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5화(8회) 조선 초기 노비의 여주인 강간

신분 상승을 노린 지능적인 성폭행
기사입력 2025.07.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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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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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내리막길을 따라 뛰어 내려가는 동안 내은이는 여러 번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집 밖을 나가보거나 뛰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더구나 밤길에 야반도주하는 형국이라 마음은 급하고 긴장되어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만복이는 그때마다 애가 타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안절부절못했다. 두 사람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산 새들이 몇 번이나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지만, 계곡은 금방 다시 정적에 묻혔다. 

“아씨. 괜찮으세요? 다친 데 없어요? 힘드시면 좀 걸어갈까요?”

 

만복이는 그녀의 동태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만복이도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둠이 깔린 계곡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뒤를 따라 내려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곡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은이는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괜찮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앞장서거라. 가자.”

 

만복이는 땅바닥에 떨어진 작은 보따리를 주운 후 흙을 털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보따리를 다시 가슴에 안으면서 그에게 앞장서라고 손짓했다. 

만복이는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내은이는 숨이 가빠 헐떡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만복이를 따랐다. 

 

계곡의 끝자락에 이르자 비로소 민가의 담장이 보였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두 사람은 속도를 줄이면서 조용히 민가 사이의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뛰다가 걷기 시작하니 내은이도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개 한 마리가 짖어대자, 여러 곳에서 덩달아 요란하게 짖어댔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옮겨 골목을 벗어났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공터를 지나 저잣거리 입구에서 만복이는 멈추어 섰다. 그녀가 재빠르게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사납게 짖어대던 개들이 잠잠해졌다. 

 

만복이는 입에 손을 갖다 대며 내은이에게 조용히 할 것을 알린 다음, 몇 걸음을 더 가더니 좌우로 길을 살폈다. 

그는 다시 돌아와 그녀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다음, 앞장서서 다시 큰길로 들어섰다. 오가는 사람들은 아직 없었다.

 

다시 큰 공터로 나오니 저만치에 여러 개의 주막이 보였다. 주막마다 불이 켜져 있었으나 여전히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과주 장날이니 곧 동이 트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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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만복이가 이끄는 대로 주막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자, 멀리 과주 관아가 보였다.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순간, 내은이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앞으로 내달려 가려다가 멈칫거리며 섰다. 그녀는 짧게 소리쳤다. 

“만복아. 잠깐만…….”

그녀가 내지르는 나지막한 고함에 만복이가 놀라 뛰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아씨. 왜 그러세요?”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보거라.” 

 

그녀는 얼른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만복이의 팔을 잡았다. 만복이는 그 와중에서도 계속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는 지금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내은이가 그를 나무 아래로 끌었다. 그녀는 탁자처럼 편평하게 다듬은 돌 위에 걸터앉았다. 만복이는 그녀 앞에 엉거주춤 서서 두리번거렸다. 

“아씨. 왜 그러세요? 여기가 지금 과주 관아잖아요. 관아라고요. 저 대문 앞에 가서 소리를 쳐도 되고 저 망루에 올라가 북을 쳐도 돼요.”

“맞아.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저기 좀 자세히 보거라.”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지금 두 사람이 빤히 보고 있는 과주관아 대문이었다. 그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뭘…… 보라는 말씀이세요?”

“잘 보거라. 지금 관아 안쪽 몇 군데에 불은 밝혔지만, 대문 앞에 근무하는 군졸이 어디 있느냐? 네 눈에는 보이느냐?”

“아…… 예. 아…… 그러고 보니 안 보이네요.”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관아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관아 몇 군데 불은 밝혀져 있었지만, 정작 대문에 근무를 서는 군졸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턱에 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나 눈은 계속 관아 쪽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만복이가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씨.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직 동이 트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우리가 대문 앞에 가서 소리치면 다들 나오지 않겠어요? 아니면 저기 망루에 올라 북을 치든가요.”

 

“쉿! 목소리를 낮추거라.” 

그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면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이 야밤에 저기 앞에 가서 소리를 치고, 망루에 올라 북이라도 치면…… 어떻게 될까?”

“아, 어떻게 되긴요……. 포졸들이 나오겠지요.”

“포졸들만 나오겠어? 여기…… 이 주변 민가 사람들이라고 가만있겠니? 무슨 일인가 하고 다들 몰려나오지 않겠어?”

“그야…… 당연히 그러겠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주변을 살폈다. 내은이가 말을 이었다.

