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신미년 영해+울진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마지막회)

1871년 영해+울진동학혁명에 관한 1차 사료.. 『교남공적』과『영해부적변문축』한글로 완역되다.
기사입력 2025.07.3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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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이다”그 외침의 첫 불꽃, 영해동학혁명

1871년 음력 3월 10일, 경북 영해를 중심으로 전국 16개 지역에서 모인 600여 동학교도들이 부패한 관권과 불의한 수탈에 맞서 일어섰다. 이는 단순한 봉기가 아닌, 동학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한국 최초의 동학혁명이었다. 최시형과 이필제 등 지도자들의 뜻 아래, 이들은 “시천주(侍天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영해부 관아를 공격했으나, 관군의 탄압으로 9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0여 명이 유배되는 등 110여 명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의 외침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조직적 토대를 이루었고, 민중 주권과 인간 평등의 실천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의 첫 장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이 혁명을 통해 동학의 정신과 그 초심을 다시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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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해동학혁명을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자료에는『교남공적』,『영해부적변문축』,『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등이 있으며, 민간 기록으로는『신미아변시일기』,『영덕수호 관련 시첩』,『도원기서』,『나암수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영해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문헌이 바로『교남공적』과『영해부적변문축』이다.

2025년 6월 19일,『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이 두 문헌을 154년 만에 전문가의 손을 거쳐 완역해 공식 출간했다. 이 작업에는 신운용)과 장우순)이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출간과 함께 학술대회)도 열렸다. 이는 동학혁명 연구에 있어서 아주 뜻깊은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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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공적(嶠南功蹟)』은 1871년 음력 3월 10일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난 직후, 조선 조정이 이 사건을 조사한 죄인 심문기록이다. 좌의정 김병학의 건의로 안동부사 박제관이 안핵사로 파견되어, 체포된 혁명 참가자들을 심문한 과정을 담고 있다. 2차에서 4차에 걸친 대질 심문까지 포함해 약 두 달간의 조사 내용을 정리해 그해 7월 3일 의정부에 제출된 문서로, 오늘날로 치면 검찰 수사 보고서에 해당한다. 심문 과정에는 고문 사실도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조정이 영해동학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영해부적변문축(寧海府賊變文軸)』은 동학혁명이 발발한 이튿날부터 약 6개월간(1871년 3월 11일~9월 4일) 영해부가 인근 고을, 중앙정부와 주고받은 모든 공문서와 명령문, 보고서 등을 모은 종합문서이다. 여기에는 당시 경상도와 강원도의 여러 행정기관, 군대조직, 상급 관청들과 주고받은 공문서가 포함되어 있으며, 포고문과 심문조서 등도 실려 있다. 쉽게 말해, 당시 영해부가 동학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를 기록한 ‘현장 작전일지’이자 종합보고서로, 영해 관아의 시각이 반영된 기록이다.

 

따라서 두 문헌은 당시 조선 정부가 동학혁명을 어떻게 조사하고 통제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1차 사료로, 오늘날 동학혁명사와 민중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하고 있다.

 

1차 사료인『교남공적』과『영해부적변문축』의 중요성

1차 사료(一次史料, primary source)는 역사학의 뿌리이자 출발점이다. 과거를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한 자료로, 역사 해석자에게 신뢰도 높은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사건을 재구성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대체 불가능한 자료이다.


『교남공적』과『영해부적변문축』은 1871년 영해동학혁명 당시 조선 정부가 작성한 공식 기록인 1차 사료이다. 이 문헌에는 관군의 작전, 체포자 심문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민중의 신앙, 삶의 고단함, 동학에 대한 인식 등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조선 후기의 행정 체계, 군사 동원, 지역사회의 대응 양상도 드러나 있어 당시 국가권력의 작동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관민 합동으로 동학 교도들을 ‘도적’ 또는 ‘변란자’로 규정하며 진압한 내용을 통해, 당시 조선정부가 동학혁명을 단순한 소요가 아닌 체제 위협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권력의 입장에서 정당화된 기록이지만, 동시에 민중 탄압의 실상을 보여주는 피눈물이 담긴 사료이기도 하다.


이 문헌의 완역은 영해동학혁명 연구에 있어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이를 통해 사건의 배경, 조직 구조, 민중 참여 양상 등 보다 다면의 분석이 가능해졌으며, 지금까지 왜곡되거나 축소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해부적변문축』은 특히 동학혁명의 동기, 주도 세력, 사상적 기반 등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사료로서, 영해동학을 단순한 지역 소요가 아닌 ‘혁명’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한 인간의 고뇌와 초모문

이 글에서는 초모문 전문 분석은 생략하고 일부 학자들의 비판적 시각을 소개한다. 

