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산문] 1871영해+울진동학혁명이야기(18)

기사입력 2025.03.1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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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과 동학군이 일대 교전이 벌어진 일월산 대티골 일대, 지금은 윗대치 마을과 야생화공원이 있다. 

2024년 6월 6일 이곳에서 동학 제2대교주 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 제막식이 있었다.(행사사진 참조바람) 

 

1871년 3월 10일,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해 관아에서는 이 사실을 이튿날인 3월 11일, 동학군이 퇴각한 뒤 상부 기관에 보고했다. 당시는 사람이 직접 가서 알리는 도보 전통이거나 말을 타고 가서 전하는 파발 통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파발이 말을 타고 지역에서 지역으로 연결되거나 곧바로 한양까지 통문이 조정에 전해지는 통신 체계였다.  

영해동학혁명 소식을 제일 먼저 영해관아 소속 순영방 관리(영해부 관군포교)가 직접 문서를 작성, 측근을 시켜 영덕현에 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신 끝에『~달려가 고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영해 부사 이정이 유고 상태이고, 관인까지도 동학군 수중에 넘어갔기에 관인이 찍히지 않은 사신 형식의 급보였을 것이다. 

적변문축 기록에 따르면,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영해부 순영방에서(영해부 관리)에서 3월 11일 축시(1-3시)에 영덕공형(영덕현 관리)에게 사신(연락)을 보내 최초로 알렸다. 여러 건 중 제1보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사신을 보내는 바이다. 3월 10일 해시(밤 10시경)쯤 전체 숫자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는 무뢰한 수백 명이 머리에 갓을 쓰고 손에 죽창과 조총을 들고 갑자기 영해부에 들어와서 군기를 뺐고 관사에 불을 질렀다. 본관 사또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관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달려가 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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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1871년까지 동학 최시형 선생이 은거했던 영양 위대치마을에 건립한 유허비 제막식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는 영양 인시천 모임회장 이상국 선생(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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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산 아래 용화리 윗대티골 <자연치유생태마을> 

홍보 벽화(마을 들머리), 이곳 일대에서 1871년 3월 16일(음)동학군과 관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영해부에서 영덕현에 급히 알린 시각이 3월 11일 날새기 전인 축시(丑時 (오전 1시~오전 3시),이다. 이때에는 영해부 관아를 동학 혁명군이 점거 중이었는데 어떻게 인근 지역에 알렸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 몸을 피한 영해부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당일 상황을 인근 영덕현에 사신 통문으로 알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 통문은 곧바로 대구 경상감사 김세호에게로 보고가 되었다. 감사 김세호는 다시 안동부사 김병학에게 통문이 되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당시 영해 동학혁명에 관하여 최초로 보고한 내용이 승정원일기)(고종)에 기록되고 있다. 다음은 신미 1871년 3월 16일 자와 3월 18일 자 승정원일기이다.


영해부사 이정필, 안핵사 박제관이 임명되다

『(앞부분 생략) 김병학이 아뢰기를 안동부사가 지금 상경하였는데 본부 공형들이 긴급히 보고한 문서를 보니『영해부에 수백 명의 난적이 관문에 난입하고 심지어는 본 고을의 수령이 해를 당하는 변까지 있었다.』 고 하였습니다. 아직 이들이 어떠한 난적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참으로 말할 수 없이 놀랍습니다.『지금 고을을 지키는 관원이 없으니 이정필을 영해 부사로 차임하여 말을 주어 밤낮없이 내려가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신미 1871년 3월 16일 이하 생략) 다음은 신미 1871년 3월 18일 자이다.


『경상감사 김세호의 장계『영해부에 적당 수백 명이 한밤중에 난입하여 관장을 멋대로 죽이고 인부를 강제로 빼앗으니 그자들을 쳐 없애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영해 부사 이정은 의(義)에 입각, 그들을 질책하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장례 치르는 것을 착실하게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 것과 관련하여 전교하기를 이들이 어떤 적도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흉패한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군사들을 풀어 저들을 섬멸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도신과 수신은 병부 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적절히 헤아려 군병을 징발하여 속히 섬멸하도록 하라.』(이하 생략) 


위 승정원일기에는 3월 10일 동학혁명이 일어난 날부터 일주일이 되는 시점에 조정에 보고 되었다. 3월 16일 자 내용은 영해부에 정체 모를 난적이 점령해 부사를 죽였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이에 조정에서 이정필을 영해 부사로 보낸다는 것이다. 3월 16일 자로 이정필이 부임하기 전에는 임시로 흥해 군수 김홍관이 겸하여 행정을 도모했다.