“이곳이 시끄러워지면 혹시라도 저놈들이 그 사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아…… 그게…… 큰일인데……  그러면 어쩌죠?”

만복이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조바심을 냈다. 그녀는 계속 관아와 장터 골목 쪽을 번갈아보며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동이 트고 관아의 대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구나. 이러다가 놈들이 우리가 집을 떠나 도망친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만복이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씨. 그렇다고 해서 당장 어디로 숨을 곳도 없잖아요. 여기에서 관아 대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놈들이 벌써 일어났을까요? 설마……”


잠시 고민하던 내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안았다. 그녀는 마음을 굳힌 듯 만복이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한양에서 과주로 넘어오던 남태령을 기억하느냐?” 

“남태령은 왜요……?”

“여기는 안 되겠다. 한성부로 간다. 앞장서거라. 일단 움직이자. 여기서 오던 길을 되짚어가다가 장마당을 지나 북쪽 한양 방향으로 길을 잡아라. 날이 밝아오기 전에 남태령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서야 한다.” 

 

내은이가 앞장서서 오던 길을 되돌아 걷자, 엉거주춤 서 있던 만복이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앞에 서서 오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요. 아씨. 근데…… 다리는 안 아프세요?”

만복이가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힐끗 보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보이더니 다시 무표정하게 말했다.

 

“괜찮다. 어서 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놈들에게 잡히는 것보다 낫다. 그놈들이 우리를 잡으면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야. 죽여서 입막음하려 들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죽여서 입막음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만복이는 소름이 끼쳤다. 그러고 보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들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은이는 그의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동이 틀 시각이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우리의 행적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야. 놈들은 우리가 도망칠까 봐 상당히 경계하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어젯밤 하루를 그냥 넘겼으니 오늘은 필시 아침 일찍 위채로 올라올 것이고……. 연지가 아무리 얼버무린다 해도 얼마를 버틸 수 없을 거야. 동이 트기 전에 남태령으로 들어서야 한다.”

“알겠습니다요. 아씨.”

 

장마당을 지나 북쪽 들판을 가로지르는 우마차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야트막한 산길로 이어졌다. 

길가에 남태령 입구를 알리는 장승을 만나자 만복이는 쉬는 자리로 내은이를 안내했다. 

그는 쉬는 자리에 걸터앉아 등짐을 내려 그 속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밥과 물을 담은 표주박이었다.

 

내은이는 그가 넘겨주는 주먹밥을 받자 군침이 돌았다. 간밤에 만들어서 비록 온기는 없었지만 먹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그녀는 잔뜩 긴장하면서 새벽길을 내달린 터라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주먹밥 한 개를 집어먹고 물을 마시자 기운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만복이도 배가 아주 고팠던지 주먹밥 두어 개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입술을 닦았다. 

 

그러는 사이, 어둠에 잠겼던 주위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빠르게 걷히면서 멀리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양 방향에서 남태령을 넘어오는 등짐과 봇짐을 맨 사람들이 장승 부근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과주 장날이기 때문에 한양 쪽에서 넘어오는 보부상들인 것 같았다.

내은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만복이는 다시 등짐을 맸다. 

 

두 사람은 남태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과주 방향으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꾸로 한양 방향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늘어난 인파 속에서 고갯길을 오르면서도 두 사람은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자신들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곤 했다. 

 

남태령 정상에서 과주 방향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길을 스쳐 지나가면서 두 사람을 힐끗힐끗 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무심한 척 묵묵히 고갯길을 올랐다.

마침내 남태령 정상에 오르자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진 장승 앞에 사람들이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은이는 일부러 장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이 많지 않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신발을 벗자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졌는지 버선에 스며든 핏물이 보였다. 만복이가 다가오자 그녀는 얼른 수건을 꺼내 발을 덮었다. 

“몹시 아프죠……? 아씨.” 

만복이는 못 본척하며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괜찮다. 다 각오하고 있었어.”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씩씩했다. 열여섯 해를 살면서 이렇게 먼 길을, 그것도 산을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발바닥이 아픈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문제는 더 걸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복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남정네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아는 그로서는, 내은이의 의젓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칩이 막 지난 시기라 새벽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고개를 오르면서 땀이 차서 헐겁게 했던 옷을 추슬러야 했다. 

 

찬 공기가 몰려오자 그녀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쳤다. 만복이가 등짐을 뒤져 쓰개치마를 찾아 그녀에게 건넸다.