최근 논란이 된 초모문은 어떤 내용인가? 

 

당시 강원도 울진 사람 남두병이 쓴 초모문 문제는 이미 38년 전에 영해 동학 연구자 장영민이 제기했다. 1987년 그가 쓴 논문에서 남두병이 작성한 초모문)은 배반)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장영민의 주장은 남두병이 사건 발생 당시 동학군을 배반하고 조정의 편에 서서 동학군을 토벌하자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교남공적과 영해부적변문축을 번역한 신운용의 미발표 논문)과 그가 쓴『영해부적변문축과 교남공적을 번역·출간하면서』에도 남두병이 초모문을 통해 동학군 진압을 주장했다는 행적도 확인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남두병이 처한 생명의 위협과 고문 상황,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할 때 안타까움을 표할 뿐이다. 결국, 남두병은 가혹한 물고(고문치사)로 영해동학혁명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이별시’에는 혁명동지에 대한 연민과 저항의 정서가 깊이 담겨 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변절자가 아니라, 민중 저항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섣부른 단죄보다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고뇌하고 고통받은 한 인물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의 사각지대, 한국 여성사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역사란 단지 ‘승리한 자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뒷면에서 민중의 숨결과 고통, 그리고 희망을 품었던 이들의 이야기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외되어 온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한국의 근대 전환기 역사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았고, 그 존재는 이름도 없이 지워졌다. 그러나 1871년 영해동학혁명에 등장하는 30여 여성들의 자취는 우리가 여성사를 새롭게 써야 할 분명한 까닭을 보여주고 있다.

영해동학혁명은 단순한 종교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패한 관권, 특히 영해부사 이정의 가렴주구에 항거한 지역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이 거대한 저항 속에서 이소사, 박소사와 같은 여성들의 존재가 뚜렷이 기록되고 있다. 그들은 단지 남편을 따라간 ‘부속 존재’가 아니었다. 혁명군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통과 희망을 나눈 능동의 참여자였다.

 

이 여성들은 혁명이 끝난 후 조선 정부로부터 『역적을 도왔다』는 까닭으로 처벌받는다. 이 기록은 단지 개인의 수난사가 아니라, 여성이 민중운동과 정치적 저항의 주체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역사 증언이다. 이는 한국 여성사가 오랫동안 간과해온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은 단지 가정의 울타리 속에만 있었던 존재가 아니며,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냈던 민중의 한 축이었다.

 

따라서 영해동학혁명에 참여한 여성들의 활동은 단순한 부수적 역할이 아닌, 사회의 변화에 실제로 기여한 행위였다. 그들의 활동은 저항과 연대, 생존과 돌봄이라는 여성 특유의 정치 실천의 표현이며, 이는 한국 여성사를 ‘사적 공간의 여성사’에서 ‘공적 영역의 참여사’로 확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우리는 이제 여성사를 단지 남성의 역사에서 파생된 부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름 없이 역사 속에 묻힌 여성들, 특히 이소사, 박소사처럼 지역 저항운동 속에서 실천 주체로 나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복원해야 한다. 영해동학혁명은 ‘민중의 역사’이자 ‘여성의 역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 여성사의 지형을 다시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1871년 동학혁명 기록물,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2023년 5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는 조선 민중이 주체가 되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사상과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외친 역사적 의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다. 동학군의 일기와 회고록, 유생 문집, 정부 보고서, 전봉준의 진술문과 최시형의 임명장 등 1차 사료 185건이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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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공적과 영해부적변문축 출간기념 학술대회(영덕군 무형문화재전수관, 2025. 6. 20.)

 

그보다 23년 앞선 1871년, 경북 영해·영덕·평해·울진·영양 등지에서도 백성들이 동학사상에 따라 부패한 관권과 가렴주구에 저항하여 들불처럼 일어섰다. 이를 ‘영해동학혁명’이라 하며, 이는 한국 최초의 동학혁명으로 기록된다. 비록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는 1894년 대규모 농민전쟁의 선구적 성격을 가지며, 민중 주권의 씨앗을 뿌린 서막이었다.


영해동학혁명과 관련된 핵심 기록물로는『교남공적』,『영해부적변문축』,『신미아변시일기』가 있다.『교남공적(嶠南功蹟)』은 1871년 음력 3월 10일,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난 직후, 조선 조정이 이 사건을 조사한 죄인 심문기록이다. 

