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5화(6회)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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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숭례문(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내윗방과 아랫방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미닫이를 열고 윗방으로 들어선 박실과 길동이는 내은이의 두 동생이 덮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그때까지도 어린 자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박실이 길동이에게 아랫목에 있는 동생을 가리키며 어깨를 쳤다. 자기가 하는 대로 빨리 따라 하라는 신호였다. 윗목에서 자는 동생의 윗 저고리가 박실의 손에 벗겨지자 인기척에 놀란 그녀가 눈을 떴다. 동시에 동생도 눈을 떴다.
달빛을 받은 방안은 그래도 사람의 형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그녀들의 눈에 거인의 모습을 한 사내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눈에는 분명 사람이 아닌 귀신의 모습이었다.
“아…… 악. 으…… 음…….”
동생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란 박실이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박실이 여자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너는 지금 뭐 하냐? 얼른 해치우지 않고?”
박실이 윗목의 여동생을 덮치며 길동이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잠시 멀뚱거리며 서 있던 길동이는 정신을 차리고 구석에서 떨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낚아챘다.
그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사납게 끌어 방바닥에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방바닥에 깔린 어린 동생들은 발버둥을 쳤지만, 중년 사내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가만있어. 더 시끄럽게 굴면 아랫방 언니가 죽어. 조용히 해.”
박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동생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영문도 모른 채 깨어난 두 동생은 발가벗긴 채 오들오들 떨었다.
윗방에서 소란이 계속되자, 피곤한 몸으로 곤히 잠들었던 내은이도 눈을 떴다.
윗방에서 들리는 비명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언가 자기 몸을 누르고 있는 억센 힘으로 느꼈다.
달빛을 받은 방안은 사물의 윤곽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그제야 어둠 속에서 건장한 사내가 자기 몸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내은이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누…… 누구……?”
내은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억센 사내의 손길이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저항했다. 달빛을 받아 환한 여닫이문을 배경으로 사내의 모습이 몸을 계속 내리누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드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내은이는 손을 뻗어 사내를 밀쳐 내려고 용을 썼지만, 그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내가 힘으로 누르며 왼쪽 젖가슴을 움켜쥐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비로소 자기 몸의 상반신을 가리고 있던 윗 저고리가 벗겨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본능적으로 옷을 찾으려고 방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내의 힘에 눌려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내가 손바닥에 힘을 주며 젖가슴을 주무르자 그녀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아…… 으…… 음……”
내은이의 입에서 고통을 참는 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지만, 입을 틀어막고 있는 수건 때문에 밖으로 새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신음을 내고 몸을 이리저리 틀며 저항했다.
그녀의 저항이 계속되자, 사내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조용히 해. 소리치면 동생들이 죽어.”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강력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듣는 순간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실구지? 설마…… 실구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은이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감히 아랫것들 주제에 상전을 범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일까?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공포에 질린 채 소리치려 하자, 사내가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윗방에서는 어린 동생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내뱉는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그제야 내은이는 윗방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온몸을 비틀면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사내의 억센 손길에 막힌 입으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생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어도 입이 틀어막혀 있어서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사내가 내은이의 바짓가랑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힘을 주었다. 쫘아악 소리와 함께 치마가 찢어지며 지게문 사이로 새 들어오는 달빛에 발가벗은 내은이의 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사내가 몸에 걸치고 있던 바지를 내리고 알몸으로 덮쳐왔다. 사내의 완력을 도저히 당해낼 수는 없었지만, 내은이는 죽을힘을 다해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저항했다.
입에 수건이 물린 채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내은이의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紅)간송미술관 소장. 속 여성의 치마는 허리를 감싸지 않고 오히려 노출하고 있다. 당시 노는 여자들의 첨단 유행이었다.
잠시 후, 차례로 동생들의 비명이 방안에 퍼졌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토해내는 어린 동생들의 몸부림과 울음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두 동생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면서, 두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잠시 후, 욕정을 채우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옷을 추스르며 입는 두 사내의 모습이 문 창살에 비쳤다. 그들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자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갓 열 살, 열세 살이 된 어린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속절없이 길고 긴 밤을 보냈다.