급하게 집을 나서면서 화장품과 장신구를 챙기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그것을 다시 꺼내 치장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고친 다음, 비녀를 다시 꽂고 일어나 쓰개치마를 둘렀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개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양반가의 여식으로서의 품위가 있어 보였다. 

쉬고 있던 사람들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녀로서는 지금 그걸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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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여성 복식(상), 조선시대 쓰개치마(국립민속박물관, 하)

 

조선 초기 여성의 옷차림은 고려 말의 유행이 그대로 이어졌다. 

명나라의 풍습에 따라 허리를 덮을 만큼 길고 넉넉한 저고리와 풍성하고 넓으며 바닥에 끌릴 정도로 주름진 치마가 주류를 이루었고 몽골의 영향을 받은 배래(소매 끝부분)가 특징이었다.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문양과 색감이 두드러졌고 머리에는 정갈하게 묶은 쪽 찐 머리에 족두리나 쓰개치마를 사용했다.

쓰개치마는 양반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쓰개이다. 그 모양은 한국의 전형적인 치마의 모습과 같았지만, 치마보다는 폭이 좁고 길이도 30cm 정도 짧았다. 

 

홑치마의 허리 부분을 이용하여 옥양목(玉洋木)을 달고 주름을 겹쳐 잡아 치마허리를 머리 위로 볼록하게 이마에서부터 턱으로 얼굴을 둘러쌌다. 그리고 치마허리의 양쪽 끈을 턱밑으로 모아 앞을 여미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잡고 다녔다. 

우리나라 복식에서 여성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개를 착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문헌상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로 추정된다. 

 

여성의 쓰개치마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유교의 영향력이 커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유교적 생활방식이 일상 전반에 확산되면서 남녀 간의 내외가 심해지고 여성들은 외출도 금지되는 추세에서, 외출이라도 해야 하는 날에는 예외 없이 쓰개치마를 두르고 다녀야 했다. 

그로 인해 여성들 사이에서는 얼굴을 가리기 위한 쓰개치마가 발달하였다. 

쓰개치마의 사용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주종관계로 나타내는 유교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내은이가 옷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만복이는 등짐을 풀어 먹을 것을 꺼냈다. 먹다가 남긴 주먹밥과 육포였다. 

내은이는 주먹밥 한 개를 먹고 육포를 입에 넣고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녀는 일어나 한양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한강이 보이고 남산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당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우마차도 여러 대 보였다. 

내은이가 가자고 손짓하자, 과주 방면에서 올라오는 길을 살피고 있던 만복이가 되돌아와 등짐을 맸다.

 

“과주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구먼요.”

등짐을 맨 만복이가 앞장서면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어여 가자.”

두 사람은 올라오는 인파 사이로 들어섰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만복이는 올라오는 사람들을 피해 갓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은이도 절뚝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발바닥 통증이 계속 밀려왔다.

계곡을 덮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한강 쪽의 시야도 훤하게 밝아왔다.


“위채는 좀 어때? 아씨는 일어난 거여? 몸은 좀 괜찮대? ”

위채의 동태를 살피러 올라갔던 간난이가 내려오자 툇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면서 실구지가 물었다. 

그는 간난이가 건네는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간밤에 퍼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뭣이냐…… 연지만 만났어요. 아씨가 몸이 아프다면서 약을 달이고 있던데요……”

“아파? 아직도 아프다고? 허허…… 거참. 만복이는? 만복이는 뭐 하느라 아직도 안 내려오는 거여?”

 

실구지가 버럭 역정을 내자 간난이가 멈칫했다. 길동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간난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아…… 만복이는 못 봤는데……? 그러고 보니 만복이가 안 보였어요. 여기 안 내려왔어요?”

“뭐? 못 봤다고? 야. 길동아. 만복이 봤냐? 아침에……?”

“나도 이제 일어났는데…… 그놈을 언제 봐요?”

 

길동이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실구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만복이 자식을 찾아 데리고 와. 빨리. 이 자식이 벌써 건방져졌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간난이가 다시 잰걸음으로 위채로 올라갔다. 물레방앗간을 지나면서 간난이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실구지가 화가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훤히 아는 그녀는 얼른 만복이를 찾아 빨리 실구지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위채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만복아. 만복이 어딨어?”

간난이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며 소리를 지르자, 부엌에서 탕약을 끓이고 있던 연지가 놀라 마당으로 나왔다.

