저녁 7시→영해읍성 도착, 영해부 점거와 부사 처단(3월 10일 밤, 10시-12시경)→경계를 세우고, 휴식과 수면 취하기(3월 11일, 오전 7시까지)→지도부 대책 숙의와 아침 식사(3월 11일 오전 7시-9시)→영해읍민 구휼 활동으로 읍민들에게 140냥 배분 등, 동학도 인원 점검(오전 9-11시)→점심 식사(오후 12시-1시경)→퇴각(오후 1-3시경)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 동학군들이 왜 머물지 않고 퇴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그 퇴각 동기를 관군의 반격과 추적에 따른 결과라는 것과 애당초 영해 관아를 점거하고 부사 이정을 처단하여 1차 목적을 달성했기에 자진 해산했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무기도 그렇고 대적할 동학군 숫자도 관군에 비교해서 열세이고, 일정 대오로 무리를 지어 이동하다 보면, 쉽게 드러나 공격에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이필제, 강수를 비롯한 지도부는 영양 일월산으로, 다른 동학군들은 평해, 울진의 북쪽으로, 또 다른 동학군은 영덕 남쪽으로 퇴각, 각자도생하면서 피신하였다. 지금도 영해를 비롯한 동해안은 바다를 끼고 연안으로 남북도로망이고, 내륙으로는 영양을 지나 안동 방향이다. 지도부는 서쪽으로, 또 한방향은 북쪽으로 그리고 다른 동학군들은 남쪽으로 흩어져 나아갔을 것이다. 돌아서면 관군이요, 동쪽으로는 바다요, 서쪽으로는 험한 산간벽지이니 관군에 쫓기는 동학군의 입장은 이래저래 참으로 불리한 형국이었다.
동학군의 자진 해산과 각자도생
동학군들은 날이 밝아오자, 아수라장이 된 영해 관아 현장을 보면서 앞일을 모두가 생각하고 다가올 관군 등의 공격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해 거사 지도부는 일차 목적인 영해부 관아 점령과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등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이필제는 내친김에 영해 인접의 영덕현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필제 주장은 강수를 비롯한 다수 동학군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논란은 애초에 영해부 관아 점령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관군 등에 대한 지도부의 전략적 대안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뚜렷하고 구체적인 지도부의 거사 후 방침이나 지시 등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도부의 전략 미숙성이 감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를 이필제 등의 주장을 공격설로, 강수 측의 주장을 각자도생설로 이름하고자 한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동학군의 영해 읍성 퇴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 이이화(李離和, 1937~2020) 대한민국의 재야 역사학자이다. 주역 연구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1937년 8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 1945년 아버지와 함께 대둔산에 들어가 한학(漢學(한자)을 공부했다. 16세가 되던 1951년에 학교를 다니려고 가출해서, 부산, 여수, 광주 등지에서 고학했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이후, 병든 어머니를 돌보며 아이스께끼 장사, 군밤 장사, 빈대약 장사, 보험 외판원,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등 2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어려운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20대 후반부터 독학으로 한국사 연구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서원대 석좌교수, 경술국치 100년 공동행동위원회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았다. 저서에는 <한국사 이야기>, <백두산을 오르며 만나는 우리 역사>, <찬란했던 700년 역사, 고구려>,<역사 속의 한국불교>, <이이화의 한문공부>,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 등이 있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 1871 영해동학혁명시 형제봉아래 영해·영양간의 대로였던 당시 동학군의 퇴각로인 신기마을 도로가 시내버스 주차장(좌)과 영양 일월면 용화리 윗대치마을 모습 일부(최시형 선생이 6여년 간 은거하며 동학을 재건했던 곳이다.)