내은이는 동생들이 걱정되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배 위에 올라탄 사내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수건으로 막힌 입으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내은이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어린 동생들을 겁탈한 괴한들은 아랫방으로 들어왔다. 내은이를 누르며 힘을 쓰고 있는 사내를 보고 말했다.
“형님은 아직도 힘쓰고 있수? 에이……”
그때까지 내은이는 발가벗긴 채 알몸으로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면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 발가벗긴 내은이의 필사의 저항으로 승강이하고 있던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알았어. 먼저 나가 망보고 있어.”
순간 내은이는 기겁을 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전율을 느끼면서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아이…… 형님. 뭐 하고 있어요? 빨리 해치우고 나오소. 이제 곧 동이 터요.”
두 사내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내은이 몸 위에서 그녀를 누르고 있던 사내는 사정없이 내은이의 뺨을 두세 차례 쳤다.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내은이는 사내가 뺨을 갈기자 그대로 사지를 늘어뜨리며 축 늘어지고 말았다.
뺨을 워낙 세게 맞은 데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내은이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녘이 다가오도록 내은이의 완강한 저항으로 야욕을 채우지 못하고 있던 사내는 마침내 내은이를 겁탈하는 데 성공했다.
일을 마친 사내가 몸을 일으키고 바지를 찾아 추슬렀다. 그는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내은이의 알몸을 쓱 훑어보며 만족한 듯 빙그레 웃으면서 방문을 열었다.
내은이는 기진맥진하면서도 자기를 겁탈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지게문에 비치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순간 문에 비친 사내의 모습은 실구지였다. 아무리 봐도 틀림없이 실구지였다.
실구지가 방문을 닫고 사라질 때까지 내은이는 너무 놀라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녀의 뺨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박실과 길동이는 실구지가 나오자 다시 담장 밖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처를 향해 냅다 뛰었다.
멍멍멍!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사방을 밝게 비추던 보름달도 어느새 서산에 겨우 걸려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은하수들도 여명이 밝아오자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내은이 가족 과주의 첫날밤은 그렇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아픔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밤새도록 사내의 완력에 맞서 저항했던 내은이는 실구지가 방을 나서고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지자 긴장이 풀리면서 실신해 쓰러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한 시진 가까이 지나서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내은이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미닫이문이 열린 윗방에는 울다가 지친 어린 두 동생은 아랫목에 쪼그린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
3월의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방문을 뚫고 들어왔다.
내은이도 구석에 처박힌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을 찾아 발가벗겨진 몸을 겨우 가렸다.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아랫도리에 심한 통증을 느낀 그녀는 도로 주저앉았다.
그녀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 엉금엉금 기어서 윗방으로 올라갔다.
어린 두 동생은 이불 속에 쪼그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찢어진 저고리와 속옷에 묻은 핏자국이 밤새 일어났던 일들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내은이는 어린 동생들 가운데 누워 그녀들을 안아주었다. 동생들도 언니의 기척에 잠이 깼다. 세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내은이는 간밤에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가족처럼 대하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아랫것들이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은 내은이는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해 봤지만 당장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실구지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 왕조인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고관대작 집안에서 양반가의 규수로 자라온 자기가 아닌가?
‘동생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문제도 역시 자기의 처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어이없이 비참한 생각만 들었다.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두 동생을 꼭 껴안았다.
지게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만복이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젖힌 만복이가 화들짝 놀랐다. 아침 해가 벌써 중천에 걸린 것이다.
‘아이고. 이거 야단났네.’
그는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며 마당으로 나오면서 우물을 찾았다. 생전 처음 마셔본 술이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고 속이 쓰렸다.
그는 바가지로 물을 마시고는 주위를 돌아봤다. 안채 쪽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들 일 나갔나……?’