“왜요? 무슨 일이래요?”

연지가 짐짓 모르는 채 눈을 부릅뜨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늉을 했다. 

 

간난이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며 채근했다.

“만복이 어디 갔냐고……. 만복이……”

“왜…… 만복이를 찾아요?”

“아…… 실구지 서방님이 찾고 있어. 빨리 데리고 오래.”

“실구지가……요? 왜요?”

“모르겠어. 뭐…… 물어볼 게 있대. 아침에 인사하러 안 왔다고 화가 많이 났어. 건방지다고 난리야. 빨리 가야 해.” 

“만복이는 조금 전에 장터로 물건 사러 갔는데……. 오늘이 과주 장날이라고 하면서…….”

“장날? 무슨 물건을 사러 간 거야……? 아씨는 어디 계셔? 방에 계시나?”

“만복이가 모시고 장에 갔죠. 아씨가 너무 몸이 안 좋으니까 바깥바람이나 쐬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갔어요.”

 

연지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간난이는 곧이곧대로 믿고 펄쩍 뛰었다.

“아이고머니나…… 이걸 어쩌나? 얼마나 됐어? 장에 가신 지 얼마나 된 거여?”

“얼마 안 됐어요. 아마 지금쯤 장마당에 도착했겠네요.”

“아이고, 이를 어째. 큰일이네.”

 

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난이가 허둥지둥 사립문을 열고 아래채 쪽으로 뛰었다. 연지는 사립문으로 나와 간난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레방앗간을 지난 간난이가 아래채 마당으로 들어서며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연지가 몸을 돌리자 작은 아씨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마당에서 연지가 간난이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느끼고 일부러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터였다.

“언니는 장마당에 가신 거야?”

“예. 아씨. 걱정하지 마세요. 장에서 두 아씨께 드릴 노리개와 맛있는 거 사 오신다고 그러셨어요. 좀만 기다리시면 오실 거예요. 자자…… 바람이 아직 차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안 돼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조반 차려서 들어갈게요.”

 

연지는 두 아씨를 달래 방으로 들어가게 하고, 다시 사립문으로 나가 아래채 쪽을 살폈다. 벌써 물레방앗간을 지나 위채로 올라오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앞장서서 뛰어 올라오는 사람은 길동이가 분명했다. 그 뒤로 실구지와 간난이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연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걱정하고 있던 일이 일에 바로 코앞에 닥친 것이다. 


그녀는 사립문을 닫고 마당으로 들어와 두어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 재빨리 작은 아씨들이 있는 방문을 열고, 잠시 후 마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방안에서 꼼짝하지 말고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연지는 방문을 닫고 나와 부엌으로 들어섰다. 가슴이 마구 뛰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뭐여? 장마당에 갔다고? 연지는 어딨어? 이리 나와봐.” 

부엌에서 탕약을 달이던 그 모습 그대로 연지가 나왔다. 

마당으로 나선 연지가 놀라 뒷걸음치자 실구지가 앞으로 나서면서 다그쳤다.

“아프다는 사람이 말도 없이 장마당에 간다고? 누가 가라고 했어? 응? 누가 허락했냐고?”

실구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연지가 놀라 대답을 못하고 있자. 실구지는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탕약을 끓이고 있는 현장을 확인한 실구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내은이가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던 길동이가 나오면서 황급히 실구지를 불렀다.

“형. 여기 좀 와봐요. 방이 좀……”

상황이 묘하다고 느낀 실구지가 잰걸음으로 내은이 방으로 들어섰다. 

“뭔데 그래? 방이 뭐……”

 

순간, 실구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방안에는 길동이가 뒤져놓은 장롱의 문이 열려있었다. 

“형. 패물 상자가 비어 있어요.”

“연지. 이리 와 봐. 이 패물 상자가 왜 비어 있는 거야? 아씨는 지금 어딨어? 어디 갔냐고?”

실구지가 화가 나 마당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겁을 잔뜩 먹은 연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난 몰라요. 그냥 오늘 장날이라고 장에 작은 아씨 노리개랑 맛있는 거 사러 간다고 그랬어요. 나…… 나는 그것밖에 몰라요.”

“그런데 왜 패물 상자가 비었냐고? 똑바로 말 안 해? 이것들이 정말……”

 

실구지가 헛간으로 들어가더니 낫을 꺼내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연지가 얼른 대답했다. 말소리가 몹시 떨렸다.