영해면 오천리 쪽에서 울진 백암온정 쪽 조금리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평해, 울진에서 참가한 동학군은 이곳으로도 탈출하여 각자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정오(1871 3월 11일. 필자 주)가 지난 뒤 토벌군이 오기 전에 스스로 물러갔다. 이들은 영양 일월산 쪽으로 달아나면서 양반 부호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필제 등의 지도부는 최시형이 기다리고 있는 일월산 용화동에 들어가서 토벌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이려 하였다. 끝내 수십 명이 잡혀갔다. 포로들의 입을 통해 참여한 봉기군들이 동학교도라는 것이 알려져서 그 주모자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고 일대 수색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필제의 신분은 탄로나지 않았다. 이때 이필제와 김낙균 그리고 최시형, 강시원 등 지도부는 도망을 쳐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이필제는 왜 스스로 물러났을까?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다. 하나는 계획만큼 봉기군의 숫자가 모이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오래 계획을 벌이면서 하나의 시험무대로 영해부를 습격하고 나서 역량을 확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필제와 김낙균이 그 뒤에 벌인 일로 보아도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이필제는 여러 차례 봉기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영해부 습격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1871경상도영해동학혁명, 조선후기 향촌사회 지배구조와 영해지방의 동학변혁운동, 이이화,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4.)
이이화 선생은 이필제 등 동학군 측이 퇴각한 까닭으로 앞으로 반격해올 관군에 대적할 만한 동학군의 무력이라 할 동학군의 숫자와 빈약한 무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점과 진천, 진주 작변 등에서 모두 실패했지만, 처음으로 영해부 습격과 점거로 일정의 성과를 거둔 것을 들고 있다. 따라서 필자도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이화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무튼, 동학군은 자진 해산을 했다.
동학군의 이탈
한편으로 필자는 과연 퇴각할 때까지 끝까지 남아있던 동학군의 수는 얼마였을까? 그래서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1871 영해동학 혁명 당시 영해읍성 관아 진입시 교전 사망자 2명과 사건 후 관군 추적에 체포되어 관의 재판 결과로 물고(고문치사), 효수, 자진, 능지처사, 유배 등 처벌을 받은 동학도가 116명*이다. 영해 관아 점거 당시 동학군 숫자는 신미아변시일기 기록에는 6백여 명이었다.
*김진문, 1871영해·울진동학거사 소개, 울진사향, 2022.울진학연구소. 윌이엔씨.
이때 수석포교 윤석중의 지시로 관군은 대포를 발사하여 대응했다. 당시 천지를 진동하는 대포 소리를 경험한 민중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동학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학군들도 대포 소리에 놀라 대오가 흩어졌다.
그러나 이필제 등의 독려로 흩어진 대오를 수습하여 재차 진입할 때 혼란한 틈을 타 도망한 다수의 동학군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사 이정을 처단하고 동학군들이 영해 관아에 머무는 밤중에도 눈을 피해 도망을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끝까지 남은 동학군은 처음 진입 당시의 3분의 2가 줄어든 200여 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탈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추정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영해부적변문축』의 울진 덕구리 출신 남기환과 교남공적의 전세규 진술 때문이다. 남기환은 본래 농사꾼이었으나 어떤 공장인가는 모르나 남의 공장에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한 것 같다. 당시 남기환은 동학군에 편입되어 중간에 이탈했다. 그리고 전세규는 당시 영해동학혁명지도부의 전영규, 전동규와는 사촌 사이였다. 그는 당시 평해 역인으로 요즘으로 치면 기능직으로 공직 신분이었다. 그도 영해동학혁명에 참가했다가 밤중에 이탈했다.
① 다음은 남기환이 1871년 3월 28일 심문에서 진술한 요지이다. 당시 그는 26세였으며 효수당했다.
『나는 본래 가난한 농사꾼이다. 예천에 임화일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공장에 고용되어 살았다. 임화일이 나를 꾀어 어머니와 동생을 안동 재산면 울연전 김경필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임화일 밑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영해부 근처 5리 되는 곳에서 유숙하려 하는데 알 수 없는 사람들 수백 명이 머리에 유건을 쓰고 손에는 죽창을 들고 위협하였다. 그들에게 편입되어 영해부로 향했다. 대포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이슥한 밤에 다급하고 두려움에 스스로 몸을 이탈하여 밖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그만 울진 장졸과 나졸들에게 붙잡혔다. (이하 생략)』
② 평해역인 전세규의 18714월 30일, 심문에 대한 진술 요지이다. 전세규는 27세로서 절도정배되었다.