그때 부엌에서 나오던 연지가 만복이를 발견했다. 연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달려왔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속은 괜찮아?”
“아…… 좀…… 괜찮아. 근데…… 아씨와 아가씨들은……? 별채에는 올라가 봤어? 조반은 챙겨드린 거야? 오늘 전답을 한번 돌아보기로 하셨는데……”
연지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물었다. 연지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만복이의 소매를 잡아 광으로 끌었다.
“왜? 왜…… 그러는데? 뭔 일이 있어?”
광으로 들어온 만복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사방에는 농사를 짓는 데 쓰는 각종 농기구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연지가 삽자루를 옆으로 치우고 문틈으로 다가가 솔캥이 빠진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연지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이 사람들 분위기가 좀 이상해.”
“뭐가? 뭔…… 분위기? 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뭔 일이야? 아씨한테 뭔 일이 생긴 거야?”
“아니. 몰라. 나도 아씨한테 못 가봤어. 별채로 올라가렸더니 못 가게 막았어. 나더러 앞으로는 가지 말래. 길동이와 간난이가 아씨 가족을 챙기기로 했대……”
“아니. 누가?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만복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암튼 몰라. 간난이가 날 붙잡고 엄포를 놓더라고. 실구지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대. 나……정말…… 어이가 없어서……”
연지가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실구지 형님이?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거 좀 이상하네, 아씨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대? 그랬대? 응?”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대체 무슨 속셈인지……. 근데 아씨가 설마 그러셨겠어? 아무 이유도 없이……. 하여간 뭔가 좀 이상해. 지금 여기 돌아가는 분위기가 우리 두 사람을 감시하는 것 같고……. 이사를 오자마자 갑자기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졌어.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무슨 꿍꿍이야……?”
“내가 직접 물어봐야겠다. 아씨께 올라가서 여쭤보면 아시겠지.”
만복이가 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연지도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만복이는 다시 우물가로 가서 바가지에 물을 떠서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잔치를 열 때부터 실구지가 하는 짓이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어…….”
연지가 만복이에게 바가지를 넘겨받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어쩐지 술을 계속 마시게 하더라고. 못 마신다고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억지로 먹이고……”
“그건 그렇고 다들 어디 간 거야? 들에 일 나갔나?”
두 사람이 사립문을 열고 담장을 돌아 나오다가 마주 오는 실구지와 마주쳤다. 그는 괭이자루를 왼쪽 어깨에 메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어이. 만복이 일어났는가? 속은 괜찮은 기여? 그렇게 퍼마시더니만…….”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예…… 형님. 저어……”
만복이가 배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실구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아래위를 훑어내리면서 물었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근데…… 자네 두 사람…… 지금 어디로 가는가?”
“아씨한테 올라가 봐야죠.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조반도 드려야 하고……”
연지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여? 아…… 갑분이가 말 안 했어? 이제부터 아씨들은 길동이네 내외가 담당한다고 말이여. 이제 너희들은 아래채 여기에서 지내면 돼. 농사일 거들어야지. 지금 계절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형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보고 더 이상 아씨를 모시지 말라고요……?”
만복이와 연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어젯밤에 내가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자네들이 그동안 고생하면서 한양에서 잘 모셨으니 이제 과주에 온 이상, 우리가 잘 모실 거라고 했잖아.”
실구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손으로 허공에 삿대질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아무리 그래도……”
연지가 어이없어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어쩔 줄 모르며 허둥거렸다.
“아…… 됐어. 그만 해. 이미 결정한 일이고……, 저 위에는 갑분이가 올라가 있어. 이미 아씨들에게 조반 다 드렸고……. 허니…… 두 사람은 여기서 그만하고 손 떼. 아씨 걱정은 안 해도 돼.”
두 사람이 미처 무슨 말을 하려고 허둥댔지만, 실구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만복이 어깨를 잡으면서 다시 마당으로 들어섰다. 만복이는 마지못해 끌려가듯 따라갔다.
