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만세 운동 주동자, 故 윤강규(尹康逵, 일명 호규 鎬逵)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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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 김성준(울진문화원장)
애국지사 고 윤강규의 생전 모습
매년 4월 11일에는 매화 만세공원에서 「4.11 매화 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린다.
올해는 독립만세를 부른지 106주년으로 ‘매화만세정신 기념선양회’의 주관으로 각급 기관 단체장과 독립유공자 후손, 그리고 지역 주민들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회 만세제가 거행되었다.
매화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의 애국가 제창을 시작으로 독립선언문 낭독, 울진문화원 합창단의 3.1절 노래 제창, 그리고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기념식에는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물론이려니와 서울 등 먼 거리의 유족들까지도 참석하여 감동을 더했다.
우리나라는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36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아오며 말과 글을 모두 잃었다. 갖은 설움을 당한 우리 국민들은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나가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는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문의 낭독에 이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고한 이 행사는 잠자던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 일제의 횡포에 억눌려 침묵하던 대다수의 조선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 만세 운동은 서울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 강원도 산골짜기인 울진에까지 만세 소식이 전해졌다.
울진의 만세 운동은 서울 파고다 공원 만세 이후 약 40일 뒤에 일어났다, 서울보다 한 달이나 지난 뒤에 일어난 것은 서울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정보가 늦은 원인도 있겠지만, 만세 운동의 핵심이 되는 독립선언문이 늦게 입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울진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경로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3.1일 서울 만세 운동에 참여한 근남면 출신 ‘장식(張植)’이란 청년이 독립선언서 한 장을 몰래 감추어 와서 울진의 청년들에게 전달하였고, 또 한 장은 서울 중앙감리교회 홍규익 전도사가 자기의 외손자인 울진군 북면 지장골 김리교회 교인인 전병겸에게 보내졌다. 홍규익 외조부는 독립선언서 1장과 공약 삼장을 양주사람 박시형을 통해 보내면서 ‘독립만세는 교회가 주동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모까지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경로로 울진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는 울진의 피 끓는 애국청년들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에 보면 매화, 울진, 북면 청년들은 당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모의했다고 하였다. 이들은 일경들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 11일 매화 장날, 4. 12일 울진읍 장날, 4. 13일 북면 흥부장에서 각각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청년들은 만세 운동을 위해 깃발과 태극기를 지장골 교회에서 은밀히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화 장날에 사용할 태극기는 야심한 밤을 이용해 북면 지장골에서부터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매화 만흥학교 건물에 감추었다고 한다.
故 윤강규씨의 아들 윤철 씨
매화리 윤강규의 아들인 ‘윤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근남면 수곡리 ‘달길 마을’에서도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집 선영 산소가 수곡리 달길 마을을 지나가는데 저희 선친께서 달길 마을을 지나실 때마다 이 마을에서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만세를 부르던 날에는 매화장에 오는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짊어지고 가게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윤강규 본인은 일경들에게 요 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태극기를 옮겼다고 하였다.
《울진의 독립운동사》(2011) 3.1독립만세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5일 윤병관의 집에서 윤호규(윤강규), 남광호, 최중모, 윤정규, 최효대 등이 모여 울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논하고 그다음 날엔 북면 고목리 전병겸과 울진면 고성리의 주진휴와 더불어 거사의 구체적인 날짜를 밀의하여 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잡은 거사 일은 11일에 매화장에서, 그다음 날에 울진장, 그리고 13일엔 흥부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당일 쓸 태극기를 각기 마련토록 하였으니, 거사 일은 모두 장날이었다.」
위의 책 200쪽에는 당일 쓸 태극기등 물품들을 준비하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거사 이틀전인 9일 윤병관, 전병겸, 최효대, 남재량, 윤정규, 최중모, 윤상홍, 금매사람 윤학규, 남광호, 근남 수곡사람 장형관 등 10인이 매화리 최현욱(최효대)의 집 대밭 속 오두막에 모여 매화 독립만세의 진행 부서를 정하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만들었다. 한편 전병겸이 다닌 지장 감리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모여 독립만세에 쓸 손에 드는 작은 태극기를 만들고서 이를 지게에 감추어 짊어지고 50리 길인 매화 만흥학교(당시 폐교된 건물)로 가져와 몰래 숨겨 두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숨겨두었던 매화리의 만흥학교 터
이렇게 준비된 매화 만세 운동은 장날 하루 전날인 4월 10일 오전 8시 조금 지나서 매화의 청년 윤상홍, 전학복 등 6명이 남수산 중턱인 ‘선산목’에 올라가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예정된 시간보다 앞당겨 만세를 시작한 것이 다소 성급하였다는 평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성급한 거사로 가담자 여러 명이 일경에게 잡혀가게 되었고 일경들은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잡혀가게 되자 다음 날 매화 장날에 만세 운동이 제대로 될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날 장날 만세 운동은 오후 3시쯤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 제5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최효대가 당시 면사무소 정문 앞에서 각목으로 길을 막고, 현수막을 가로친 후 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선창하였다. 윤병관, 전병겸, 남재량, 윤정규, 최중모 등 주동자들이 ‘대한독립’이라고 쓴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연창하니 장꾼들도 가세하여 온 장터가 독립만세 함성의 포효로 가득 차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날 매화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한 인파는 장꾼들과 합하여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헌병들은 아침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장꾼들을 해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군중들은 오히려 급속히 불어나 일경 5명으로서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경들은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을 해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위협을 가했지만, 분노한 군중은 쉽사리 해산되지 않았다. 일경들은 급기야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만세 인파들은 헌병들의 마구잡이식 체포를 피하여 이 골목 저 골목, 또는 숲이 우거진 남수산 쪽으로 흩어지며 몸을 숨겼다.
