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5화(5회)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사건

신분 상승을 노린 지능적인 성폭행
기사입력 2025.05.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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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민속문화재 8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농가주택(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햇살로105번길 36-7)

 

내은이 가족이 과주로 내려오자, 실구지는 미리 깨끗하게 손질하여 단장해 놓은 별채로 내은이를 안내했다. 

 

연지와 만복이는 앞장서서 물건을 부지런히 집안으로 옮겼다. 어린 두 자매는 새로 단장한 집에 들어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깔깔댔다. 내은이는 어린 동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다소 안심이 되었다.

 

“아씨. 짐은 모두 내렸으니 차차 정리하시면 됩니다요. 저는 달구지를 갖다 놓고 저녁상을 준비하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연지는 아씨가 방 안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고 만복이는 나를 따라 아래 행랑채로 좀 가세.”

“예? 저 말입니까?”

“아니…… 그럼…… 만복이가 여기 자네 말고 또 있나?”

“아이고…… 그렇구먼요. 큰 아씨, 작은 아씨. 그럼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연지야. 부탁해.”

 

한양에서 실어 온 짐을 내리던 실구지가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웃었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내은이도 웃음을 참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짐을 모두 내리자 실구지는 달구지를 끄는 소의 고삐를 잡아 만복에게 건넸다. 만복이는 달구지를 몰아 아래 행랑채로 내려갔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농막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자, 야트막한 계곡을 끼고 있는 아담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네들이 바삐 움직이고,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실구지 형제들이 사는 집은 내은이가 묵을 집과는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실구지가 만복이를 데리고 오자, 실구지의 동생 길동이와 처남 박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모두 나와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요.”

 

만복이가 멋쩍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긴 해도 아직은 좀 어색한 분위기였다.

“저녁 준비는 다 돼 가는가? 해가 곧 넘어가네.”

 

실구지가 재촉하자 그의 처가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뭔가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뭐 하고 있어? 빨리 연장 다 챙겨서 제 자리에 갖다 놓고 우리도 빨리 준비해야지.”

실구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만복이는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엉거주춤 서서 실구지를 쳐다봤다.

 

“너는 조금 있다가 여기 저녁상이 준비되거든 올라가서 아씨를 모셔 와.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모두 한 식구니까 잘해 보자고…….”

“아…… 예. 제가 잘 부탁드려요. 헤헤……”

만복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었다.

 

해가 넘어가면서 땅거미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날이 어둑해지자, 실구지는 만복이와 함께 집 주위에 등(燈)을 걸어 환하게 밝혔다. 

 

실구지는 만복이에게 아씨를 모셔 오라고 일렀다. 만복이가 잽싸게 내은이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집을 향해 뛰었다. 만복이가 물레방아 농막을 돌아 사라지자 실구지는 식구들에게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여인네들은 부지런히 부엌을 드나들었다.

 

잠시 후, 만복이와 연지의 안내로 내은이가 어린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실구지와 하인들은 모두 나와 허리를 90도로 굽히면서 인사했다.

“아씨.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구먼요.”


실구지와 그의 처 복실이가 굽신거리면서 마루 위로 안내했다. 등불을 환하게 밝힌 마루 위에는 미리 준비한 음식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뭘 이렇게 준비한 건가. 그냥 간단하게 준비하지……”

“아닙니다. 별로 차린 게 없습니다요. 그래도…… 아씨. 저희 아랫것들의 정성이니 받아주시면…….”

“아니지. 아니야. 정말 고맙네.”