실구지가 빨리 따라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연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어정쩡하게 뒤를 따랐다. 연지와 만복이는 자꾸만 아씨가 계시는 집을 돌아봤다.
“아씨…… 아씨. 조반 가지고 왔어요.”
갑분이가 준비한 아침 밥상을 머리에 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밥상을 조심스럽게 마루에 내려놓았다. 마루에 걸터앉은 그녀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아씨를 불렀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아씨. 아직도 주무세요?”
갑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내은이가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순간 그녀는 놀라면서 입을 막았다.
“헉……?”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윗방 문은 열려 있고 옷가지가 방바닥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인기척에 내은이가 눈을 떴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으로 방안에 들어선 사람을 발견하고는 놀라 본능적으로 저고리로 가슴을 가렸다. 갑분이가 놀라 소리쳤다.
“아씨.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세요? 작은 아씨들도…… 괜찮……”
내은이가 살던 윗채
내은이는 일어나 앉으며 그녀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녀의 눈은 힘도 없고 초점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얼른 방문을 도로 닫고 나왔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 일을 빨리 실구지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저만치에서 실구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갑분이가 제자리에서 뛰며 손을 들고 소리쳤다. 그녀를 발견한 실구지가 뛰어 올라왔다.
“뭔 일인데? 왜?”
“아씨가…… 좀…… 이상해요. 밤새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실구지는 얼른 그녀의 입에 손을 갖다 대고 그녀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무슨 일인데 그래? 아씨는 일어났어?”
실구지가 짐짓 모른 체 하며 되물었다. 갑분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실구지가 손을 내밀면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알았어.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내려가 있어. 여기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알았어? 누가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가 죽어. 다 죽는다고…… 알았어?”
모두가 죽는다는 협박에 갑분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구지는 갑분이를 세워놓고 입을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갑분이가 종종걸음으로 아래채로 내려가자 실구지는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은이가 있는 방으로 향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씨. 일어나셨소? 해가 중천에 떴는데……”
그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내은이와 두 동생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벽에 기대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은이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놀란 두 동생을 뒤로 앉혔다. 두 동생은 울음을 참으면서 언니 등 뒤에 바짝 붙었다.
“잠은 좀 주무셨나? 왜 그리 놀라시오?”
실구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은이는 실구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놈이 감히……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상것 주제에 주인인 나를 어찌 감히……”
“허허…… 뭐가 어쨌다고 이러시는 가요? 반상이 애시당초 무슨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잖소. 안 그런가?”
“반상이 유별하고 국법이 지엄하거늘 네 놈이 감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네가 성할 듯 싶으냐? 내 장차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내은이는 양반가 규수로서의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려서부터 반상의 법도를 익히고 아녀자로서 해야 할 도리를 배워온 터라,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해질 수 있었다.
“내 알았소. 아씨와 작은 아씨들은 조반 먼저 드시고 정리 좀 하시오. 내 이따 저녁에 다시 오리다.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기로 하고…… 그리고 아 참….”
실구지가 방문을 열다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앞으로 여기는 길동이와 갑분이가 시중을 맡기로 했으니까 그리 아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두 사람에게 말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실구지가 신발을 끌며 마당으로 나가 잠시 내은이가 있는 방을 지켜보더니 이내 사립문 밖으로 사라졌다.
“언니…… 언니이…… 흑흑……”
바깥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 어린 두 동생이 앞으로 나오면서 내은이 품에 안겼다.
“울지마. 이제 괜찮아. 언니가 지켜줄게.”
내은이는 두 동생을 꼬옥 껴안으면서 볼을 비볐다.
“언니. 연지는 어디 갔어? 왜 안 보이는데? 응? 흑흑……”
동생이 울면서 연지를 찾자 그제야 내은이는 연지와 만복이가 생각났다.
이때까지 한 번도 자기 곁을 떠나 이렇게 오래 있어 본 적이 없었는데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간 거지? 하루 종일 보이지 않고……?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뭔가 일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 동생에게 부엌으로 들어가 얼굴을 씻고 몸단장을 다시 하라고 일렀다.