『(전략) 지난 3월 9일 영규형(동학지도부 전영규를 말함:필자 주)이 돈 5냥을 주면서 너는 먼저 영해읍성 밑에 가서 기다려라. 영규형이 그날 저녁, 해질 무렵에 왔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영규 형도 앞장서서 참가했다. 그것을 보니 만족감도 들었지만 다른 광경은 두렵고 떨려서 보지 않고 즉시 밤중에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하생략)』
위 두 사람의 진술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남기환은 다급하고 두려움에 스스로 몸을 이탈하여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남기환은 나이가 26세였다. 전세규의 진술도 남기환과 비슷하다.
당시 평균 수명이 짧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26세쯤이면 지금으로 치면 40대 중년이었다. 이 같은 진술을 볼 때 영해 관아 진입 시 교전 현장과 관아 점거 후 이튿날 퇴각 전까지 참여 동학도 상당수가 대열을 이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양 일월산 쪽으로 나아간 동학군 숫자는 4~50여 명쯤 되어 보인다. 1차로 최시형 선생 일행이 일월산에 도착하고, 제2차로 이필제 등이 뒤따랐다. 이들 일행 중에도 이탈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쪽으로 흩어져 각자도생을 도모했던 동학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상당수는 고향을 등지고 다른 곳에서 몸을 숨겼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왕조가 동학도들을 체포 등 탄압하는 엄중한 분위기였다.*
* 1871영해동학혁명시 영덕·영해·평해·울진 등 이름깨나 있는 양반 집안의 유림출신인 선비나 지식인들이 상당수가 있었다. 당시 연루된 그들 집안에서는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동학신봉은 역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최근에도 영해면의 어떤 분한테 1871영해동학혁명에 관한 취재 중 신향과 구향의 갈등 상황을 문의한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분은 답변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영해향교 관련 책을 발간할 때 구향과 신향의 갈등 상황은 요즘 학자들이 말하는 것이지 당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림과 관련된 1871영해동학 관련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분의 생각은 존중하지만 그 까닭을 생각해볼 때 당시 동학은 유학이념에 반하는 불온한 사상인 좌도난정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뿌리 깊은 이념문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느꼈다.
동학군의 퇴각로
그리고 자진 해산 후 각자도생으로 자기 살길을 찾아 다음과 같이 세 갈래로 퇴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좋게 보면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인 셈이나 당시로서는 지도부의 전략에 미숙한 점도 보인다. 결론적으로 영해관아 점거 후 만약에 사태에 대한 전략 부재로 보인다. 자진 해산은 각자도생하여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남아 각자도생으로 남북으로 도피하던 동학군들은 교전 중 사망, 부상, 체포 등으로 거의 궤멸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체포된 동학군 일부는 관의 재판을 받기 전에 현장에서 바로 타살되기도 했다.* 참혹한 인권유린과 탄압이었다. 하지만 몇몇 지도부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도피했다.
* 교남공적 신미1871년 3월 14일자 오時(오시 낮12시) 각 읍현에 보낸 공문서에 보면『그날 술시에 오촌 거주 백중호,권취근, 진보 율곡거주 오맹광을 붙잡아 유향소에서 먼저 문초한 후 여러 사람이 하나 같이 분한 마음으로 당장 때려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기현, 자유를 향한 영웅들, 44쪽 참조 ,한국지방세연구회,2015.)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관의 정식재판도 없이 분노에 찬 주민 등에 의해 전근대적인 인민재판식과 유사한 즉결처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해·울진쪽의 퇴각로였던 백석마을. 퇴각하던 동학군은 영덕현 관군과 이곳에서 교전 중 일부는 체포되었다.