 

내은이는 실구지의 안내를 받아 마루로 올라서서 가운데 앉았다. 실구지를 비롯한 일꾼들은 부지런히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어린 자매들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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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잔치 모습


내은이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위기에 울컥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자주 느껴보던 분위기였는데,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가장이 된 후로는 이런 기회조차 없었으니 부모님이 그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은이는 이렇게 정성스럽게 거처할 곳을 만들어 주고 잔치 분위기처럼 자신과 여동생을 환대해 주는 실구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리 아랫것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배려해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실구지 형제와 처남 박실 그리고 가족들 모두 막걸리를 마시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저마다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참판 댁 외거노비들이 살고 있던 집은 잔칫날 같았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가고 있을 즈음, 난생처음으로 먼 길을 나선 내은이는 몹시 피곤했다. 온몸이 욱신거려왔다. 어린 동생들은 차례로 내은이와 연지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내은이가 몸을 일으키자, 실구지가 얼른 눈치를 채고 만복이의 등을 살짝 쳤다. 아씨를 숙소로 안내하라는 신호였다.

 

내은이는 하인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실구지가 앞장을 서고 만복이가 등을 밝히면서 길을 안내했다. 어린 동생들은 연지와 박실의 처 간난이가 업고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한 내은이가 뒤를 따라온 하인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연지와 간난이가 어린 동생들을 아랫방에 눕혔다. 오랫동안 장작을 피웠는지 방바닥은 따뜻했다.

 

“아씨. 오늘 너무 수고하셨습니다요. 그럼, 먼저 쉬세요. 글구…… 만복이와 연지는 잠시 내려가서 저희와 남은 음식을 마저 먹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려고 합니다. 금방 올라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내은이는 실구지를 먼저 보낸 후, 연지와 만복이를 불렀다. 두 사람에게 수고했으니 내려가 충분히 쉬고 올라오라 이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만복이와 연지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첫날에 그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묵묵히 따르기만 했다.

“그럼…… 아씨. 잘 쉬세요. 낼 아침에 오겠습니다.”

윗방에 작은 아씨들을 눕혀놓고 아랫방까지 방바닥의 온기를 확인한 연지가 마당으로 나왔다. 만복이는 이쪽저쪽 돌면서 확인한 후 사립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제법 깔끔하게 단장한 방에 누운 내은이는 과주에서의 첫날 밤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게 불안했지만, 그녀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으므로 모든 건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게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왔다. 뒤척이던 내은이는 몸을 반쯤 일으켜 윗방 방문을 열고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 어린 두 동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내은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동생들이 깰까 봐 아랫방으로 내려와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잠시 뒤척이던 내은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한강을 건너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어오느라 너무 피곤했던 하루였다. 이렇게 먼 길을 나서 본 적이 없었던 내은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 만복이. 너 술 좀 하냐?”

실구지가 만복이를 곁에 앉히면서 물었다. 사람들은 마당에 죽 둘러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니요. 아직 술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 그래? 근데 그 뭣이냐…… 술을 뭐 배워서 마시냐?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안 그런가?”

“아…… 맞는 말씀이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언제 술 마시는 걸 배운 적이 있소? 하하하……” 

억지로 먹이려는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엉겁결에 두어 잔을 마시자 취기가 확 올라왔다. 

 

만복이는 계속 손사래를 쳤다. 연지가 건너편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만복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오늘은 맘껏 마시고 내일부터 우리 주인아씨 잘 모시고 잘살아 보자고……”

“와아”

 

실구지가 술잔을 들고 소리치자 모두가 호응했다. 실구지와 하인들이 머무는 집은 왁자지껄하게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실구지가 일어나 길동이와 박실이 앉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 사람이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실구지가 곁눈질로 만복이와 연지를 보며 두 사람에게 귓속말로 뭔가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박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자아, 마시자고……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했잖아…….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즐기면서 사는 거지. 안 그렇소. 형님. 하하하……”

“맞소.”

 

길동이가 장단을 맞추었다. 실구지의 처 복실이는 뭔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을 삐쭉거렸다. 

 

실구지는 미소를 띠며 다시 만복이 옆에 돌아와 앉았다. 그는 만복이의 적삼을 끌어당기면서 귀에 대고 조용히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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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만복이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만복이. 너는 앞으로 나를 형이라고 불러. 응? 그래야지.”

“알았어…요. 혀엉…니임.”