그녀는 마당으로 나와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추스르며 주변을 돌아봤다.
춘분이 막 지난 때라 멀리 산자락과 들판에는 농사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래채에서 내은이가 있는 거처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듯, 내은이의 거처에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이 급히 뛰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순간 만복이와 연지가 올라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곧 손을 내렸다. 올라오는 사람은 길동이와 갑분이었다.
길동이는 내은이를 안으로 들어가라고 졸랐다. 바람이 아직도 차니까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두 사람이 자기를 감시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간밤에 두 동생을 범한 범인 가운데 한 명이 분명히 길동이일 거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길동이는 내은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립문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갑분이는 내은이에게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내은이는 길동이에게 연지와 만복이를 찾으면서 좀 불러달라고 말했다. 길동이는 두 사람이 오늘부터 아래채에서 농사일을 돕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위채는 자기와 처 갑분이가 맡기로 했다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기와 처에게 말씀하라고 했다.
내은이는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실구지가 계획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멀리 아래채 쪽을 힐끔힐끔 보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에는 갑분이가 가지고 온 조반이 그대로 보자기에 덮인 채로 있었다. 내은이는 두 동생에게 보자기를 걷어내고 밥을 먹도록 했다.
그녀는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동생들을 보면서 눈물을 삼켰다. 동생들은 언니에게 밥을 권했지만, 그녀는 밥 생각이 없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그녀는 또 울음을 삼켰다.
저녁이 되어 다시 갑분이가 밥을 가지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고기반찬에다 사골국물도 있었다. 그녀는 사골국물만 한 사발 들이켜고 자리에 누웠다. 동생들도 윗방에 자리를 펴고 눕혔다.
동생들은 아직도 온몸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아파했다. 그녀는 동생들이 잠들 때까지 윗방에서 함께 누워있었다.
아랫방으로 내려와 자리에 눕자 온몸이 욱신거렸다. 간밤에 세게 얻어맞은 탓인지 턱은 아직도 얼얼했다. 지게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두 분만 살아계셨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 구멍에 숟가락을 끼워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또 어디에 하소연해야 좋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만복이와 연지도 곁에 없어 의지할 사람조차도 없으니 모든 게 불안했다. 더구나 지금은 자기가 감시를 받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두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긴 했지만 계속 하품이 나오면서 몹시 졸렸다. 초저녁이었지만 간밤에 밤이 새도록 몸싸움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그녀는 금방 잠이 들었다.
삼경이 가까워진 시각이 되었을까? 내은이는 누군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달빛을 등지고 지게문에 비친 건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누구요? 누구……?”
그림자는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내은이는 숨이 막혔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두려움은 더 컸다.
“혹시…… 만복이? 만복이냐……?”
그녀는 구세주를 찾는 심정으로 제발 만복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만복이를 찾았다. 그러나 문 앞에 선 사내는 말이 없었다. 순간 덜커덩 소리와 함께 문고리에 끼워놓은 숟가락이 빠져나가면서 문이 열렸다.
방안으로 들어 온 사내는 벽에 기대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은이를 낚아채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방바닥에 눕혔다.
그는 방바닥에 내동댕이친 내은이에게 고개를 들이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 소리치면 윗방에 어린 아씨들이 다쳐.”
실구지였다. 익히 들어온 실구지의 목소리였다. 내은이는 혹시나 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자 절망감에 몸부림을 쳤다.
“네 놈이……어찌……. 네 놈이 감히…… 으음……”
그녀의 목소리는 실구지가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자 금세 잦아들었다. 그녀는 입이 막힌 채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몸부림치다가 실구지의 한 마디에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더 시끄럽게 굴면 두 아씨를 먼저 죽여버릴 거야.”
실구지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한마디에 그녀의 저항이 멈칫하자 그의 손이 거침없이 내은이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부림을 쳤으나 건장한 사내의 완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굶은 터라 저항할 힘이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마침내 그녀의 몸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났다.