3월 18일 자는 승정원일기는 영해부사 이정의 장례를 도와줄 것과 병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지방 수령이 자체 병권을 행사하여 섬멸하라는 지시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박제관이 안핵사)로 임명하여 안동과 경주 등의 병졸을 동원하고 영해, 영양, 평해, 울진, 영덕 등의 포졸들을 총동원하여 동학도들을 본격 색출 작전에 들어간 것은 1871년 3월 18일부터였다. 이후 이 토벌 작전은 5개월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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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북쪽 퇴각로였던 영해 병곡의 백석 마을 전경, 곧바로 북쪽으로 4㎞쯤 가면 울진 후포항이다.

 

일월산 윗대치 일대에서 동학군과 관군이 교전하다 

일월산 아래 첩첩산중 윗대치 마을은 해월 최시형 선생이 스승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4년 4월 15일 순도 후 이곳에 6여 년간 은거하면서 동학을 포덕한 비밀 아지트였다. 윗대치마을은 현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상죽현(윗대치) 마을이다. 필자는 작년(2024. 6. 6.) 이곳에서 영양인시천모임(회장 이상국)주관으로 <동학해월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필자는 동네 분들과 이상국 회장에게 <최시형 선생 주거지>를 문의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2024년 10월 19일에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골에서 있었던 최시형 선생이 1894년 9월 8일(음) 동학혁명 제2차 기포령발령 기념식에 참관했다. 문바위골 마을에는 최시형 선생이 주거했다는 민가에도 가보았다. 아직 개인 소유라 보존 상태는 미비했다. 앞으로 윗대치골의 최시형 선생 주거지 고증은 필요해 보인다.


1871 영해부 관아를 점거했던 동학군이 퇴각하자 당시 영해부 관아의 행정이 마비된 가운데 영해 유림에서 초기 대응에 나섰다. 지방 행정관이 유고한 상태에서 지역 유림이 자체 수습에 나선 셈이다. 이들은 영해동학혁명 사건을 수습할 책임자인 도유사)로 남유진을 추대)하였다. 도유사로 추천받은 남유진은 이미 3월 11일 인근 마을에 유림에게 영해부 사건에 대하여 연락을 취하는 한편 영해 향중 유림에게 글을 보내 동학 혁명군을 토벌할 대책을 세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부분 생략함) 지난밤, 해시쯤 흉도 5, 6백 명이 성부(영해부 관아:필자주)에 난입하여 먼저 무기를 탈취하고 곧바로 아헌으로 올라갔는데 본관 성주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소. 이같이 극심한 사변은 예로부터 있지 않았소. 무릇 백성이 된 자로서 누군들 마음이 떨리고 담이 떨어지지 않겠소? 이에 글을 보내니 사변에 대응하는 대책을 잠시의 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소 글이 도착한 후 각 촌에서 사리를 아는 이는 해당 동정을 이끌고 곧바로 와서 서문 밖에 모여 계획을 마련해서 적을 토벌하여 소멸시키는 기반으로 삼는다면 아주 다행이겠소. (『신미아변시일기』 중에서. 권호기 역, 영덕문화원, 문자향, 2022)


남유진의 통문을 받은 영해 유림과 인근 지역 영덕현 등에서 동원된 장정들과 후일 관군 등 약 600여 명의 토벌대가 영해 동학 혁명군 추적과 체포에 나섰다. 이 토벌대에는 유림 측이 동원한 장정 200여 명, 관군이 400여 명이나 되었다. 적변문축(3월 16일 자)에는 경주진에서 총잡이 120여 명, 영일의 장기현에서도 총잡이 110명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영덕, 평해, 울진, 청하, 경주, 안동 등 인근 각지에서 관군이 총동원되었다. 

유림이 동원한 민보군과 관군의 연합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 토벌군은 영해에서 평해, 울진 쪽이나 포항, 경주 등지로 달아난 동학혁명군보다 지도부가 피신한 영양 일월산 쪽 동학혁명군의 행방 추적에 더 주력했다.