헌병들이 만세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날 뛰자 장꾼들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던 윤강규는 장꾼들과 합세하여 숲 쪽으로 몸을 피했다.
윤강규의 부친 윤병기(尹炳夔)씨는 마구잡이 식으로 체포하는 일경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군중들을 향해
“일본 경찰이 무서워 도망가는 자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분개하였다고 한다,
당시 윤강규는 24살의 혈기 방장한 청년이었다.
윤강규는 만세 운동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가담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날도 윤강규는 청년들과 함께 매화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윤강규는 일단 체포현장에서는 벗어났지만 다시 건너편 마을인 금매리 ‘쇠니동’에 가서 친구인 남계원과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밤 10시경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군중들을 이끌고 금매리 뒷산인 금매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윤강규 청년이 2차 만세를 부른 곳. 현재 매화 만세공원으로 뒷 산이 남수산이다
결국 윤강규를 비롯한 주동자 청년들은 일경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날의 매화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청년들은 윤강규를 포함해 11명이었다.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윤강규는 1919년 4월 21일 울진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윤강규의 형량이 다른 사람에 비해 높게 판결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 기록에는 윤강규가 높은 형량을 받은 것은 ‘낮에도 만세를 불렀고 밤에도 금매리로 옮겨 다시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울진의 만세 운동은 흔히 매화와 부구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울진의 독립운동사』의 「3.1만세 운동의 특징편」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있어 울진의 여러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울진 3.1 독립만세가 일어난 지역은 면 단위로는 원남면과 북면 그리고 단독 거사까지 포함하여 온정면 3개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병헌의 『3.1운동 비사』에 보면 울진 군내 다른 몇몇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4월 1일 울진면에서 수백 명이 울진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을 당했고, 서면 근남, 기성 3개 면에서는 밤에 산 위에서 봉화를 신호로 상호 연호하면서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뿐 아니라 4월 14일에는 평해에서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을 당했고, 15일에는 온정면에서도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을 당한 것으로 적고 있다.
매화만세 운동 다음날인 4월 12일 울진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매화 장날의 만세 운동으로 주동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일경들이 밤새 청년들에게 예비 검속을 실시하여 울진장날 만세 운동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다음날인 4월 13일 흥부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흥부 만세운동은 칠보산을 중심으로 낮에는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고, 일경들의 무차별적인 체포를 피해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밤늦은 시각까지 만세를 불렀다 한다. 만세 군중은 그동안 가슴속에 쌓였던 울분이 표출되어 다음 날까지 산발적으로 무리 지어 만세운동이 이어졌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울진의 만세운동은 결국 매화 만세운동으로 11명, 흥부장날 만세로 12명의 젊은이들이 체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체포된 청년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국하기도 했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육신이 성한 데가 없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만세 운동 당시 신문기사
○ 윤강규(尹康逵)는 누구인가?