『영해부적변문축(寧海府賊變文軸)』은 동학혁명이 발발한 이튿날부터 약 6개월간(1871년 3월 11일~9월 4일) 영해부가 인근 고을, 중앙정부와 주고받은 모든 공문서와 명령문, 보고서 등을 모은 종합문서이다.

 『신미아변시일기』는 지역 유생들의 모임인 향중에서 당시 영해동학혁명 상황을 기록한 문헌으로 민중과 사대부, 관권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다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세계유산기록의 등재기준은 기록물의 진정성, 보존 가능성, 역사적 가치에 두고 있다. 『1871년 영해동학혁명기록물』은 사건 직후에 작성된 1차 사료로서, 기록의 진정성이 높다.

이들 문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원본의 상태 또한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어,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보존 가능성(preservation)’ 측면에서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이 기록물들은 지역 사건을 넘어 동학사상의 형성과 확산, 민중의 정치적 각성, 나아가 근대적 시민 의식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은 재난이나 민주주의 운동 등 특정 공동체의 고통과 저항의 기록에도 주목하고 있다. 최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세월호 참사 보도 기록 등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따라서 한국 근대 민중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영해동학혁명 관련 기록물들 역시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충분한 당위성과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영해동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지자체, 학계, 시민사회가 뜻을 모아 이들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추진해야 할 때다. 1871년 영해동학혁명은 단지 지역의 저항운동이 아니라, 동학사상과 민중 주권의 정신을 최초로 드러낸 역사적 기점이다. 지금도 결코 늦지 않았다. 우리가 잊지 않고 기록을 보존할 때, 세계는 그 의미를 공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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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담> 화가 이형수, 영해동학혁명 그날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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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수 화가(우)와 대담 중인 필자

 

1952년,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이 감도는 고장 영덕에서 태어난 이형수 화가는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아홉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뿌리”라는 그의 고백처럼, 그는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여정을 걷고 있다.

 

포항에 정착한 뒤로는 죽도시장의 풍경과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돼지머리를 파는 덕대집’, ‘칼을 가는 여인’, ‘두부 파는 아저씨’처럼, 그가 그리는 수묵 인물화에는 서민의 체취와 생생한 일상이 담겨 있다. 꽹과리에 먹을 풀어 인물화를 그리는 그의 손끝에는 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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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림 사인여천의 일부(25m×35cm)


최근에는 동학에 깊이 천착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땅의 정통 사상이자 평민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한편, 포항에서 최시형을 주제로 초등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동학 수업도 학생들과 지역민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는 최시형 선생이 포항 출신이라는 점과 우리가 동학을 너무 모른다는 인식에서 나온 그의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지난 6월 20일, 영덕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주최한 교남공적과 영해부적변문축 출간 기념학술대회가 열린 이날도 그는 영해동학혁명의 장면을 담은 길이 25미터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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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 그림


언젠가 여러 동학 학술모임에서 그를 자주 마주했지만, 정작 그의 그림에 대해 깊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다. 오늘은, 그가 그려내는 동학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붓으로 서민의  삶을 그리다

김진문(이하 김) 이 선배님 안녕하세요? 길이 25미터짜리 대형 두루마리 그림이 대단하네요.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이형수(이하 이)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걸 즐겨 했는데 그림 그리게 된 동기는 국민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사생대회에서 입상한 게 시작이었어요. 그 이후로 늘 그림에 관심이 있었어요. 더구나 사춘기 때에 인생의 허무함이랄까 이런 걸 느껴 예술의 길을 들어서 빛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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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 장면을 그린 25미터 두루말이 작품 앞에 선 화가(지관 이형수 선생)


김: 벌써 국민학교 2학년 때 그림에 소질이 있었네요. 

이: 제 고향이 영덕입니다. 그런데 영덕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안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지금은 그 대회가 없어졌지만 1960년도로 기억하는데요, 한국일보 주최한 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하게 된 것이 제 인생에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김: 예술가 기질이 어릴 때부터 있었네요. 본격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

이: 예, 그런 집안 사정도 있고 또 여러 가지로 사춘기 때 방황한 그런 흔적도 있고 그렇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린 시절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사춘기를 겪으며 책 대신 손에 붓을 잡게 되었는데요. 

서울에서 방황하던 시절, 학교도 가지 않고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러다 열여섯 살에 우리나라 최후의 어진 화가 이당 김은호 선생님께 매화 소품을 그려 우편으로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문하생으로 들어가 도제교육을 받으며 시, 서, 화를 섭렵했어요. 이후로 60년 차 문인화의 길을 걷고 있답니다. 이제는 세월을 넘어 현대 문인화의 인문학 가능성을 탐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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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동학연구자 정선원박사와 함께, 영양 일월 용화리 윗대치에서(2025. 6. 24.)