 

한편, 영해동학혁명군들은 3월 11일 영해부성에서 점심을 시켜 먹은 후 각자 철수를 시작했다. 이필제를 비롯한 지도부는 창수면 인량리, 가산리, 오촌리, 인천리, 보림리의 옷재(烏峴)과 백청리의 허리재(屹里嶺)를 넘어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로 관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용화리를 향했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 피신한 최시형 일행과 일월산에서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관군에 쫓긴 5백여 명에 이르는 동학군들의 대부분은 중도에서 흩어지고 각자도생하였다. 일월산 첩첩 산골 용화리에 모인 동학군들은 겨우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모인 교도들은 다시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영해부에 대한 공격을 하늘에 고하는 천제의식을 치렀다. 삼암 표영삼 선생이 쓴 <동학 1>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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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지역 합창단(좌), 풍물패 길놀이 행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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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윤석산 교령의 감사패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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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3월 16일 동학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던 영양 일월면 용화리 윗대치(상죽현)일대는 첩첩산중이었는데 지금 일월산 자생화 공원으로 변모했다. 이 윗대치마을은 최시형 선생이 수운최제우 선생이 순도 후 6여 년간 은거해 동학을 포덕했던 곳으로 알려졌으나 그가 주거했다는 민가는 아직 미상이다. 2024년 6월 6일에 영양인시천모임(회장 이상국)이 주관하여 <동학해월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가 제막되었다.

 

동학군 일월산에서 궤멸되다

이필제가 피신한『영양현 구간은 <기산리-가천리(佳川里)-칠성리(七星里)-문암리(門巖里)-용화리(龍化里)>로 이어졌는데, 용화리의 상죽현(上竹峴)에는 1865년 3월경부터 동학(東學)의 교주(敎主)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과 그 일행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중략- 이필제·정치겸·박영관 등 약 50명은 인아리(仁雅里) 쪽으로 철수하여 해월이 기다리는 용화동 윗대치로 향하였다. -중략- 이필제와 정치겸은 교를 타고 무리들과 같이 인천까지 들어갔다. 여기서 일박하고 12일에는 보림동까지 들어갔다. 저녁때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더니 13일에는 폭우가 쏟아졌다.『신미아변시일기』에는『13일에 종일 큰바람이 불어 모래를 일으키고 돌을 날릴 정도여서 길 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필제 일행은 관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13일 오후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옷재(烏嶺)를 넘었다(출전 : 표영삼,『동학 1』).


한편, 전날 홀리령을 넘다가 낙오되어 길을 잃고 잡히거나 영양 용화리 개곡동(開谷洞) 마을로 길을 잘못 들어서서 영양포교에 잡힌 사람이 많았다. 한편, 이미 사로잡은 동학혁명군들에게서 첩보를 입수하여 민관 연합군이 일월산 포위하여 수색하고 있었다. 3월 17일 자『적변문축』에 따르면 3월 16일, 영양 현감 서중보가 아침 일찍 포졸과 포수 등 관군과 민간연합군을 이끌고 일월산 용화동에서 40리까지 추격해 동학군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포를 쏘아댔다. 갑작스러운 포성에 놀란 동학군들은 여기서도 각자도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포위 작전으로 동학군은 궤멸 되었고 최시형, 이필제 등 지도부는 앞장에서 기술한 대로 울련전(또는 우련전: 당시 안동군 재산면 갈전리)을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영양 현감이 이끈 관군의 공격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희생한 동학군들 가운데 포에 맞아 죽은 사람이 13명이고, 생포한 남자 10여 명이었다. 나머지는 아이들과 여자들로서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장을 따라 일월산으로 피신한 가족들이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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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대치마을 일부(좌측 위), 일월산 용화리 윗대치마을 최시형 선생 은거유허비(좌측 아래), 

일월산 용화리 윗대치마을 삼층석탑 경북도유형문화재(제8호)(우)

 