① 1871년 3월 11일 오후 2시쯤 제2진 지도부인 이필제 등은 송천을 따라 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는 최시형 선생이 피신한 일월산 용화리였다. 현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상죽현(윗대치) 골짜기다. 지금도 가보면 아주 깊은 산골이다.
1864년 3월 3일, 수운 최제우 선생이 대구 경상감영에 수감 중 최시형 선생은 스승을 면담하고,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는 유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최시형은 스승의 명을 받고 곧장 흥해, 평해 울진 죽변을 거처 영양 일월 용화리 윗대치에 은거하며 동학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이필제, 강수, 김낙균, 박사헌, 남두병, 전의철 등을 비롯한 동학도가 중심이 되어 교조 신원을 하자는 거사가 실행되었던 터였다. 또 하나는 지난 2024년 6월에 영양군 지원으로 영양 인시천(人侍天)모임(회장 이상국) 주관으로『동학해월 최시형선생은거지유허비』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천도교 윤석산 교령, 용화리 마을 주민, 영양군 관계자,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포항동대해문화연구소, 경북동학단체연합, 전국동학단체연합 등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필자도 취재차 갔는데 윗대치 마을 주민 한 분은 마을이 생기고, 이렇게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 것은 자기 생전에 처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마을 주민들은 최시형 선생이 이곳에서 은거했다는 사실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날 최시형 선생 고손자인 최동희씨도 참석해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해 주었다.
일월산으로 퇴각한 지도부 일행은 3월 11일 오후 인천리의 민가에서 1일째 하룻밤을 보냈다.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12일에는 영해 지경 오촌리에서 2일째 밤을 보냈다. 이후 험한 산길을 넘어 일월산으로 향했다. 제1진은 3월 14일 일월산에 도착해 천제 지낼 준비를 했다고 한다. 3월 15일에는 본진이 도착,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에서 소를 잡아 하늘에다 영해 거사의 성공을 고했다고 한다. 3월 16일에는 영양현의 관군이 일월산 일대 수색으로 대포를 쏘며 진격해 오자 최시형 등 지도부는 일월산을 탈출해 단양으로 도피했다.* 단양에서 최시형, 강수 등은 은거하다 다시 강원도 산골 인제로 도피하게 된다. 이때부터 최시형은 전국으로 도피하는 등 본격적인 고난의 도바리 인생이 시작되었다.
* 김기현, 자유를 향한 영웅들, 1871년 영해 동학혁명 관련 연표 23-24쪽. 한국지방세연구회(주). 2015.
2024년 6월 6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윗대치의『동학해월 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
영양 일월면 용화리 윗대치마을 모습 일부(최시형 선생이 6여년 간 은거하며 동학을 재건했던 곳이다.)
② 신미아변시일기에 따르면 1871년 3월 11일, 또 다른 방향의 동학군들은 병곡→백석→평해, 울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북쪽으로 나아가던 동학도들은 영덕과 울진 접경인 백석 해안 등지에서 관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 또는 체포되기도 하였다. 영해면 병곡을 지나 구 7번 국도가 지나는 해안가 백석마을은 울진군과 인접한 영덕군의 지경마을이다. 바로 북쪽으로 후포면 소재지가 있고 후포항구가 보이는 가까운 곳이다. 새로 난 7번 국도는 마을을 비껴나 남북으로 지나간다.
한편 남쪽으로 퇴각하여 각자도생한 동학군들은 웅창(지금의 축산면 기암리 곰창마을)에서 영덕 관군과 교전으로 죽기도 하고 체포되기도 했다. 다른 동학도들은 각자도생으로 경주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각자도생으로 관군과 교전하며 영해 지역을 탈출하고자 했다.
왼쪽 제일 윗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제막식, 엉해 출신 이형수 화백의 걸개 그림, '사람이 하늘이다' 붓글씨 쓰는 모습, 최시형 선생의 고손자 최동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씨와 천도교 교령 윤석산 선생(앞줄 왼쪽에서 여섯번째), 제막식 행사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 서울 등지에서 제막식에 온 버스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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