“아씨가…… 며칠 전부터 장날에 물건을 사러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면서 걱정하……셨어요. 패물 팔아서…… 물건을 사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연지가 두손을 모으고 거의 울먹이며 대답하자, 실구지는 방안에서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는 길동이를 불렀다.

 

“길동아. 거기 장롱 안에 문서 꾸러미 찾아봐. 있나 없나 확인해야지.”

“안 그래도 찾고 있는데…… 안 보이네요. 여기도 없고…… 어…… 없어요.”

“물건을 사는데 돈이 없으면 패물이면 되지 토지문서와 노비문서는 왜 들고 간 거여? 응? 오호라. 이것들이 아무래도 도망을 친 모양이다. 야. 길동아. 모두 시켜서 장마당으로 가서 잡아 와. 근데…… 박 서방, 박 서방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왜 안 오는 거야?”

 

화가 난 실구지가 간난이를 보자 그녀는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밭에 …… 일하러 갔는데…… 오라고 했는데……”

그녀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사립문을 열고 아래채로 뛰어 내려갔다.

“이런 씨팔…… 이 연놈들을 내가……. 만약 무슨 개수작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면, 가만두지 않겠어. 내 오늘 아주 요절을 내고 말 거여.”

 

실구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내은이 방 문틀을 낫으로 찍었다.

“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장마당으로 가서 확인하고 잡아야지. 일이 터지기 전에 어서 움직입시다. 빨리…….”

 

길동이는 부엌으로 들어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화가 잔뜩 난 실구지에게 건넸다. 갈증을 느끼고 있던 실구지가 단숨에 물 한 바가지를 비웠다.

잠시 후,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실구지는 마당 한쪽에 있는 평상에 앉았다. 그리고 연지를 불러 다시 심문하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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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주택

 

연지는 내은이가 시키는 대로 아씨는 장마당에 바람 쐬러 간다고 해서 만복이가 모시고 갔으며, 자기는 작은 아씨들과 아침을 먹고 아씨가 돌아오시면 드릴 탕약을 달이고 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실구지는 더 이상 캐물어 봐야 나올 게 없다고 판단한 듯 연지에게 작은 아씨 둘을 데리고 이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밖으로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간난이가 올라오면 박 서방에게 장마당으로 오도록 전하라고 당부했다.

말을 마친 실구지는 길동이에게 빨리 장마당으로 가서 아씨와 만복이를 찾아야 한다면서 함께 아래채로 뛰어 내려갔다.

 

실구지와 길동이가 아래채로 내려가자 연지는 사립문에 기대서 눈물을 흘렸다. 

어둠은 이미 걷히고 동녘이 밝아오면서 멀리 들판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아씨 방으로 향했다. 마당이 조용해지자 두 아씨가 문을 빼꼼히 열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달려 나와 연지 품에 안겼다. 

두 아씨의 눈물을 닦아준 연지는 내은이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장롱과 이불 등을 완전히 헤집어 놓아서 엉망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두 아씨의 아침상을 차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구지 형제는 아래채를 지나 곧장 장마당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장마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장마당 한쪽 구석에는 먼 길을 왔는지 아침 요기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모가 솥단지를 여닫을 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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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구지 형제가 장마당을 한 바퀴 돌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내은이와 만복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형. 관아 쪽으로 한 번 가봅시다. 혹시 이것들이 거기로 간 게 아닐까요?”

길동이가 실구지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실구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아무리 어려도 창피스러운 건 알지 않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한번 가봅시다. 장마당은 다 돌았잖아요.”

실구지는 길동이가 끄는 대로 관아로 가서 정문 맞은 편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돌 탁자에 걸터앉아 동정을 살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지켜봐도 관아 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실구지가 일어서면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가자. 여긴 아무 일이 없는 것 같고……. 장마당을 다시 한 바퀴 돌고 집으로 가자. 혹시 그사이에 집으로 돌아와 있지나 않을까?”

실구지는 만약, 내은이가 새벽에 관가에 고발이라도 했다면 관아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아마도 벌써 무장한 포졸들이 골짜기를 들이닥쳤을 것이고, 집에 저들이 없는 것을 알았다면 이 부근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졌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좋지요. 그래야지요. 흐흐흐.”

길동이가 다소 안심이 되어 맞장구쳤다. 

두 형제는 오랜만에 웃으면서 다시 장마당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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