만복이가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떨구었다. 실구지는 만복이와 연지에게 봄이 오면 좀 더 편하고 넓은 곳에서 아씨를 모시면서 생활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면서 씩 웃었다.

 

길동이와 박실이 계속 권하는 술을 먹지로 몇 잔을 더 마신 만복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처음 마셔보는 술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구. 모두 정리하소. 제수씨가 여기 다 치우소. 연지도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고.”

 

만복이가 곯아떨어지자 실구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길동이와 박실이 만복이를 업고 방으로 들어가 눕혀놓고 나왔다. 

 

연지가 만복이를 걱정하며 안절부절 왔다 갔다 하자, 길동이가 얼른 연지 소매를 잡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여자들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흥겨운 모임이 마무리되고 집안을 환하게 밝히던 등불이 꺼졌다. 하인들이 각자 제 방으로 들어가자 사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느티나무 위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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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부엉이 울음소리 사이로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보광사(普光寺)에서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범종(梵鐘)은 원래 사찰에서 대중에게 때를 알려서 그 시각에 맞게 사찰로 오도록 하는 목적으로 치던 도구이다. 

전통적으로 사찰에서는 초경(初更) · 이경(二更) · 삼경(三更) · 사경(四更) · 오경(五更)에 대종을 울려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렸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찰에서 의식을 행하는 때 외에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릴 때도 타종하게 되었다. 

 

초경(저녁 8시)에는 대종을 2번 쳤는데, 이것은 수행의 단계인 십신(十信), 십주(十住)를 나타냈다. 이경(저녁 10시)에는 대종을 세 번 울려,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回向) 그리고 십지(十地)를 의미했다. 

 

삼경은 자정(子正)에 대종을 108번 쳤으며, 사경(오전 3시)에는 견도(見道) 등 오위(五位)를 상징하여 5번을 타종했다. 그리고 오경(오전 5시)에는 대종을 28번, 저녁예불(저녁 6시) 때에는 36번을 쳤다. 일상에서 듣는 종소리 그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외에도 사찰에서 중요한 불교 행사(法要)가 열리거나 고승의 법회 또는 열반 그리고 재난 등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대종을 쳐서 대중에게 알렸다. 

 

조선시대 관(官)에서는 통행을 금지하기 위해 ‘인경’이라 하여 백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종루에서 종을 쳤는데, 모두 사찰에서 행하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인경은 순수 우리말로 원래 말은 ‘인정(人定)’이다. 관청에서는 매일 밤 10시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렸는데 이를 인정이라 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 4시에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렸는데 이를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오늘날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제야(除夜)에 서울의 보신각종 타종 행사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타종 행사에서 33번 울리는 것도 인경의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두리번거리며 마당으로 나오더니 조용히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담 모퉁이를 돌아 잰걸음으로 물레방아 농막으로 향했다. 

곧이어 사내 두 명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도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사립문을 열고 물레방아 뒤 농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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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은 중천에 걸려 사위가 밝았다. 내은이가 머무는 초가집에도 불빛이 없었다. 모두 곤하게 잠든 것이다. 농막 옆 느티나무 위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두 사람은 누가 보는 사람이 없을까 하며 계속 뒤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저만치에서 앞서가는 사내를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달빛을 받으며 사내 3명이 물레방아 농막에 차례로 들어섰다. 

“누가 본 사람은 없는 거지?”

 

먼저 나온 사내가 집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바로 실구지였다. 

“없지요. 이 야밤에 누가 알겠어요?”

 

길동이가 박실을 쳐다보며 대답하자, 그도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구들은……? 만복이와 연지도 자는 게 확실하지?”

“그러면요. 모두 잠이 든 거 보고 나왔어요. 만복이는 술에 곯아떨어졌구먼요.”

“쉿. 목소리 낮춰. 이 사람아.”

 

박실이 얼른 대답하자, 실구지가 박실의 어깨를 잡아 앉히고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농막의 바깥쪽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들 술은 적당히 했지? 괜찮아?”