“가만히만 있으면 동생들은 안 죽어. 또 앙탈을 부리면 다 죽여버리겠어.”
실구지가 바지를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반항하면 동생들을 해치겠다는 그의 협박은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반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실구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덮쳐왔다. 그녀는 동생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윗방에 자는 동생들은 기척도 없었다. 아마도 곤히 잠이 든 것 같았다.
욕심을 채운 실구지가 내은이 곁에 나란히 누웠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으면서 웃었다.
내은이는 소름이 끼쳐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몸을 돌리려고 움찔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억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봐. 내은이. 당신은 이제 내 여자가 된 거야. 앞으로 내 마누라가 될 거라고. 여기서 이렇게 그냥 살면 되는 거야. 내가 잘해줄게. 그러니 이제는 나만 믿으면 돼. 알겠어?”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자기가 실구지의 마누라가 된다고?
그녀는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도리질하며 몸서리를 쳤다.
잠시 후, 실구지가 옷을 챙겨입고 앉았다. 그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봐. 내 미리 일러두는데…… 행여라도 도망갈 생각은 말어. 여기서 조용히만 있으면 돼. 아무도 안 다쳐. 만약 딴생각 품었다가는 다 죽을 줄 알어. 생각 좀 하고 처신하는 게 좋아. 고분고분하게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먹을 것도 잘 먹어 두고 말이야. 내일 또 보자구.”
말을 마친 실구지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내은이는 옷을 추슬러 입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생각할수록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움직여 윗방 미닫이를 조용히 열었다. 동생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들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몹시 피곤한 몸으로 자리에 누웠다.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어서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부엉이도 울어댔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씨. 조반 드세요. 조반 가지고 왔어요.”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내은이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방문을 열었다. 혹시나 연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녀는 금방 실망하고 말았다.
마당에는 갑분이가 쟁반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아침햇살이 고운 아침이었다.
“알았네. 거기 두고 가게.”
“예.”
갑분이가 마루에 쟁반을 내려놓으면서 방안을 힐끔힐끔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더니 사립문을 열고 나갔다.
사립문 밖에서는 길동이가 안을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더니 아래채 쪽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의 인기척에 두 동생도 잠이 깨면서 일어나 아랫목으로 내려와 내은이 곁에 앉았다.
내은이는 동생들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자기도 미음을 몇 숟가락 떴다. 허기가 몹시 밀려왔지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은이는 일어나 마당으로 나섰다. 햇살이 고운 아침에 꽃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씻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뒤따라 나온 동생들도 차례로 씻겼다.
동생들은 계속 언니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내은이는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의연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생들을 방으로 들어가 쉬게 하고 조용히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아래채 길목의 물레방앗간에서 건장한 사내가 뛰어나오더니 내은이가 있는 위채로 오는 게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심히 살폈지만 역시 길동이었다. 그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도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자기와 동생들이 지금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만 짐작하던 일이 엄연한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으로 들어왔다. 길동이가 사립문 밖에서 안쪽의 동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내은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대로 실구지의 여자로 살아야 하나? 아무도 오지 않는 이 골짜기에서 이대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동생들은 어떻게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그녀는 소름이 끼쳐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외부에 알려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복이와 연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만복이와 연지는 어디에 있을까? 두 사람은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을까? 그런데 그 두 사람도 틀림없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감시받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말인가.’
내은이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조바심이 났다.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먼저 만복이와 연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래야 무슨 방도를 세울 수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내은이는 오후 내내 해가 질 때까지 마당과 사립문을 오가면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물레방앗간에서 망을 보고 있던 길동이가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고 오르락내리락했다.
내은이는 지금 감시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그녀는 동생들을 서둘러 재웠다. 밤새 일어날 몹쓸 일을 동생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이경이 지날 무렵, 인기척이 나더니 실구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 왔네. 임자. 흐흐흐……”
그가 가까이 오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내은이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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