윤강규는 일명 호규(鎬逵)로도 불렀다. 윤강규는 파평 윤씨 야성공파(野城公派) 제34세 손이다. 1895년 3월21일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120번지에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윤병기(尹炳夔)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강규가 태어난 매화리는 파평 윤씨들의 집단 부락인 윤촌(尹村)과 강릉 최씨들의 집성촌인 최촌(崔村)이 함께 어우러져 울진 지역에서는 양반촌으로 알려져 있던 마을이다. 당시는 농경사회로 토지의 소유 면적에 따라 부의 척도를 가름하던 시대였다. 매화리는 지형적으로 마을 앞에 매화천이 흐르고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부촌이었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자녀 교육열도 높았다. 이러한 건전한 토양에서 성장한 이 지역의 청년들 또한 국가관이나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다. 윤강규도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윤강규는 평소 애국심이 강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강한 열의를 가지고, 지역의 뜻있는 청년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고 한다. 그의 애국심이나 정의감은 부친의 성품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강규의 부친 윤병기씨는 성품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면 신변에 위험이 닥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자녀들에게 늘 애국심을 고취했다고 한다.
윤강규씨의 아들 윤철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부친은 평소 애국심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항상 우리에게 일본이 빨리 물러가고 조선이 독립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윤강규씨의 애국 활동은 지역 주민들에게 평소에 크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사회 상황은 정치나 행정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는 혼란한 사회를 급속히 안정시켜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높은 신뢰를 받는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해방 후 애국지사 윤강규의 울진군 교육위원 활동. 뒷줄 왼쪽에서 8번째. 우측에서 10번째
윤강규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초대 원남 면장 겸 원남면 수습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2년가량을 재직하면서 36년간이나 일본의 압제하에 시달려온 주민들을 보살피며 어지러운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뿐만 아니라 울진군 교육청의 교육위원으로도 3~4년을 역임하면서 현대식 교육 체계를 세우는 일에 크게 일조하였다.
또한 해방 후에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인사들로 구성된 「삼일동지회 울진군 지부장」을 맡아 3년여 지역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아들 윤철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부친은 삼일 동지회 울진 지부장을 맡아 3년여 수고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함께 활동하시던 산해 전영경씨가 쓴 기록을 보면 저희 부친이 삼일동지회 울진군 지부장을 맡고 전영경씨가 부회장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고 항상 선도적인 입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고 한다.
윤강규씨는 이렇게 국가와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2월 5일 73세를 일기로 하세하였다.
그의 업적은 오랜 기간 묻혀 왔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수형 기록이 확인되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故 윤강규 지사의 묘. 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증서와 표창장
대정팔년
큰 나무는 뿌리가 깊듯이 윤강규씨 댁에는 옛 선조들의 문집이 상당수 보존되고 있었다. 고문헌들은 가문으로 보면 영원토록 보존해야 하는 가보인 셈이다. 그러나 시골 가정에서 온전하게 보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므로 아들 윤철 씨는 영구히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서 375종 835점, 유물 1종 9점 등 총 844점을 2015년 3월 국가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에 기탁하였다. (2025. 6.)
[윤강규의 재판 판결문]
- 피고사건: 보안법 위반
- 주문
피고 윤강규(尹康逵)를 징역 6월에 처한다.
- 이유
피고는 예전부터 구한국 독립의 희망을 품고 있는 자인데, 대정 8년 4월 11일에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음을 알고도 동일 오후 10시경 매화 시장 부근 금매리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교사(敎唆)하여 여러 명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연창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 적용법조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대정 8년(1919년) 4월 21일 검사사부취급 조선총독부 경시(警視) ‘장곡천풍치(長谷川豊治) 간여로 판결함.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
조선총독부 판사 입원양보(笠原良保)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황명석(黃命錫)
대정 8년 형(刑) 제110호
이유서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윤강규(尹康逵)
위에 대한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언도한 증거에 관한 이유가 다음과 같다.
피고는 대정 8년 4월 11일 매화리 시장에서 다수의 사람이 한국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것을 알면서도 그날 밤 장에서 4.5정 떨어진 금매리에서 성명 불상자 3인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사실은 당 공판정에서 자백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증인 남필호(南弼鎬)의 신문조서에 ‘피고는 4월 11일 오후 8시 30분경 필호의 집에 와서 동인의 장남 계원(啓源)을 꼬여 불러내 만세를 부르려고 하는 것을 동인이 질책하였다는 내용’의 기재가 있음에 비추어 피고는 구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는 자이며, 다른 사람을 교사(敎唆)한 것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판시 사실을 인정한 증거가 충분하다.
대정 8년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벙원 울진지청
남수산 아래의 윤강규가 살던 집 터. 현재는 타인 소유로 새 건물 신축. 최연석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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