김: 예술가의 길은 어려운데 그림으로 생계유지가 되나요?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 제가 대학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조경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조경학은 공간 구성 감각이 있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제가 그리는 그림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죠. 사실 집안 경제는 우리 집사람이 도맡아 고생 많이 했어요. 집사람도 꽤 유명한 서예가입니다. 대학 강단 등 여러 곳에 강의 나가고 합니다. 글씨도 쓰고 영동문화원에서 지금 강의를 다닌 지가 17년 차예요.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빚진 마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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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심(부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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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어(50cm×45cm)


우리 철학, 사상인 우리 동학을 우리는 너무 모른다.

김: 최근에는 동학 그림 그리기에 몰입한 거 같은데요. 영해 동학혁명에 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요?

이: 그거 처음에는 잘 몰랐죠.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향 영덕을 떠나 서울로 갔으니까요. 60대 초반에 알게 되었지요. 포항에서 내가 활동을 하다 보니까 해월 선생이 젊은 시절 포항 신광면 검등골 종이 제작 공장에서 직공으로 거주했더라고요. 동학은 경주에서 최제우 선생이 창도했지만, 해월 선생은 동학을 한국 사상으로 기초부터 더 발전시킨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포항은 그 발상지예요. 또, 해월 선생이 동해안 지역으로 종이 팔러 다니면서 제가 보기에는 동학을 전파하기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동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제 고향인 영해 쪽의 1871년도에 일어난 동학혁명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동학 연구자 김기현씨하고는 병풍 바위골과 형제봉을 답사하기도 했죠. 결론은 우리가 우리 철학, 사상인 동학을 우리는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이제라도 공부해야죠. 지역민들에게도 최시형의 존재도 알리고 영해에서 최초의 우리나라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그것이 우리 근대의 출발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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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에서의 맛난 식사(140cm×70cm)


김: 그간 영해 동학 그림과 최시형 선생 관련 작품에서 주로 무슨 주제를 그립니까? 

이: 예를 들면 제가 영해동학혁명 그리는 작품 중에 동학군 남자들이 죽창을 들고 막 함성을 지르면서 영해부관아를 진격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하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그 뒷면에는 분명히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여성들도 혁명에 참여한 이유가 후천개벽으로 우리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했을 것이다. 그걸 밑바탕으로 해서 여성들이 참여한 그림도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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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이다(140cm×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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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안민(140cm×70cm)

 

25미터 두루마리 동학그림 한국 최초, 최대!

김: 25미터짜리 두루마리형 영해동학혁명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국내 최초, 최대가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도 동학 그림을 그려야죠.

이: 그렇죠. 당시의 영해동학혁명 장면을 유추해 담으려고 했고요. 앞으로도 꾸준히 그릴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글보다 그림으로 요즘 사람들이 보고 쉽게 이해하고, 동학그림을 통해 동학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고 또한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는 역사의식도 기를 수 있다고 봐요.


김: 제가 주문하나 할까요? 파블로 피카소는 전쟁과 인간 고통을 주제로 한 두 작품을 통해 강렬한 반전 메시지를 시각예술로 표현했습니다. 그 대표작이『게르니카(Guernica, 1937)』이며, 또 하나는『한국에서 학살(Massacre in Korea, 1951)』입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성과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한 역사적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앞으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명작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이: 예 무슨 뜻인 줄 알겠어요. 역사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화로 그리라는 말씀인데요. 또 하나는 제가 동학에서 주요 인물을 그리는 작업도 합니다. 최시형, 이필제, 강수, 전의철, 남두병 등도 그 인물들을 후손의 고증을 통해 그려볼까 합니다.


김: 끝으로 동학과 영해동학혁명을 알리기 위해 하고 싶은 말씀은?

이: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54년이 지났지만, 동학 본래의 정신을 살리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자면 우리가 먼저 동학이 무엇인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아직 포항에서 활동한 최시형 선생 같은 분이나 영해 동학혁명에 관해 지역민들의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런 인문학 자원은 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앞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 뜻에서 이번에 기념사업회에서 영해동학혁명 관련 문헌을 한글로 완역한 사업은 잘했다고 봅니다. 


김: 학자들은 한국의 동학, 즉 k동학이 새삼 거론되는 것은, 그 핵심 가치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 만물의 생명 존중, 평등과 공동체 중심의 삶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동학의 핵심 가치를 표현하는 주제로 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대담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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