“아. 거의 안 마셨어요. 먹는 시늉만 했죠. 만복이 취하게 만드느라고 애썼어요. 만복이 자식 순진하기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더라고요. 흐흐흐……, ”

박실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길동이도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따라 웃었다. 

 

실구지는 두 사람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실구지가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두리번거렸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응?”

“어…… 그게…… 아씨를 말하는……”

“그래. 그거야.”

“아. 기억하지요. 그런데요?”

“그런데요라니? 내가 말한 그날이 바로 오늘 밤이야. ”

“예에……? 오늘 이사 왔잖아요……. 아직 짐도 다 안 풀었는데요?”

“에이…… 그래요. 형님. 아무리 그래도 오늘 이사 왔는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요?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길동이와 박실이 다소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난감해했다. 실구지는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 해치워야 한다고. 소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했잖아. 오늘 밤이 좋아. 모두 정신이 없을 때 해치우는 거야.”

 

그래도 두 사람이 선뜻 말이 없자 실구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자네들 언제까지 양반들 밑에서 하인 노릇을 하며 살 건가? 이대로 가면 우리가 낳은 자식도 우리처럼 사람 취급 못 받고 사는 거잖아?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잖아. 저것들만 취하고 나면 우리도 양반처럼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어. 이 많은 재산도 우리 꺼가 되는 거야. 알아들었어? 내 말?”

 

실구지는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실구지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였다.


우리 역사에서 노비와 관련된 신분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관련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바뀌었다. 그때마다 노비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분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가해지는 신분 세습이라는 사회적 불이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다.

『고려사(高麗史)』「형법지(刑法志)」에서는 “정종 5년(1039), 천한 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어난 자의 신분은 어머니가 가진 신분을 따른다.’라는 뜻으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충렬왕 때 ‘부모 가운데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된다.’라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을 시행함으로써 노비의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조선 건국 이후, 조정과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 노비 수가 급증하는 데에 따른 사회적 폐단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즉, 노비를 줄이고 양인층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해 태종의 대에 노비종부법이 시행되었다. 태어난 자의 신분을 아버지의 신분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폐단이 발생하고,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겹치자, 세종 때 결국 노비종모법으로 환원하였다.

 

당시 실구지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선 초기에 왕조가 바뀌면서 지배권력층의 이해관계 득실에 따른 관련법 정비과정의 허점을 이용하려고 든 것이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지금 아씨는 아랫방에 작은 아씨들은 윗방에서 자고 있어. 자네 둘은 작은 아씨 하나씩 맡아. 나는 큰아씨 내은이를 맡을 테니까.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해야 해. 각자 수건 준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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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 생가터 )


두 사람은 목에 두른 수건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돼. 어린 것들이니까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거야. 먼저 해치우고 나온 사람은 밖에 나와서 망을 보라구. 자아…… 모든 건 지난번에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알겠어?”

“예. 잘 알았소. 형님”

실구지가 일어나자 두 사람도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자. 가자구.”

 

실구지가 농막을 나서자 두 사람은 바로 뒤를 따랐다. 내은이가 사는 집은 불빛 하나 없었지만 중천에 떠 있는 달빛에 그 아담한 모습을 드러냈다.

앞장선 실구지가 조심스럽게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실구지가 두 사람을 보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두 사람도 실구지가 하는 대로 들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환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였지만 얼핏 봐서는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실구지가 지게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돌쩌귀를 달아 여닫는 문으로 안팎을 두꺼운 종이로 싸서 만든 문이라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도 약간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건장한 사내 세 명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방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피곤한 몸으로 곯아떨어진 내은이는 기척도 없었다.

 “자네들은 윗방을 맡아.”

실구지가 박실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이듯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윗방을 가리켰다. 박실과 길동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윗방 문을 열었다. 

 

지켜보던 실구지는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잠이 든 내은이를 내려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입고 있던 겉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던지고 내은이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젖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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