흥선대원군이 무관 배선달을 파견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 고종의 아버지이자 정치가로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섭정으로 조선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오랜 기간 왕실 외척인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왕권 강화, 제도개혁, 인재 등용을 하는 개혁 정치를 했으나 한편으로 서양 열강 등 외세를 배척하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조선이 망하는 시기에 등장한 정치가로서 그의 일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그는 19세기 조선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현대까지도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왜냐하면, 한쪽으로 단언하여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말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 역사의 주요 사건에 많이 엮인 인물로 그는 조선 말엽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은 생전 운현궁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운현 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1871영해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배선달에게 말과 칼을 하사하여 영해 현장에 파견했다는 기록이『신미아변시일기』 3월 24일 자에 나온다. 선달은 사람을 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선달(先達)은 원래 조선 시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새 부사(이정필을 말함 필자 주)가 부임할 때, 운현궁에서 배선달이란 자를 선발해서 말과 칼을 하사하여 부사와 함께 보냈다. 배선달은 적도들이 대체로 관동 가까운 고을에 매복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날 부교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수색하였다.』)


3월 28일 자『신미아변시일기』에는 배선달)(裵先達)이 관동지역에서 동학혁명군 8명을 체포했다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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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산 자생화 공원 표지판, 이곳에 해월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가 건립되었다(좌), 자생공원 뒤로 보이는 일제 강점기 운영했던 폐선광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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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출신 이형수 화백이 그린 최시형 초상화(일월산 윗대치마을 자생화공원, 2024, 6, 6)

 

울진동학도 남두병, 배선달에게 체포되다

『동관(관동지역인 울진, 삼척을 말함: 필자 주)으로 간 배선달이 적도 8명을 울진·삼척 등지에서 붙잡았는데 그 가운데 한 우두머리는 평소 남보다 용력이 있다고 일컬어져 시험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체포당할 때 말하기를『내가 너희들에게 붙잡힌 것은 운명이다. 운명이 이르렀는데도 거역하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결박을 받고, 안핵소(안동:필자 주)로 압송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영해부적변문축』, 18714. 9일 자에 울진 매일리 남두병(43세, 물고)의 첫 진술에 배선달 관련 기록이 나온다.


『문) 너가 사뢰는 바는 어찌 수상한 자취가 있기 때문에 붙잡힌 것 아니야. 이번 영해동학혁명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실대로 말한다면 자연스럽게 옛날의 허물을 되돌려 속죄하여 잘 가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궂은일을 당한 요즘 사정을 숨김없이 바로 진술하기 바란다.』


『남두병: 답) (앞부분 생략) 울진 본 현에서 이미 눈여겨보아 아무런 죄가 없다고 내보냈다가 다시 잡아들인 것이다. 이번에는 배선달이 다시 붙잡도록 해서 본 영해부에 압송한 것이다.)(이하생략)』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무관 배선달과 힘이 장사(용력이 강한 우두머리: 필자 주)였다는 두 인물은 누구인가? 

배선달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밀피한 인물이다. 당시 배선달과 관군이 삼척지역까지 파견되어 동학군을 추적했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으로 보아 배선달에게 체포된 인물이 바로 울진 매일리(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필자 주)의 남두병이다. 왜냐하면, 결박하여 체포한 사람 중 특정한 인물을 우두머리라고 했으며, 이 우두머리는 용력, 즉 힘이 센 장사였다는 것이다. 또한, 남두병 자신이 심문에서 배선달에게 다시 붙잡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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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위키백과사전


이와 관련하여 남두병 선생의 후손인 남상균(현재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거주)씨가 말하는 집안 구전에 따르면 어느 정도 일치가 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집안 구전은 다음과 같다.


『남두병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하루는 명화적(明火賊))이 집안에 들이닥쳐 쌀을 내놓으라고 하자 그는 두 장정이 함께 들어야 하는 한말짜리 되를 한 손에 들고 갑자기 들이미니 그들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이 구전은 명화적이 힘센 장사인 남두병을 만나 대적치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구전에서 보듯이『신미아변시일기』와 『적변문축』에서 배선달이 체포했다는 그 우두머리는 지역이 울진이라는 것과 인물 됨됨이가 힘센 장사였다는 점에서 남두병이 틀림이 없다. 

영해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남두병은 이후 체포·수감되어 대구 경상감영에서 물고를 당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감옥에서 시신을 거두지 못해 후손들이 고향에서 의관장을 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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